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불상 / 위상복
깜냥도 안 되면서 나댄 걸까. 머릿속이 하얗다.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쳤는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빛바랜 진열대에 웅크린 공갈빵 같다고나 할지. 텅 빈 속을 감추기 급급하다.
계곡 어귀에 왕릉 셋이 나란하다. 삼릉계곡이다. 깊고 찬 기운이 감돌아 냉골이라고도 불린다. 계곡을 들어서기 바쁘게 깨진 불상과 불탑 조각이 길섶에 널려있다. 경주 남산에서 가장 많은 유적을 품고 있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고 싶은가 보다. 고묵은 솔숲길 따라 오륙백 미터 발걸음을 옮기자, 자연석 위에 곧추앉은 불상이 몸통을 불쑥 내밀면서 소매를 잡아당긴다.
발길을 멈춘 채 숨죽이고 바라본다. 당당한 어깨에 섬세하면서도 늠름한 기상이 찾는 이를 압도한다. 금방 옷깃을 여민 듯 유려한 가사 주름과 매듭이 선명하다. 남산을 지키는 불상 가운데 가슴에 새겨진 무늬가 가장 아름답다는 칭찬이 자자하다. 석굴암 본존불과 비교해도 몸매나 차림새가 빠지지 않는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조차 경이로움을 감추지 못한다.
좋은 일에는 탈도 많다고 했던가. 냉골 석조여래좌상에는 머리가 없다. 손발도 보이지 않는다. 여느 부처님처럼 깊고 숭고한 숨결도, 자비로운 미소도 눈에 띄지 않는다. 처음부터 머리가 없진 않았을 터. 불교를 경시하던 유생들의 힘 자랑에 못 이겨 떨어져 나갔을지도, 도굴꾼 무리에게 떠밀려 넘어지면서 상처 입었을지도, 아니면 천년 수행에도 제 눈을 밝힐 수 없어 스스로 잘라낸 것은 아닐까.
머리 없고 손발 잘려 나간 게 이곳 불상만이 아니다. 돌이켜보니 나의 지난 교직 생활도 몸통만 남은 불상이었다. 처음 교실에 들어설 땐 꿈도 많았다. 코피까지 쏟으며 밤늦도록 가르쳤던 초등학교 6학년 담임 선생님을 본받고 싶었다. 출중한 실력과 인품으로 제자들에게 존경받았던 고등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 흉내도 내고 싶었다. 나도 아이들에게 훌륭한 스승으로 남고 싶은 꿈을 꿨을 테니….
내가 찾은 교실은 달랐다. 머릿속에 그리던 장밋빛만 기다리는 게 아니었다. 입시 교육에 찌든 듯 사방이 퍽퍽했다. 우리가 다니던 시절에 비해 형광등 개수가 늘고 선풍기가 달린 게 다를 뿐이었다. 아이들의 숨통을 틔워주는 특별활동은 시간표에 이름만 얹고 있었다. 해 뜨기 바쁘게 집을 나서 밤늦도록 교실에서 보내는 아이들이 안타까웠다. 어쩌면 학교라기보다는 입시 학원에 더 가까웠다.
의욕은 앞서고 욕심은 끝이 없었던가 보다. 인간의 능력은 모두 같은 줄 알았다. 생김새가 다른 만큼, 아이마다 꿈이나 소질이 다를 텐데도 같은 옷을 입혔다. 아무리 부족한 아이도 몰아붙이면 이룰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까. 학교 적응이 더딘 아이들에겐 함께 탈출구를 찾기보다는 스스로 일어나라고 독촉하기 바빴다. 공부가 힘겨워 곁눈질하거나 게으름 피우는 아이들에겐 ‘하면 된다’며 희망 고문하듯 밀어붙이기 일쑤였다. 열심히 하다가도 벽 앞에 주저앉는 아이를 볼 때면 가슴보다 입으로 먼저 다그쳤다. 그렇다고 아이들 꿈을 죄다 이루어 준 것도 아니었다. 우리 모두에게 합격이라는 선물을 안겨주었던 초등학교 6학년 담임 선생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닐 터. 귀에 따까리가 앉도록 조르기보다는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도록 한마디 보태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은 회초리 한 번 들지 않았다. 공부하란 말도 하지 않았으며, 공납금 빨리 내라는 말 없이도 우리를 잘 이끌었다. 나는 달랐다. 회초리는 필수품이었고, 성적표가 나오면 상담부터 시작했다. 돈 문제는 입에 올리지 않도록 하라며 아예 쐐기부터 박았다. 텅 빈 머리로 몸통만 허우적거린 나를 보면 따뜻하게 품었던 담임 선생님 흉내는커녕, 발끝에도 얼씬거리지 못한 꼴이다.
교사의 머리가 사명감이라면, 손발은 실천이 아닐까. 하지만 나는 선생이라는 허울만 있을 뿐, 머리는 비어 있었다. 손발도 바지런하지 못했다. 무식한 놈이 용감했다고나 할지. 열심히 가르치고 결과만 그럴듯하면 자랑으로 생각했다. 숨도 쉬지 못하게 아이들을 몰아붙인 사실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때는 왜 그랬을까. 시대가 변했다는 말로 일그러진 자신을 변명했을지도, 아예 내가 걷는 길의 의미도 잊은 채 나댄 것은 아닌지.
정원시인 백낙천은 말했다. 자기 분수를 지켜 만족할 줄 안다면, 밖에서 더 구할 게 없다고. 마치 나처럼 아둔한 이에게 정신 차리라고 이르는 말 같다. 날개를 펼친다고 모든 새가 공작이 되는 건 아닐 테다. 손발조차 없는데도 불구하고 날갯짓하려 몸부림쳤으니 얼마나 한심해 보였겠는가. 나를 알고 분수를 지키는 삶을 꿈꾼다. 자신의 부족함도 제대로 모른 채 가식으로 가득하였던 날들은 멀리 날려버리고 싶다.
갑자기 계곡이 훤하다. 석조여래좌상이 그윽한 미소를 보낸다.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어서 오라고 손을 내민다. 너럭바위에 덩그러니 가부좌를 튼 모습이 장엄하다. 아직도 머리 찾아 헤매거나 다시 만들어 올리려는 이들을 꾸짖는 듯하다. 부처님 가르침인 진리의 불법을 되살리고 중생을 향한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복원이라는 말이 귓전을 때린다.
그랬다. 나를 향한 회초리인 듯 정신이 번쩍 든다. 머리와 손발 없는 불상도 스스로 일어나거늘, 온몸이 멀쩡한 나는 무엇인가. 남은 몇 달만이라도 내 모습을 다잡고 싶다. 여태 교사라는 몸통만으로 버텨온 날들이 부끄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