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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에 읽어보는 고려사
고려사 - 64. 개혁의 실패와 고려의 몰락1
고려 31대 왕으로 즉위한 공민왕은 충숙왕의 둘째 아들이며, 공원왕후 홍씨의 소생으로 폭군 충혜왕의 동복동생이었습니다.
처음 이름을 기라 하였고 나중에 전으로 고쳤던 공민왕의 몽골식 이름은 백안첩목아였습니다. 1330년 5월에 태어난 그는 강릉대군으로 봉해졌으며, 1341년 원나라 황제 순제의 입조 요구에 따라 12세부터 줄곧 연경에서 생활해 왔습니다.
이렇게 연경에서 생활해 오던 강릉대군은 1344년 조카 충목왕이 즉위하면서 강릉부원대군으로 고쳐 봉해지고, 1348년 12월에 충목왕이 12세의 어린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신하들은 그를 다음 왕위에 잇도록 추대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원나라가 충정왕을 내세움에 따라 이것은 성사되지 못했습니다만, 충정왕이 나이가 어려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여 정치가 불안해지고 사회가 혼란해지자 다시 원나라에서 충정왕을 폐하고 그를 31대 왕으로 봉하게 되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22세의 한창 나이였습니다.
공민왕이 즉위할 무렵 나라 안팎은 매우 어수선 했습니다.
우선 나라 안으로는 약 100여 년간의 원나라 직간접적인 지배를 받는 동안 고려는 한때 대등한 관계에 있었던 대외 관계가 이 시기를 전후하여 크게 실추되었습니다.
곧, 자주성과 주체성을 상실한 채 그저 원나라의 직간접적으로 간섭을 받는 사실상 원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충목왕 - 충정왕으로 이어지는 어린 왕들이 대거 즉위하지만, 특히 충정왕대의 불안한 정정은 나라 안팎으로 큰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나라 밖으로는 한때 세계에서 가장 넓고 큰 영역을 자랑했던 원나라가 내부의 권력 투쟁과 사회 불안으로 인해 국력이 급속도로 쇠약해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홍건적이라는 대도적의 출현은 이러한 원나라의 몰락을 가속화 하는 일종의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나라 안팎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무척 어수선한 가운데 공민왕은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강력한 개혁 정책을 추진하여 국가 기강을 바로 잡는 한편, 적극적인 배원정책을 추진하여 상실되고 실추된 자주성을 회복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개혁의 실패와 고려의 몰락 2
공민왕이 즉위할 무렵의 고려와 그 주변의 사정은 매우 좋지 못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특히 원나라의 쇠퇴와 신흥 대국 명나라의 대두는 고려가 100여년 동안 지속되어 왔던 원나라의 간섭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이러한 나라 안팎의 주변 정세를 감지하고 있었던 공민왕은 밖으로는 원나라의 간섭을 철저히 배격하여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는 한편, 안으로는 어려움에 빠진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강력한 개혁 정책을 추진하여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공민왕의 개혁은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되는데, 그 하나가 바로 이번에 이야기할 고려의 자주성 및 주권의 회복이고, 다른 하나는 신돈이 등장하여 그에 의해 추진되는 개혁이지만, 신돈의 전횡을 우려한 공민왕에 의해 제거되고 다시 친정에 임하게 되나 왕비 노국공주의 급작스런 죽음은 그의 개혁 의지를 크게 상실시켜 개혁의 좌절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이번 회에서는 공민왕이 추진했던 개혁 정치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는데,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1) 왕권의 강화, (2) 신돈의 개혁정치 (3) 실추된 자주성의 수복 - 영토 회복 순 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1351년에 즉위한 공민왕은 그해 12월에 고려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352년 2월부터 그는 전격적으로 개혁 작업을 추진하기 시작하여 2월 1일에는 무신정권의 최이가 처음 설치하여 지속적으로 운영해 오던 인사행정 기구인 정방을 폐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방을 폐지한 그 다음날인 2월 2일, 그는 자신의 개혁 구상을 언급한 개혁 교서를 발표하여 토지와 노비에 관한 제반 문제를 해결할 것을 명하게 됩니다. 그의 이 정책은 뒷날 신돈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대토지 및 노비 관련 개혁으로도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다음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352년 8월에 그는 다음과 같이 교서를 내려 자신의 친정 의지를 더욱 강하게 피력하는데, 사서에 기록된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옛날에 임금들은 일심전력하여 나라를 다스릴 때 그 나라를 보존하기 위해 반드시 친히 국가의 정무를 봄으로써 자신의 견문을 넓히고 하부의 실정도 알게 되었으니, 지금이 바로 그렇게 할 때다. 첨의사, 감찰사, 전법사, 개성부, 선군도관은 모두 판결송사에 대하여 5일에 한번씩 (짐에게) 계를 올리도록 하라.
