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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들이 천주교나 개신교로 개종하는 사례가 많다는 걸 접했는데...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유는, 여러가지겠지만,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이유와 한국불교의 문제점을 알아야 될 것 같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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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이유-
힌두교의 등장으로 세력이 약해지기는 했지만 불교는 인도에서 여전히 번성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교도의 침입 이후 인도에서 불교는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지요. 1100년 무렵부터 이슬람교도는 인도를 침입하기 시작했습니다. 흔히 이슬람교도들은 침입한 땅의 주민들에게 "코란이냐, 칼이냐?" 하면서 "이슬람교도가 되거나. 아니면 죽거나 택일하라." 고 강요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일정한 돈, 즉 종교세금을 내면 주민들의 종교선택권을 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불교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처음에는 불교와 힌두교의 차이를 두지 않고 공격했지만 조금 지나자 불교만 집중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스님을 보면 무조건 죽이고 절이 나타나면 완전히 파괴해 버렸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의 무자비한 살육에서 살아남은 스님들은 카라코람 산맥을 넘어 티베트로 피신했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이 불교를 철저하게 탄압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우상으로 보는 불상을 모신다는 것인데 이 점이 불교도에 대한 적대감을 키웠다고 할 수 있지요. 이는 아프카니스탄의 이슬람 원리주의자인 탈레반에 의해 2001년 3월에 파괴된 세계 최고의 입불상(立佛像)이었던 바미안 석불(石佛)의 경우를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힌두교 역시 여러가지 동상을 만들지만 그것은 신상(神像)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봐야 합니다.
두번째 이유는 종교세를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당시 스님들은 무소유를 기본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바칠 돈이 없었지만 이슬람교도들의 입장에서는 이교도들의 사정을 봐 줄 이유가 없었던 것이지요. 이런 상태가 계속되자 1500년 무렵 불교는 인도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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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적으로 세계적인 종교의 탄생지인곳에서는 아직도 그 종교의 영향이 크다.
흰두교 이슬람 기독교, 도교등이 있지만 유독 불교만은 그렇지 않다.
인도에서 싣달타에 의해서 크게 번성했지만 그 기간이 길지않고 지금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다.
인도하면 아직도 불교라는 관념이 있는 것은 초기불교의 발생지가 인도라는 관념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인도엔 태반이 흰두교인이다.
불교가 사라진 이유는 카스트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불교의 교리는 내안에 부처가 있다는 "마음을 중요시하는" 평등의 개념이 강하다.
또한 깨달음이라는 요소가 마음의 속박에서의 해방과 더불어 대승적인 외부로의 영향력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자유라는 명제가 지배자들에게 있어서는 그 당시 카스트제도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위험천만한 종교로 비춰진것이다.
불교가 그토록 평화적이고 순교적이었지만 지배자들에게 있어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 폭탄과도 같이 위태한 종교였던것이다.
그후 달마를거쳐 중국으로 전해진 불교또한 비슷한 이유로 도교가 번성시되고 불교가 퇴색된 시절이 있었다. 종교가 순한을 거듭한 일들이 없겠는가 마는 불교처럼 종교 자체가 옮겨진 사례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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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종교가 모두 그렇습니다.
석가모니가 교주였던 불교도 현재 인도에서는 명맥만 이어지고 힌두교가 성행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가 시작하였던 천주교/개신교(기독교) 역시 발상지인 예루살렘에선 예수님은 신격화되지 않고 한 명의 '인간 스승'으로만 모셔질뿐, 역시 찬밥 신세입니다. 예루살렘은 현재 유대교의 나라입니다. 여호와는 믿지만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슬람교의 마호메트 역시 자신이 천사 가브리엘에게 여호와의 예언을 메카에서 전수받았으나 기존 기득권세력에게 밀려서 메디나로 쫒겨나 그곳에서 이슬람교를 전파시킵니다.
석가모니가 불교를 부흥시킬 당시의 인도는 바라문교(현 힌두교의 모체)가 민족종교로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특히 카스트제도와 허례의식을 중요시하여 모든 시민이 하루 6시간씩 신께 제사 올리고 산 양과 제물을 바쳤으며 그런 제사를 주도하던 바라문들은 왕과 왕족,귀족보다도 높은 신분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왕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무릎끓고 고개를 숙여야할만큼 막강한 파워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바라문교의 영향아래 있던 인도에서 태어난 고타마 싯다르타는 참진리를 찾기위해 출가하여 카스트제도를 부정하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라는 평등사상을, 그리고 몇시간에 걸쳐 신에게 올리는 허례의식의 제사보다는 실천을 중시하는 보시행원을 중시하였습니다. 또한 기존에 신께 제사하는 것 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낮은 계급인 수드라(노예)와 카스트 조차도 끼지 못하는 계층인 바리아(천민)등도 불교에 자유롭게 입문하는 것이 허락되어 인도 전역에 큰 파장을 몰고 왔습니다. 또한 힌두교는 수억의 신이 존재하는 다신교의 종교이며 신께 기도함으로써 복을 얻는다는, 이슬람교나 기독교와 비슷한, 신에게 기대는 종교인데 반해서 불교는 자신의 삶은 신의 영향을 받는것이 아니라 자신이 짓고 자신이 받는 원인과 결과의 인과응보 사상을 펼쳤기에 기존 힌두교의 견제를 많이 받았습니다.
