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여행2 - 주장에서 양자강변에 자리한 심양루에 올라 송강등 양산박 호걸들을 만나다!
중국 여행 6일째인 10월 21일 장시성의 성도인 난창 (南昌 남창) 에서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달려서 논과 강을 지나 10시 40분 주장(九江 구강) 에 도착합니다.
역에서 승용차로 영업하는 택시를 타고는 버스 터미널인 주장치처짠 九江汽车站 :
客运总站(구강기차참 : 객운총참) 으로 가서는 주장을 구경한 후에
루산 庐山(여산) 으로 가려고 16시 02분 버스표를 1인당 16.5 위안에 구입합니다.
그러고는 백수호 호수공원 북쪽에 자리한 쉰양러우 浔阳楼(심양루) 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타는데.... 넓은 도로를 달려서 양자강 까지 가서는 죄회전을 해서 내려가 멈춥니다.
버스터미널 에서 부터 얼추 30분이나 달렸으니 주장(구강) 의 구시가지는
성벽으로 둘러 쌓여있는지라 남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둘러왔나 봅니다?
택시에 내려서 마당으로 들어가니 거기에 주장의 구시가지인 백수호 호수공원 지도 가
있기로 찬찬히 살펴보는데 여기 심양루 는 타원형으로 된 주장성의 북쪽 양자강
강변에 위치한 성문인 북문 인가 본데 양자강은 장강의 하류지역 을 일컫는 이름 입니다.
여기 쉰양러우 浔阳楼 (심양루) 는 당나라 때에 장강(양자강)에 누각이 지어졌는데
장강 옆으로 난 입구에는 사자 두 마리 가 맞이하니 지붕에는
청기와 를 얹고 주변에 회랑을 쌓았으며...... 난간은 붉은색 을 곱게 칠했습니다.
꼭대기층의 남쪽과 북쪽 처마 밑에는 각각 '潯陽樓(심양루)' 라고 적힌 현판이 하나씩
걸려 있으니 서예가 자오푸추의 필적 이라는데 1층은 전청(展廳) 이고 2층
충의당 (忠義堂) 에는 "양산박의 수령" 들이 박진감 있게 여러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두령인 송강(宋江) 을 중심으로 108명의 유협(遊俠) 들이 양산(梁山) 산록
호숫가에 산채를 만들어 "양산박(梁山泊)" 이라 일컬었으며 조정의
부패를 통탄하고 관료의 비행에 반항하여 민중의 갈채를 받는 이야기 입니다.
수호전(水滸傳) 은 중국 최초 백화문(白話文) 으로 쓰여진 소설이며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형성, 발전했으니 남송때 양산박(梁山泊) 의 영웅 호걸들의 이야기가 널리 유행하였는데,
사람들이 즐겨 들었기 때문에 설화인들은 이야기를 소재로 연출하였고 문자로 기록했습니다.
수호전(水滸傳) 의 중심 인물인 송강(宋江) 등 36인 에 대한 사적들이 “송사(宋史)”
에도 간략하게 기재되어 있는데 "송강(宋江) 은 36인과 함께 제· 위 땅을
횡행하였으니 관군 수만이 감히 대항하지 못했으며, 그 재주는 대단히 뛰어났다.
( 宋江以三十六人橫行齊魏, 官軍數萬, 無敢抗者, 其才必過人. )" 라고 적었습니다.
민간에 널리 유포되었고 송말에 이르러 영웅적인 전설로 전해졌으며 원대에 희극이 성행
하게 되어 많은 작가들이 양산박 이야기 를 제재로 극본을 창작 하였으니 극본이 33종
인데 시내암(施耐庵) 과 나관중(羅貫中) 의 손을 거쳐 “수호전(水滸傳)” 이 완성 됩니다.
시내암(施耐庵) 은 34세 때 진사에 합격하여 전당 錢塘(항저우 杭州 시의 현윤 縣尹)으로
2년간 관직 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고향인 고소 姑蘇(현재 쑤저우 蘇州 시)에 내려와
문을 걸어 잠그고 저술에 몰두했다는데, 박학다식해 고금에 정통했으며 문장과 시가를
비롯 천문, 지리, 의술, 점술, 성상 (星象, 별자리의 모양) 등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합니다.
나관중 과 함께“삼국지연의”를 연구했으며 산둥성 양산박 송강 등 영웅에 관한 고사를
수집해“수호전(강호호객전 江湖豪客傳)을 창작했으며 역사에서 소재를 취한 장편 통속
소설을 창작하여 대중의 환영을 받았으니 나관중과 함께 중국 소설사 에 큰획을 그었습니다.