무신정권 이후 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했으며, 특히 원나라의 간섭 때에는 겨우 서무에 대한 결재권만 되찾아 놓은 상태였기에 이와 같은 공민왕의 친정 의지는 곧 왕권을 더욱 더 강화시키기 위한 조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친정의지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각 부서의 중요한 안건은 자신이 직접 챙기며 관계와 민생 전반에 대한 자신의 통치 기반을 더욱 다지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공민왕의 친정체제 구축작업은 무신정권 이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던 정치토론장인 서연제도를 부활시킴으로서 더욱 구체화 되었습니다. 서연은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학문 및 정치를 토론하고 의논하는 자리로서 고려시대에는 서연이라 불리웠던 것이 조선시대에는 경연이라 하였고, 세자의 경우를 서연이라 하였습니다.
어쨌든 공민왕은 그해 8월 서연에 나아가 원로와 사대부들이 교대로 경서와 사기, 예법 등을 강의할 것을 명하였고, 이 자리에서 전답과 가옥, 노비와 억울한 죄수 문제를 시급히 해결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아울러 첨의사와 감찰사를 왕의 눈과 귀로 규정하고 정치의 옳고 그름을 위해 백성들의 이해 관계에 대한 기탄없는 보고도 당부하였습니다. 이러한 공민왕의 뜻에 따라 부정을 저지른 인당, 성사달등 고급 관리들이 대거 파면, 하옥하는 한편, 풍기 문란한 생활을 한 사람들을 대거 색출해 냄으로서 관리들의 기강을 비로잡고 풍기를 바로 잡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이렇게 공민왕의 왕권 강화와 그에 따른 개혁 정치에 위기를 느낀 조일신 등이 정변을 일으켜 공민왕을 위협하게 됩니다.
고려사 - 66. 개혁의 실패와 고려의 몰락 3
1352년 9월 공민왕이 과감하게 추진하고 있던 개혁정치에 대해 당시 기득권을 쥐고 있던 조일신, 정천기, 최화상, 장승량 등은 크게 이러한 공민왕의 정치에 크게 두려워한 나머지 기원과 최덕림 등을 제거하고 정변을 일으키게 됩니다.
정변에 성공한 조일신은 공민왕을 위협하여 자신을 우정승에 앉히도록 하고 자신들의 측근들을 대거 요직에 발탁시킵니다.
하지만 여기에 만족 못한 조일신은 다시 자신과 함께 거사를 감행했던 최화상, 장승량 등을 죽이고 정권을 혼자 맡게 되었는데요. 이때 조일신은 좌정승으로 승격되어 판군부감찰을 겸직하며 찬화 안사공신이라는 호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일신에 위세에 눌릴 공민왕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위세와 전횡에 제거할 마음을 품고 그를 제거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정동행성에서 대신들과 의논한 뒤 김첨수라는 사람을 시켜 조일신을 연행하고 제거하는 데 성공합니다. 조일신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 공민왕은 그에게 협력했던 측근 및 도당 28명을 붙잡아 모두 유배보내고 왕권을 회복하는 데 성공합니다.
조일신을 제거하고 왕권을 회복한 공민왕은 이제현을 우정승으로, 조익청을 좌정승으로 발탁하여 명실공히 개혁정권을 수립, 자신이 의도한 바에 따라 개혁 작업을 추진하게 됩니다.
이러한 공민왕의 개혁 작업은 당시 몰락해가는 원나라와 새로 등장하는 명나라의 등장과 맞물려 더더욱 순탄하게 이루어 집니다.
고려사 - 67. 개혁의 실패와 고려의 몰락 4
자신의 개혁에 대해 반발하는 조일신 세력의 거센 저항을 뿌리치고 가까스로 왕권을 회복한 공민왕은 이제현, 조익청등을 요직에 기용하여 본격적인 개혁 작업에 들어가게 됩니다.
특히 공민왕의 정치개혁은 이 당시 급변하는 주변 정세와도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즉, 원나라가 극심한 정쟁과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속에 몰락해 가고 있었던 가운데, 홍건적의 우두머리 가운데 하나인 주원장이 이끄는 신 세력이 점점 크게 세력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원나라의 쇠퇴와 몰락을 접하던 공민왕은 본격적으로 원의 압력에서 벗어나 실추된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반원 정책과 정치 개혁을 함께 추진하게 됩니다.
