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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의 의도를 잘 읽었느냐, 순서를 제대로 파악하였느냐가 사건 해결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우리 앞에는 모든 단서가 주어져 있습니다. 절단된 시체, 두 채의 잠긴 집, 범인이 찍히지 않은 CCTV, 804호의 완강기, 그리고 흙. 이 조각들을 하나씩 끼워 맞춰봅시다. 거기 준비됐어요?”
주민회의실에서 무전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설화 옆에 앉은 의형사는 잡음 때문에 귀가 아팠지만, 탐정의 추리를 듣기 위해 참았다. 탐정과 형사, 그리고 경비원과 주민, 7명의 인물이 함께 모여 나란히 놓인 3개의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하나는 404호, 하나는 804호, 하나는 아파트 뒤의 풍경을 찍는 캠코더의 화면이 전송된다. 노트북 화면은 선명한 LED 소재를 사용했지만, 캠코더를 든 사람이 흔들면서 걸었기 때문에 화면을 보는 누구도 그런 느낌은 받지 못했다. 설화는 3개의 화면을 모두 확인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범인은 피해자의 몸을 절단했습니다. 어째서 그랬을까요? 이유가 심리에 있다면 저는 모릅니다. 범죄심리학자가 아니라서요. 다만 이유가 범행에 있다면 탐정으로서 말해드릴 수 있어요. 시체는 100kg의 상당한 무게였고 404호에서 804호로 옮겼다는 점에서 시체의 무게를 나누기 위해 절단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는 여러분도 다 아실 겁니다. 범인이 어떻게 범행을 저질렀는지 범행 시뮬레이션을 통해 직접 보여 드리겠습니다. 범인은 손을 들어주세요.”
탐정의 지시에 따라 804호 거실에 서 있는 흰 티를 입은 남자가 장갑을 낀 손을 들었다.
“저분이 범인역입니다. 804호는 흙을 보여주세요.”
화면은 심하게 요동치더니 거실에서 창고로 이동했다. 현장 조사했을 때 텅 비어있었던 그곳에 주황색 쌀포대 7개가 놓여있다. 모두 똑같지는 않고 저마다 부피가 다르다. 아까 손을 들었던 남자가 다시 화면에 나타나 포대 중 가까운 하나를 열었다. 안에는 쌀 대신 흙이 들어있다.
“범인은 범행에 앞서 804호로 정원의 흙을 옮겼습니다. 총 무게 100kg을 넘는 어마어마한 양이죠. 심리상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계단을 이용하거나 어디에 담아 몰래 가져갔겠죠. 그리고 404호 곁에 흙이 담긴 포대 하나를 숨겨 놓았습니다. 먼저 보신 804호의 흙은 무게추의 역할을 하고 404호의 흙은 범인 무게를 조절하는 역할을 합니다. 어떻게 쓰이는지는 곧 알려드리겠습니다. 세 번째 화면을 보시면 104호 앞 정원에 구덩이가 생겼습니다.”
맨 오른쪽에 있는 노트북 화면에 운석이 떨어져 생긴 것 같은 깊게 팬 구덩이가 나타났다.
“범인은 404호에 이동할 때까지 지시한 대로 움직여주세요.”
다시 맨 왼쪽 화면에서 남자는 6개의 와이어를 창고 쪽 창문 밖에 있는 완강기 설치금구의 구멍에 끼워 밖으로 꺼내 404호 창문까지 닿게 늘여놓았다. 그리고 804호를 나와 (804호 현관문은 열려있음) 8층 방화문의 계단 쪽을 잠그고 계단을 통해 404호 문 앞에 도착했다. 그의 손에는 804호에서 가지고 온 식칼과 톱, 그리고 빈 포댓자루와 소주병이 들려있다.
“이것으로 8층은 밀폐되었습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기죠. 범인은 엘리베이터를 쓰지 않았는데 어떻게 방화문 반대쪽을 잠갔는가? 저는 많은 생각을 해봤지만, 방화문에 어찌해볼 방도가 없었습니다. 방화문 자체에 틈이 없으므로 실을 이용한다든가 이런 수법은 일절 통하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방화문은 한쪽을 잠그고 어떻게든 반대편으로 가서 직접 잠그는 수밖에 없습니다. 범인은 계속 진행해주세요.”