본시 인도의 성격상 불교는 종교라기 보다는 하나의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적인 요소로 시작하였습니다. 초기 석가모니 사후에는 전통적으로 탑은 세웠지만 불상이란것도 없었고 목탁이나 목어나 요령등도 후대에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불교를 쫒아 출가하는 사람은 인간의 생노병사를 뛰어넘고자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이었고 그 고난이도의 철학은 일반 생활을 하는 서민들에게는 이해하기가 힘든 내용이 없잖아 있었습니다. 더구나 불교가 자신의 깨달음과 해탈을 중시하였기에 점점 외곬수로 빠져들어가는 성향이 있어서 (그것이 후에 북방으로 전달되면서 대승사상에 불을 지피는 역할도 하였지만) 이념보다는 빵을 중시하는 일반 백성들에겐 차라리 신에게 매달려 복을 기원하고 건강을 기원하는 힌두교로의 복귀가 빠르게 이어졌고 또한 워낙 몇천년동안 인도인들에게 힌두교(바라문교)는 민족종교로서 자리잡았기 때문에 서서히 불교는 힌두교 세력에 밀려나기 시작하여 현재는 몇몇 지방을 제외하고는 불교는 동남아->티벳->중국->한국->일본->미국 의 순서로 동쪽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현재도 인도인의 대부분은 힌두교신자이며 위대한 지도자 간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외형상 카스트제도는 폐지가 되었지만 아직도 사회의 기득권층은 바라문교의 수장 바라문출신이 아니면 사회진출도 쉽지가 않습니다. 미국이나 영국에 유학오는 인도인들도 99%는 바라문출신의 자녀들이며 나머지도 그나마 왕족/귀족 출신의 자녀들일 정도로 힌두교는 몇천년을 두고 인도인의 가슴에 뿌리가 박혀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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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불교가 (거의) 사라진 이유는 몇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는 불교 교단이 허약해졌습니다. 불교 교단이 허약해진 것은 또 몇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1) 민중과의 사상적 괴리 2) 민중과의 공간적 괴리 3) 부유한 교단의 문제가 있습니다. 불교 사상은 인도 사상사에서 불교이전, 불교, 불교이후로 구분할만큼 독창적이고 고도로 발달된 논리와 사유체계입니다. 불교를 흔히 지혜의 종교라고 하는데, 그만큼 쉽게 접근하기 어렵다는 의미도 됩니다. 그래서 불교 교단이 비록 모든 계급에 문호를 개방하였지만 석가모니 당시 교단은 지배계급인 - 그래서 학문을 배우고 철학적 사유의 기초를 가지고 있는 브라만과 크샤트리아 계급 출신 승려가 90%를 차지하였습니다.
석가모니 당시에는 석가모니의 탁월한 감화력과 인품으로 교세가 급격히 확장되었지만, 석가모니 이후에는 승려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정리하고 분석하는데 노력을 기울였으므로(아비담마) 번잡한 교리체계가 구성되고, 20여 학파로 나뉘어 각 학파가 서로 다른 학설을 주장하는가 하면, 이러한 학파의 주장을 소승이라고 주장하면서 더 복잡한 교리사상을 들고 나온 대승불교론자 등으로 인하여 민중은 사상적으로 불교와 많이 멀어져 있었습니다. 공간적으로도 승가는 탁발을 하지 않고 국가가 사찰에 기증한 토지와 재산을 관리하고 소작농을 부려서 토지임대료를 받아 생활했습니다.
불교가 초기에 교세를 크게 확장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탁발이었습니다. 탁발은 교단이 세상을 만나는 시간이며, 잘 수행하고 있음을 평가받는 시간이기도 했으며, 교단이 엄격한 무소유의 정신으로 살 수 있게 하는 경제적 기반이었습니다. 그러나 석가모니가 입멸하면서 교단은 사찰거주가 주류를 형성하고, 숲에 거주하면서 탁발수행을 하던 데바닷타 등이 교단에서 배척되었습니다. 데바닷타의 교단이 훗날 서유기의 삼장법사가 인도를 순례했을 때에도 존속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엄격한 수행과 탁발이 얼마나 교단의 생명력을 유지시키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교단이 부유하다보니 재산이 축적되고 재산을 관리할 소임을 승가가 맡아야 하므로 자연히 수행에 소홀하게 되고 소임을 둘러싼 마찰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석가모니 입멸후 1000년, 불교 교단은 내부적으로 부패의 양상을 띠게 됩니다.
둘째는 힌두교입니다. 불교가 등장할 무렵 인도의 사상계는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천 년 이상 유지되었던 브라흐만교와 브라만 계급(제사장 계급)의 권위가 무너지고, 제2계급인 크샤트리아계급(왕족 귀족 무사계급)의 권력이 강화되었으며, 이들은 사상계에서조차 지배적 역할을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자이나교 교주 마하비라와 불교 교주 석가모니입니다.
기원전후 브라흐만교는 기존 토착 신앙을 흡수한 새로운 종교로 변모하는데 그것이 힌두교입니다. 힌두교의 교세가 강해짐에 따라 불교에서도 의식을 강화하여 각종 진언(주문, 만트라)을 담은 경전이 등장하고, 관세음보살을 등장시켜 시바, 비슈누, 인드라 등이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제사 등 각종 의식을 만들어 행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불교는 힌두교와 비슷한 종교로 변질되어 갔습니다. 더구나 힌두교에서는 붓다가 비슈누의 화신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물론 그 내용은 다르지만, 보통 사람들은 붓다가 비슈누의 화신이라고만 알게 되어 불교가 힌두교의 일파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실제로는 비슈누의 화신 붓다는 연기 무아라는 사상을 주창하여 브라흐만, 시바, 비슈누 등 절대신의 창조와 유지, 소멸의 기능을 부인하는 악마신과 그 추종자들이 붓다의 교리를 따르게 한 후, 이들을 지옥으로 이끌고 간다는 것이 붓다의 사명입니다. 즉 겉으로는 붓다가 비슈누의 화신이라고 하면서도 실제 속내를 들여다보면 붓다의 교설은 지옥으로 이끄는 가르침이라고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힌두교의 입장에서 가장 거북한 불교의 핵심 교설은 바로 연기 무아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는 이슬람 침공으로 인한 종교 박해입니다. 이렇게 안팎으로 약해진 불교 교단에 치명적인 위해를 가한 것이 바로 이슬람의 침공입니다. 이슬람은 인도를 침공하여 불교 교단을 철저히 파괴하였는데 엄청난 수의 승려를 학살하고 사찰을 파괴했습니다. 인도의 중요한 사찰과 불교 유적이 이로 인하여 파괴되었고 불교는 회생 불가능의 상처를 입고 말았습니다.
물론 불교가 인도 민중속에 깊숙히 뿌리내리고 있었다면 이슬람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회생할 수 있는 생명력을 잃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번잡한 철학 논쟁으로 민중과의 사상적 교감을 상실하고, 풍족한 사원 생활로 민중과 공간적으로 생활적으로 분리되었기에 불교는 승려 학살과 사원 파괴의 종교 박해를 극복해낼 수 없었습니다.
