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황 최석우신부 한국교회사연구소출판부 p182
문 교황의 계보는 40년 동안 계속된 ‘서구 대이교 (西歐大敎)’(1378~1417) 동안에 끊어진 것이 아닌가?
답 그렇지 않다. 교황의 현재의 계승이 로마계 또는 아비뇽계를 통하여 계속 이어졌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가들과 공식적인 바티칸 목록은 로마계 교황을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는 긴 기간에 걸친 ‘아비뇽 유수(幽囚)’를 끝내고 로마에 교황좌를 재건한지 거의 1년만인 1378년 3월 17일에 세상을 떠났다.
추기경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프랑스인들이 프랑스인을 교황으로 선출하며 다시금 아비용으로 교회청을 옮겨갈까 두려워한 로마의 민중들은 교황선거장 앞으로 몰려가서 로마인 교황 또는 최소한 이탈리아인 교황을 선출해 줄 것을 요구했다. 추기경들은 민중들의 요청을 전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지만 4월 8일에 바리의 대주교인 이탈리아인을 전원 일치로 선출했고, 그는 자신을 우르바노 6세로 명명하였다. 이선거는 매우 특수한 상황에서 행해졌을지라도 추기경들은 우르바노를 합법적인 교황으로 인정하고 있었음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들은 6명의 결석 추기경들에게 우르바노의 당선을 정식으로 통보했으며 또한 이들은 우르바노 교황과 함께 성주간 전례를 집전했으며 그에게 성직록(聖職錄)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해 8월 2일이 되자 추기경들은 우르바노를 선출한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우르바노는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부터 경솔하고 기이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는데, 공공연히 추기경들을 비방하는가 하면 한 추기경에게는 폭력을 행사하기까지 했다. 추기경들은 그들에게 교황을 폐위시킬 권한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오직 하나 가능한 길이 있다면 교회법에 협박을 받아 행해진 강압적인 교황선거는 무효라는 조항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추기경들은 우르바노의 선출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는데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르바노를 선출한 교황선거가 바로 문밖에서 시위하는 로마 민중들의 위협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모든 추기경들이 우르바노를 거부했으며 9월 20일에는 클레멘스 7세를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했다. 우르바노가 교황으로 선출된 후 처신을 좀 더 올바르게 했었다면 모든 사람이 그의 선출의 적법성 여부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두번째 선거를 치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클레멘스의 지위를 확고한 것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모든 추기경들의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상충되는 주장과 증언들이 오가는 사이에서 외부인들이 그 사건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한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국가들은 정치적 노선에 따라 각기 의견을 달리하게 되었다. 영국과 독일, 플랑드르 지방에서는 우르바노를 인정하는 반면에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스페인에서는 클레멘스를 인정했다. 신학자들, 교회법 학자들, 심지어 성인들까지도 국가적 노선에 따라 분열되였다.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는 우르바노를 지지한 반면에 성 빈첸시오 페레는 프랑스인인 클레멘스를 옹호했다.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모든 증거물들을 근거로 하여 일반적으로 우르바노 6세를 합법적인 교황으로 인정하고 있다. 우르바노의 뒤를 이어 보니파시오 9세, 인노첸시오 7세, 그레고리오 11세가 정당한 후계자로서 교황직을 이어나갔으며 클레멘스 7세의 뒤를 이어 베네딕토 13세, 알렉산델 5세, 요한 23세는 대립 교황이 되었다.
이 ‘대이교 (大離敎)’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이교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어느 쪽에서도 신앙의 일치나 교황의 수위권을 문제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누가 합법적인 교황인가를 결정짓는 문제였다. 1876년에 미국에서 헤이즈를 대통령으로 선출한데 대한 합법성 여부가 심각한 의심을 자아내게 되었다. 이 문제를 놓고 민주당과 공화당 간에 내란이 일어났다고 가정해 보자. 양쪽 편에서 다 누군가 진정한 대통령이 있다는 것은 인정했을 것이나 누가 합법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했을 것이다. ‘서구 대이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가톨릭 교도들은 누군가 진정한 교황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으나 누가 합법적으로 선출된 교황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교황직의 계승은 로마측 계보를 통해 끊어지는 일없이 이어졌으며 이 문제에 대한 모든 논의는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마르티노 5세 (1417 ~1431) 를 선출함으로써 종결지어졌다.
론칼리 추기경이 자신을 요한 23세로 명명한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이 선택으로 교회사상 요한 23세란 이름으로 재직한 합법적 교황이 없었음이 명백해졌다.
가톨릭 교도들은 이 수치스럽고 비극적인 대이교 사건을 기꺼이 인정하고 있다. 이는 교황직의 위신과 권위를 손상시켰으며 16세기에 일어난 반란의 불씨가 되기도 하였으나 그 반면에 이는 교황직이 신성하고 영구 불변의 것임을 밝혀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교황직이 단순히 인간이 만들어낸 지위에 불과했다면 이와 관련해서 발생한 그토록 큰 혼란의 와중에서 어떻게 그 직책이 지속될 수 있었겠는가?
* 부자와 당나귀 (따뜻한 편지 2324)
어느 아버지와 아들이 당나귀를 내다 팔기 위해 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마을을 지날 때 방물상이 그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당나귀를 타고 가면 될 걸 왜 안 타고 가시오.” 그 말이 옳다고 생각되자 아버지는 아들을 당나귀에 태우고 갔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가는데 한 노인이 화를 내면 말했습니다. “저런, 아버지는 힘들게 걷고 다니는데 젊은 아들은 당나귀를 타고 편하게 가다니.. 불효막심한 놈 같으니!”
그 소리에 아들이 내리고 이번에는 아버지가 당나귀 등에 올라탔습니다.
얼마쯤 더 가자 이번에는 우물 앞에서 물을 기르던 여인들이 말했습니다.
“왜 아버지가 당나귀에 타고 아들만 불쌍하게 걷게 만드는 거예요.”
이 말도 옳다고 생각해서 두 사람이 함께 당나귀를 타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본 한 무리의 사내가 나무라듯 말했습니다.
“조그만 당나귀에 두 사람씩이나 타다니 당나귀가 너무 불쌍하지도 않소.”
당나귀를 끌고 갈 수도, 두 사람이 다 탈 수도 없어 고심하던 부자는 결국 당나귀를 장대에 묶어 어깨에 메고 가기로 했습니다.
마을 입구의 다리 위에 이르렀을 때, 동네 아이들이 이 진귀한 구경거리에 몰려와서는 웃고 떠들었습니다. 놀란 당나귀가 발버둥을 쳤고 그만 장대가 부러지면서 당나귀는 다리 밑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처럼 비판은 누군가의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자신의 직관과 경험을 토대로 하는 판단입니다. 그렇기에 비판은 객관적이지 않으며 심지어는 그 사람의 감정에 따라 왜곡되기도 쉽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을 만족하게 할 수 없듯이 우리는 모든 비판의 소리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판단에 삶이 흔들리고 상처받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관을 가지고 나아갈 줄 알아야 합니다.
# 오늘의 명언
나에 대한 자신감을 잃으면 온 세상이 나의 적이 된다.
– 랄프 왈도 에머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