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스 쿤드나니의 『독일의 역습』(2015.11.01.)
독일은 어떻게 유럽 경제를, 세계 경제를, 그리고 중국을 뒤흔드는가
서문 : 역사는 다시 반복되는가
독일은, 변하지 않았다!
2015년 유로존 국가 중 독일의 실업률은 4.7퍼센트로 가장 낮고 그리스는 가장 높은 25.6퍼센트를 기록했다. 유럽이 단일통화를 사용하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비용을 힘없고 가난한 나라들이 과도하게 짊어져 온 것이다.
나치 점령기에 그리스가 겪었던 유럽현대사에 손꼽힐 최악의 기근은 그리스인들의 기억에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다. 일부 그리스인들은 독일에게 다시 전쟁 배상금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는 2012년에 나온 정부 보고에 따르면 1,620억 유로(대략 212조원)에 달한다.
지금 독일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1945년 이래로 자신들이 배워온 역사적 교훈을 잊고 과거로 회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추진한 유럽연합과 유로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서독과 동독이 통합되면서 1990년에 독일은 2차 통일을 하게 된다. 독일 통일로 유럽은 두 가지 모순되는 두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하나는 통일된 독일이 유럽 대륙에 기여하길 거부한 채 홀로서기를 해서 비스마르크 시대로 복귀하지나 않을까 하난 염려였다면, 다른 하나는 애초에 독일을 구속하기 위해 설립된 국제기구들이 제 기능을 수행하기에는 통일된 독일이 너무 커져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결국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은 유럽 통합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하나로 합쳐진 독링에 대처하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른다. 따라서 유럽연합은 어떤 측면에서는 거대해진 독일의 힘을 제한하고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설립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독일의 통일은 유럽 통합의 진전에 촉매가 되었고 특히 유로 탄생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1999년1월1일을 기해 유로화가 사용되기 시작했을 때 프랑스의 전략은 먹혀드는 것처럼 보였다.
2000년대 초반, 유럽의 병자였던 독일
2002년부터 2005년에 이르는 2기 내각에서 슈뢰더는 독일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제도 개혁을 단행했다. 그리고 이것이 병자로 보였던 독일경제를 뒤바꿨다.
2000년대 독일 노동자의 임금은 해마다 1.1퍼센트가량 올랐다. 하지만 이는 인플레이션을 감안한 실질 소독은 오히려 4.5퍼센트 떨어진 셈이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 독일은 자동차 생산량의 4분의3이상을 수출했다.
유로화로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무임승차하는 독일
마르크에 비해 약했던 유로화 덕분에 독일의 수출은 날개를 단 듯 유럽을 뛰어넘었다. 2010년에 터져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그리스 사태는 독일은 물론이고 유럽연합 전체를 역사상 유래없는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독일 은행들이 경제 호황기에 그리스 같은 나라들에게 무책임하게 대출을 남발해서 위기에 기여했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는다. 독일은 자신들의 재정 흑자가 거시경제상의 불균형에서 발생한 문제의 일부로 얻어진 것임을, 즉 자신들이 동맹국들에게 얹혀진 부당한 이득을 취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2010년대 독일이 주도하는 유럽연합은 보다 더 엄격한 규율 체계와 강화된 규정을 도입하였다. 이처럼 한층 강제성을 띤 유럽연합은 더욱 독일화되어 갔다.
경제 위기 이후 그 어느 나라보다 돈독해진 중국과 독일
중국과의 공생관계는 다른 어떤 국가들보다 완벽했다. 독일의 대기업들은 중국에 생산 시설을 이전하기 시작했고 중국은 독일 제품에 대한 수요가 특히 증가했는데, 메르세데스 사의 S-클래스 차종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중국에서 가장 많이 팔렸다. 중국에서 밀려드는 수요로 독일은 또 한 번 큰 호황을 누렸다. 경제적 교류로 돈독해진 두 나라와의 관계는 다른 문제를 덮게 만들었다. 상대가 독재 국가라도 상관없었다. 바야흐로 독일은 중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럽국가가 되었다. 최근 독일이 거둔 경제적 성공은 중국에 대한 수출 못지 않게 러시아로부터 천연 가스 수입에 힘입은 바 크다.