남자는 가지고 온 물품을 문 곁에 두고 404호 현관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고 턱수염을 기른 다른 남자가 나왔다. 실제로 사용한 소주병 대신 다짜고짜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어 피해자역인 남자의 머리를 내리치는 시늉을 했다. 모두의 시선은 중앙 노트북 화면으로 옮겨졌다. 피해자는 현관문 곁에서 푹 쓰러지고 그 모습을 본 범인은 물품을 거실에 두고 문밖으로 나와서 방화문 곁에 놓아둔 주황색 쌀포대를 끌고 다시 돌아왔다. 현관문을 잠그고 그것을 창고로 옮겨 부엌에서 손수레를 가지고 나와 피해자를 얹히고 그 위에 거실에 둔 흉기와 포댓자루를 놓아 그대로 화장실로 옮기고 손수레는 문밖에 두었다. 캠코더는 화장실 안을 찍지 않았지만, 그 안에서 어떤 참혹한 일이 있었는지는 상상에 맡긴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손수레 위에 피해자 대신 내용물이 채워진 흰색 포댓자루들 (시체)과 씻은 흉기를 놓았다. 시체를 한 포대씩 창고로 옮기고 모두가 숨죽이는 가운데 창문 밖에 있는 와이어의 끝을 안으로 꺼내 한쪽의 6개는 시체를 다른 한쪽은 6개의 줄을 한데 모아 자신의 허리에 묶고 범인 무게 조절용 포대 안에 흉기들을 꽂고 잠가 손잡이를 만들어 어깨에 맺다.
“설마”
화면에 몰입하던 의형사는 무의식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그의 예상에 배신하지 않는 상황은 이러했다. 시체 조각을 하나씩 밖으로 꺼내고 하나를 남겼을 때 창가로 올라가 마지막 조각을 꺼내면서 빠르게 창문을 닫았다. 이윽고 시체 조각이 지상으로 추락하면서 동시에 범인과 무게 조절용 포대는 위로 상승했다. 이건 마치…….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해 계단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804호로 이동했습니다. 지상과 404호 사이와 404호와 804호 사이의 높이가 똑같아서 가능한 트릭입니다. 이렇게 하면 더 무거운 시체는 바닥에 떨어지고 시체보다 무거운 범인은 804호에 들어옵니다. 저 무게 조절용 포대는 시체무게와 범인의 무게 차이를 줄이기 위해 사용합니다. 무게 차이가 클수록 가속도가 증가하니, (범인의 가속도=[무게 차이/두 사람+무게 맞춤 포대의 총합 무게]*중력가속도 ※공기저항을 고려해 더 감소) 무게 조절을 안 하면 범인이 죽을 수도 있었겠죠. 상황을 보시면 범인이 804호에 들어왔으니 이제 시체를 804호로 옮길 차례입니다. 이 경우는 전처럼 더 무거운 물체를 매달 필요가 없습니다. 시체는 나뉘어 있으니 하나씩 옮기면 됩니다.”
804호를 찍던 캠코더가 남자의 손을 확대했다. 그는 허리를 연결한 와이어를 풀고 804호에 두었던 흙더미의 무게를 맞춰 각각 지상에 있는 시체 조각과 맞교환을 했다. 물론 이때는 흙더미의 무게가 시체의 무게보다 무겁다. 이리하여 흙더미는 바닥에 놓이고 시체는 804호로 올라왔다. 시체와 와이어를 분리해 시체를 거실에 놓고 무게 조절용 포대에서 흉기를 꺼내 부엌에서 씻어 그 곁에 두었다. 대신 시체를 담았던 포대를 넣었다. 잠그지 않은 8층 방화문과 804호 현관문을 잠그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제 범인이 퇴장할 순서입니다. 자신이 나갈 때 무게추로 흙더미를 다시 활용하되 역시 자신의 무게와 비슷하게 조절합니다.”
고민하던 그는 다리 한쪽을 담당했을 포대를 연결한 와이어를 놓았다. 나머지 와이어는 자신의 허리에 묶고 다시 무게 조절용 포대를 맨 채 창문을 닫으며 뛰어내렸다. 이번에는 범인이 흙더미보다 더 무겁다. 남자는 추락하고 흙더미는 상승한다. 지상에 도착한 후 무게 조절용 포대를 놓고 허리를 묶은 와이어를 풀었다. 반대편은 아무것도 매달지 않았기에 흙더미는 빠른 속력으로 떨어져 구덩이에 착지했다. 804호에는 시체가 지상에는 범인과 흙더미가 남았다.
