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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명의 떡이다.
본문/요한복음6:30-35절
우리는 계속해서 “나는 생명이 떡이다”라고 선언하신 예수님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떡집이라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그부ᅟᅲᆫ의 공생애를 통해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루어 내시어 굶주린 사람들의 배를 채워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본 군중들은 주님께 나와서 더큰 기적을 베풀어달라고 요구하시는 것은 요한복음 6장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그들의 요구에 예수님은 오늘 본문 35절의 말씀처럼 진짜 배부르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두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 놀라운 예수님의 자기선언이신 생명의 떡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지난 시간을 통해서 생명의 떡이되시는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영접할 때에 우리가 생명의 떡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일회성입니다. 영접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접하고 난뒤에 우리는 계속해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생명의 떡을 먹는 방법을 인위적으로 행동해야 먹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얌얌 거리면서 예수님을 마치 떡인 양 먹는 행동을 하라고 주문하는 목사들도 있습니다. 손을 빵을 든 것처럼 그렇게 해서 시늉을 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의 떡을 먹을수 있습니까? 그런 방식으로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습니까? 그것은 바랍직하지 않는 행동입니다. 우리가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 그 예수님으로 만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그것을 실제적으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으로 만족하려면 예수님을 알고 그분을 사모해야 합니다.
영적인 세계의 중요한 법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원하는 것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23:37절에 그것을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또 계시록22:17절에도 같은 뜻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이 두 구절을 비교해 보십시오, 그러면 원하는 자들 사모하는 자들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원하는 자들이 얻게 됩니다. 길가 독짝밭 가시밭과 같은 마음의 밭은 모두 원하지 않고 무관심하거나 피상적으로 구원을 원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반면에 옥토의 밭은 구원을 원하되 진심으로 원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무슨 대가를 지불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의미합니다. 구원은 누구든 진정으로 원하는 자들이 받게 됩니다.
마태5:6절에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구원도 원해야 하듯이 거룩도 원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누구든지 원하면 원하는 도수만큼 이루어집니다. 어느 정도 거룩해집니까? 원하는 만큼 이루어집니다. 구원도 거룩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7:37-38절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은혜받는 척도는 사모해야 합니다. 원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성령의 권능을 받고 능력을 받는 척도는 사모해야 합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찾듯이 말입니다. 원하지 않는데 목마르지 않는데 물을 찾을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마5장에 나오는 8복도 시작이 무엇으로 시작됩니까?
3절에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합니다. 배고프지 않는데 가난하지 않는데 그것을 채우려고 하는 몸무림이 있겠습니까? 일단 시작은 가난한 마음입니다. 배고픈 심령입니다. 사모하는 마움입니다. 아무리 복을 가르쳐도 그 마음에 가난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땅에 죄인인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다. 라고 하는데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하는데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까? 유한한 인간의 생명이 다가 아니고 죽음 이후에 영원한 삶이 있는데 예수안에 해결점이 있다 라고 하는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땅의 삶만이 중요하다고 하면 도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빵입니다. 그것을 먹어야 배부르고 만족을 누릴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전재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원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아는 계3:20절에 뭐라고 합니까?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원해야 합니다. 원하지 않는데 어떻게 예수님을 받아들입니까?
지금 그런 그림을 하나 그려봅시다. 누군가가 우리집 문앞에 문을 두드립니다. 이분을 어떻게 하면 우리 집안으로 모실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그분이 아무리 두들겨도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은 우리가 그분을 인정하느냐 안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집에 홀로 있을 때 잡상인이나 여호와 증인이나, 신천지들이 벨을 누르고 찝쩍거려도 우리는 그들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만나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돌아갑니다. 반대로 부모님이나 사랑하는 지인이 왔는데 집으로 안모십니까? 당연히 이들을 영접하러 나갑니다. 그래서 즉각적으로 집안으로 모셔 들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간단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원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우리는 예수님으로 충만케 됩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초인종을 누른 후 문을 열어 주면 그 사람이 바로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한시간 후에 혹은 하루나 이틀 후에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진심으로 원하면 주님은 즉각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우리는 즉시 주님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42:1절 같이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라고 고백한 한 시인의 고백처럼 하나님을 간절하게 사모하고 찾고 소원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좋아하는 잠언8:17절에도
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으로 채워지려면 예수님과 함께 하시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빗소리를 좋아 하십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비소리를 좋아합니다. 비가 내리면 교회 1층 주방에서 비 내리는 소리가 굉장히 크게 들립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주방문을 좀 열어놓고 잘때가 있습니다.
