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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6일 금요일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한국 103위 순교 성인 시성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유다인들의 고발로 재판을 받는다. 바오로는 서원한 일이 있었으므로 코린토를 떠나기 전에 머리를 깎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지만 아무도 빼앗지 못할 기쁨을 누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복음).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말년에 파킨슨병으로 고통을 당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병자와 고통받는 이들에게 “여러분의 고통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수행하시는 구원 사업에 참여하는 것이기에 진정 가치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사노라면> 살아가다보면 매사가 비관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죽을 지경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얼굴이 엄청 어둡습니다. 입만 열었다 하면 불평불만이 폭포수처럼 흘러나옵니다. 마주 앉아있기가 점점 두려워 집니다. 물론 충분히 이해가 가지요. 한번 입은 상처가 빨리 아물지 않고 오래 갑니다. 그 어떤 위로 앞에서도 슬픔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빨리 떠나주었으면 고맙겠는데 느닷없이 찾아온 병고가 떠나지 않습니다. 당연히 지치기 마련이고, 삶이 비관적이 됩니다. 그러나 정반대의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이지 순간순간이 지옥과도 같은 나날을 보내면서도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미소를 짓고 살아가는 분들이 계십니다. 주변에서 바라볼 때 ‘하느님도 무심하시지’하는 한탄이 절로 튀어나오지만, 정작 본인은 아름다운 정원을 천천히 거닐고 있는 황후처럼 우아하게 살아갑니다. 시련 속에서도 기쁠 수 있는, 고통 가운데서도 행복할 수 있는, 비참함 속에서도 미소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근원적 기쁨’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기쁨이란 주제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기쁨에는 여러 종류나 단계의 기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기쁨이라고 다 같은 기쁨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외적인 기쁨, 스쳐지나가는 잠시의 기쁨이 기쁨의 전부가 아닙니다. 만수무강, 무병장수, 승승장구... 물론 이런 삶의 모습도 기쁨의 배경이 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기쁨은 자기 존재를 충만히 실현시키는데서 오는 기쁨이 아닐까요? 자신의 내면 안에 확고한 중심이 서 있음으로 인해 그 어떤 외부적인 요인에도 흔들리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데서 오는 기쁨이 참 기쁨이 아닐까요? 참 행복의 길, 참 진리의 길을 찾았기에 더 이상 헤매지 않고 수시로 다가오는 갖은 역경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해맑은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데서 오는 기쁨이야말로 진정한 기쁨일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우리 삶의 든든한 지주가 됨으로 인한 기쁨, 주님의 성령께서 내 앞길을 환히 밝혀주심으로 인한 기쁨, 그 기쁨이야말로 평생 우리가 추구해야할 기쁨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예수님 안의 참 기쁨은 한 인간을 치유하고 고무(鼓舞)시키는 힘이자 에너지입니다. 그 기쁨은 생명력을 낳습니다. 그 기쁨은 절망스런 상황 가운데서도 희망하게 합니다. 그 기쁨은 깊은 슬픔 가운데서도 미소 짓게 합니다. 그 기쁨은 결국 우리를 생명과 구원에로, 창조자이신 하느님께로 인도합니다. 우리의 나날이 늘 고통과 슬픔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지나서 돌아보면 많은 기쁨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사는 것 자체가, 삶 자체가, 하루하루가 기적이며 가장 큰 기쁨의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바닷가에 매어 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인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김종삼, 어부)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고통과 기쁨
제 앞방엔 저와 한 동네에서 태어나 함께 자란 친구 신부님이 살고 있습니다. 오늘 날도 덥고 해서 저녁으로 냉면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그러면서 시골에서 함께 자랄 때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희가 자라던 시골은 전기도 안 들어오는 정말 시골이었습니다. 집도 몇 채 없었습니다. 어느 날은 온 동네가 엿 고는 냄새로 가득 차기도 합니다. 그런데 엿 고는 집은 그 집에 사는 가족 모두가 밤을 새야합니다.
아버지는 불을 때기 위해서 장작을 밤새 패야하고 어머니는 솥단지안의 조청이 눌어붙지 않도록 밤새 저어야하며 아이들은 밤새 때는 불 때문에 뜨거워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아예 엿을 고을 때면 장판지가 눌어붙지 않도록 방의 장판지를 다 걷어내고 불을 땝니다.
다른 집 사람들은 밤새 온 동네에 퍼지는 엿 고는 냄새를 맡으며 내일의 꿈을 꾸며 잠을 잡니다. 이렇게 한 집이 밤새 엿 고는 것이 끝나면 아침에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조청으로 만들 수 있는 온갖 종류의 먹을거리를 만듭니다. 쌀 뻥튀기에 조청을 입혀 과자를 만들고 깨나 땅콩으로 엿을 만들기도 합니다. 또 인절미에 찍어 먹기도 하고 그것을 굳혀 순수한 엿으로 먹기도 합니다.
밤새 잠을 못 자고 일을 해야 하는 가족은 좀 안 됐지만 내일의 이런 기쁨의 잔치를 생각하며 기꺼이 고생을 감수합니다. 한 가족의 희생으로 온 마을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엿을 만드는 것이 어찌 아기를 낳는 고통과 또 아기를 낳은 후의 기쁨에 비길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세상사는 것이 항상 이 고통과 기쁨의 반복인 것 같습니다. 또 더 큰 기쁨을 위해서는 더 큰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것도 세상의 이치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제자들에게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미리 예고해 주십니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은 어머니이고 제자들은 자녀들과 같습니다.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럽다는 출산을 겪어내고 자녀를 얻는 기쁨을 느끼신 분입니다. 따라서 어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이 ‘고통과 기쁨의 신비’를 터득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어떠한 시련과 고통도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기쁨의 열매가 있을 것임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나 힘들어하는 자녀들은 어머니의 말을 잘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지금은 다만 힘든 것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도 온갖 아픔을 이겨낸 어머니처럼 자녀들인 제자들에게 곧 다가올 진통의 시간을 잘 견뎌낼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세상 자체를 커다란 어머니 뱃속으로 비유합니다. 이 안에 새로운 생명이 준비되기 때문입니다. 근심과 고통 속에서 준비된 새 생명은 어머니인 교회의 고통으로 새로 태어나게 되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 기쁨은 영원한 것입니다.왜냐하면 더 이상 죽음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빼앗지 못하는 기쁨의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분과의 만남은 육체적인 만남이 아니기 때문에 죽음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입니다.
어떤 수녀님께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냐고 물었더니,
“예수님께서 나를 불러주셨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 분은 그 확신으로 평생 수녀님으로서 그 기쁨을 잃지 않고 사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확신을 얻기 위해 얼마나 고민하는 시간이 많았겠습니까?
우리도 수많은 고통 가운데 있더라도, 그것은 주님께서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을 주시기 위한 과정임을 상기하며 힘을 냅시다.
"You will grieve but your grief will turn to 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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