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오싱 여행9 - 월왕전에 올라 춘추전국시대 부차와 구천의 와신상담 고사를 생각하다!
88路 버스를 타고는 루쉰꾸리 魯迅故里(노신고리) 에 도착해 魯迅故居(노신고거) 를
보고 육유와 당완의 슬픈 사랑 이야기 가 전해지는 심원 (沈園) 을 구경하고는
푸산쿵위엔 府山公园 (부산공원) 에 도착해서 콰이지산 (會稽山 회계산) 을 오릅니다.
도중에 오른쪽 건물에 입장료 8元을 내고 들어가니 여긴 월나라 임금인 구천의 와신상담
고사를 기념하기 위해 지었다는 越王臺( 월왕대) 인데, 월나라 역사진열관 으로 월왕
구천과 중국 4대 미인 중 한명인 서시의 초상화 가 있으며 월왕보검 도 전시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문이 잠겨 내부를 보지는 못하고 한바퀴 돌아 계단을 내려가서는
산 을 오르니 오른쪽에 오래된 건물이 한채 보이기로 들어갑니다.
송나라 깃발 이 보이는 걸로 보아 남송시대에 금나라 와 대결했던 그림들
같으니..... 그럼 이 건물은 월왕 구천 과는 관련이 없나 봅니다?
건물을 나와 산을 오르니 높은 계단 위에 우뚝 선 우람한 건축물 이 보여 가파른
계단을 올라 안으로 들어갔더니..... 한쪽 벽에는 오나라왕 부차 그리고
다른쪽 벽에는 월왕 구천 의 인물상을 중심으로 여러 인물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럼 콰이지산 (會稽山 회계산) 에 춘추전국시대 와신상담의 그림 을 그렸다는 월왕전
(越王殿)인데 그러고 보니 돌길을 따라 양쪽으로 오래된 측백나무가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고 청백천 이라는 샘물은 천여년의 세월 동안 월왕터를 지키고 있는 듯 참 맑습니다.
여기 越王展(월왕전) 도 1982년에 저기 아래 월왕대 越王臺 와 함께 원래 자리에 새로지은
것인데... 월나라 시대의 인물 초상화 와 와신상담의 고사 벽화 등이 그려져 있기로
찬찬히 구경하다가 불현듯 와신상담(臥薪嘗膽) 이며 오월동주(吳越同舟) 고사를 떠올립니다.
와신상담(臥薪嘗膽) 이란 “가시 많은 거친 나무 위에서 자고 쓰디쓴 쓸개를 맛본다”는
뜻으로,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고난을 참고 견디어 심신을 단련함 을 비유
하는 말이니“臥 : 엎드릴 와, 薪 : 섶나무 신, 嘗 : 맛볼 상, 膽 : 쓸개 담”을 말합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에 나오는 말로 춘추전국시대에 인접한 오(吳) 나라와 월(越) 나라는
앙숙지간이니 오나라 왕 합려 가 오자서와 손무의 보필로 구거 싸움에서 초나라를 대패
시키고는 오나라군이 초나라 도성 정도로 진격할 때 월나라 윤상이 오나라로 쳐들어 옵니다.
이처럼 배후를 습격당한 일로 오나라와 월나라 간에 끊임없는 전쟁 이 시작되었으니
합려 (闔閭) 는 즉시 군대를 돌려 오나라로 돌아와서는 BC 496년 월나라왕
윤상이 죽자 기회를 틈타 쳐들어 갔는데.... 휴리 (携李) 에서 월나라의 새 왕
구천(勾賤) 에게 패하고 영고부에게 화살을 맞은게 악화되어 결국에는 목숨을 잃습니다.
합려는 죽기 전에 아들에게 원수를 갚아 달라는 유언 을 남겼으니.... 부차(夫差)
는 아버지의 복수를 잊지 않기 위해 아침, 저녁으로 가시 많은
땔나무 위에 누워 자며 자신의 방을 드나드는 신하에게 이렇게 외치게 하였습니다.
“부차야! 너는 구천이 너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夫差志復讎, 朝夕臥薪中, 出入使人呼曰: “夫差, 而忘越人之殺而父邪”)
부차(夫差) 는 오자서 를 상국으로, 백비를 태재로 삼아 월나라로 진격할 만반의 준비를
하는데, 복수를 하기 위해 부차가 밤낮으로 군사를 조련한다는 소식을 들은
구천 은 이듬해에 선제 공격 을 하니 대초(大椒) 라는 곳에서 결전이 벌어졌는데...
