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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5:1~9a)
오늘 본문은 명절 기간에 발생한 일이었어요. 1절에서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기록해요. 이때가 3-4월 일 것을 감안하면, 아마도 부림절이거나 유월절이었을 거예요.
이때는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요. 평소엔 10만 명 되는 예루살렘에, 100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어요. 한 주간 동안 거대한 축제의 불야성이 돼요. 모두 흥겨운 잔치를 즐기죠.
예수님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명절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3절을 보면 알게 돼요.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 몸이 아파 누워 있는 사람들로 들끓는 베데스다 연못으로 가셨어요.
명절을 기뻐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셨어요. 그들을 위해 명절의 잔치를 멈춘 것이죠. 명절이 더 외롭고 더 슬픈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잔치를 포기하셨어요.
이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 700년 전에 이미 예언되어 있었어요. 사 61:1절에서 말씀하세요.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오실 예수님의 관심이 누구에게 집중될 것이라고 하나요?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 된 자, 갇힌 자”에요. 예수님께서 성령 부음을 받는 이유도 무엇이라고 하나요? 능력 받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성공이 아니에요.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 된 자, 갇힌 자들”을 돕기 위해서라고 하세요.
사실이었어요. 이 말씀이 있고 나서 700년 뒤인 본문에서, 주님이 명절을 슬프게 보내는 베데스다 사람들에게 집중하세요. 명절이어서 아픈 곳이 더 아픈 베데스다 사람들을 찾아가셨어요.
그리고 나서 2천 여 년의 세월이 흘러 2018년이 되었어요. 그러나 세월은 흘러도 주님은 동일하시죠? 지금도 추석 명절을 아픔과 슬픔과 외로움으로 맞이하는 자들을 찾아가세요. 여러분과 저에게 집중하세요.
주님께서 마 12:20절에서 말씀하세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리라.” 갈대는 잡초이고 성가신 잡풀이에요. 게다가 상한 갈대가 되었다면 아예 쓸모없어요. 그런데 주님은 그것마저도 꺾지 않으신다고 하세요. 다시 싸매시고 고치세요.
꺼져가는 심지도 마찬가지죠. 그을음을 낼 뿐이에요. 쓸모없어요. 그런데, 주님은 그것마저도 끄지 않으세요. 다시 심지를 돋우세요. 다시 살리세요.
사람이든 짐승이든 약한 것들은 도태시켜요. 약육강식의 생존법칙이죠.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아요. 도리어 그들을 먼저 찾아가시고 돌보세요.
하나님이 겔 16:6b절에서 말씀하세요.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만신창이가 되었어도 살아 있기만 하라 하세요.
왜요? 겔 16:14b절에서 대답하세요. “내가 네게 입힌 영화로 네 화려함이 온전하여짐이라.” “피투성이가 되었다고, 나는 너희를 버리지 않을 것이니, 살아 있으라. 만신창이가 되었다고 망하게 하지 않을 것이니 살아 있으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이 말씀대로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피투성이였던 이스라엘 백성들, 이집트에서 430년 동안 피투성이였던 이스라엘을, 꺾지 않으시고 끄지 않으시고 살려 내셨어요. 피투성이 된 요셉, 만신창이 된 다윗과 다니엘을 꺾지 않으시고, 끄지 않으시고 살려 내셨어요. 영화(榮華)로 온전하게 하셨어요.
보름달 추석을 맞이하는 우리들 삶을 들여다보면, 쪼개진 반달 같고, 찌그러진 초승달, 기울어가는 그믐달 같아요.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 같아요. 피투성이 만신창이로 얼룩져 있어요. 베데스다 병동의 환자들이죠. 그래서 추석이 기쁘지만은 않아요.
그러나 기억합시다! 명절에 베데스다에 오신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주목하신다는 것을! 그런데, 명절날에 베데스다 아픔의 사람들에게 찾아오셔서 깨우치시는 교훈이 있어요.
1. “희망을 잃지 말라” 깨우치세요.
주님께서 베데스다에 가셔서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 누구인가요? 38년 환자에요. 가장 절망적인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에게 물어요. “네가 낫고자 하느냐?”(6c절) 이상하고 엉뚱한 질문이에요. 38년 동안 지긋지긋한 병으로 꼼짝도 못한 사람인데, 낫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요?
