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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오싱 여행18 - 난정에서 강을 건너 서법 박물관에 입장해서 왕희지와 사안을 만나다!
10월 19일 사오싱(소흥) 에서 3로 버스로 란팅 蘭亭(난정) 을 찾아 鹅池碑亭(압지비정)
을 보고 鹅池(압지) 를 지나 蘭亭碑亭 (난정비정) 에서 청나라 강희제 가 썼다는
“蘭亭(난정)”글씨를 구경하고는.... 書聖(서성) 이라 불리는 왕희지 의 사당인
왕우군사 (王右軍祠) 에서 중국에서 가장 크다는 높이 7미터에 달하는 비석을 봅니다.
바로 御碑亭(어비정) 이니 석비 앞면에는 "강희제가 쓴 난정집서”가 그리고 뒷면에
"건륭제가 쓴 난정집서”가 새겨져 있으니..... 왕희지 의 초상과 글씨며
난정집서를 보고는 墨池(묵지) 를 지나 안압지 와 같은 유상정 (流觴亭) 을
구경하고는 다시 蘭亭碑林(난정비림) 을 거쳐 강을 건너서 도자기 전시관 을 봅니다.
왼쪽에 강을 끼고는 산길을 걸어서 난정서법박물관 (蘭亭書法博物館) 으로 들어가니
내부에는 거위 가 노니는 모습이며.... 鹅池(압지) 와 蘭亭(난정) 등 비석과
曲水流觴(곡수유상) 이며 御碑亭(어비정) 에 여기 4계절 모습등 사진이 많이 보입니다.
그러고는 王羲之 (왕희지) 를 비록하여 선비 들이 여기 蘭亭 (난정) 에 와서는
술잔을 들고 노닐며 시를 짓고 글씨 를 쓰는 그런 풍류에 속하는 옛
그림들이 많이 보이니 바로 " 蘭亭序(난정서)에 나오는 41명의 문인" 인가 합니다?
아는 사람 이름이 먼저 보이는 법이니 낭야왕우 "謝安(사안)" 이라는 사람이 보이는데
동진(東晉) 시대 진군(陳郡) 양하(陽夏) 사람으로 자는 안석(安石)이니 젊어서 명망이
높았고 행서(行書) 를 잘 썼지만 세상에 뜻이 없어 발탁을 받고도 나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회계(會稽)에서 은둔생활 하면서 왕희지(王羲之) 와 허순(許詢), 지둔(支遁)
과 교유하며 자연의 풍류를 즐기다가 마흔이 넘은 중년에야 비로소 중앙 정계에
투신하니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환온(桓溫) 의 휘하에서 사마(司馬) 로 활약 합니다.
사안 은 효무제(孝武帝) 때 중서감(中書監) 과 녹상서사를 지냈으며 이부상서(吏部尙書)
로 진급한후 제위를 찬탈하려는 환온의 야망을 저지 했으며 환온이 죽은 뒤에
재상 이 되었는데 당시 전진(前秦) 이 강성해져 동진(東晉) 의 군대가 연달아 패했습니다.
383년 화북을 통일한 전진왕(前秦王) 부견(苻堅) 이 100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비수(淝水) 에 주둔하니 위세가 강동일대에 진동했는데... 사안은 정토대도독
(征討大都督) 이 되어 동생 사석(謝石), 조카 사현(謝玄) 과 함께 강력하게
방어하는 작전을 지휘해서 결국 대승을 거두고는 건창현공(建昌縣公) 에 봉해집니다.
동생 사석에게 북정(北征) 을 지시해 낙양(洛陽)과 청주(靑州), 연주(兗州) 를 수복하고
양주(揚州) 와 형주(荊州) 등 15주(州) 군사(軍事) 를 맡았으나 왕족인 회계왕(會稽王)
사마도자(司馬道子)에게 배척을 당해 외직으로 나가 광릉(廣陵)을 지키다가 병사 했습니다.
제가 사안(謝安) 을 안다고 한 것은 고구려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 비수대전 (淝水大戰)
주인공 이기 때문이니... 오호십육국시대(五胡十六國時代)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
383년 동진(東晉) 을 공격 했다가 비수(淝水) 에서 동진의 재상 사안 의 지시를
받은 조카 사현(謝玄)에게 패배했기 때문에 모용수가 후연을 건국 할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삼국지 이후 위나라를 계승한 사마씨의 진나라 는 골육상잔으로 흉노족 에게 망하고
강남으로 달아나니 동진(東晉) 인데, 중원은 흉노족의 조나라가 망한후
저족의 전진 과 선비족(鮮卑族) 모용씨(慕容氏) 의 전연(前燕) 이
강성했으니 전연은 342년 고구려를 공격해 수도 환도성(국내성)을 함락 시킵니다.