우선, 1352년 고려의 옛 풍속으로 회복하기 위해 원나라가 그동안 반 강제적으로 착용하도록 한 변발과 호복 등의 몽골 풍속을 전격 폐지하였습니다.
또한 1356년에는 지속적으로 사용해 오던 원나라의 연호를 폐지하는 한편, 원의 간섭으로 격하되거나 폐지되었던 관제를 문종대의 제도에 맞춰 복구하도록 하는 동시에 일본 정벌을 목적으로 설치되었으나 정벌이 실패로 끝나면서 고려의 내정 간섭 기관으로 전락해 버린정동행중서성 이문소를 철폐하였습니다.
이러한 공민왕의 반원 정책에 대해 원나라 순제 기황후의 오라비이자 대표적인 친원파인 기철 등이 반발하는 움직임을 보이게 되자 공민왕은 원나라 왕실에 의존하여 권세를 부리고 있던 기철과 그 일당들을 모조리 숙청하게 되는데, 이 숙청은 원나라 조정에 알려져 훗날 원나라 군대의 침입을 초래하는 한 원인이 됩니다. 하지만, 이성계, 최영 등의 활약에 힘입어 원나라 군대는 격퇴되었습니다.
앞서 이성계를 말씀드렸습니다만, 공민왕대 개혁 정책 및 영토 회복에 있어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과 이성계의 도움은 공민왕에 있어서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자춘과 이성계의 도움을 받은 공민왕은 원나라 복속 이후 1백년간이나 존속해 왔던 쌍성총관부를 폐지하는 한편, 동시에 원나라에 빼앗겼던 서북면 및 동북면 일대의 영토도 차츰 회복하게 됩니다.
이밖에도 공민왕은 보우를 왕사로 삼아 불교의 선 사상을 장려하는 등 침체된불교의 중흥을 도모하고자 하였는데, 이것은 태조의 유지를 받드는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문종시대의 태평성세를 재현해 보기 위한 공민왕의 노력이었습니다. 아울러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던 유학자 관료들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인 판단에서도 비롯된 일이었습니다.
한편, 동북면 및 서북면 영토의 탈환에 만족하지 못한 공민왕은 평리 인당이라는 사람과 밀직사사 강중경이라는 사람을 파견하여 압록강 건너 파파부 등 세 곳의 원나라 수비대를 격파하는 전과를 올리게 됩니다.
이러한 공민왕의 배원정책과 실추된 자주성 회복에 반발하던 원나라는 고려에 온갖 협박과 회유를 병행하게 됩니다만, 공민왕은 이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서북면 일대의 여, 원 충돌로 인당이 전사하는 등 한때 어려움에 빠지기도 했던 고려는 1356년 7월 동북면 병마사 유인우가 쌍성총관부를 함락시키고, 고종 말년 이래로 원나라에 빼앗겼던 함주 이북의 땅을 수복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에 당황한 원나라는 쌍성과 삼살 이북에 대한 자유로운 왕래를 요청했으나, 고려는 원래 고려의 땅이었다는 점을 들어 사실상 거부 하였습니다.
이렇게 공민왕은 반원 정책과 실추된 자주성을 통해 고려의 국력을 회복하는 데 성공하지만, 그 과정에서 숱한 시련을 겪게 됩니다.
고려사 - 68. 개혁의 실패와 고려의 몰락 5
공민왕의 반원정책과 맞물려 추진되던 내정개혁은 실추되었던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기점으로 공민왕은 강력한 반원 정책과 함께 한때 원에 의해 상실된 동녕부 및 쌍성 총관부등 우리의 옛 영역을 수복하는 개가를 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중국 하북성 일대에서 발생한 농민 종교 반란 집단인 홍건적들의 고려 침입으로 공민왕의 개혁 정책은 다소 주춤거리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홍건적의 침입으로 어려움에 부딪힌 고려는 반원정책에서 후퇴 다시 원과의 화해를 통한 유대관계 강화를 통해 친원 정책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그때 홍건적들은 더더욱 세력을 확대 1355년에는 국호를 송이라 하는 한편, 허난성 및 산시성 등지로 세력을 확대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만주 지역으로 북진, 급기야 요동까지 점령하여 원나라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원나라의 반격에 쫓기게 되자 방향을 돌려 고려로 쳐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홍건적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친원 정책으로 일시 전환한 고려에서는 1357년에 김득배를 서북면흥두군왜적방어도지휘사로 삼아 그들의 침입에 대비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홍건적은 1359년 모거경이 이끄는 4만의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밀려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홍건적들의 침입에 밀려 고려는 한때 철주와 서경이 함락되는 등 한동안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러다 1360년 2월, 2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그들을 압록강 이북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 홍건적의 1차 침입 -
그러나 홍건적은 여기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홍건적들은 해로를 통해 풍주, 봉주, 황주, 안주 등의 해안 지방 백성들을 괴롭히게 되었으며, 그리고 급기야 1361년 10월 반성, 사유, 관선생, 주원수 등이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대대적으로 쳐들어오게 됩니다.
