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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식(딤전1:12-16)
본문에는 바울의 자기 고백이 담겨 있어요. 바울을 위대한 사도가 되게 한 “바울의 자의식”을 확인할 수 있어요. 세 가지를 함께 나누려고 해요.
첫째, 〈죄에 대한 자의식〉이예요.
13a절에,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라 고백해요. 그러면 지금은 어떤가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15b절) 말해요. 바울은 “내가 죄인이었다.”과거지사로 끝내지 않아요, “내가 지금 죄인 중의 괴수이다.” 말해요.
무슨 큰 죄를 지어서가 아니었어요. 이미 대 사도가 되었을 때인데, 이미 수많은 자들을 전도한 때인데, 이런 고백을 한다는 게 놀라워요. 바울은 자신을 소개할 때, “죄에 대한 자의식”을 점점 심화시켜요.
회심하고 20년 후 쯤 인, 55년 경,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작은 사도다.”(고전15:9) 고백해요. 비교치가 사도인데, 그들 중에 가장 작은 자래요. 그리고 감옥에 갇힌, 61년 경, 엡 3:8절에서 고백해요. “나는 모든 성도 가운데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다.” 이번엔 비교치가 사도가 아닌 성도예요. 그리고 순교 직전 65년 경, 오늘 본문 15절에서는 “죄인 중에 괴수라.” 했어요.
믿음생활 하면 할수록, 헌신하면 할수록, 바울은 점점 더 죄인임을 고백해요. 은근히 내 죄를 합리화하고 묵살하는, 저하고는 참 많이 달라요. 내 죄에 대해 무덤덤하게 넘어가는 우리하고는 많이 달라요.
그런데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은, 예외 없이 이런 죄의식을 가졌어요.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임재를 만나는 순간 고백해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사6:5) 베드로도 주님을 처음 만날 때 고백해요.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 하나님을 만나니까 초음파로 속을 들여다 보 듯, 자신의 허물과 얼룩진 때가 적나라하게 다 보였던 거예요.
저는 바울의 고백, 이사야와 베드로의 고백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어요. ‘내가 아는 가장 큰 죄인이 나인 것을 인정 못하면, 나는 아직 하나님을 잘 모르는 것이고, 아직 나를 잘 모르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모두 의롭게 되었지요. 그러나 우리는 용서받는 죄인이지, 죄가 없는 의인은 아니에요. 그러므로 예수 믿는다고 죄의식을 버리지 않아야 해요. 하나님께 죄스런 마음으로 살아야 해요. 그런 자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채워져요. 그리고 그런 자가 믿음생활도 제대로 해요.
눅 15장의 유명한 탕자의 비유가 가장 좋은 예이죠. 아버지 유산을 탕진한 탕자가 집으로 돌아가면서 말해요.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눅15:19, 새번역) 아들로 받아달라고, 아들로 대접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아요.
왜 그랬나요? 18절에 답이 있어요.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눅15:18, 새번역) 죄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러자 아버지는 탕자를 품꾼이 아닌 아들로 받아들어요. 아들을 축복해요. 그리고 아들은 이후에 어떻게 살았을까요? 아들 노릇 제대로 하면서 살았을 거예요.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식이 더 겸손하고 더 효도하는 법이니까요.
바울도 그랬어요.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고백하고 살았기 때문에, 주님이 바울을 도우셨고, 바울은 주님을 위해 고생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아요. 당하는 것에 억울해 하지 않아요. 그 정도는 은혜이고 감사라고 생각했어요.
박완서 작가를 아시지요? 1988년에 남편을 암으로 잃어요. 그런데 석 달 뒤에 27살 난 막내아들도 잃어요. 서울 의대를 나와 서울대병원에서 레지던트로 근무하던 늦둥이 외아들이었어요.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하나님께 대 들면서 써 내려간 일기가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책으로 나왔어요.
그 책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기도시간에 산책을 하면서도 내가 하나님께 묻던 질문은 딱 한 가지였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이런 시련을 주시나? 하는 것이었다. 내가 하나님께 포악을 떨고 항거하던 이유는, 나는 그닥 죄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화장실 변기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응답이 들려왔다. 소화가 안 되어 변기에 무릎을 꿇고 다 토해내고 나자, 계시처럼 내 죄가 떠올랐다.