원나라 말기 농민 봉기군 수령인 장사성 이 오(吳) 지방 을 점거한후 초빙했으나 응하지
않았고, 주원장에 의해 명나라가 건국 된후에도 초빙되었으나 단호하게 사양 하였다고
하는데 어떤 연구자는 시내암과 나관중이 장사성의 막료로 활동했다는 주장도 제기합니다.
나관중 羅貫中 은 산서(山西) 병주(竝州 태원) 출신으로.... 책을 한번 읽으면 잊지
않았다는데 원나라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수시로 반원(反元) 감정 을 드러내어
관리들의 귀에 까지 소식 이 들어가자 아버지는 숙부 집 에 보냈는데 당시 평민을
위한 연극과 이야기가 저잣거리를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풍조로 자리 잡았다고 합니다.
해서 나관중 은 민간 전설을 수집하여 36줄기의 전설을 모았으니“수호전”이 36줄거리
에서 72줄거리로 늘어날수 있었던 것도 이 덕분이었으니 그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 주고 그 대가로 노잣돈 을 해결하면서 강소성(장쑤성) 까지 여행할수 있었고
그곳 출신인“수호전”의 원작자 시내암을 만나서 그의 제자이자 막역한 친구가 됩니다.
장사성 밑에서 모사(謀士) 노릇을 하다가 장사성이 원나라에 투항해 버리자 나관중은
항주(杭州) 로 내려가 은둔생활을 하다가 북상해 허난(河南)성 허비(鶴壁)시
교외의 허가구촌 (許家溝村) 에 정착해 문학 창작을 시작했으니 죽을 때 까지
우리가 흔히 말하는“삼국지”곧“삼국지통속연의 (三國志通俗演義)”를 집필했습니다.
“수호전(水滸傳)”은 “삼국지”와 함께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는 고전소설이니 "젊어서
"수호전"을 읽지말고 나이 들어서는 "삼국지" 를 읽지말라" 는 유명한 말이 생겼는데
삼국지는 경험이 부족한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인생의 지혜 가 담겨있으며 수호전은
정의감을 불러일으키니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젊은이는 굳이 읽지 않아도 된다는 뜻?
수호전은 108명의 비범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사회의 기존 질서에 순응하거나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인물이 아니니 암흑가 출신이거나 땡땡이 중 또는 관료생활을 했더래도
어쩔수 없이 죄를 짓거나 모함을 받아 도망친 사람들이 대부분이며 자신의 처지에
불만을 가졌고 사회의 부패와 불합리성에 반기 를 들고 있다는 면에서 공통점을 지닙니다.
하나같이 기존의 불합리한 사회질서에 반항하는 싸움꾼들이니 민중의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영웅호한들 이라고 말할수 있겠는데... 그럼에도 나라를 세운다든가 민중을
해방시키는 주장을 내세우지는 않으며 남의 재물을 약탈해서 사리사욕을 채우기도
하고 여인네를 겁탈하는 부도덕한 면도 있으며 실수를 연발하는등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웅이란 칭호는 부적절하며 악한에 불과하다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면모
때문에 오히려 민중은 그들을 매우 인간적인 친근한 영웅 으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르는데.... 이런 계급투쟁적인 특성은 독자들의 열렬한 환영과 인기를 얻는데
기여했으며 반대로 지배층 관료와 문인 들은 "수호전" 을 금서(禁書) 로 낙인 찍었습니다.
또한 "수호전" 의 내용에 불만을 가진 문인들이 내용을 수정해서 조금씩 다른 작품으로
변형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으니... 수호전은 삼국지(三國演義), 서유기(西遊記) 와
금병매(金甁梅)등 중국 사대기서(四大奇書) 중 가장 복잡한 판본을 지닌 작품이 되었네요!
청(淸)나라때 김성탄(金聖嘆) 은 새롭게 출간한 수호전(水滸傳)에서 송강(宋江)을 비롯한
무리가 송나라 황제에게 투항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데 100회 길이를 가진 다른
작품들이 송강의 무리가 관군에 투항한뒤 황제를 위해 전쟁에 참여하는 내용을 포함
하는데 반해, 이러한 내용을 삭제하여 70회본으로 줄인건 도적 출신의 무리가 국가를
대신해 오랑캐나 반란의 무리와 싸운다는 설정 자체가 성립할수 없다는 것이 이유라네요?
도적의 무리 는 결국 황제의 품으로 귀순해야 하며 충의(忠義)를 논하는 것은 불가 하다는
김성탄 의 생각은 수호전을“충의수호전”이라고 명명한 명(明)나라 이지(李贄) 와
구별되니 이처럼 수호전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의 갈래 는 현재 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수호전 은 삼국지연의 처럼 역사적 사건에 근거한 작품인데 삼국지가 7할이 사실 이고
3할이 허구인 역사소설이라면, 수호전은 사실에서 기원하나 대부분 내용이 허구 라는
차이가 있으니 오랜기간 전설 형태로 전승된 작품은 대중의 소망이 반영 되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서술하기 보다는 영웅적 인물의 활약상에 비중을 둘때 더욱 흥미를
유발시키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니 수호전은 민중들의 염원을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작품 속에서 실현시켰다는 점에서 삼국연의(삼국지) 보다 창작의 자유를 누린 작품 입니다.