고국원왕은 단기(單騎)로 산속으로 달아났지만 모용황은 궁궐을 불사르고 도성을 파괴한후
미천왕릉(美川王陵) 을 발굴해 시신과 왕모(王母)와 왕비에 도성 백성 대부분인 5만명과
노획한 보물들을 연나라로 끌고가니 고구려는 수도를 동황성(東黃城 강계) 으로 옮깁니다!
지금도 한국에서 서울 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만 1700년 전에는 수도의 비중이 지금보다
훨씬 커서 나라의 절반 이라 일컬어지는데... 수도가 함락되고 도성의 백성 대부부이
포로가 되어 연나라로 끌려갔으니 나라가 망한거나 진배없는지라... 고국원왕 은
왕제(王弟) 를 연나라(전연)에 보내어 항복 하니 정동대장군 영주자사 낙랑공에 책봉됩니다.
고구려 수도 는 그 전에도 함락된 적이 있으니 244년 고구려 동천왕은 2만 병력으로 비류수
에서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 과 대진해 6천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고 추격하다가
역습을 당해 대패해 1천명만 고구려로 도망쳤는데 관구검은 추격해 환도성(국내성)
을 점령하니 왕이 낙랑으로 도망치는지라 관구검은 숙신까지 진격해 기공비를 세웠습니다.
한족인 왕맹(王猛)을 재상으로 등용한 전진(前秦)의 부견(符堅) 은 동쪽의 전연(前燕),
남쪽의 양(梁), 북쪽의 대(代), 서쪽의 전량(前凉) 을 거두고 376년 화북을
통일한후 강남의 동진(東晉) 마저 복속시켜 중국을 통일 하기 위해 남정(南征)
하려하자 왕맹은 전연(前燕) 에서 항복한 모용수(慕容垂) 부터 경계하라고 진언합니다.
동진(東晉) 은 전진(前秦) 의 침략에 대비해 재상 사안(謝安) 이 조카 사현을 광릉(廣陵)
에 배치하니 양주(揚州), 예주(豫州), 서주(徐州), 청주(靑州) 의 군사권을 쥐고
북부병(北府兵) 병사들을 훈련시키니 휘하에 유뇌지(劉牢之), 하겸 등 맹장이 있었습니다.
부견 은 378년 4월 부비(符丕)에게 7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동진의 양양(襄陽)을 공격하게
명하고는 10만의 병력을 추가하여 3방향으로 양양 을 침공해 1년만에 함락시킨후
광릉(廣陵)을 압박했으나 동진의 사안(謝安)이 건강(남경) 에서 방어하고 명을 받은
사현이 5만의 북부병 을 거느리고 반격에 나서 전진을 상대로 4전(戰) 4승(勝) 을 거둡니다.
이에 부견 이 대병을 일으키자 동생등 신하들이 반대하는 가운데 오직 모용수만이 찬성하자
힘을 얻은 부견은 남정하니 383년 5월 소식을 접한 동진 은 먼저 행동을 일으켜 환충
(桓沖) 에게 10만의 병력으로 양양을 공격하게 하고 양량(楊亮) 은 촉을 공격하게 합니다.
전진 은 8월에 부견의 동생 부융과 모용수 등에게 25만의 병사를 주어 선봉으로 삼고
부견 자신은 직접 보병 60만, 기병 27만명을 지휘해 도합 100만이라 불리는
대군을 이끌고 장안(長安)을 출발했으나 실제 전선에 도달한건 절반 정도 라고 봅니다.
동진 은 사석을 대도독으로 임명하고 사현을 선봉으로 삼아 8만 병력으로 3방향에서 전진을
견제하는데... 10월 부융이 수춘(壽春)을 함락 시키고 양성의 군은 낙안에 주둔하자
11월 유뇌지 가 정병 5천을 이끌고 낙안을 기습하여 전진군을 격파 하고 양성을 죽였습니다.
동진군이 비수(淝水) 에 이르자 부견의 본진도 수춘에 도착해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니
사석 은 동진군이 강을 건널테니 전진군이 방해하지 말아달라하자 부견은 적을 유인해
격파할 욕심으로 전진군을 뒤로 물리니 병사들은 후퇴하는데, 주서 가 진영을 돌면서
아군이 패배했다고 거짓 선전하고 동진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진짜로 도주하게 됩니다.