현대에 들어 인도에서는 불평등한 계급제도에 불만을 가진 천민계급과 여성을 중심으로 불교신앙운동이 일어나고, 스리랑카 등의 영향으로 불교 유적이 복구되는 등 불교 신도가 증가하고 있지만 전체 인구대비 불교 인구는 아주 미미한 수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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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에는 불교 가 사라진 이유는, 힌두교 를 지탱 해야만 지배층의 득세가 지속될수 있다는 점 뿐이다..인도 브라만 계급은 절대로 붓다를 지지할 수 없다... 그 대체로 슬그머니 굴러박힌게 자이나 교 쯤 되겠다..
....한국(중국) 불교는, 더이상 고타마 싯타르타 의 평등호혜 정신에 입각한 철학을 폄하해선 안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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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불교 멸망 원인 규명 호사카 슌지 교수
"한국불교, 현실 외면 땐 군소 종교로 전락할 것"
지난 2008년 출간된 일본의 저명한 비교종교학자인 레이타쿠(麗澤)대학 호사카 슌지(54) 교수의 『왜 인도에서 불교는 멸망했는가』(한걸음 더)는 한국불교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동안 인도불교는 이슬람의 침략으로 거대한 사원이 파괴되고 수많은 스님들이 학살됨으로써 교단이 무너졌거나 혹은 불교의 교의와 의례에서 정체성을 잃고 힌두교화 됨에 따라 저절로 소멸했다는 학설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호사카 교수는 7~8세기 서인도 불교의 사정을 전하는 이슬람 자료인 『차츠나마』를 토대로 불교는 힌두교 및 그 정통파 권력에 대한 대항세력으로서의 고유한 역할을 이슬람에 빼앗기면서 인도사회에서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호사카 교수의 주장에 대해 일각에서는 공개적인 비판도 있었지만 한국불교는 인도불교의 멸망에서 교훈을 배워야 한다는 데는 의견이 일치했다.
이런 가운데 호사카 교수가 이 책을 우리말로 번역했던 동국대 불교학부 김호성 교수의 초청으로 지난 3월 7일 한국을 방문했다. 본지는 3월 8일 조계사 인근에서 호사카 교수를 만났다.
▷인도불교의 멸망을 다룬 저술로는 이 책이 유일한 것 같다. 이 주제를 다룬 이유는?
“인도불교 멸망의 원인을 연구한다는 것은 배타적 일신교를 비롯한 불교 주변의 환경이 점점 혹독해져 가는 속에서 이 시대 불교가 어떻게 스스로의 존재를 지켜 나가고, 그 고매한 가르침을 계속 유지해 나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이 책의 출판 이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판카즈 모한 교수는 “이슬람에 ‘안티 힌두교’의 위치를 잃었기 때문에 인도에서 불교가 멸망했다는 학설은 잘못됐다”며 “불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이슬람을 수용했다는 『차츠나마』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라크전을 일으킨 부시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오류다”라고 반론했다.
“이슬람의 무력 침공과 불교의 힌두이즘화가 불교의 멸망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힌두교나 자이나교는 똑같은 이슬람의 탄압을 겪었지만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우연히도 지금 방글라데시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이슬람 지역들은 당시 불교가 가장 융성했던 지역들이다. 여기서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은 이슬람의 침략과 더불어 불교가 민중으로부터 어떻게 해서 유리되고 소멸됐는가를 규명해야 하는 점이다.”
인도불교의 멸망은
지나간 이야기 아닌
동아시아 현실 문제
▷이슬람 자료인 『차츠나마』는 어떤 자료인가?
“『차츠나마』는 인도이슬람연구의 기본문헌으로 평가받는 자료다. 『대당서역기』의 보완적인 관계에 있는 이 자료는 7~8세기 서인도 일대의 불교와 힌두교의 정치적·문화적 관계를 비롯해 불교도의 이슬람 개종 등 서인도 말기의 불교 상황 등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다. 이런 여러 자료들과 선행 연구들을 검토한 결과 불교의 교리적인 면과 종교적인 면을 중시한 사람들은 힌두교에 흡수되고, 불교의 안티힌두적인 정치적 기능을 중시한 사람들은 이슬람교도 개종했다는 것이다.”
▷당시 불교와 힌두교의 관계는 어땠는가? 힌두교에서는 아직도 비쉬누의 아홉 번째 화신을 붓다라고 보지 않나?
“붓다가 비쉬누의 화신이라고 해서 힌두교가 불교문화를 보호했다고 보나? 전혀 그렇지 않다. 붓다는 힌두교에 저항하고 반발하는 악마적인 신성으로 오랜 세월 간주돼 왔으며, 붓다의 강한 이미지로 인해 비쉬누의 화신으로 인정됐을 뿐이다. 불교는 힌두교의 가장 강력한 저항 세력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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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불교의 멸망을 연구한 학자로서 일본불교 미래는 어떻게 보는가?
“대단히 암울하다. 장례의식만 남아있을 뿐 신앙심이 없다. 사찰경제가 오로지 장례에만 의존하는 탓에 지금 젊은 세대들이 훗날 절에서 장례를 지내지 않게 되면 절 자체가 유지되기 어렵다. 30~40년 안에 일본에서 불교신앙은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메이지유신 이후 정권은 신도는 떠받들고 불교는 혐오하도록 하는 ‘경신혐불(敬神嫌佛)’ 정책을 폈다. 또 불교계의 사회참여를 철저하게 막았다. 불교계도 거기에 저항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보다는 오직 장례에만 매달렸다. 지금도 일본에서 한해 3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살로 목숨을 끊고 있지만 이에 대해 한 마디 언급도 없다. 더 큰 문제는 설령 불교계가 그런 목소리를 낸다고 하더라도 그런 불교계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기는커녕 ‘왜 월권을 하느냐?’며 대중들이 냉담하게 반응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만큼 일본에선 불교를 혐오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그 이유는 메이지정권의 영향도 컸지만 스님들이 세속인과 별로 다를 게 없다는 점이 무엇보다 컸다. 일반인들보다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 먹으며 사는데 누가 종교인을 존경하겠나. 몇 해 전 장례 문제로 한 스님을 우리집에 초정했는데 10분 정도 경 읽고 나더니 담배 피고 술 먹고…. 오죽했으면 우리 어머니까지도 나 죽으면 스님 부르지 말라고 하실 정도였다.”
▷일본에는 불교계에서 세운 대학도 많은데 거기에서 배출되는 인재들도 많지 않나?