월나라군이 대패하니 회계산 (會稽山)으로 도망친 구천은 오나라 군사들에게 포위 됩니다.
구천(勾賤) 은 살 가망이 없다고 생각해 부인을 죽이고 최후의 결전을 벌이려고 했으나
대신인 문종(文種)과 범려(範蠡) 가 맹목적인 결전은 오로지 죽음뿐 이라면서
그럴 바에는 오나라 백비에게 뇌물을 먹여 살길을 도모하는 것 이 어떠냐고
연신 설득하니.... 구천은 그 말을 따라 몰래 백비에게 미녀들과 금은보화 를 보냅니다.
탐욕스러운 백비 는 뇌물을 받자 기뻐했으며 부차에게 월나라 구천을 살려주라고
권유하니 부차는 오자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구천을 살려주기로 했는데
하지만 구천이 오나라로 와서 속죄 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으니...
구천 은 나라 대사를 문종에게 맡긴후 부인과 대부 범려 등을 데리고 오나라로 갑니다.
부차는 아버지 합려의 능묘 옆에 돌집을 하나 짓고 구천 부부와 그의 대신들을 몰아넣고는
죄수옷 을 입히고 말을 먹이는 고역을 시켰으며 외출할때면 범려를 밟고 수레를 탔으며
구천에게는 말고삐 를 잡게 했으니 구천은 2년동안 오나라에서 별의별 고생 을 다 했습니다.
문종은 백비에게 미녀와 금은보화를 또 보내어 구천을 월나라로 돌려보내도록 부차에게
진언해 달라고 부탁하니... 백비의 말이라면 듣지않는 법이 없는 부차 인지라 2년동안
구천이 진심으로 속죄 했다고 생각한 부차는 백비의 말을 듣고 월나라로 돌려 보냈습니다.
부차가 용서해 준 덕분에 고국으로 돌아온 구천 은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무명옷을
입고 잡곡을 먹었고... 잠도 초가집 에서 잤으며 돗자리 대신 섶나무 를
펴고 잤으니, 식탁 위에는 쓰디쓴 쓸개 를 달아놓고 음식을 먹을 때마다
그 쓸개를 맛보고는.... “구천아, 회계의 치욕을 잊었단 말이냐?” 외쳤습니다.
(吳旣赦越, 越王勾踐反國, 乃苦身焦思, 置膽於坐, 坐臥卽仰膽,
飮食亦嘗膽也. 曰: “女忘會稽之恥邪?”)
그는 이런 방법으로 과거의 치욕을 잊지 않고 분투하도록 거듭 자신을 격려했던 것이니
이것이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성어 가 생긴 유래라고 합니다.
월나라가 강대해지는걸 본 오자서 는 근심이 커졌으니“구천이 쓸개를 맛보며 백성과
함께 복수를 벼르고 있습니다.” 하고 부차에게 여러번 간언했지만 부차 는
월나라왕 구천이 바친 중국의 4대 미녀 서시 에게 빠져서는...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오자서를 멀리했으며 2년후 군대를 거느리고는 제나라를 쳐서 승리를 거둡니다.
조정의 문무대신들이 경하했지만 오자서 는 이렇게 말했으니“이번에 제나라를 친 것은
작은 승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월나라를 멸망시키지 않으면 큰 심복지환을 남겨놓는
것인 줄을 왜 모르십니까?”대노한 부차는 오자서에게 자살하라며 보검 한 자루 를 줍니다.
오자서는 그 보검으로 목을 베어 자살했는데 얼마후 구천 은 문종에게 조정 일을 보게하고
자신은 범려와 함께 정예군 5만을 이끌고 오나라를 습격하니 오나라군은 크게 패하고
태자도 전사했는데... BC 473년 구천은 재차 오나라로 진격해 부차를 고소산에서 포위합니다.
이렇게해서 오나라를 멸망시킨 구천은 부차에게 회계 동쪽에 있는 작은 섬인 용동(甬東)
을 봉해주었는데 부차는 간신 백비의 말만 듣고 충신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다가 자존심 에...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목을 베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구천 은 국왕의 예로 부차의 장례 를 치러주었으며, 백비는 죽여 버렸다는데 오나라
와 월나라의 전쟁은 춘추시대 말기에 일어난 큰 사건으로 이 무렵인
BC 475년에 이르러 중국은 전국시대 에 진입했으며 봉건 사회 가 시작되었습니다.
