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6.8.연중 제10주간 화요일 강론>
<마태5,13-16>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15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16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세상의 소금이며 빛으로 사는 길은 무엇일까요?
전교와 공동 합의성 입니다.
이 둘을 행하는데 있어서, 소금으로서 짠 맛을 잃지 않고, 빛을 잃지 말라 하십니다.
주님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데,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서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옛날에는 전교를 양이 아니라 질로 따지는 때가 있었습니다.
또한 전교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아주 강했지요.
제가 고3때 절친한 친구를 성당에 데려가 성수를 찍고 성호경을 가르쳐준적이 있었습니다.
3년 내내 지켜보다가 저 친구면 냉담하지 않고 천주교 신자로서 부끄럼이 없겠다 싶어 성당에 데려간 것이지요.
그 후로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던 해에 제가 외국에 있을 때 어머니께 전화를 했다고 하면서 외국에 전화가 왔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써클 선배가 개신교에 같이 가자고 해서 거절하는 바람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고 했습니다.
회사에 들어가서도 바로 위에 상사가 끈질기게 개신교를 권고하는 바람에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소개한 천주교에 드디어 입교 했다고 알려왔습니다.
우리는 힘이나 말로 사람들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주고 사랑을 선사하고 일깨우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전교하는 것이며,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사는 길이라 여겨집니다.
함께 일을 할 때에는,
경쟁 관계가 아니라 공동 합의성으로 하면 좋겠지요.
‘공동 합의성’이란 ‘함께 걷기’를 뜻하는 ‘시노드syn-odos’에서 파생된 것으로 합의를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높은 차원에서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조화를 이루려는 노력입니다.
따라서 각 의견의 좋은 점이 유지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종국에는 완전히 일치된 합의는 아니더라도 각 의견의 장점을 유지하는 화합을 이루어냅니다. 그런 조화를 이루어내는 이는 바로 성령이십니다.
빛과 소금으로서 사는 길은?
모든 일에 선택에 앞서 성령께 의탁하며 기도하면 됩니다.
방법은?
결정해야할 사항들을 순간 예수성심께 봉헌합니다.
그리고 성령께 답을 기다리며 마음이 어디를 향하는지 봅니다.
<Matthew5,13-16>
13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if salt loses its taste, with what can it be seasoned? It is no longer good for anything but to be thrown out and trampled underfoot.
14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A city set on a mountain cannot be hidden.
15 Nor do they light a lamp and then put it under a bushel basket; it is set on a lampstand, where it gives light to all in the house
16 Just so, your light must shine before others, that they may see your good deeds and glorify your heavenly Fa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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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차이를
인정하며
함께 걸어갑시다
교황으로서 내 관심사는 ‘공동 합의성synodality’이라는 오래된 관습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교회 내에서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범람이 일어나도록 독려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교회만이 아니라, 걸핏하면 합의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교착상태에 빠지는 인류에게 봉사하는 뜻에서도 그 오래된 관습을 되살리고 싶었습니다.
‘공동 합의성’이란 개념은 그리스어에서 ‘함께 걷기’를 뜻하는 ‘시노드syn-odos’에서 파생된 것으로 그 뜻이 실제로 공동 합의성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합의를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높은 차원에서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조화를 이루려는 노력입니다. 각 의견의 좋은 점이(LET US DREAM 렛 어스 드림, 더 나은 미래로 가는 길, 프란치스코 교황 POPE FRANCES, 오스틴 아이버레이/김주현 옮김,(주)북이십일 21세기북스, 2020, p.192)/
유지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역동적인 ‘시노드’, 즉 회의에서는 차이들이 표현되고 다듬어지며, 종국에는 완전히 일치된 합의는 아니더라도 각 의견의 장점을 유지하는 화합을 이루어냅니다. 음악에 비유하면 이해하기가 한결 쉬울 겁니다. 일곱 개의 음, 반음 올림표와 반음 내림표를 조합하여 각 음의 특이성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멋진 음률을 빚어내지 않습니까. 음률에는 각 음의 아름다움이 내재해 있습니다. 그 결과는 복잡하면서도 아름답고, 우리 상상의 범위를 벗어나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그런 음률을 빚어내는 이는 성령이십니다.(LET US DREAM 렛 어스 드림, 더 나은 미래로 가는 길, 프란치스코 교황 POPE FRANCES, 오스틴 아이버레이/김주현 옮김,(주)북이십일 21세기북스, 2020,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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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이 세상은 어떤 모습으로 완성되나요?
세상이 끝나는 날 하느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입니다. 악은 더 이상 아무런 영향력도, 어떠한 매력도 갖지 못할 것입니다. 구원받은 이들은 친구처럼 하느님을 마주보게 되고, 평화와 정의에 대한 그들의 열망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는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하느님이 그들 가운데 사시며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죽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슬픔도 비탄도 고난도 없을 것입니다.[1042-1050]->110-112
(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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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희망
->1042 종말에는 하느님 나라가 완전하게 도래할 것이다. 공심판 후에 육체와 영혼이 영광스럽게 된 의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다스릴 것이며 우주 자체도 새롭게 될 것이다.
온 교회는 “비로소 천상 영광 안에서 완성될 것이다. 그리고 그 때에는 인간과 밀접히 결합되어 인간을 통하여 그 목적에 이르는 온 세상도 인류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 완전히 새롭게 될 것이다.”(교회 헌장, 48항)
->1043 인류와 세상을 변화시킬 이 신비로운 새로움을 성서는 “새 하늘과 새 땅”(2베드3,13)이라고(묵시21,1 참조) 부른다. 이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하나가 될”(에페1,10) 하느님 계획의 결정적 실현이 될 것이다.