그런데 여기에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교훈의 핵심이 있어요. 당시 그 베데스다 못에는 전설이 있었어요. 이따금씩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그 연못물을 움직이는데, 그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든 낫는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믿거나 말거나 였지만, 38년 된 환자에게는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기였어요.
그래서 누군가에게 그 못까지만 옮겨달라고 부탁했고, 물이 움직일 때, 자신을 제일 먼저 넣어달라는 부탁도 했어요. 그 사람과 그를 데리고 가족이나 친구들은 희망찬 눈으로 연못을 주시하며 기다렸어요.
그러나 연못 물은 쉽게 동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가족과 친구들은 서서히 지치기 시작했죠. 한 명 두 명 떠나가기 시작했어요. 이젠 혼자만 남았어요.
이쯤 되면 포기하고 싶어져요. 베데스다 못에 있기는 하지만, 절망감으로 누워있기 쉽죠.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아예 모든 기대와 희망을 접고 누워 있기 쉽죠.
그래서 주님은 물어요. “네가 정말 낫기를 원하느냐?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사실 이 질문은 질문이 아니라 권면이고 격려에요. “희망을 가져라!”
장영희 교수를 아시죠? 선천성 1급 지체 장애자였어요. 그런데 유학까지 하고, 서강대 영문학 교수, 수필가, 번역가로 유명을 떨쳤죠. 2001년 이후 유방암, 척추암, 간암, 세 차례나 암 판정을 받고, 수술과 항암치료를 반복하다, 2009년 5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해요.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에서 이런 글을 남겨요. “아무리 운명이 뒤통수를 쳐서 살을 다 깎아먹고, 뼈만 남는다 해도 울지 마라. 기본만 있으면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살이 아프다고 징징거리는 시간에 차라리 뼈나 제대로 추려라. 그게 살길이다”
‘기본만 있으면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했는데 기본이 뭘까?’ 생각했어요. 두 가지인 것 같아요. 아프지만 지금 내게 남아 있는 건강이, 그 기본일 것 같고, 또 하나는 하나님일 것 같아요. 천주교 신자였기에 아마나 그 기본은 신앙이었을 거예요. 장 교수님은 그 기본을 챙겨서, 죽는 날 까지 희망 전도사로 살았어요.
많은 사람들은 몇 번의 실패나, 거듭된 실패로, 도전을 포기하고 살아요. 계속되는 질병으로 치료의 희망을 기대하지 않은 채 살아요. 자녀 때문에, 남편 때문에 수 년 동안 눈물로 매달렸는데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아서, 서로에게 아무런 기대감 없이 살아요.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무슨 희망을 가지냐고? 어차피 인생은 다 그런건데 뭘 그렇게 애쓰며 사냐고? 이젠 다 포기하고 다 잊어버리고 살자.“ 하기도 해요. 애써도 좌절과 상처만 생기니까요...
우리 중에 그런 분이 있다면, 38년 된 병자를 향하신 주님의 질문을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돼요.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네 가족이, 네 자녀가 정말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아직도 소망을 버리지 않았느냐?”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버렸던 희망을 다시 찾아와야 해요. 잃었던 소망을 다시 찾아 와야 해요. ‘이 또한 내 삶인데, 이 또한 내 길인데’ 끌어안으면서 희망을 지켜야 해요. 기본을 챙겨서 희망을 지켜내야 해요.
만절필동!(萬折必東), “강물이 일만 번을 꺾여 굽이쳐 흐르더라도 반드시 동쪽 바다로 흘러간다.”는 뜻이죠. 강물이 굽이굽이 가파른 골짝을 만나고, 위태로운 장애를 만나도, 마침내 바다로 흘러간다는 거예요. 지독한 가뭄 때에는 실핏줄으로라도 멈추지 않고 바다로 흘러가요.
우리는 세상 앞에 일만 번을 꺾여요. 마음이 꺾이고, 몸이 꺾이고, 삶이 꺾이고, 꿈이 꺾여요. 그러나 “필동”, “반드시 동쪽 바다, 나의 목적지”에 이를 것을 믿고, 희망으로 살아야 해요. 38년 된 환자가 꺾이고 꺾이는 삶이었지만, 그래도 베데스다를 떠나지 않은 것처럼, 희망의 자리에서 버텨야 해요.