지경학적 거인이 등장했다!
세계적인 재정 위기 이후 독일 경제가 되살아나면서 독일의 경제 민족주의는 또다른 형태로 다시 부상하고 있다. 지경학geoeconomic이라는 개념은 현재 독일이 유럽연합 내에서 경제력을 얼마나 강력하게 휘두를 수 있게 되었는지를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전후의 외교정책과 냉전 기간의 분단이라는 제약에서 자유로워진 독일은 유럽 내에서 점점 더 막강한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나는 이 책에서 유로화 위기 이후의 정세와 그리스 사태 등에서 보여준 독링의 대응에 숨겨진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나는 이것이 1990년 독일의 재통일과 유로 위기가 발생한 20년 동안 일어나 독일의 국가적 정체성과 독일 경제의 변화로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2장은 2000년부터 현재까지 일어난 일들을 다루고 있다.
3장부터는 1871년 베르사유궁전에서 이루어진 통일 독일제국의 선언에서 시작된 독일 현대사를 추적하면서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나는 독일 문제가 새로운 형태로 재등장했다는 것으로 이책의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
유럽이 수세기동안 씨름해 왔던 지정학적 딜레마가 이제는 지경학적 딜레마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동시에 안정이라는 개념과 수출에 바탕을 둔 새로운 형태의 독일 민족주의가 부상하고 있고, 이로 인해 독일과 서구와의 관계에 다시금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1장 “우리 독일이 옳았다. 우리 독일이 승리했다!”
유럽의 병자, 독일
1990년 동독과 서독의 통일이 가져다준 초기 효과는 1871년 독일제국 최초의 통일 때에 그랬던 것처럼 경제적 붐으로 나타났다.
1993년 무렵 구 동독 지역은 노동력의 15퍼센트가 실업자 신세였다. 콜 정부 말기 동안 경제성장이 부진의 늪에 빠지면서 실업률이 치솟다보니 그만큼 사회 복지 수요도 늘었다.
하르츠 개혁안 등, 독일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개혁 단행
2002년부터 2005년에 이르는 슈뢰더 2기 내각에서 독일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사회보장제도 개혁을 단행했다. 그리고 이것이 독일 경제를 뒤바꿨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알려진 조치가 2003년3월에 시행된 어젠다 2010이라고 명명된 이 개혁 패키지 안에는 실업률을 낮추고 의료 보장 혜택과 연금을 삭감하는 조치들이 들어 있었다. 이 안은 소규모 업체도 좀 더 쉽게 직원을 해고할 수 있게 했으며, 매달 4백 유로(약50만원)이하의 소득자에게는 사회 보장세와 소득세를 면제해 주었다. 이로써 단위 노동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한편 파트타임 일자리를 더 많이 창출할 수 있게 했다.
제조업의 부활, 높은 수출 의존도, 그리고 임금 억제로 생긴 남아도는 돈
독일 제조업체들이 중동부 유럽에서 아웃소싱 제작을 시작했다. 2000년대 후반 독일 회사들은 체코공화국, 헝가리, 폴란드, 슬로바키아(이들은 2004년에 유럽연합에 가입한다)등지로 생산 기지를 옮기기 시작했다. 일례로 자동차 제조업체 폭스바겐의 자회사인 아우디는 헝가리에서 자동차 엔진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1993년부터 20여년간 아우디는 헝가리에 57억유로(대략 7천5천억원)를 투자했고 덕분에 이 나라의 가장 큰 해외 직접 투자자가 되었다.