월나라 왕 구천은 최후의 승자 가 되었으니 실패를 맛보거나 어려운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굳은 의지 를 의미하는데는 절치부심(切齒腐心) 이란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고대 병기 중에서도 특이한 보물로 출토 당시에도 여전히 빛이 났으니
굉장히 날카로워서 머리카락도 벨 수 있었으며 몸체에는 흑색의 무늬가
있고 ‘월왕 구천 자작용 (越王勾踐自作用劍)’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니.... 이 "검" 은 고대 중국의 검 주조 기술 이 높았음을 보여줍니다!
이후 승자인 월나라 는 두 공신인 범려와 문종의 실각 으로 점차 몰락의
길을 걷게 되니 兎死狗烹(토사구팽) 의 고사와 구천의 시기심 을
잘 알고 있는 범려 는 그를 피해 제나라로 잠적해 목숨을 부지 했으나....
문종 은 안이하게 생각하다가 구천의 질투심 으로 숙청 당했으며... 월나라는
쇠락하기 시작하여 기원전 464년에 구천왕이 죽으면서 내리막길 을 걷습니다.
BC 306년 구천왕 6대손 무강왕 때 초나라 위왕의 원정 으로 패하니 무강왕 은 초나라군의
추격에 포로로 잡혀 처형 되었으며 이후 한(漢) 나라에 귀속되어 민(閩), 동월(東越)
이 제후국이 되어 해양 세력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월(越) 족 중에서 백월(白越)족이
남하해 BC 275년 하노이의 반랑왕국 을 멸망시키고 어우락 왕국을 세우니 베트남 입니다!
옛 월나라 사람들은 기원전 2~3천년 부터 해양을 통하여 다른 나라와 교류
하였으니 주로 배를 타고 한반도와 일본 열도 를 돌아 다녔다는데...
중국 기록에 의하면 이들의 일부가 일본에도 월국(越國?) 을 세웠다고 전합니다.
동해안에 관동팔경 이 있으니 그중에 평해의 越松亭(월송정) 은 신라시대에 영랑, 술랑,
남석과 안상 네 화랑이 달밤에 솔밭에서 놀았다는 곳에 세운 정자로 월국(越國) 에서
가져온 소나무 묘목을 심어 越松(월송) 이니 1326년 고려 충숙왕때 박숙이 정자를
지었다는데 허물어진후 1969년 울진출신 재일교포 김정문등 금강회 에서 재건하게 됩니다.
월국(越國) 이라면 중국의 사오싱(소흥) 을 의미하지만 또는 동해(일본해)에 일본 월국 이
있으니 후일 나누어서 교토에서 가까운 땅을 에치젠(越前) 이라고 하니 후쿠이현이고
다음을 엣츄(越中) 라 하니 이시가와현과 도야마현이며 가장 먼 땅은 에치고(越後) 니
니가타현인데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신라왕자 천일창이 일본으로 건너간 내용이 있습니다.
월왕전 에서 뒤쪽 산 위로 올라가다 보면 월왕 구천의 명신인 문종의 무덤 이 있고
또 당대 부터 새기기 시작한 마애석각 도 있다니 시간과 체력만 있다면 이
산길을 올라 부산 府山 의 정상 에 기원전 490년 월왕 구천이 신하 범려 에게
명하여 세웠다는 비익루 를 보면 좋으련만.... 시간과 체력 모두 남은게 없습니다.
월왕 구천이 비익루 를 세울 당시는 오나라를 경계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이었겠지만 이후
망해정 으로 이름을 바꾼데서 알수 있듯이 전망대 로 쓰이게 되었다는데 오랜 세월
무느져서 현재 건물은 1998년에 지은 것으로 월왕보검의 모조품 이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비익루 꼭대기에 올라 서면 사오싱 시내 전경 이 한눈에 들어온다는데 특히 부산 북쪽에는
아직 까지 옛 건물이 많이 남아 있어 샤오싱의 유구한 역사 를 생각해 보게 한다지만....
이제 날이 저물고 있으니 오를수는 없는지라 훗날을 기약하고는 산을 내려가 여기 소흥 에
우펑선 (乌蓬船 오봉선) 이 다니는 운하 챵차오즈제 仓桥直街(창교직가) 를 보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