유리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으려면 예수님앞으로 가야 합니다. 꼭 기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기도해도 안될 때가 있습니다. 명절 때 그렇게 많은 음식을 차려도 전혀 먹고 싶지 않을때가 있지요, 주님을 깊이 묵상하세요. 예수님을 보여주는 명화 한장면을 떠올리든지, 아니면 예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묵상해 보십시오. 마치 성탄절 때 부르는 고요한밤 거룩한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예수님을 품에 앉고 가만히 내려다보는 것처럼 그렇게 고요하게 주님을 묵상하며 주님을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내십시오, 우리는 기도할 때보다 오히려 이런 시간을 통해 주님을 훨씬 더 많이 채워질수가 있습니다. 이런 훈련은 기도를 충분히 하고 나서 가지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주님을 사모하는 찬양을 충분히 하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질 때에 효과가 나타납니다.
셋째로,예수님으로 채워지려면 예수님앞에 우리속에 있는 것을 털어놓아야 합니다.
기도입니다. 기도는 일반적인 그런 기도의 형태보다 내 속에 있는 것을 주님앞에 다 알려드립니다. 나와 가장 친한 친구에게 속에 있는 것을 함께 나누듯이 말입니다. 만난지 얼마 안된 사람 앞에서 속에 잇는 것을 나눌수가 없지요, 가장 편안한 마음으로 주님앞에 내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입니다.
시편145:18절에, 18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그러므로 친한 친구를 만나서 속마음을 털어놓듯이 그렇게 주님앞에 나와서 나의 속 마음을 털어놓는 그런 시간을 갖여야 합니다. 자세도 편안하게 꾸밈없이 자신의 마음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아무런 격식이나 꾸임이 없이 말입니다.
주님 앞에서 탄식하고 주님앞에서 슬퍼하고 주님께 절망적인 마음과 좌절감이 있다면 그것을 낱낱이 아뢰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과 교통하고 주님을 먹을 수 있는 매우 좋은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친구인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창18:17절에 참 기억에 남는 말씀입니다.
1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이사야41:8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의 벗 이라고 하십니다. 벗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8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같은 방식으로 우리도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단순히 위대하시고 엄위하신 하나님으로만 대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친구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에게 하듯이 우리의 속 사정을 다 아뢰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 충만케 되는 비결입니다.
넷째로, 예수님으로 채워지려면 예수님의 임재에 잠겨야 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을 원하고, 예수님 앞에서 시간을 보내고, 예수님께 속 마음을 털어놓게 되면 주님이 오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친구가 되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 문을 늘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원하고 예수님 앞에서 시간을 보내고 예수님께 속 마음을 털어 놓아보십시오, 주님이 얼마나 좋아하시겠습니까? 주님이 당장 우리에게 강력하게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위로와 평강이 몰려오고, 주님이 주시는 새힘이 느껴지고, 달콤하고 감미로운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사람들이 많은 실수를 합니다. 저도 많이 실수를 합니다. 그것으로 만족해서 안됩니다. 보통 사람들은 얕은 물가에서 노는 아이처럼 영적으로도 같습니다. 얕은 영적인 체험이 대단한 것처럼 다 되었다 하고 일어납니다. 충분하다고 착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 해서는 안됩니다. 좀더 인내를 가지고 그 자리에 더 끈질기게 있어야 합니다. 그 정도로 해갈의 기쁨으로 만족 해서는 안됩니다. 더 목말라 더 많이 채워지기를 갈망하셔야 합니다. 좀 은혜받은 그 시간부터 비로소 진짜의 시간이 됩니다. 그전에는 음식을 자리는 시간이었다면 더 깊이 주님의 임재앞에 머물 때에는 진짜로 숟가락으로 밥을 떠먹는 그런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17장에 기도해야 할 때 좋고 있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수 없더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가능한 주님앞에 머무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을 묵상하고 주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단순히 나라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자식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주님앞에 깊은 교제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일상적인 기도도 잘 못하는데, 국가와 교회 부흥과 자녀를 위해서는 소수의 사람들이 기도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직접적으로 그분을 사모하고 교제하는 기도의 시간을 갖는 분은 극히 드뭅니다. 그러니까 한국교회 성도들이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 14장에 가름부음이 멍에를 깨뜨린다고 했는데 멍에에 기름만 발라져서 더 단단하고 깨뜨리기 힘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너무 적게 먹으면 그렇게 됩니다. 밥을 소량 먹으면 충분한 힘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충만하게 채워져야 합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맛보는 정도가 아니다. 예수님으로 채워져야 하고, 충만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잠시 천국을 맛보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 실제적으로 우리 마음에 임하게 하고 죄를 이길 수 있는 충분한 힘을 확보하고 주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충분한 지혜와 능력과 권위로 덧입혀져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인터넷의 영향 때문인지 너무나 조급합니다. 기도할 때도 사실 10분을 못 넘깁니다. 진득하게 앉아있는 그래서 주님의 임재 앞에 머무는 그런 진득함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으로 충분하게 채워지도록 해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바로 그런 사람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33:11절에