“불교에서 세운 대학들에서도 불교학과가 찬밥신세이거나 사라진지 오래다. ‘불교’라는 이름이 전혀 환영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 ‘불교혐오’ 팽배
장례에만 매달린다면
30여년 뒤 사라질 것
▷그렇다면 불교가 일본 사회에 꼭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나?
“불교는 일본인들과 천수백 년을 함께 해온 문화와 사상의 보고이다. 불교가 사라진다면 일본인들에게 참으로 막대한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어떤 문제에 대해 일신교가 하나의 대답을 한다면 불교는 천 가지 탁월한 대답을 할 수 있다. 지금 일본은 황폐해져 있고 의지할 곳이 없다. 자살자가 그렇게 많은 것도 전쟁과 경제성장에만 매달렸던 일본의 근현대사로부터 비롯된다. 불교는 고통 받는 일본인들의 안식처인 동시에 환경파괴 등 온갖 난제들과 맞닥뜨린 인류의 살 길이기도 하다.”
▷한국불교 미래는 어떻게 보나?
“한국불교는 일본불교와 달리 존경받는 스님들이 적지 않고 불교인들의 신앙심도 깊은 것으로 안다. 그러나 불교가 대중으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하면 더 이상 설 곳이 없게 된다. 스님들은 계율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세속과의 차별을 분명히 해야 한다. 동시에 사회 문제에 대해 적극 관심을 갖고 불교의 정신에 입각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가난과 고지식함이 일반인에겐 허물일 수 있어도 종교인에겐 존경심의 원천일 수 있다. 아무리 오랜 역사와 문화를 지닌 한국불교라도 스님들이 세속인과 추구하는 것이 비슷하고, 현실 문제를 외면한다면 불교는 결국 군소종교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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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인도에서 왜 사라졌는가?
-불교의 소멸과 자이나(Jaina)교의 생존- 김경철-델리대 불교학과 박사과정
(참고원전: 불교 역사연구(Studdies in History od Buddhism by A.K.Narain),The Decline of Buddhism in India by R.C. Mitra))
수수께끼 같은 인도역사에 있어서 가장 풀기 힘든 수수께끼 중의 하나는 7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졌다는 문제이다.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많은 이론들이
제시되었는데 R.C Mitra는 ‘The Decline of Buddhism in India’에서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진 원인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1. 수명이 다하여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2. 왕권의 후원이 없어졌다.(Ashoka 왕조의 쇠퇴와 운명을 같이했다)
3. 바라문교의 박해
4. 무슬림(이슬람)의 침입
5. 불교내부의 부정부패
6. 불교의 분파주의로 인한 분열
7. 불교교단에서 재가 신도들의 소외.
첫번째 원인은 에드워드 콘즈와 같은 몇몇 불교학자에 의해 제시된 이론이지만, 단순히 불교가 자연사 하였다는 논리는 재고의 가치가 별로 없다. 나머지 원인들은 불교의 운명에 대한 상황설명이나, 사건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검토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이론들이다. 그렇지만 이 원인들 중 어느 한가지 혹은 모든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인도 땅에서 불교가 사라졌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위에서 제시된 원인들과 상황들은 불교와 여러 면에서 아주 유사한 자이나교에도 똑같이 작용되었지만, 자이나교는 사라지지않고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가 사라진 원인들이라고 제기된 이론들은 논리성을 잃고 만다. “ 어떻게 갠지즈 강 유역에 Sramana전통에 근거를 둔 자이나교는 살아 남았는데 그것과 유사한 불교는 사라졌는가?” 라는 질문을 통해서 불교가 인도 땅에서 사라지게 된 원인을 살펴보겠다.
먼저 불교와 자이나교가 비교 대상이 될 만큼 서로 비슷한지를 살펴보자. 두 종교 전통의 스승인 붓다와 마하비라는 둘 다 황족은 아니지만 갠지즈강 유역의 작은 부족왕국의 왕족 출신이다. 둘 다 인생의 황금기에 가정을 떠나 당시 쉬라마나(Sramana) 수행자 들에게는 일반적이었던 금욕과 고행을 수년동안 했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선언한 역사상 유일한 인물들이다. 깨달음을 얻은 후, 이 둘은 모두 재가 추종자와 출가 추종자로 구성된 샹가(Shanga공동체)를 만들었으며, 이 새로 만들어진 공동체들은 각각 많은 수의 바라문 계급과 부유층 자제들을 끌어들였다. 마지막으로 이 둘은 대체로 같은 지역을 돌면서 약30년 동안 가르침을 폈고. 마침내 니르바나(열반)에 들었다.
크샤트리아 계급 출신의 두 명의 성직자들로부터 시작된 두 종교는 발전과정도 비슷하다. 이새로운 두 종교는 왕권의 후원을 받은 것이나, 방대한 철학적 문헌을 남긴 것이나, 베다의 전통을 반대하는 가르침이라는 비판을 받은 것도 유사하다. 그리고 힌두교의 믿음과 관습이 일반화된 사회에서 자신들의 가르침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던 것도 비슷하다. 불교와 자이나교는 교리의 차이 때문에 가끔 충돌하기도 하지만, 두 종교의 전통이 처했던 비슷한 역사적인 상황을 볼 때, 두 종교는 유사한 종교로 볼 수 있다.