“이 트릭을 이용하는데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흙 위에는 범인의 발자국과 그동안 지상에 떨어진 물체들이 남긴 흔적이 남습니다. 그리고 범인은 정문을 이용하지 않고 건물 내부로 들어가야 합니다. 여기서는 범인이 흙을 채취하고 파놓은 구덩이를 활용해야 하는 겁니다. 보시다시피 구덩이는 물건이 추락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거기에 사용한 범행 물품을 버리고 구덩이 가장자리부터 흙덩이를 담은 포대를 뜯어 구덩이를 메웁니다. 이로써 단서와 추락흔적, 발자국이 사라졌습니다. 일을 다 마치면 미리 열어 놓은 창문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오면 범행은 완료됩니다. 이 범행이 가능한 사람은 단 한 사람뿐입니다. 104호에 사시는 연식씨, 당신이 범인입니다.”
탐정의 손가락은 날렵하게 공기를 갈라 연식을 가리켰다. 당사자는 땀이 비 오듯 쏟아지며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 그는 보는 사람이 쉽게 알 수 있을 정도로 당황하고 있다.
“경찰분들께 부탁해서 정원에 묻어둔 당신이 사용한 범행 물품을 모두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장갑 안쪽에서 지문이 검출됐는데 과학수사팀이 당신의 지문이 필요하다고 요청하셨습니다. 제출하시겠습니까?”
“거의 비슷하게 추리하셨군. 그럴 필요 없어. 내가 인호씨를 죽였어.”
범인의 자백은 과자부스러기같이 푸석하고 메마른 느낌이었다. 연식은 스스로 의형사에게 팔을 내밀었고 그는 익숙한 동작으로 부드럽게 죄인의 팔에 수갑을 채웠다. 쇠줄의 찰랑거리는 소리가 주민회의실 안을 채웠다. 모두가 조용히 그의 비참한 모습을 지켜보는데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가온 중기가 떨리는 손으로 수갑을 찬 손을 쥐었다. 그리고 가슴을 파고드는 질문.
“어째서 그런 짓을……. 그렇게 인호씨가 미웠습니까?”
“모르겠어. 내가 어떻게 이런 짓을 했는지……. 인호씨와 말다툼을 한 순간부터 나 자신을 잃어버린 느낌이야. 인호씨가 직업 얘기를 꺼내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어. 내가 요즘 분식집 일이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자기 안정된 직장이랑 비교하면서 조롱했지. 내 정신은 비참할 정도로 나약해서 버텨내지 못하고 찢어져 버렸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피웅덩이와 조각난 인호씨의 몸과 그것을 바라보는 두려움에 떠는 자신이 남았을 뿐. 난 이제 할 말이 없네.”
말을 마치고 의형사에게 이끌려 문으로 걸어갔다. 그의 얼굴은 빛을 받아 증오로 얼룩진 악의를 비추었다. 인호를 무참하게 난도질을 할 때도 저런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연식는 진정한 진실을 보여주었을까. 일순간 머리에 빛나는 어떤 불안감이 설화의 머리에 제동을 걸었다.
“잠깐만요.”
그들이 문을 열고 밖으로 발을 딛으려는데, 설화의 맑은 목소리가 멈춰 세웠다. 이제 사건이 끝났구나 하고 안심하고 있던 주민이 다시 긴장자세로 설화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의심하고 있다. 그의 악의를 제대로 밝혀냈는가. 진정한 진실에 당도했는가. 이러한 질문에 스스로 해답을 내었다. 주홍색 실타래는 아직 풀리지 않았다.
“왜? 범인을 잡았고 범행이 다 밝혀졌고 동기도 있잖아. 그만 좀 가자.”
의형사는 빨리 연식을 이송하고 청에 돌아가 쉬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건을 해결해준 설화에게 고마움이 있었지만, 이 순간에 밀물에 휩쓸리듯 씻겨나갔다. 그런 마음을 알 리 없는 설화는 눈을 감고 자신만의 시간을 가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연식의 얼굴이 시간이 흐를수록 창백해졌다. 그의 곁에 의형사는 그가 가진 두려움을 읽어냈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백을 한 사람이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가족이 없어서 가족의 안일을 걱정할 필요도 없을뿐더러 법의 심판이라는 단어를 언급했을 때 태연히 받아들이는 태도였는데.
“형사님, 자백까지 했잖아요. 빨리 연행하시라고요.”
재촉하는 연식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의형사는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탐정이 눈을 뜰 때까지 연행은 잠시 보류하겠습니다. 아니면 숨겨둔 진실을 먼저 밝히시던가요.”