나는 내 가족 외에 타인에겐 철저하게 무관심했다. 그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 이 태산 같은 고통을 주신 것을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 뒤로 작가는 불평과 원망을 멈추고 평안을 찾게 되었고, 마침내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해요.
나는 이 정도면 무난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바울이 죄인 중의 괴수라면 우리도 괴수예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고백합시다!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 거기에 주님의 평안과 은총이 와요!
2. 바울은 〈은혜에 대한 자의식〉이 있었어요.
14절에서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고백해요. 주의 은혜가 과도하게 넘친다는 고백이에요.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바울에게 아무런 고통이 없어서가 아니에요. 시련이 있었고, 절망감도 있었어요. 그러나 받은 은혜가 더 크다고 생각했어요. 외로움이 있고, 상처가 있었어요. 그러나 은혜가 더 크다고 생각했어요. 나의 그 어떤 것을 갖다 댄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작다는 것이죠.
무슨 은혜인가요? 구원의 은혜에요. 우리가 “은혜 받았다.”고 말할 때는, 내가 준 것보다 받은 게 더 많을 때이죠. 이를테면 1000원 주고 10,000원 받을 때에요. 내가 지불한 것과 받은 것의 격차가 크면 클수록 큰 은혜가 돼요.
그렇기에, 이 세상에, 내가 구원받은 구원의 은혜보다, 더 큰 은혜는 없어요. 나는 아무것도 준 것이 없는데, 생명을 받았기 때문이죠. 나는 잠시도 한 것이 없는데, 영원을 받았기 때문이죠. 이것을 인정할 때, 바울처럼 ‘내가 과도하게 은혜 받은 자’라는 자의식이 생겨요.
정연희 작가가 쓴 「내 잔이 넘치나이다」 책이 있어요. 2017년에 출판된 책인데, 세종문화회관에서 오페라로 올려 지기도 했어요. 6.25전쟁 당시 거제도 중국군 포로수용소에서,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돌보다가 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아름다운 청년 맹의순 이야기에요.
맹의순을 봐 온 포로들은 이런 고백을 해요. 『선생은 하늘에서 보낸 천사였습니다. 마지막 환자를 다 씻기고 일어난 선생은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시편 23편을 우리말로 더듬더듬 읽어주셨습니다. 다 봉독하신 뒤 높은 곳을 바라보시며 다시 한 번 말씀하셨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맹의순은, 무슨 은총을 그리도 넘치게 받았기에 “내 잔이 넘치나이다.” 고백했을까요? 구원의 은총이예요! 포로수용소에서 그거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요.
여러분! 구원의 은총이 여러분에게 무겁게 느껴지나요? 크게 다가오나요? 혹, 작은 병도 견디지 못하는, 지푸라기 정도의 무게는 아닌가요? 작은 시련도 감당하지 못하는, 미세먼지 정도의 크기는 아닌가요?
바울에게는 치명적인 병이 있었죠. 몸을 찌르는 가시였어요.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고후 12;7절에서 “사탄의 사자”가 내게 있다고 했겠어요. 사람들에게 상처도 많이 받았어요. 유대인들에게 모함과 모욕을 받았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배신도 당했어요. 죽을 고비도 많았고, 감옥에 갇혀 사형수로도 살았어요.
그러나 삶을 포기한 적이 없어요. 원망하지도 않아요. 도대체 그 모든 것들을 견디고 감당할 만한 힘이 무엇 이었을까요? 구원의 은혜, 그 힘이었어요. 고전 15:10절에서 말해요.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똑같은 구원의 은혜였지만, 바울은 우리보다 더 무겁고 큰 은혜였어요. 그래서 무거운 삶의 무게를, 그 구원의 은혜로 견딜 수 있었어요. 장애물이 있어도 물이 더 크면 넘어가듯, 그 어떤 아픔보다, 은혜가 더 커서 아픔을 넘을 수 있었어요.
‘나는 어떤가?’ 돌아보았어요. 아픔과 시련 앞에서 내 구원의 은혜가 무력하고 헛된 은혜이지 않은지... 삶의 무게 앞에서 내 구원의 은혜가 맥 못 추는 헛된 은혜이지 않은지... 우리가 받은 은혜도 세상 앞에서 헛된 것이 아니기를 소망해요.
3. 바울은 〈사명에 대한 자의식〉이 있었어요.