왕권의 후원 문제를 살펴보자. 인도의 왕들은 전통적으로 모든 종교를 지원하는 관습을 따랐는데, 왕권의 후원을 받은 종파들은 교세가 확장되었다.왕권의 후원은 일반 대중들을 끌여 들였을 뿐 아니라, 실질적인 물질적인 이익도 가져다 주었다. 붓다와 마하비라는 그들의 활동 초창기부터 마가다왕국의 Srenika왕, 부친을 밀어내고 왕이 된 Ajatasatu의 아낌없는 후원을 받았다. 아자사타사투의 후계자인 Nanda(난다)왕은 자이나교의 추종자이고, 마가다 왕국의 후신인 마우리아 왕조의 찬드라굽다(Chandra Gupta)왕은 자이나교로 개종하였는데, 자이나교는 찬드라 굽타왕이 말년에 자이나교의 승려로 출가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찬드라굽다(Chandra Gupta)왕의 손자인 Ashoka(아쇼카)왕은 불교의 후원자로 잘 알려져 있다. 아쇼카왕의 열성적인 포교로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파되었으며,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불교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마우리아 왕조를 무너뜨리고 일어난 친(親) 바라문 성향의 Sunga왕조의 흥기는 마가다지역에서 비(非)베다 전통의 종파들의 전성기가 끝난 것을 의미하였다. 자이나교의 경우, 초기에는 Saurashtra에 있는 Valabhi와 Girnar로, 후기에는 남인도의 Karnataka(지금의 벵갈로르가 위치한 주)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불교도들은 고향을 떠나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서쪽의 마투라지역으로 이주하여서 인도스키타이계인 카시니카왕으로부터 많은 후원을 받았다. 자이나교가 친 쉬리마나 전통이 강한 남인도로 이동하는 동안 많은 불교도들은 카시미르를 지나 중앙아시아(간다라 유적지)로 이동하였는데,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왕권의 후원은 불교와 자이나교의 형성에 도움을 준 가장 확실하고 효과적인 요소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불교가 소멸한 원인을 왕권의 후원이 사라졌다는 사실에만 찾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불교와 거의 같은 정도로 왕권의 후원에 의존했던 자이나교의 교단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몇몇 역사학자들은 비(非)베다 전통들에 바탕을 둔 두 종교에 대한 바라문교의 박해를 강조한다. 실제로 힌두 광신도들에 의한 개별적인 박해는 있었지만, 이 사건들이 실제로 이 종교 전통들을 무너뜨릴 만큼 효과적이지도 않았고 많지도 않았다. 힌두교도 들의 근본적인 교리인 아크만의 존재를 불교에서는 거부했던 반면, 마하비라의 자이나교는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자이나교가 불교에 비해 박해를 덜 받았다는 주장이 나올 만 하다. 하지만 바라문교의 반 자이나교 감정이 아크만 교리에 있어서는 불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했다고 하더라도, 자이나교가 바라문교의 동물 희생제를 극렬히 반대했기 때문에 불교에 비해서 바라문교의 박해를 덜 받았다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육식에 대해서 유연한 태도를 보였던 불교가 힌두교의 희생제에 대해서 자이나교 보다 덜 반대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기 때문에, 두 종교가 바라문의 박해에 같은 정도로 고통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힌두교의 박해가 원인이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주1) 베다(veda)경전 - 시경(詩經)-Rig veda,성례전(聖禮典)-Yajur veda,
성가(聖歌)-Sama veda,주문(呪文)-Atharva veda등 네 종류가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경전은 시경이며 B.C2000-1000사이에
기록되었으며 범어로 1028편의 기도와 찬미의 시를 모은 것이다.
주2) 바라문교의 개혁운동기에 태동한 두 종교 (B.C600-A.D1917)
(1)자이나교 : B.C557년경에 인도의 귀족출신 마하비라가 시작했는데,그의 개혁의
요점은“브라만 계급의 배타적 정신“”지나친 베다경 숭배“”무자비한 동물제사“
”우파니사드 철학의 일월론을 반대한 것 등이다. 여기서 “자이나교”가 창설되었다.
(2)불교:B.C548년경 석가모니에 의하여 시작되었으며, 세습적 계급제도, 제사장에게
공물드리고 구원을 얻으려는 것, 철학적 사색을 지나치게 중요시 하는것,의식주의,
알지 못할 고대어로 쓴 경전을 중시함등에 반대하였다. 여기서 불교가 출발되었다
12-3세기의 무슬림 침입과 관련된 경우는 쉽게 무시할 수 없다. 자이나교가 많이 퍼져있는 인도서부(구자라트 주)와 데칸고원 쪽은 지리적인 위치 덕분에 다행히 무슬림의 침입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반면, 날란다(세계최초의 종합대학, 부다가야에서 가까운 곳)와 같은 대규모 불교교단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는데, 날란다와 같은 불교학문의 센터가 파괴되었다는 것이 불교에 심각한 타격이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초기의 무슬림의 학살 행위가 끝난 다음 불교 공동체는 왜 불교를 재건하고 재정비 할 수 없었던가? 자이나교의 경우 무슬림 침입 후 구자라트와 라자스탄 지역의 많은 자이나교 사원들이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었지만, 그래도 자이나교는 살아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자이나 교도는 상업과 이슬람 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주, 실제 이름에 Jain이 붙는 사람은 대부분 자이나교도이고, 상업인구 비중이 매우 높음)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외적인 이유에서 이슬람의 침입이 가장 치명적인 타격이었다고는 할 수 있지만, 불교공동체가 완전히 없어지기에는 충분한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Shanga(샹가)내부의 부패라는 원인을 살펴보자. 가장 초기의 불교문헌에서 조차도 샹가내의 게으름과 부패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을 불교가 약화된 것의 중요한 원인으로 보는 것이 옳은 관점일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가 내부적으로 부패할 수도 있지만 내적으로 개혁을 하는 종교들은 이런 단계를 넘어 선다. 예를 들면, 자이나교의 사원에서 행해졌던 형식적이고 극단적인 의식행위와 사원의 행정 수도자들의 권력확장에 대한 일반 신도의 분개가 원인이 되어서 15세기에 한 사원주의 분파가 형성되게 되었는데, 비록 이 새로운 분파인 스타나카바시(Sthanakavasi)들이 추종자를 많이 얻지는 못했지만, 이 운동은 정통 자이나교에 경종을 울렸으며, 주류인 스베탐바라(Svetambara)공동체내에도 개혁을 불러 일으켰다. 종교 내부의 부패, 그자체만으로는 종말이 이어지지는 않는다.
개혁이 필요한 시기에 이 개혁을 수행할 능력이 불교에 없었던 것이 가장 뼈아픈 원인으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교리에 대한 의견차이로 19개 분파로 분리될 정도로 불교 내부에 만연해 있던 분파주의는 종종 불교 내부의 허약함을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하지만 불교의 분파주의는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의 차이 때문에 일어난 것이므로, 다양하게 분파들이 일어난 것은 영성적으로나 사상적으로 활발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으로 받아 들여져야 한다. 모든 불교분파들은 Pali 삼장의 권위를 인정하였고, 거의 동일한 계율을 가지고 있었으며, 각 분파들간의 교류도 왕성했다. 이러한 불교쪽의 상황과는 정반대로 자이나교는 주요분파가 2개뿐이었지만, 분리 초창기부터 서로가 소원한 관계였다.