그러면 “만절필금”(萬折必金), 만번을 꺾이고 꺾여도 반드시 정금되어 나와요. 재산이 꺾이고, 열 명의 자녀들이 꺾이고, 건강이 꺾이고, 아내와의 관계도 꺾이고, 친구들의 신뢰도 꺾였던 욥이 그랬어요. “내가 가는 길을 그(하나님)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소망해요.
2. “사람이 답이 아니고, 주님이 답이다.”를 깨우치세요.
주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실 때, 38년 된 환자가 이런 대답을 해요.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절)
측은하고 처절하게 들려요. “주님 나는 이 병에서 벗어나려고 이 연못가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데 물이 동할 때에 아무리 발버둥치고 애를 써도, 이미 누군가가 나보다 먼저 들어갑니다. 나를 넣어 줄 사람이 제 주위에는 전혀 없습니다. 친구들도, 가족들도 모두 떠났습니다. 그런데 저는 낫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렇게라도 버티고 누워 있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말씀하신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
사랑하는 여러분! 38년 된 병자는 그가 낫기 위해서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자신을 들어서 물속 에 넣어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 사람이 없어서 내 고통이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사람만 기다렸어요.
그런데 이 사람의 문제 해결자는 예수님이셨어요! 그러니까 정작 이 사람에게 필요한 분은 주님이셨는데... 이 사람에게 정작 중요한 분은 주님이셨는데... 지금껏 사람만 기대하고 사람만 기다렸어요.
여러분, 여러분의 문제해결을 위해,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나를 돕는 사람이 없어서 실패했다고 변명하시나요? 그런데, 본문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궁극적인 답을 주실 수 있는 분, 참된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은 주님 한 분 뿐이라고 하세요. 내게 그 어떤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할 때, 내 곁에 계실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임을 보여 주세요.
그러기에 우리는 다짐해야죠. ‘다른 사람을 기다리지 말자! 다른 것을 기대하지 말자! 그런 것들은 내가 의지할 대상이 아니다. 오직 주님만이 내가 의지할 대상이고 기다려야 할 대상이다. 주님을 기다리고 주님을 사모하자!“
그리고, 보세요. 38년 환자는 연못물에 들어가야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연못을 고집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몸에 물 한 방울도 묻히지 않고 고치셨어요. 생각지도 않은 방법으로 해결해 주셨죠. 오직 주님이 우리의 답이에요. 오직 주님이 우리의 살길이에요.
겔 37장에서 에스겔이 한 말이 생각나요. 하나님이 에스겔을 마른 뼈들이 가득 쌓인 곳으로 데리고 가셨어요. 죽음의 골짜기죠.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물으세요.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겔37:3a) 일고의 가치가 없는 질문이에요. 안 돼요. 불가능해요.
그런데 에스겔은 이렇게 대답해요.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겔37:3b)
안될게 뻔한데도 안된다고 속단하지 않고, “주께서 아시나이다.” 답해요.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아십니다. 그러니까 주님께 맡깁니다.” “나는 안 됩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 맡깁니다.”의 대답이었어요.
하나님은 깊고 깊은 우물과 같아요. 우리의 지식, 우리의 경험, 우리의 능력은 작은 두레박과 같아요. 내 것으로 하나님을 다 가늠할 수 없어요. 때문에 그저 고개 숙여 고백할 뿐이죠.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다 막혔어도 하나님만이 열어주실 길을 믿으면서 고백할 뿐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마쳐요. 명절에 주님의 눈길이 잔치에 있지 않으셨어요. 명절에 주님의 발길이 잔치에 있지 않으셨어요. 명절이 슬픈 사람들, 명절이 외로운 사람들, 명절이 괴로운 사람들에게 있었어요. 그리고 그들을 찾아가셨어요.
추석 명절을 앞둔 우리에게도 요 5장의 말씀으로 찾아오세요. 그리고 말씀하세요. “희망을 잃지 마라” “사람이 답이 아니고 주님이 답이다.” 우리를 깨우치시는 주님의 권면과 격려를 마음에 새깁시다!
그래서, 다시 힘내고, 다시 일어나고, 우리의 삶을 다시 주워 들고, 힘차게 걸어가는 삶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해요.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