이것이 홍건적의 2차 침입으로 수도인 개경마저 함락되기에 이르렀고, 이에 공민왕은 경기도 광주를 거쳐 경상도 안동으로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362년 1월, 고려군 20만이 적장 관선생과 사유 등을 죽이고 개경을 회복한 후 홍건적을 다시 압록강 이북으로 몰아냄으로서 고려는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홍건적의 두 번에 걸친 침입으로 개경의 궁성이 완전히 불타 없어졌고, 각 도의 문화재와 사찰마저 불타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어 공민왕은 한동안 죽주, 진천 등에서 행궁생활을 전전해야만 했습니다.
또한 홍건적의 침입은 그동안 추진해 왔던 반원 개혁 정치를 한동안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즉, 홍건적들에 맞서 원과의 연합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고려에서 반원 정책을 포기하고, 1361년에 개혁 정책으로 폐지된 바 있던 정동행성을 다시 복구하였으며 이듬해에는 관제마저도 개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홍건적의 침입으로 무장들의 입지를 강화시켜 공민왕 초기에 어렵게 복구했던 문신 중용 정책이 퇴조되는 경향을 보이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최영, 이성계 등 무장들이 대거 정계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게 됩니다.
홍건적의 침입의 후유증이 미처 복구되기 전에 이번에는 다시 내란으로 인해 고려는 또한번 어려움을 겪습니다. 바로 김용의 반란과 최유의 덕흥군 추대 음모가 그것이었습니다.
고려사 - 69. 개혁의 실패와 고려의 몰락 6
홍건적의 피해가 극심하여 미처 복구되지 못한 상황에서 왕이 개경에 입성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고려는 엎친데 덮친 격으로 1363년 윤 3월에 찬성사로 있던 김용이 일으킨 모반으로 인해 또 한번 위기를 겪게 되었습니다.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남으로 피신해 있던 공민왕이 개경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흥왕사라는 절에서 발생한 이 사건으로 내관 안도치가 왕을 대신하여 목숨을 잃었고, 판전교지사 김한룡 및 우정승 홍언박도 반란군의 칼에 맞아 목숨을 잃었습니다.
특히 공민왕은 거의 살해되기 일보 직전의 상황에 까지 놓여 있었으나 앞서 말씀드린 내관 안도치의 희생으로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한때 공민왕의 목숨을 위협하던 반란군은 곧 변란 소식을 듣고 달려온 최영과 오인택 등에 의해 제압되었습니다만, 주모자 김용은 이때 술책을 부려 한동안 목숨을 유지하며 1등 공신까지 올랐다가 나중에 이르러 그 전모가 드러나게 되자 처형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김용의 난을 진압한 것을 계기로 최영, 오인택 등 무장 세력들이 대거 중앙 정계의 실세로 등장하게 되었고, 한때 홍건적의 침입 당시 많은 활약을 보였던 이성계 또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최영과 오인택 등의 활약에 힘입어 겨우 목숨을 건진 공민왕이 채 숨을 돌리기도 전에 이번에는 공민왕의 기철 일당 숙청에 앙심을 품고 있던 원나라 순제의 황후 기씨의 사주를 받은 최유가 덕흥군 왕혜를 받들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포위하게 됩니다. 이때가 1364년 1월의 일이었습니다.
최유는 군사 1만을 이끌고 의주를 함락하고, 그 여세를 몰아 다시 선주라는 곳에 머물며 진을 치게 됩니다. 하지만, 김용의 난 평정 이후 중앙 정계의 실세로 등장하고 있던 최영과 이성계 등의 활약에 힘입어 최유는 침략 보름 만에 압록강을 넘어 원나라로 도망하였다가 그 해 10월 원나라 군사에 의해 포박되어 고려로 압송, 다음 달인 11월에 처형되었습니다.