->1044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새롭게 된(묵시21,5 참조)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사람들 가운데 거처하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426)/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묵시21,4)(묵시21,27 참조)
->1045 인간에게 이 완성은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 원하신 인류 일치의 궁극적 실현이 될 것이며, 순례 중인 교회는 바로 이 일치의 “성사”(교회 헌장, 1항)이다. 그리스도와 결합된 사람들은 구원된 사람들의 공동체, 하느님의 “거룩한 도성”(묵시21,2), “어린양의 아내인 신부”(묵시21,9)가 될 것이다. 이 공동체는, 지상의 인류 공동체를 파괴하거나 상처를 입히는 죄와 더러움과(묵시21,27 참조) 이기주의로 생겨나는 상처를 더 이상 입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선택된 사람들에게 당신을 무궁히 드러내 주실 지복직관은 행복과 평화와 상호 친교의 마르지 않는 샘이 될 것이다.
->1046 우주와 관련하여 계시는 물질 세계와 인간 사이의 깊은 공동 운명을 이야기한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거기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곧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날 날이 올 것이다……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로마8,19-23).
->1047 그러므로 가시적인 우주도 역시 변화되고, “세상 자체도 그 최초의 상태로 복원되어 아무 장애 없이 의인들에게 봉사하며”(성 이레네오, ‘이단 반론’, 5, 32, 1: SC 153, 398(PG 7, 1210))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들이 누릴 영광에 참여하게 되어 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427)/
->1048 “우리는 땅과 인류가 완성되는 때를 모르며, 우주 변혁의 방법도 알지 못한다. 죄로 이지러진 이 세상의 모습은 반드시 사라진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정의가 깃들이는 새로운 집과 새로운 땅을 마련하시리라는 가르침을 우리는 받고 있다. 그 행복은 인간들 마음 속에서 솟아오르는 평화의 모든 열망을 채우고 또 넘칠 것이다.”(사목 헌장, 39항)
->1049 “그러나 새 땅에 대한 기대가 현재의 이 땅을 가꾸려는 관심을 약화시켜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러한 관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이 땽에는 이미 새로운 세계의 어떤 밑그림을 제시하여 줄 수 있는 저 새로운 인류 가족의 몸이 자라고 있다. 따라서 현세 진보는 그리스도 왕국의 발전과 신중하게 구별되어야 하지만, 그 진보가 인간 사회의 더 나은 개선에 이바지할 수 있는 그만큼, 하느님 나라에 커다란 중요성을 지닌다.”(사목 헌장, 39항)
->1050 “인간의 존엄과 형제적 친교와 자유의 가치들, 곧 우리 본성과 노력의 훌륭한 열매인 이 모든 것을 주님의 성령 안에서 주님의 명령에 따라 지상에 널리 전파한 다음, 그리스도께서 성부께 보편되고 영원한 나라, ‘진리와 생명의 나라,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 를 돌려 드릴 것이다.”(사목 헌장, 39항. 교회 헌장, 2항 참조). 그 때에는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통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1코린15,28) 것이다.
우리의 실체적이고 참된 생명은 성부께서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모든 이에게 샘물처럼 부어 주시는 하늘의 선물입니다. 그분의 자비로써 우리 인간들에게 참으로 영원한 생명의 선물이 약속되었습니다.(예루살렘의 성 치릴로, ‘예비신자 교리교육’, 18, 29: Opera, 2권, J. Rupp 편(모나코 1870), 332면(PG 33, 1049)(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428)/
III.성서의 해석자이신 성령
->110 성서 저자들의 진술 의도를 알아 내기 위해서는 그들의 시대와 문화의 상황뿐 아니라, 당시의 일반적인 ‘문학 유형’과 이해, 표현, 서술 방식 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진리는 본문에서 역사적, 예언적, 시적 양식 또는 다른 화법 등 여러 양식으로 각각 다르게 제시되고 표현되기 때문이다.(계시 헌장, 12항)
->111 그러나 성서는 성령의 영감을 받은 책이므로, 성서를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한 또 하나의 원칙이 있다. 이 원칙은 앞의 원칙만큼 중요하며 이 원칙이 없다면 성서는 “죽은 문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성령을 통해 쓰여진 성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읽고 해석해야 한다”(계시 헌장, 12항)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76)/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서에 영감을 주신 성령을 따르는 성서 해석을 위해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하였다(계시 헌장, 12항 참조)
->112
1.우선 “성서 전체의 내용과 단일성”에 특히 유의할 것. 왜냐하면 성서를 구성하는 책들이 아무리 다양하다 해도, 실제로 성서는 하느님 계획의 단일성 때문에 하나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 이후 밝혀진 그 계획의 중심이시며 심장이시다.(루카24,25-27.44-46 참조)
“그리스도의 마음을(시편21,16(22,15) 참조) 알려 주는 성서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이해해야 한다. 당신의 수난 전에는 성서가 모호하였으므로 이 마음은 닫혀 있었다. 그러나 수난 후에는 성서가 열렸다. 이 때부터 성서를 깨달은 사람들이, 예언을 어떤 방식으로 해석해야 할지를 고찰하고 식별하였기 때문이다”(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시편 해설’, 21,11: Opera omnia, 18권(파리1876), 350면)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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