군대는 삽시간에 흩어졌고 부견은 모용수의 보호를 받으며 12월 장안으로 귀환했으며
동진 은 전투 승리를 호기로 삼아 북벌을 감행하여 황하 이남의 옛 국토를
되찾았으나, 사안(謝安) 의 사망 후에는 수세로 일관하는데..... 전진 은
대혼란에 빠지니 모용수는 384년 화북의 업(鄴) 에서 자립해 후연(後燕) 을 건국합니다.
모용충은 서연(西燕) 을 건국하였고 요장은 강족을 규합하여 후진(後秦) 을 세웠으며
여광(呂光) 은 간쑤성(甘肅) 에서 후량(後凉) 을 건국하였는데.....
부견 은 385년 7월 요장에게 붙잡혀 살해당했고 아들 부비가 뒤를 계승했으나
서연에 대패후 도망중에 동진군에게 죽었으며 386년 선비족 탁발규는 북위 를 세웁니다.
그전인 342년 고구려 는 선비족 전연의 공격으로 수도 환도성이 함락되고 단신으로
탈출한 고국원왕도 371년 평양에서 백제군에 전사해 위기를 맞지만 한해 전에
서쪽의 전연이 전진에 망하는 바람에... 고구려는 한숨을 돌려 국력을 기르게 됩니다.
예로 부터 국제관계는 遠交近攻(원교근공) 이 기본이니, 멀리 떨어진 전진과 고구려는
우호 관계를 맺고 반면에 가까운 거리인 전진과 연나라, 연나라와 고구려 는
전쟁 을 하는 것이니, 장안(서안)이 수도인 전진은 먼 고구려와 우호하면서 불교 를
전해주는데... 전연이 망하지 않았으면 이때 불교가 한반도에 전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전에 요하의 모용 선비 세력이 너무 크지자 동진의 평주자사 최비 는 고구려에 협공을
제안하니 미천왕은 319년 단선비, 우문선비 와 함께 모용 선비의 수도 극성 을
포위했는데.... "반간계" 에 걸려 우문선비를 의심한 고구려군이 후퇴 해버리자
홀로 남은 우문 선비를 격퇴한 모용 선비 는 동진의 평주 까지 거두어 세력이 크집니다.
337년 모용 선비의 모용황이 전연 을 건국하자 다음해인 338년 흉노 별종 갈족인 석호의
후조가 고구려 요동반도에 30만석 군량미 를 실어다 주며 후조 + 고구려 + 단선비 가
모용 선비를 협공 하자고 제안하고 극성을 포위했으나... 화공으로 후조군을 물리친
모용선비 는 4년후 보복으로 고구려를 공격해 수도 환도성(국내성)을 함락시켰던 것입니다!
391년 즉위한 광개토대왕 은 즉위하자마자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의 원수 를 갚는다며....
백제를 침략 해 백제 및 왜군과 싸우던 396년에 비수대전(淝水大戰) 결과 건국된
後燕(후연) 의 모용보 로 부터 "광개토대왕은 평주목 요동대방이군왕" 에 책봉 됩니다.
왜와 가야군이 신라를 침범해 서라벌을 포위하자 다급해진 내물왕은 노객이 되겠디며 원군을
청하니 광개토대왕은 399년에 5만 구원군 을 남진시켜 서라벌을 구원하고 아라가야와
금관가야 까지 추격했는데, 400년 2월 후연의 모용희 3만이 고구려를 공격해 신성과
남소성을 함락해 5천을 포로로 잡고 700리 땅을 차지하니... 남진한 고구려군은 철수합니다.
5년전인 395년 후연의 모용수는 태자 모용보 에게 8만을 주어 북위로 진격시키니 탁발규는
유인전술로 후퇴하다 11월 참합피에서 기습해 후연군을 격파하자 이듬해 모용수는 직접
대군을 이끌고 북위를 정벌하다가 참합피에서 병이 깊어져 죽으니... 모용보가 황제에
오르는데 북위는 396년 9월부터 후연으로 진격해 397년 10월 수도 중산을 함락해 차지합니다.
북위에 수도 중산 을 뺏긴 후연 은 연이어 반란이 일어나자 요하의 용성으로 후퇴해 북위와
공방전을 벌이던중 고구려 대군이 남진했다는 소식에...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고구려를
침략하니 광개토대왕은 병력이 없는지라 지원군을 보내지 못해 두 성이 함락된 것인데
가야에서 철수한후 후연에서 반란으로 황제 모용성이 죽자... 402년에 숙군성을 공격 합니다.