하지만 고려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1365년 정월 밀직부사 김유라는 사람을 원나라에 보내 덕흥군을 고려로 보낼 것을 요구하나, 원나라 측에서는 덕흥군의 병을 핑계로 고려의 요구를 사실상 거절하였습니다.
고려사 - 70. 개혁의 실패와 고려의 몰락 7
홍건적의 침입과 끊임없이 계속된 잇단 내란으로 인하여 한동안 개혁 노선을 후퇴한 채 친원 정책을 통해 주변 정세를 관망하던 공민왕은 1367년 농민 반란군의 지도자였던 주원장에 의해 명(明) 이 들어서자 몰락해 가던 원나라를 버리고 명나라와 새로이 외교 관계를 맺습니다.
이후 명나라의 연호 사용부터 모든 국가적 큰 일은 명나라의 승인을 받는 등, 철저하게 친명 정책으로 일관합니다. 그리고 한동안 계속되는 혼란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개혁정치를 재차 시도하게 되었는데,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승려 신돈이었습니다.
이제현 등에 의해 공민왕 초기의 개혁 작업이 주도되었다면 공민왕 집권 후반기의 개혁 작업은 이 신돈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신돈은 이후 개혁주의자라는 이미지보다는 사대부 세력들에 의해 엄청난 비판과 평가 절하 속에 요승, 왕위를 도둑질 한 반역자, 혹은 나라의 일들을 어지럽히는 데 앞장섰던 간신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그것은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후손, 즉 신우와 신창으로 각인시켜 이들로 인해 고려가 망하고 새로운 왕조 조선이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는 조선왕조의 성립을 합리화하고자 했던 조선 개국 세력의 의도적인 역사 왜곡 작업의 하나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 왜곡 작업으로 인해 신돈은 조선시대 때 편찬된 고려사 열전에도 간신/반역 열전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이후 조선시대 내내 이러한 부정적 이미지만 견지된 채 오늘날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신돈의 부모가 누구였는지는 기록에도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아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다만, 그의 어머니가 계성현 옥천사라는 절의 노비였다는 이야기만 전해오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이유에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아주 어린 시절에 절에 맡겨져 양육되었다고 하며, 그것이 곧 출가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고려사 열전에 그의 본관이 영산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아버지가 영산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으나, 그의 속세 이름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출가 이후 그는 편조라는 법명을 얻었고, 요공이라는 자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후 공민왕을 만난 다음부터는 청한거사라는 법호를 얻게 됩니다.
그가 처음으로 공민왕과 인연을 맺게 된 시기는 1358년의 일이었습니다. 당시에 공민왕의 개혁을 주도하던 이제현은 건강을 이유로 물러날 것을 허락받아 이미 관계에서 물러난 상태였고, 공민왕은 왕사 보우 (조선 중기 승려 보우와 동명이인의 승려)를 통해 불교에 깊이 심취되어 있었습니다.
공민왕이 이때 불교에 심취되어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로 의미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유교를 기본 정치 이념으로 확립한 이후 유학자 중심의 관료 체제로부터 여러 가지로 강한 압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공민왕 이전의 역대 임금들은 여기에서 벗어나고자 불교를 통하여 그들을 나름대로 견제하고자 했던 것이죠. 문종을 비롯하여 흔히 고려시대의 역대 임금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정치적 방편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공민왕에게 신돈을 소개해 준 인물은 바로 김원명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신돈을 처음 접한 공민왕은 그에게 매료되었고, 그래서 그를 곧잘 찾았다고 합니다. 이를 시기한 관료들은
'앞으로 나라를 어지럽힐 자는 반드시 중 (신돈을 지칭)이 될 것이다'
라고 비난하는가 하면, 심지어 홍건적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운 정세운과 같은 장수들은 신돈을 요승이라 하여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이 생각하는 바는 달랐습니다. 공민왕은 신돈을 통하여 자신이 추진하고 있던 개혁정책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고자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김용의 모반이 일어나고 김용의 계략에 의해 정세운을 비롯한 왕의 측근 신료들이 죽음을 당했을 때 공민왕은 신돈을 다시 찾았습니다. 김용의 모반과 공민왕 주변 신하들의 곱지 않았던 시선을 피해 한 동안 떠돌이 행각승으로 전국을 유람하던 신돈은 1364년 공민왕의 부름을 받고 입궐하여 공민왕의 개혁 정책을 주도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