오프쇼링(offshoring:사업을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옮기는 과정으로, 업무 일부를 인건비가 싼 해외로 이전시키는 현상을 말한다. 아웃소싱은 국내에서도 할 수 있지만 오프쇼링은 국외로 나가는 것)은 또 다른 상황을 만들어냈다. 바로 독일내 숙련 노동자들의 임금 하락을 불러 온 것이다.
내수 저하와 수출증가의 조합으로 발생한 막대한 이윤은 결국 독일 국내를 넘어선 또다른 투자처를 찾게끔 등을 떠밀었다. 독일의 잉여자금이 아일랜드와 스페인, 그리고 일명 서브프라임인 미국의 주택 저당 증권 등에 투자하기 전에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유로화로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독일, 유로는 집중을 강화하는 대신 분산만 야기했다
독일 마르크에 비해 약했던 유로화 덕분에 독일의 수출은 날개를 단 듯 유럽을 뛰어넘었다. 하지만 급속한 신용 팽창은 독일의 수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고는 하지만 향후 분쟁을 일으킬 만한 문제점들을 잉태하고 있었다.유로화가 도입되고 나서 유로존 경제들, 특히 무역수지 흑자 국가(독일 간은)들과 무역수지 적자 국가(그리스 같은)들 간의 불균형이 그만큼 더 심화되었다. 원래 단일 통화는 그리스 같은 나라들이 독일의 낮은 인플레이션과 저금리 모델을 모방하고, 역으로 독일은 내수를 늘리고 임금과 인플레이션을 높이는 모델에 더 가까이 다가서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현실은 이 차이가 더욱 확대되었다.
러시아와 중국과의 밀월 관계, 경제적 교류가 모든 것을 바꾼다
슈뢰더 총리와 푸틴 대통령이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기 위해 힘을 모으기로 한 것을 계기로 두 정상의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긴밀해졌다. 2005년 슈뢰더와 푸틴은 러시아에서 독일에 이르는 가스관을 건설하는 합의서에 서명했다.
독일의 새로운 현실적 대외정책의 충격적인 사례는 이란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200년 이란이 두 곳의 비밀 시설에서 우라늄을 농축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국제원자력기구는 즉시 조사에 착수했다. 그 결과 서방 측이 이란에 강력한 경제제제 조치를 취하려 하자 중국과 러시아가 반대를 하고 나섰다. 그러나 서방의 대이란 최대 수출국이자 전 세계 3위의 수출대국인 독일은 두 나라 사이의 경제 관계 때문에 처음에는 이란과 정면으로 맞서기를 꺼했다.
충분히 배부른 권력,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최우선으로
리스본 조약(유럽연합 27개국 회원국 정상들이 2007년10월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최종 합의한 조약으로, 경제 공동체를 넘어 유럽연합의 정치적 통합까지 목표로 한 일종의 미니 헌법이다. 2005년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어 무산된 유럽헌법조약을 대체하는 조약으로 2009년12월1일에 발표되었으며, 정식 명칭은 유럽연합 개정조약이다)
“우리 독일이 옳았다. 우리 독일이 승리했다!”
독일 민족의 정수가 언젠가는 세계의 구원자가 될 것- 1861년 독일의 시인 앰마누엘 가이벨
2장 총 대신 경제력, 경제 제국주의의 탄생!
우리도 피해자, 힘의 정치로 밀어붙이다!
독일의 수출민족주의는 독일이 유로존 위기를 해결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였다. 특히 위기가 시작될 즈음 독일이 경제 성장을 끌어올리고 극단적으로 수출에 의존했던 정책은 유럽과 나머지 세계 사이를 두고 시행하는 대외정책의 우선 분야에서 긴강감을 유발시켰다.