12절에서,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고백해요. 바울은 직분을 맡은 사명자로 살아요. 그 사명을 구체적으로 1절에서 “사도”라고 말해요. 바울에게는 다른 호칭이 있었어요. “유대인 바울”, “가마리엘 문하생 바울”, “로마인 바울”이죠. 사람들은 그렇게 불러지는 것을 좋아해요. 그러나 바울은 아니었어요. 사명자 사도로 불러지는 것을 좋아했어요.
바울의 그런 마음은 옥중서신인 골로새서 4장을 보면 더욱 분명해져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빌4:3) 부탁해요. 감옥의 문을 열어 달라가 아닌, 감옥에서도 전도할 문을 열어 달라는 기도부탁을 해요. 사명자로 살기를 원했어요.
사형수로 있을 때 이런 말을 해요.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1:20) 바울은 사형수로 갇혀 있으면서도, 자신이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존귀하게 되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했어요. 철저한 사명자의 모습이에요.
스님들에게 “왜 사냐?”고 물으면, 성불(成佛)하기 위해서래요. 부처를 이루겠다는 것이죠. 우리 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죠. “성 예수”하는 것이죠. 그리고 불교 신자들은 서로에게 이런 인사를 해요. “성불(成佛) 하세요!”
목사인 제게 “왜 사냐?” 물으면, “성 예수” 하기 위해서이어야 해요. 그리고 우리 모두 서로에게 “성 예수 하세요” 인사함이 자연스러워야 해요. 그저 예수 믿어 마음 편하고, 넉넉하게 살고, 성공하고, 죽어 천국 가면 되는 것이 아니어야 해요.
느헤미야.를 아시죠? 아닥사스다 왕 때 왕의 높은 관원장이었어요. 비서실장 격이죠. 그러나 그는 궁궐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훼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괴로워해요. 그리고 결국에는 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훼파된 성전을 수축하는 일에 힘을 쏟아요.
사람들이 보기엔 느헤미야의 행동은 어리석기 짝이 없어요. 그러나 그는 비서실장으로 인생을 마치고 싶지 않았어요. “성 예수” 하는 인생으로 마치고 싶었어요. 내게 있는 것으로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명자로 인생을 마치고 싶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원장(비서실장) 느헤미야로 인생을 마치려고 해요. 그러나 지위와 권세 있다고 소용 있는 게 아니에요. 가진 지위와 권세로,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소용 있어요. 돈 많다고 주님께 득이 되는 게 아니에요. 돈을 사명과 연관 짓는 사람이 주님께 득이 돼요.
우리 교회에, 주님께 소용 있고, 득이 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축원해요. 우리 교회 청년들과 성도님들의 덕 보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아지기를 축원해요.
지난 8, 9월에 저를 부끄럽게 하는 뉴스를 듣게 되었어요. 8월 12일에, 분당 한신교회 이윤재 목사님이, 65세 조기 은퇴를 하고, 아프리카 선교로 여생을 마치겠다는 의사를 밝혔어요. 9월 16일에, 분당 지구촌교회 진재혁 목사님이 "아프리카 케냐 선교사로 떠나려 한다." 면서 사임을 밝혔어요. 올해 54세예요.
모두 대형교회예요. 모두가 말리는데도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떠난다고 했어요. 제 눈에 두 분 모두, 황무지 예루살렘으로 떠났던 느헤미야 같아 보였어요. “성 예수” 하는 것 같아 존경스러웠어요.
저와 여러분도 관원장으로만 끝나는 인생이 아니길 소망해요. 우리에게 있는 것이 무엇이든 분량대로,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든, 그것이 주님에게 득이 되고, 사명으로 이어지길 간절히 소망해요.
마쳐요. 16절을 볼까요.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자신이 믿음의 사람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고, 하나님이 일체 오래 참으셨다고 해요. 나같이 못난 자도, 나 같은 죄인도, 유익한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보여 주시기 위해 일체 오래 참으셨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그 하나님이 지금도 덜떨어진 우리를 참아 주세요. 지금도 강퍅한 우리 가족을 참아 주세요. 세상의 비판받는 우리 한국 교회를 참아 주세요. 우리와 내 가족이 누군가의 본이 되고, 한국교회가 세상의 본이 되도록요!
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소멸되기 전에, 더 늦기 전에, 우리 모두, 속히 죄인임을 고백하고, 은총 받은 자임을 고백하고, 사명자로 변화되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축원해요.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