디감바라 종파(裸依行派)는 스베탐바라파(白依행파)의 경전들의 유효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자신의 경전들을 새로 만들어 냈다. 따라서 종파분열에 의한 분파주의는 불교보다는 자이나교가 더 심하였다고 말하는 것이 공정할 것이다. 그러므로 분파주의가 불교의 쇠락을 가져온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주) 종종 봄이 되면 자이나교의 나의행파(裸依行派) 구루(Guru,스님)가 정말로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고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음. 그 뒤에는 신도들이
수십-수백명이 독경을 하면서 따라감
이제 미트라(R.C.Mitra)가 제시했던, 불교가 재가 신도들을 돌보는데 실패했다는 점에 대해 살펴보자. 불교 교단이 재가 신도들을 등한시 하는 경향은 불교의 가장 초기부터 나타났던 것으로 보이는데,‘불교도’라는 용어 자체가 가정을 떠나 출가하여 노란색 승복을 입은 탁발 수도자들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에는 재가 신도들을 위한 특별한 서원이나, 사회윤리규범, 제례의식 등이 없었던 반면, 자이나교에서는 성직자들이 항상 재가 신도들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재가 신도들에게 계율을 가르치는 적절한 경전들도 만들었다.
교단에서의 재가 신도들의 역할이나, 종교 신원 의식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불교 재가 신도들이 가장 약한 집단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불교 교단의 문제에서 재가 신도들의 역할이 제외됨으로써 4-5세기경부터 시작된 인도 전역을 휩쓴 박티운동(재가신도들이 참여하는 대중적 신앙운동)에 재가 신도들이 흡수되어 버렸다. 이러한 문제는 마하바르타(Mahabharata), Puranas, Jayadeva의 Gitagovinda에서 붓다를 비쉬누(힌두의 신)화신으로 묘사함으로써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불교문헌에는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는 힌두신을 불교신화에 끌어 들이거나, 붓다를 화신으로 취급하는 것을 거부하는 시도를 보여주는 문헌은 단 한권도 없는데, 아마도 불교의 승려들은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것 같다. 붓다를 힌두신의 화신으로 묘사한 것을 그대로 묵과한 것은 심각한 문제였는데, 이는 불교에서 이런 흐름을 암묵적으로 용인하였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주1) 비슈누신(힌두의 유지신)-시대에 따라 뱀,석가.예수,풀,보리수나무, 크리슈나로
화신하였다고 믿고 있다.
주2) 박티운동 – 신에 대한 헌신을 통하여 신과 인간의 신비적 합일을 추구하는 일종의
대중적 신앙운동. 카스트제도에 대한 배격뿐만 아니라 제도화되고 관념적인 종교의
형식을 벗어나 여성을 포함한 누구나 사랑 또는 헌신을 통해 신과 하나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종교 대중화에 크게 기여함.
중세시대(1200-1750),이 시대는 박티운동이 인도 전역에 확산된 시대이다.
이 박티운동은 기독교의 청교도 운동과도 같은 운동인데 비슈누,크리슈나,라마와
그 배우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다. 개인적인 종교와,지방어로 찬양, 성직자
중심의 예배 무관심을 보였다.
반면, 자이나교의 경우는 힌두교가 자이나교의 마하비라를 비쉬누의 화신이라고 제시하자, 비쉬누의 화신들이 보여준 비도덕적인 행위를 비난하면서, 람과 크리쉬나를 자이나교의 법을 따르는 자이나교의 세속적인 영웅으로 묘사하는 완전히 새로운 버전의 라마야나와 마하바르타를 만들었다.
재가 신도들에 대한 세심한 관심이나, 박티운동을 포용한 점 등은 자이나교가 불교보다 재가 신도들과의 내적인 공존에 신경을 많이 썼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이다. 이러한 핵심적인 차이점 때문에 자이나교는 남아 있을 수 있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자이나교가 여전히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었던 이유로 꼽히는 것 중에서, 불교의 흐름에는 있지만, 자이나교에서는 나타나지 않은 것인 마술적 제의식이 강한 탄드라가 있다. 탄드라 불교의 기원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겠다. 7세기에서 12세기 인도에는 대승불교의 변형인 탄드라 불교(㈜밀교의 일종 : 性을 깨달음과 연결시켜 이해하는 상반된 인식을 갖고 있음)가 크게 유행하였는데, 힌두교 안에서도 탄드라 힌두교가 번성하였다.
힌두교의 종교문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회에서 불교의 재가 신도들은 힌두문화를 따라 생활하였고, 여기에 탄드라라는 공동의 문화가 하나 더 생긴 것이다. 대승불교의 보살들은 탄드라불교에서는 신적인 능력을 가진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며, 이 보살신들은 탄드라 불교의 만신전에서는 힌두 탄드라와 거의 동일한 신들을 숭배했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변형은 힌두교와는 구별되는 불교의 특징을 희석 시켜서, 힌두교와 불교의 융합을 더 가속화 시켰다. 반면 자이나교는 탄드라 버젼이 없다.
자이나교는 영적으로 가장 발달한 인간을 그 창시자로 삼고 있어서, 인간을 초월적인 존재로 둔갑시키는 시도를 한 적이 없다. 궁극적, 절대적인 어떠한 철학적인 명제도 받아들이지 않는 자이나교의 비절대주의(Anekanta)철학은 인도 사상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지만, 자이나교가 힌두교에 흡수되지 않고, 지금까지 그 전통을 이어 갈 수 있게 하는 힘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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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의 문제점
힌두신들과 중국 도교적 불보살 형상과 탱화,
영가들 위패로 장엄?된 무당집 같은 우중충한 법당.
청소년 외면하기.
장애우 배려 부족.
산중에 박혀있는 절.
한자투성이 고리타분한 경전..
알아듣기 어려운 뜬구름 잡는 법문,
불교가 어렵게 보여 접근조차 쉽지않다.(다부처 다보살에서부터)
중국불교 카피
만연된 49재 천도재
통일되지 않은 법회의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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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교회엘 가라......자수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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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는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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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선종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7문이 바로 마조의 제자에서 비롯되었다. 4조 도신(道信)에서 비롯되는 희양산문과 7조 청원행사(靑原行思)에서 비롯되는 수미산문을 제하면 모두 마조의 문하에 있다. 선종의 법통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왜 한국에도 훌륭한 선사들이 많은데 중국에서 법통을 끌어대지 않으면 안 되느냐는 것이다. 왜 거기에 급급하냐 하는 것이다.