“숨겨둔 진실 같은 거 없다고요. 젠장”
일말의 외침을 뒤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지된 시간 속에 연식에게만 시간이 허락된듯했다. 연식은 의형사의 팔을 뿌리치고 몸체를 공중에 띄워 테이블 위에 착지했다. 의형사의 시선이 테이블 위로 이동했을 때, 연식은 테이블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동하는 방향의 끝에는 눈치채지 못하고 추리 중인 설화가 있다. 그녀의 고도의 집중력이 도리어 올가미가 되어 목을 죄었다. 그녀가 가까워질수록 인호를 죽음으로 이끈 그것이 되살아나 증폭하다 못해 폭주한다. 손에 닿을 거리에서 그것이 이끄는 데로 수갑이 묶인 두 손을 활짝 펴 작은 머리를 향해 뻗었다. 하지만 상대는 강력계 형사였다. 범인이 달려가면 형사는 날아가고 범인이 칼을 던지면 형사는 볼링공을 던진다. 연식을 따라잡을 수 없을 거란 판단에 의형사는 실해 보이는 테이블 다리에 발차기를 먹였다. 예전에 도박장을 습격할 때 쇠방망이를 맞아본 다리는 나무쯤이야 아픔도 없었다. 나무다리는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부서지고 테이블이 기울어져 중심을 잃은 연식은 뒤로 넘어졌다. 미끄럼틀이 된 테이블의 표면으로 내려온 연식은 다시 의형사의 곁으로 돌아왔다.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정신이 깬 설화가 신경질적으로 윽박질렀다.
“아 쫌 머리 굴리고 있으면 조용히 해주세요. 그리고 멀쩡한 테이블은 왜 부셔요?”
“아 미안미안. 그건 그렇고 머리 굴린 결과를 말해주실까? 탐정?”
급격히 기분이 좋아진 설화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절 탐정으로 인정해주시는군요. 인정해주신 보답으로 추리를 알려드리죠. 아까 연식씨가 말한 동기는 거짓입니다. 당신은 인호씨에게 악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악의가 없다고? 그럼 왜 죽인 거냐.”
의형사의 물음에 설화는 바닥에 누워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연식을 돌아보았다.
“의형사님은 경찰에게 정원을 더 파내라고 지시를 내리세요. 그곳에 보물보다 진귀한 진실이 묻혀있습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이 있듯이 경찰인력 10명이 포크레인 없이 정원의 절반을 파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추운 날씨와 싸우며 열심히 파낸 결과, 10명 중에 가장 나이 어린 감식반원이 약 2m 아래에서 두 구의 얼어있는 시체를 발견했다. 인호의 시신을 확인한 검시관이 연락을 받고 급히 돌아와 시신을 분석했다. 두 시신은 0도에 가까운 땅속에 비닐로 포장된 채 묻혀있었기 때문에 부패가 일어나지 않아 형태는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다. 그냥 일반인이 보기에도 영락없는 초등학생 소녀의 시신이었기에 설화는 차마 시체검시에 참여하지 않았다. 주민회의실에서 기다리는 그녀 대신에 의형사가 검시관의 의견을 듣고 전달해주었다.
“둘은 친자매인 것으로 확인했고 나이 차이는 1~2살밖에 안 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 언니 쪽은 가슴에 충격을 받았지만, 직접적인 사인은 심장마비, 뒤통수의 외상과 머리카락에 붙은 아스팔트 조각을 고려해보면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본다. 그리고 동생 쪽은 외상은 없고 목이 죄인 흔적, 두피와 목의 청색증, 속옷에 실금의 흔적을 보아 액살이다.”
설화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이렇게 된 거군요. 연식씨가 언니를 뺑소니로 치고 그걸 지켜보는 동생을 목 졸라 살해, 시신을 여기로 데리고 와 유기. 연식씨가 굳이 여기서 유기한 이유는 이 아파트가 철거예정이기 때문이죠. 무너진 아파트로 진실을 영원히 감추기 위해서. 하지만 인호씨가 그 사실을 알아버렸고 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경찰이 수사 중에 증거 수집을 위해 정원을 파헤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것만은 피해야 할 연식씨는 인호씨 살인사건의 증거물을 정원에 파묻었습니다. 초등학생 시체가 묻혀있다는 것을 모르는 경찰이 증거물을 발견하게 되면 더는 정원을 파헤치지 않을 테니까. 연식의 측면에서 걸리더라도 초등학생을 죽인 것보다 인호씨를 죽인 것을 걸린 게 더 형량이 낮다는 계산이 있었습니다. 초등학생 대상의 교통사고와 살인, 그리고 시체유기와 성인 대상의 살인과 시체손괴를 비교할 필요도 없겠죠. 그리고 초등학생 실종사건은 영원히 미궁 속으로 빠져버리는 겁니다.”
의형사는 하마터면 시체를 놓칠 뻔한 자신에게 자조했다. 이번이 두 번째 패배였다. 그때 바지 호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청에 있는 동료에게 한 달 전에 근방에서 발생한 실종사건을 조사시켰더니 벌써 마친 모양이다. 설화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알아냈대요?”