수호전 의 기본 모티프는 북송 시대 산동에서 발생한 송강 무리의 기의(起義) 사건이니
역사책에는 송강을 비롯한 36인이 기의를 일으켰다가 관군에 의해서 정벌 되었다고
매우 간략히 기재되어 있지만 사건이 발생했던 지역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승되면서
등장인물은 108인으로 증가했으며 보다 흥미진진한 허구화된 영웅담으로 발전해 갔습니다.
수호전의 배경인 양산박(梁山泊)은“송사(宋史)”의 기록에 보이지 않는데 하북(河北)에서
일어나 산동(山東)과 하남(河南) 을 치고 회수(淮水) 이남인 강소성(江蘇省) 북부와
안휘성(安徽省) 을 침범한뒤 강소성 북부 연해지역으로 들어갔다는 기록이 있을 뿐입니다.
수호전에서 묘사하고 있는 양산박과 산동성의 양산박은 거리상으로나 실제 모습 으로나
차이가 있으니 초기의 '36호한고사(好漢故事) 는 태행산(太行山) 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태행산은 금(金)나라에 투항하기를 거부한 인물들이 모였던 곳이니 이로써
산동의 양산박, 태행산, 초주 등이 종합되면서 새로운 허구의 양산박 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희곡과 민간 전설 등 다양한 형태로 전승되어 온 "수호전" 관련
이야기를 정리하여 편찬한 첫번째 인물이 시내암 이고 반면에 나관중 은
이후 문체와 표현을 정리하고 편찬하는데 참여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북송(北宋)때 발생한 송강을 비롯한 36인의 기의는 전국적인 규모의 반란도 왕조의 존망을
위협할 만한 반란도 아니었으니 관군에 의해 사건은 평정되었으면 잊혀져야 하는데도
해를 거듭할수록 민간의 생활속에 살아 숨쉬는 영웅으로 형상화되어 역사 속에 그
이름을 남긴 것은 민중은 양산박에 모인 호한들에게서 희망을 찾아냈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부패한 관료와 무능한 군주 는 봉건시대 지배계층의 전형적인 모습이니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속에서 민중은 내세를 기약하거나 숨죽이며 하루하루를 연명할수밖에 없었는데
이야기 속에서나마 양산박의 호한들은 부패한 관료와 민중을 착취하는 부자들을
정의의 이름으로 처단하고는.... 그들의 재물을 빼앗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송강의 별명이 '때마침 내리는 비' 라는 뜻의 급시우(及時雨) 이고 군관 출신인 임충(林忠),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는 무송(武松), 거칠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파계승 노지심
물불 안가리며 쌍도끼를 휘두르는 술고래 이규(李逵) 등 하층민 출신 영웅들의 활약상
에서 현실에서 느끼는 억울함과 절망감을 해소 하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한 것입니다.
윗층 으로 올라가니 노인이 사람들에게 시를 써 주는 모습이 보이는데 송강 宋江 의
반시(反詩) 라고 해서... 송강은 이 시로 인하여 사형수 가 되었다고 하는데
여기 심양루 浔阳楼 를 찾은 시인 도연명 이 남긴 시에..... 사시(四時) 가 있습니다.
사시(四時) 도연명(陶淵明)
춘수만사택(春水滿四澤) 봄이 오니 사방 못마다 물이 잔잔하고
하운다기봉(夏雲多奇峰) 여름 구름은 봉우리들마다 휘감네
추월양명휘(秋月陽明輝) 가을 달 맑은 빛을 뿌리고
동령수고송(冬嶺秀孤松) 겨울 산마루엔 홀로 외로운 소나무
도연명 은 365년에 중국 심양(현재의 강서성 구강 九江 시) 에서 출생했으며 동진 말의
시인으로 벼슬을 하다가 부패한 권력에 등을 돌리고 쓴 歸去來辭(귀거래사) 로 유명
한데, 낙향해 전원 생활하며 자연을 노래한 시를 지었으니 전해지는 시는 130수 라 합니다.
3층 화랑에서 중국의 주석이었던 장쩌민(강택민) 이 심양루를 방문했던 사진을 구경하고
4층 접대실에 올라 유유히 흐르는 양자강 (양자강이란 장강 하류를 뜻하는 이름 이니
중류인 구강의 강은 양자강은 아님) 를 바라보는데 누각은 1986년에 중건 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