또 그동안 고승대덕들이 많았는데 왜 한국에서 출발한 종파 하나가 제대로 세워져 있지 않느냐 하는 점이다. 이는 선종이냐, 교종이냐를 떠나서 한국 불교 저류에 흐르는 중국 사대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중국은 분명 우리와는 달랐다. 아무리 외국에서 종교나 이데올로기를 들여온다고 해도 결국 자신의 것을 만들어 내고 만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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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열스님은 이를 ‘불교의 신학화(神學化)’라고 표현하면서 “고따마 붓다에 대한 신학적 접근 방식은 불교에 대한 왜곡과 오해를 불러왔다. 불교의 신학화야말로 불교 타락의 극치라 하겠다”, “한국불교의 위기는 불교를 믿는다면서 교주(敎主)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데서 비롯되고 있다”, “붓다의 신격화는 신심이란 이름으로 더욱더 심해졌고, 불교의 신학화는 기도라는 이름을 빌려 더욱더 심각해졌다. 붓다의 신격화는 빗나간 믿음을 낳게 되었고, 불교의 신학화는 지금 이 지상에서의 종교를 죽음 저 너머의 종교로 왜곡하고 말았다”고 질타하고 있다.
성열스님의 비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신학화된 불교에서는 승려는 고따마 붓다의 뒤를 잇는 수행자가 아니라 사제(司祭)로 전락하고 만다. 사실 오늘 이 땅의 많은 출가자들이 사제의 역할에 매달려 있을 뿐 붓다의 정신으로 살려는 몸짓은 적어 보인다. 바로 이것이 한국불교의 위기이다.” “출가자들의 정신이 죽어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존경해 마지않는 고따마 붓다 역시 죽어버린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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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중인 호진스님이 절친한 도반 지안스님에게 ▷
“부처님 참모습 찾기위해 신화 전설 제거돼야"
몇 년 전 어떤 책에서, “진실의 적은 거짓이 아니라 신화다”라는 말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이 문장을 읽었을때 무릎이라도 칠 만큼 기뻤습니다. 당장 이 말을 내 연구노트마다 첫 페이지에 커다랗게 써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역사적인 부처님의 참 모습을 보기위해서는 신화와 전설을 제거해야 한다. 그렇다. 나의 공격 목표는 신화와 전설이다”라고 마음속으로 부르짖다시피했습니다. 신격화와 전설이 싯다르타라는 역사적인 인물을 죽이고 있는 주범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한때는 우리에게 그런 요소들 또는 그런 표현방법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것들이 싯다르타를 역사적으로 존재하게 하는데 장애물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신격화, 역사적 인물 묻어버리는 일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그런 허상들을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본질적인 것에 손상을 당하면서까지. 어느때 우리 선배들은 그 당시의 필요에 의해서 실제로 있지도 않았던 그런 이야기들을 꾸며도 내었는데, 지금에 와서 왜 그런 이야기들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아이들에게는 동화(童話)가 필요하지만 성인들에게는 그들에게 맞는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2600여 년 전과 비교해서, 우리는 많은 것이 변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기적 이야기와 전설이 필요하다면, 우리에게 설득력이 있는, 그리고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현대적인 기적 이야기와 전설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나름대로 부처님 전기를 쓰기로 계획을 하면서, 제일 먼저 3가지 기준을 만들었습니다. (1)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모습의 부처님, (2) 정상적인 한 인간으로서의 부처님, (3) 신화와 기적같은 것이 완전히 제거된 모습의 부처님. 이와 같은 설정은 전혀 무리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달라이라마 존자는 이 3가지 점을 충족시키는 존재이지만,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가장 존경받고 영향력 있는 인물이 아닙니까. 고타마 싯다르타는 왜 이렇게 될 수가 없겠습니까.
종교에 ‘억지 무리’ 만들 필요 없어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종교에서 신화나 기적같은 요소들을 없애 버린다면 종교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하나의 새로운 종교를 만들기 위해 활동했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왜 종교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억지와 무리를 해야 합니까. 종교가 인간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 인간이 종교를 위해 헌신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종교를 위한 종교의 존재이유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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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과학이 자기네 기독교 대신 불교를 선택하고 서로 상생의 길을 열어가고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인 인과법과 인연법에서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과학적 연구방법이 바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원인과 결과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는 조건들의 영향을 검증하는 것 또한 과학이 하는 주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같은 토양에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과나 상대성보다는 무조건과 절대성을 강조하는 기독교와 서양과학은 근본적으로 갈등과 반목을 낳을 수밖에 없지 않았나 생각된다.
따라서 기독교는 과학의 힘이 커질수록 상대적으로 비과학적으로 전락하는 자신들의 교리를 정치적·조직적 힘과 사회적 이슈로써 유지하려는 현상을 보이는 것 같다. 반면에 동양과 서양이라는 서로 다른 토양에서 성장했지만 조건과 상대성, 인과관계를 똑같이 강조하는 불교와 서양과학의 만남은 처음부터 궁합이 맞았고 그 결과 불교과학, 과학불교를 만들어가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뇌과학과 불교의 만남
그러면 이제 우리는 여기서 뇌과학과 불교라는 것이 어떤 분야인지 대충 짐작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뇌과학과 불교는 뇌과학자가 불교를 만나서, 뇌과학적 관점에서 불교의 가르침을 배우고 연구증명하고 활용하는 방식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
뇌과학자들에 의해서 드러나고 있는 불교의 모습은 그동안 서양 철학자들에 의해서 사유적·철학적 방식으로 소개되었던 불교의 모습과는 아주 다르다.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역시 불교에 대한 그들의 과학적·실증적 접근방식을 들 수 있겠다. 예를 들면 지금 미국에서 불교가 서서히, 그렇지만 앞으로 가장 확고하게 받아들여지고 구축되어가고 있는 대표적 분야인 서양의 심리치료가들은 명상수행이 심리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실제 환자들을 상대로 한 치료결과를 통해서 꾸준히 연구해 왔으며 그 결과 이제는 기정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한편 인간의 뇌의 구조와 기능 등과 관련된 연구에 종사해온 뇌과학자들의 일부는 불교의 명상수행이 어떤 뇌 부위와 기능에 변화를 가져오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오고 있다.
