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이야기
임재정
1.
거인 등에 우리 살던 옛집
흔들림은 근사한 놀이여서 어깨에 앉아 거인의 귀 잡고, 마부가 되어 어디든 간다 이럇, 거인 귓바퀴에 묻힌 이야긴 다 엿들으면서
밤이면, 거인이 몰래 남의 산비탈에 심은 고추모종 이라서, 나는 뿌리내리기 창피한 되먹지 못한 떡잎, 이내 가뭄이 오고, 거인은 비탈의 돌을 고르고 물을 퍼 날랐다 가문 내 얼굴을 그가 사랑할까봐 비탈로 누워 숨바꼭질
윗방에 숨어 격자무늬 칸칸을 헤아리는 큼큼한 오후, 나는 거인 걸리버를 읽거나 소인 걸리버를 읽는 나를 읽었다 비좁은 책 속에서 배고픈 거인이 깨어날 때면, 발목이 삐져나오던 흥부네 움막이 부끄러웠다 그때마다 맵고 시큰한 밤이 쏟아졌다 얼마나 자랐는지 거인은 잠든 내 아랫도리를 뽑아보곤 했다
소출은 칠 대 삼으로 나누겠네, 누군가 다그치고 있었다 그 밤 나는 아궁이 불빛을 품은 제사장이 되어 걸리버의 화형식을 거행했다
2.
끝내 나를 항해에 오르게 한 열병, 거인은 등뿐이었으므로 그가 품었던 대양들을 알지 못한다
3.
어깨에 앉아 귀를 잡고
이럇, 등을 걷어차는 아이들에게
읽어주는 문고판 걸리버 이야기
걸리버는 왜 자꾸 떠나나요? 창문을 갖고 싶어서일 거다
누구도 대답한 만큼 살아내지는 못하므로, 내가 읽어주는 걸리버 이야기는 맵고 침침하다
매번 순서가 달라서 거인이 햇살의 손바닥을 갈아엎거나 수시로 아랫도리를 뽑아보는 내가 등장한다
삐-걱, 우리 살던 옛집 대문 열렸다 닫힌다
ㅡ귀농통문 (고료를 낫으로 받은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