전진의 부견 이 383년 비수대전에서 강남의 사안(謝安) 일족에게 참패하지만 않았더라면
나라를 유지 했을테니 후연이 건국될수 없었고 고구려는 전진과 우호관계를 이용해
400년 고구려군 5만이 신라를 구원하고 왜군과 가야군 을 추격해 종발성(김해) 에
이르렀으니... 이때 "고구려에 의한 한반도 통일" 이 이루어 졌을 것이니 참 아쉽습니다?
역사에 만약이란게 없다지만 여기 사오싱(소흥) 난정에서 왕희지와 함께 곡상유수 를 하며
시를 짓고 놀았던 사안(謝安)이 끝내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유유자적 풍류만 즐겼으면
비수대전 이후에도 전진이 존속 했을 것이니 고구려에 의한 통일 이 이루어졌을텐데...
"이놈 사안아? 초야에 묻혀 시나 지을것이지 왜 재상의 자리로 나갔느냐?" 힐책해 봅니다!
사안(謝安) 외에 주인공 우장군 王羲之(왕희지) 에 전도항회 孫統(손통) 이 보이니 그는
동진(東晉) 태원(太原) 중도 사람으로 어릴때 남쪽으로 내려와 얽매임 없이 살았고
문장을 잘 지었으니 저부가 참군(參軍)에 임명했지만 나가지 않고 회계(會稽)에 살았습니다.
孫統(손통) 은 성격이 산수자연을 좋아하여 은령(鄞令)이 되었다가 오녕(吳寧)으로
전임(轉任) 했다고 하는데... 정치는 돌보지 않고 산수를 질탕하게 다니며
즐길뿐이었으니 풍류에 살았다고 할만한데, 이후 여요령(餘姚令) 을 지냈다고
하며 그외에 우사마 손작(孫綽) 과 영천 유우며 산기상시 희운등의 인물이 보입니다.
그러고는 마눌 이 뭔가 발견한듯 쪼르르 달려가더니... 기계 화면에 손가락 으로
글씨를 쓰는데 우리가 한자 서예 를 배울 때 가장 먼저
연습하는 글자인 길 영 “永” 자 인데..... 점수를 보자니 67점이 나옵니다.
해서 나도 다가가서 글씨를 썼는데 이런??? 60점이네요? 우이... 창피!!! 해서 다시 썼더니
65점이라.... 해서 한번 숨을 쉬고는 정성들여 다시 썼더니 이번에는 69점이
나오는데..... 계속 쓰면 좀 더 좋은 점수 가 나오겠지만 시간이 없으니 그만 돌아섭니다!
이어 넓은 전시장 을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돌아보는데, 깊은 산속에 사람들이
노니는 모습도 보이고.... 그 다음 벽에는“王氏 家族(왕씨 가족)”
이라고 적혔으니 아마도 王羲之(왕희지) 가문 의 족보 가 나올려나 봅니다?
그리고 이어 옆으로 걸어서 이동하니 거기에는 무슨 "극" 이 나오는데...
잠시 구경하다가 중국어를 모르니 이해하기 어려운지라가 옆으로 돌아갑니다.
"당태종 이세민" 도 보이고 그 옆 화면에는 여인 둘 이 무얼 받쳐들고 있는데....
머리 모양으로 보니 倭人(왜인?) 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닌가.... 중국인?
그 다음 장면에 황제와 신하가 서로 모인 가운데 난정집서 를 펼쳐 보이는데... 그러니까
저 황제는 틀림없이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 인 것이.... 그는 왕희지의
글씨 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죽을 때 진본을 자기 무덤에 순장품으로 매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지하로 내려가는데 여긴 아주 넓은 공간으로 유상곡수 (流觴曲水)를 하고
있는 거대한 조각품과 실제 유상곡수 놀이 를 하는 사진이 보이며 그 아래에는
방문객들이 붓글씨를 연습할 수 있는 책상에 종이와 벼루며 먹과 붓 이 놓여있습니다.
맞은편에 소년 소녀가 글씨를 쓰는 장면을 보고 위로 올라와 기념품점을 거쳐
밖으로 나와 걸어서 다시 강을 건너고 왕우군사 를 가로질러
란팅 蘭亭(난정) 입구에 도착해서는 3路 버스를 타고는 소흥 시내 로 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