요약하자면 뇌과학과 불교의 만남은 불교의 명상수행이 우리들의 뇌의 어떤 부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변화를 주는지 연구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일단 명상수행이 뇌의 어느 부분에 영향을 미치는지 확인이 되면 명상수행이 우리들의 신체와 마음에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와 영향을 줄 수 있는지는 곧바로 확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간단한 예를 들면, 신경과학자 리처드 데이빗슨(Richard Davidson)은 우리가 분노하거나 우울하거나 몸이 굳을 정도로 공포를 느끼는 상태에서는 우리 뇌의 전두엽피질(prefrontal cortex)의 우측부위가 활발하게 작용하는 반면, 행복하고 희망적이고 쾌활한 마음상태에 있을 때는 전두엽피질의 좌측 부위가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시 말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좌측 전두엽피질이 주로 작용하고, 기분이 나쁠 때는 우측 전두엽피질이 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일 우리가 부정적 정서상태를 유발하는 우측 전두엽피질의 작용을 억제하고 긍정적 정서상태를 유발하는 좌측 전두엽피질의 작용을 더 높일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그만큼 더 행복해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심리적·신체적 질병도 줄어들 것이고 소위 말하는 웰빙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방법이 실제로 있는가 하는 점이다. 어떤 방법으로 전두엽피질의 작용을 조절해서 좌측 전두엽피질의 기능은 강화시키고 우측 전두엽피질의 기능은 약화시킬 수 있는가? 데이빗슨은 그 방법을 명상수행에서 찾았다. 그는 명상수행이 우측 전두엽피질의 작용을 좌측 전두엽피질의 작용으로 전환시킴으로써 분노, 우울, 불안 등의 부정적·심리적 상태를 행복, 희망, 쾌활 등 긍정적 심리상태로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했고 이는 곧바로 정신치료에서 긍정심리학의 탄생과 발전에 공헌했다(다음호에서 논의). 뿐만 아니라 또 다른 학자들은 명상수행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대뇌의 인슐라(Insula)나, 감각피질(Sensory Cortex), 전두엽피질이 더 두껍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요약하면 명상수행은 뇌를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뇌과학은 불교의 명상수행이 분노, 우울, 불안 등의 부정적 심리상태를 행복, 희망, 즐거움 등의 긍정적 심리상태로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킴으로써 대뇌의 전두엽피질의 작용과 구조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리고 명상수행을 오래 할수록 그만큼 더 행복하고 희망적이고 즐거운 삶, 즉 웰빙을 실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뇌기능의 변화를 통해서 입증했다.
서광 스님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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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은 서광스님 글에 있네요..미신적 불교에서 벗어나....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고통에서 해방되는 길을 제시해 주는 불교가 된다면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까? 절대자(신)에게 비는 것도 한계에 도달합니다...일이 잘되면 좋으나 안될 때는 신을 의심하게 된다는 것이죠...불교 수행은 하면 할 수록 편안해지는 공부 아닙니까?
첫댓글 옛날 이발관을 하던 분이 ..손님이 줄어들어..현대식으로 바꾸고보니..수입이 좋아졌다고 방송에 나오더군요..불교도 복잡한 법당좀 산뜻하게 정리하고. 의식도 간소화 했으면 합니다. (젤로 싫은게 발디딜 틈도 없는 좁은 법당에서 앞사람 궁딩이에 머리 박으며 절하는기 싫더라ㅎㅎ )
타이완 불교 처럼 의자에 앉아서 스님 법문 들었으면 좋겠구요. 지금처럼 하다간 젊은 불자들 안 옵니다. 하지만 자애명상쪽은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위빠사나 말입니다. 심리치료가 없다면 종교가 아니지요.
이런 좋은 글만 올리시는 일행님은 사성과안에 드신 게 틀림없습니다....()......
사성과라니요? 번뇌사성과?에 머물고 있답니다.^^ 글 수정해 주시오면 고맙겠습니다~
학점이 짠 교수님이 있고요, 학점이 후한 교수님도 있습니다.
부처님의 학점은 어땠을까요?
열가지 족쇄 중에 유신견, 계금취견, 疑(부처님 법에 대한 의심)
이 세가지를 벗어나기만 해도 예류자라 하셨습니다.
유신견은 자아가 있다는 견해입니다...
자아가 없다를 완전히 깨달으면 해탈이겠지요.
유신견은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라 단지 견해입니다...
견해는 수행없이도 가능한 상태이지요,
계금취견, 의도 견해일 따름입니다.
불교에 대해 바른 견해만 가져도 예류자에 속하는 것이지요....^^
부처님은 학점에 넉넉하신 분이라 사료되옵니다....
불교가..(동양쪽) 망자천도나 하는 동안...불교 수행은 어디다 빼았겼는지 아십니까? ...불자들을 수행으로 유혹하는 곳들입니다..
붓다를 힌두신의 화신으로 묘사한 것을 그대로 묵과한 것은 심각한 문제였는데, 이는 불교에서 이런 흐름을 암묵적으로 용인하였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반면, 자이나교의 경우는 힌두교가 자이나교의 마하비라를 비쉬누의 화신이라고 제시하자, 비쉬누의 화신들이 보여준 비도덕적인 행위를 비난하면서 람과 크리쉬나를 자이나교의 법을 따르는 자이나교의 세속적인 영웅으로 묘사하는 완전히 새로운 버전의 라마야나와 마하바르타를 만들었다. 24 대 티르탕카라 반열에 올랐다..더 기발한 곳은 전세계인이 유대족으로부터 퍼졌다는 기독교이다.오직 유대족만 알고 기독교가 퍼지기전의 그외 나라민족은 전혀 몰랐던 웃기는 창조 신화소설
불교 경전에도 범천등이 붓다께 귀의 했다..이렇게 나오긴 하다만...9번째 화신설을 오히려 인도에서 인정 받았다고 좋아하는 무리들이 있으니..그속내나 알고 있는지.? 지옥으로 이끄는 부다로 되어있지 않은가? 암튼 불교는 스폰지여..뭐든 받아드려, 팔억의 경전이 나와도 "여시아문"만 있으면 받아드릴 불교의 불자들란 것이다...
결국..동양권(대승불교)는 힌두교식대로 따라가고 있었으니..대승불교는 힌두교에 먹히고 말았다는 것.반면 상좌부 불교는 힌두교에서 벗어났는가? 천만이다~ 윤회설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으니..겉모양만 불교이고 속내는 힌두교적이라고 봐야한다..그러나 이젠 알아야 한다.윤회설로 인간을 구속하던 시대는 지나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