1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여호수아는 모세가 회막을 떠난 뒤에도 회막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게속 머물러 있었습니다. 마치 여호수아처럼 가능한 한 오래 주님앞에 머무르는 진득함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과 3년 6개월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처럼 충분히 주님과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행4:13/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우리가 주님과 보낸 순수한 시간이 3년이 넘게되면 사도들처럼 분명히 우리의 삶의 질과 가치가 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에만 몰두하는 사역형제자가 아니라. 마리아처럼 주님 무릎앞에 얼굴과 얼굴을 대하면서 입에 떨어지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그런 기도의 사람 영성형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섯째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을 수시로 깊이 생각하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먹는 방법은 묵상하는 것입니다. 밥을 입에 넣었다고 해서 먹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잘게 씹어서 삼켜야 합니다. 그 작업이 바로 묵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수1:8절에
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어떤 분은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니 우리는 죄인인데 어떻게 그것을 다 지켜 행할 수가 있나? 그것은 불가능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작 여호수아는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말씀은 단시 우리의 의지력으로 지켜지지 않습니다. 그 앞에 뭐라고 하였습니까? “그것을 묵상하여”라고 했습니다. 묵상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게 씹어서 삼켜야 합니다. 그것을 먹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밥을 먹은 힘으로 사는 것처럼 그 힘으로 말씀을 지킬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하여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아무튼 묵상이 곧 말씀을 먹는 방법입니다. 마찬가지로 묵상이 곧 예수님을 먹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묵상을 통해서 예수님을 먹을수 있습니다. 히브리서3:1절의 말씀이 오늘 주제의 말씀과 굉장히 부합 되는 말씀으로 다가 옵니다. 잘 달으십시오,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생각하는 것”과 “깊이 생각하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가 무의식중에 누군가를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지나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대할 때는 다릅니다. 이때는 단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 생각”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예수님에 관해 지식적으로 혹은 신학적으로 깊이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신 그 사랑과 은혜 그리고 지금까지 나와 함께 하신 그 사랑의 주님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사랑에 빠진 남녀가 수시로 상대방을 생각하는 것처럼, 수시로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께 고백과 간구를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예수님츨 먹을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먹으면 먹을수록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더 잘 알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먹으면, 예수님이 얼마나 우리에게 필요한 분이며 소중한 분인지를 알게 됩니다.
먼저,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 되십니다. 말씀이나 기도가 아니라.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오늘 본문에 생명의 떡이다 라고 하신 것처럼 생명이신 예수님을 더 깊이 체험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으로 충만해야 생명이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또 다윗이 고백한 대로 예수님은 우리의 힘(시18:1)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자기가 가진 권력이나 백성들의 수가 자신의 힘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는 모든 것을 할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이 떠나가시면 나약하게 되어 삼손처럼 두 눈이 뽑히고 연자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됩니다 .주님이 곧 우리의 힘입니다. 다윗은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더욱 의지하고 사랑했습니다.