독일인들은 견실하지 못한 공동화폐를 만들어낸 유로존국가들 간의 상호관계 안에서 위기의 원인을 찾기보다는 재정 취약국들에서 재정 규율이 부족한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다.특히 그들은 2000년대에 개혁을 이룬 독일경제가 회생하면서 주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지 않았다. 그들은 유로존 위기에는 미시경제만이 아니라 거시경제적인 원인도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중국이 문제라고 믿는 사람은 독일이 문제라고 믿어야 한다”
독일은 중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럽 국가가 되었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 칼럼니스트인이 마틴 울프는 이처럼 세계 2대 수출 대국을 합쳐 처머니(Chermany)(중국과 독일을 하나의 경제적 실체 혹은 시장으로 보는 것)라는 신조어를 만들기까지 했다. 독일과 중국은 금융시장은 물론 세계 경제 거버넌스를 개혁하려는 열망도 품고 있었다. 독일은 중국이 유럽연합을 통해 시장 경제를 촉진하는 것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았다. 위기에 대처하는 독일과 중국의 접근법은 결국 이들 나라와 미국과의 마찰로 이어졌다. 유럽내에서 대외 불균형을 바로잡으려면 독일의 경쟁력은 유로존 다른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축소되어야 한다. 독일은 유럽의 적자 국가들이 보다 큰 경쟁력을 갖추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면서도, 이를 위해서는 독일 자신의 경쟁력이 낮아져야 한다는 사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독일과 유럽의 충돌, 독일 혼자 세계로 치고 나갈 것인가
더 큰 유럽을 호소하는 와중에도 메르켈은 유로채권 형태 안에서 시한을 두지 않는 부채 공유제를 이행하자는 제안만은 줄곧 거부했다.
총구를 들이댄 통합,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의 통합체
통화 동맹을 구상하는 데서 파생되는 결점을 고치기 위해 독일이 주도하는 유럽연합은 한결 엄격한 규율 체계와 강화된 규정을 도입하였다. 유럽의 재정 위기는 프랑스와 독일이 안정 및 성장에 관한 협약을 실질적으로 위반한 뒤 단일 통화 지역내에서 경제적 통합을 도모하려는 목적으로 2005년 개정된 마스트리히트 체제가 실패했음을 극적으로 드러낸 사례였다.
한층 강제성을 띠어가는 유럽은 더욱 독일화되어 갔다. 유로존의 부채라는 골칫거리를 더 떠맡게 되면서 독일은 점점 더 강한 규제를 찾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세계 안보에 기여하는 건 거부하지만, 무기 수출만큼은 적극적
다자적 환경에서도 안보에 기여하는 것을 꺼리는 독일의 태도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2011년3월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보인 독일의 행동이었다. 무아마르 카다피의 리비아 군대가 벵가지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학살하자 이를 막기 위한 군사 개입을 표결하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 회의에서 독일이 기권한 것이다. 기권표를 던짐으로써 독일은 미국뿐 아니라 프랑스와도 결별한 셈이었다. 독일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 임무의 일부로 지중해에 배치된 공중 조기 경보기들을 운영하던 70명의 인력도 철수시켰다. 그로부터 불과 몇 주 뒤에 독일 정부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레오파르트 2전차 200대를 판매하는 15억 유로(대략 2조원)짜리 계약을 비밀리에 추진했다. 리비아에 대한 군사개입에는 기권하고 사우디아라비아에는 전차를 판매한 것을 들여다보면 아랍 혁명에 긴장하고 있는 독일 대외정책의 단면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지경학적 권력의 시대가 도래했다
독일의 힘은 경제적 단호함과 군사적 자제의 독특한 혼합으로 그 특성을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독일의 힘에 내재한 역설을 이해하는 한 방법은 미국전략문제연구소의 애드워드 르투와크가 말한 지경학 개념일 것이다. 1990년에 쓴 국가의 이익이라는 에세이에서 루트와크는 국제 관계에서 상업이라는 방식이 군사적 방식을 몰아낼 것이라고 주장했다. 화력 대신 이용 가능한 자본으로, 군사-기술의 발전 대신 민간 혁신으로, 요새와 진지 대신 시장의 침투로.