다시 휴대폰을 호주머니에 넣었을 때 설화가 물었다. 의형사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20km 떨어진 ㅇㅇ지역에서 초등학생 자매 실종사건이 있었다. 근처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담당한 수색대는 엄한 대를 조사하고 있었나 봐.”
“아마 연식씨도 산에 유기할 생각은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땅이 녹으면 부패냄새가 퍼져서 쉽게 들킬 것이고 토사가 이동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현명한 방법은 아닙니다.”
“그건 그렇고 넌 어떻게 범인이 시체를 유기한 걸 알아낸 거야?”
설화는 문제풀이를 설명하듯이 술술이 읊었다.
“404호를 조사했을 때 인호씨 방에서 일에 관련된 물건 말고도 낚시 관련 물품이 심심치 않게 보였어요. 낚싯대를 5대나 보유할 정도면 취미가 낚시라는 것이죠. 그리고 여기 정원을 살펴보는데 시체가 발견된 지점 근처에 이게 떨어져 있었습니다.”
라며 들어 보인 건 비닐랩 속에 두 번 접힌 흙 묻은 모자였다. 분명 현장에 들어오기 전에 현장 물건을 맘대로 손대지 말라고 했지만 용서하기로 한다. 설화는 이어서 설명을 계속했다.
“안쪽에 이니셜로 I.H가 적혀있는 걸 보아 모자의 주인은 인호씨입니다. 안에는 모자에 빠져나오지 못하고 말라죽은 지렁이의 사체가 들어있었는데 추측건대 인호씨는 어떤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원에 들어왔다가 지렁이를 발견합니다. 수지맞은 그는 수집한 지렁이를 모자에 넣어서 가져가려고 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모자를 내버려둔 채 그냥 가버렸습니다. 저 같은 사람에게 지렁이는 하찮은 존재이지만 낚시꾼에게는 황금같이 귀중한 존재임에 도요.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인호씨는 여기서 지렁이를 구하려고 흙을 파다가 뭔가를 발견했는데 그것이 모자와 지렁이를 잊어버릴 만큼 귀하거나 충격적이라고요. 그것과 사건을 연결해보면 두 가지 중 하나는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어요. 하나는 그것이 누군가 숨겨둔 고액의 돈다발이나 귀금품이어서 인호씨가 발견한 장면을 목격한 범인이 뺏기 위해 죽였다. 또 하나는 범죄자가 숨겨둔 범행의 단서나 시신을 인호씨가 발견했기 때문에 진실 은폐를 위해 죽였다.”
“그럼 뭐야? 피해자는 고작 지렁이 때문에 죽었다는 거야.”
의형사가 진지한 얼굴로 그런 말을 하니 옆에 듣고 있는 설화는 웃음이 터져서 시원하게 소녀답지 않은 웃음소리를 냈다.
“나비효과이론이란 게 있잖아요. 결과에 비해 원인이 아주 하찮을 수도 있고 아주 장대할 수도 있는 거죠. 그래서 동기는 어렵고 광범위해요. 지금도 수십 권의 추리소설이 나오는 이유는 우리가 아직 범죄의 원인이라는 세계를 파악하지 못해서죠. 인생을 연구에 바친 범죄분석학자조차도 발만 담갔을 뿐이에요. 이 세계가 완전히 밝혀지기 전에는 진실을 찾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지렁이 말인데요. 지렁이는 사람 목숨을 잃게 한 대신 범인을 잡을 단서를 제공했으니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에요. 범인이 흙을 사용했단 단서가 없었다면 트릭을 밝혀내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밝혀내지 않더라도 범인은 스스로 자백할 생각이었으니 이긴 맛이 없어서 조금 씁쓸합니다.”
끝말은 씁쓸한 기분이 묻어났다. 의형사는 가만히 탐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기분을 풀어주었다. 그로부터 이틀 뒤, 설화는 자기 반에서 친구들과 선생님 험담을 하고 있는데 대기를 진동하고 굉장한 굉음이 유리창을 넘어 그녀의 말을 먹었다. 설화를 포함한 모든 학생이 굉음이 일어난 붕괴한 아파트를 향해 시선을 집중할 때 설화는 생각했다. 그 소리는 흙 속에서 묻힐 뻔한 진실의 우렁찬 감사인사이리라.
첫댓글 와이어액션이 답이었네요. 히이 어째 나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냐ㅠㅠ
잘 봤어요ㅎㅎㅎ
부실한 부분이 있지만 읽어줘서 고마워요. 머릿속에 든 생각을 글로 옮기는 게 어렵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