또 예수님은 우리의 지혜이십니다. 진짜 깊은 지혜와 말씀의 깊은 깨달음은 평소 때는 잘 임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임재속에 있을 때 임합니다. 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행10:38절/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주님의 임재로 인해 모든 기적이 일어나게 되며 죽은 자들이 살아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곧 우리의 지혜이시며 능력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의 거룩이십니다. 우리는 단지 의지력만으로 죄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먹어야 죄를 이기고 거룩한 자가 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의 거룩이십니다.
그리고 에수님은 우리의 보배 이십니다. 우리는 질그릇과 같고 예수님은 보화와 같은 분이십니다. 우리의 가치는 ㅇ우리 속에 계신 예수님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에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면 우리는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면 우리는 무가치한 자입니다. 성경 속의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은사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은사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한 사람들입니다. 에수님이 함께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면 우리는 역사를 바꿀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면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킬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보배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전부이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모든 선한 것과 좋은 것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좋은 것은 예수님에게서 나옵니다. 예수님과의 관게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의 근원 이십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시나 노래의 가사나 명언이 아니라. 실제로 예수님이 우리의 전부이십니다. 예수님은 실제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전부이십니다.
여러분 지금 드리는 말씀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르겠으면 지혜의 주님께서 깨닫는 마음을 달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원하고, 예수님앞에서 시간을 보내고, 예수님과 허심탄회하게 대화하고, 예수님의 임재 안에 머무르며 예수님을 먹으면 먹을수록 그렇게 맛이난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이 좋습니다. 먹을수록 그렇게 그분이 좋습니다. 그렇게 그분이 소중합니다. 그렇게 그분이 보배롭습니다. 그분의 임재가 너무나 귀하기 때문에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븐께 자꾸만 집중하게 됩니다. 꼭 기도 시간이 아니더라도 일상적인 삶속에서 예수님과 대화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묵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 사랑을 고백하게 됩니다. 예수님 자신을 점점 더 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임재를 느끼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먹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운전할때도 가능합니다. 일을 할때도 가능합니다. 언제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간단한 일입니다. 우리 주의를 주님께 집중시키고, 주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그냥은 잘 안됩니다. 여러분이 그냥 예수님을 생각해 보세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네가지 단계를 밟고 그 영적 상태를 유지하면서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죄를 지어서 그 영적 상태가 허물어지면 안됩니다. 반드시 영적인 상태를 유지한 상태에서 해야 합니다. 영적인 상태가 유지된 채로 예수님이 좋기 때문에 생각을 예수님께로 고정시켜 보십시오, 예수님을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즉각적으로 주님의 임재가 느껴집 니다. 즉각 영이 새로워집니다. 영이 회복되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즉각 천극을 느낍니다. 천국의 분위기를 느끼게 됩니다. 천국의 임재를 느끼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런 일은 아무 때나 항상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단계들을 밟고 주님과 교통하는 자가 된후, 일정한 수준 이상의 죄를 짓지 않으므로 그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 상태에서 언제 어디서든 우리의 생각을 의지적으로 주님께 돌이면 즉각 주님의 임재가 우리에게 강타 되는 것을 느낍니다. 즉각 우리의 영이 새로워집니다.
여러분 이 놀라운 일들이 간단하고 쉬운 것입니다. 기도시간 뿐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계속해서 예수님을 먹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운전하면서 예수님을 먹어야 합니다. 설거지 하면서 예수님을 먹어야 합니다. 청소하면서, 일하면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길을 가면서도 예수님을 먹어야 합니다. 대화하면서 예수님을 먹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계속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요셉이나 다윗처럼 됩니다. 창39:2-3절을 보시면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또한 삼상18:12절에도 나옵니다.
12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이 말씀처럼 일상의 삶 속에서 주님이 함께 하시므로 주님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나아가서 에녹이 하나님과 300년 동안 동행했던 것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가능해집니다. 일상속에서 주님을 생각 할때만 가름부음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24시간 전체가 항상 예수님의 생명과 기름 부음으로 충만하고 주님과 손잡고 걷는 그런 삶이 됩니다. 이런 삶을 계속해 나가면 상상할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통과할 때 먹을것이 없었습니다. 오직 만나뿐이었습니다. 그들은 만나를 먹고 그 힘으로 광야를 통과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을 통과할 때 진짜 먹을수 있는 것은 계시록 2:17절에 나온 말씀처럼 감추인 만나를 먹게될 것입니다.