3장 왜, 독일이 문제인가
절반의 패권만 쥔 독일, 강대국들의 〈연합의 악몽〉에 시달리다
프랑스의 장렬한 패배와 더불어, 1871년1월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이루어진 통일 독일제국의 선언은 유럽에서 엄청난 〈거인의 부상〉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독일제국은 우선 1866년에 오스트리아가 무릎 꿇은 뒤 생겨난 북독일연방과 바덴의 남부 주들을 연이어 합병했다. 이어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전까지 친프랑스 성향이었던 바이에른 주, 뷔르템베르크, 알자스-로렌 지방까지도 병합하였다.
자신들만의 우월함을 보여주려는 독일식 민족주의와 독일 예외주의의 등장
독일 민족주의가 출현한 것은 19세기 초반이었다. 독일 민족주의는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이라는 두 사건의 연관성 속에서 두 개의 큰 흐름으로 나눠진다. 하나는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이다. 이 입장은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독일에 적용하여 여러 소국들을 민주주의의 기치 아래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다른 하나는 낭만적 민족주의이다. 이 입장은 프랑스 혁명에 반대할 뿐 아니라 나아가 계몽주의 자체를 거부하면서 독일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것을 기치로 삼았다.
유럽 대륙에 안주하느냐, 세계로 뻗어 나가느냐
독일 민족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체화하는데 있어 독일이 스스로를 해방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세계 전체를 구해야 한다는 포부를 품었다. 독일제국의 해외 영토(혹은 식민지)문제는 경제적, 지정학적 논리 모두로부터 자극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연합의 악몽이 전쟁으로 현실화되다
1914년8월, 결국 전쟁(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사실 전쟁의 기폭제는 영국과 독일이라기보다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가 발칸 반도에서 벌인 전략적인 경쟁이었다.
19세기 중엽에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신성로마제국의 전 영역을 포함하는 대독일을 건설하고자 한 주장을 대독일주의라고 한다. 반면,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채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독일을 통일하려고 한 정책을 소독일주의라고 한다. 결국 이 둘의 차이는 오스트리아를 포함시키느냐의 여부였다. 1871년 독일 통일 당시 비스마르크는 소독일주의를 채택하여 독일제국을 건설했다. 일반적으로 독일 문제라고 하면 이와같은 대독일주의와 소독일주의를 말한다.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정치적 혼란, 군사력이 아닌 경제력의 중요성을 간파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일은 작아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붕괴된 것은 아니었다. 독일은 알자스-로렌지방을 프랑스에 양도했고, 포메라니아와 동부 프로이센 일부도 포기했으며, 폴란드에게는 실레지아를 넘겨주었다. 이로써 독일은 비스마르크 이후에 쟁취해왔던 유럽 바깥의 식민지들까지 포함해서 상당한 영토를 잃게 되었다.
완충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첫 번째 시도가 바로 국제연맹의 설립을 통한 새로운 집단안보체제로의 접근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1919~1933)에서 독일 외교의 목표로 떠오른 것은 만사를 불문하고 독립과 주권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국제연맹에서 배재된 데다 서구 열강에서 배척을 당했던 독일과 소련은 이윽고 1922년 두 나라 사이의 우호관계 설정에 관한 라팔로 조약을 맺기에 이른다. 이에 대한 반발로 프랑스와 벨기에 군대가 독일 산업의 심장부라 할 루르지역에 밀고 들어왔다.
전쟁배상금을 갚기 위해 돈을 찍어내자 발생은 1923년의 극심한 인플레이션은 독일인들에게 엄청난 트라우마로 남게 되었고 점령 또한 독일의 전략적 사고를 바꿔놓은 계기가 되었다.전쟁의 배상금을 지불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덕에 슈트레제만은 차관 형태로 미국의 지원을 얻어냈을 뿐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의 입장차를 이용해서 보상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에도 성공했다. 1924년 도스 안이 발효되자 상당한 액수의 배상금이 삭감되었으며 미국 대출 기관들로부터 1억 달러를 융통해낼 수 있었다.