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때에 다른 힘으로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그 힘으로 신앙생활해야하고, 그 힘으로 목회하고 그 힘으로 사역하고, 그 힘으로 전도하고 사랑하고 세상의 빛으로 살고 소금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추인 만나 되시는 예수님을 먹어야 합니다. 그분은 요한6:35절에 생명의 떡입니다. 만나입니다. 요한복음5:39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유대인들에게 하셨습니다.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로 압니다. 즉 성경이 말하는 복음을 진리라고 믿고 확신하면 영생을 얻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지 못합니다. 성경은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만 갈르쳐 줍니다. 즉 구원에 이르는 방법만 가르쳐 줍니다.
성경은 한 분을 소개시켜 줍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영생을 주는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나아가느냐 하면 죄에서 돌아서는 회개와 예수님을 진실한 마음으로 임금과 구주로 모셔 들이는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우리안에 들어오시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영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자꾸 성경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안에서 지옥에 가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을 알고 믿는 사람이 천국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회개와 믿음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자가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성경에 동의하고 믿는데서 멈추지 않고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나의 임금과 구주로(행5:30절)모셔들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성경은 생명을 못주는데 왜 그렇게 부릅니까? 그 이유는 성경이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14:6)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요11:25)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영생”(요일5:20)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예수님은 부활이시며 예수님은 영생이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에 관한 책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그래서 생명의 말씀인 것입니다. 즉 성경이 영생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이 예수님에 관한 책이기 때문에 생명의 말씀인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성경은 마치 의학서적과 같습니다. 또한 의사의 처방전과도 같습니다. 처방전을 씹어 먹으면 병이 낫습니까? 처방전은 사람을 고치지 못합니다. 처방전이 지시하는 대로 약을 먹어야 사람이 고쳐집니다. 성경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성경을 아무리 공부해도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님을 신앙으로 믿고 고백하는 그런 거 말고, 진실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나의 주인과 구세주로 모셔들어야 합니다. 그분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영생을 먿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롤 우리가 충분하게 먹어야 할 것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입니다.
끝으로 명심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날마다” 들에 나가서 만나를 거두었습니다. 마치 그와 같이 우리도 날마다 예수님께로 와야 합니다. 그분을 먹어야 합니다. 날마다 먹어야 합니다. 틈나는 대로 먹어야 합니다. 수시로 예수님 앞으로 와야 합니다. 예수님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예수님을 진심으로 원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배고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에수님께 목마른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단지 시끄럽게 기도하는 자가 아니라. 그런 기도도 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주님 앞에 마음의 깊은 것을 털어놓으십시오, 친구이신 예수님과 마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주님의 임재를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선경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예수님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한마디로 예수님을 먹는 것입니다. 그 힘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힘으로 사역하고 일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이런 생활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과 막힌 것이 없습니다. 항상 마음에 평강과 희락이 넘칩니다. 그리고 기름부음이 임합니다. 이런 삶이 찬송가 가사처럼 “세상과 나는 간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라는 것이 경험됩니다. 이런 사람이 최고의 성공자입니다. 바울이 그것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단순히가 복음을 전하는 자가 압니다. 바울이 힘차게 달려간 길은 빌립보서3:7절 이하에 있습니다.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우리들도 남은 생애를 그렇게 달려가야 합니다. 다 죽습니다. 죽음 이후에는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섭니까? 그때에는 이땅에 어떤 집에 살았느냐? 어떤 학문을 배웠느냐? 어떤 자녀가 있느냐? 어떤 명성을 얻고 살았나?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 주님을 먹고 살아왔느냐? 이것입니다.
다함께 기도합시다. 주님을 더 알기를 원합니다.
나를 구원하신 그 주님의 사랑을 더 알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으로 배부르며 만족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오늘 이시간 그 주님 기도가운데 만나주옵소서.
그리고 생활속에서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을 묵상함으로 더 깊이 주님을 알고 주님과 하나 되는 신앙생활을 하게 하옵소서.
간절하게 통성으로 기도를 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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