히틀러의 등장, 다시 한 번 유럽의 패권에 도전
1933년 히틀러가 당선되고 난 뒤 독일은 이전보다 한층 강화된 수정주의 노선을 펼쳐 나갔다. 1933년 가을 , 국제연맹을 탈퇴한 독일은 바르세유 조약에서 규정한 무기 제한 조치를 따르는 것을 거부했다. 1935년에는 국민투표를 시행해 자르지방을 되찾아왔다. 이듬해인 1935년에는 비무장지대였던 라인란트로 부대를 파견했다. 1939년 무렵, 독일은 다시 한 번 유럽에서 패권을 노려도 될 만큼 강력한 힘을 비축해 놓고 있었다.
역사상 규모가 크고, 가장 격렬하며, 가장 대담무쌍한 유럽 재편성 시도 속에서 더욱 급진적이 된 나치는 다시 꿈틀대기 시작하더니 1880년대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대륙 제국의 구상을 실행에 옮겼다.
1945년 독일은 완전히 패망했다. 대륙의 상당부분이 파괴된 후 지구상에서 유럽의 역할은 변화를 맞았다.
결국 독일의 팽창주의가 대재앙을 불러온 것인가
1871년부터 1945년 사이 독일의 대외정책은 구조적 요인들과 데이비드 칼레오 교수가 독일 사회의 내적 충동이라 칭했던 이른바 이념적 요소간의 복잡다단한 상호작용의 결과물이었다. 독일만의 특수한 길이라는 주제에서 특히 큰 영향력을 발휘한 버전은 1848년 독일 혁명의 실패를 독일이라는 특이한 국가가 숙명적으로 걸을 수밖에 없는 일탈적 궤도의 틀에서 설명한 것이다.
4장 독일의 딜레마,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전략적 중심지에서 변방으로 추락, 노선을 바꿔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1871년 통일에서 1945년의 대재앙에 이르기까지 독일은 늘 중부 유럽에서 강력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서유럽 끄트머리에 자리 잡은 무기력한 국가일 뿐이었다. 1990년 동독과 서독의 재통일이 이뤄질 때까지 독일연방공화국은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우방의 보호를 받는 또한 전쟁도발국이라는 전력 탓에 자국의 이익을 규정하거나 명시적으로 추구하는 것도 금지당한 절반의 주권 국가일 뿐이었다.
패전 후 이상주의를 택하느냐, 현실주의를 택하느냐
동독과의 재통일 이전까지 서독의 대외정책에서 주된 관심사는 민족문제와 서방과의 관계에 집중됐다. 안보와 재건이라는 서독의 두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세계로의 통합, 특히 서방과의 밀접한 관계가 요구됐다.
동독과의 통일보다, 서방과의 친밀한 관계가 우선이다
서독 대외정책의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면 콘라드 아데나워를 들 수 있다. 기민당 출신으로 쾰른 시장이었던 그는 1949년에 독일연방공화국의 초대 수상 자리에 오른 뒤 1964년까지 집권했다.아데나워는 소련의 위협에 맞서 점령 세력의 보호는 유지하되 그들로부터 보다 많은 묘책과 자유를 얻어내는 것을 첫 번째 목표로 삼았다.
1949년의 페테르스부르크 협정은 아데나워가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이를 통해 독일연방공화국은 자신들의 산업이 해체되는 것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루르 지역 집행위원회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이는 독일연방공화국이 동등한 파트너 자격으로 참여했던 최초의 다자 기구였다.
아데나워는 통일을 희생하는 대신, 안보와 재건을 강조하는 편을 택했다. 1950년 여름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미국의 관심을 유럽에서 아시아로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서독은 소련의 위협 앞에 더욱 취약한 처지로 내몰리게 되었다.
유럽으로의 통합은 서독에게는 모욕과 무기력에서 벗어나 존중과 동등한 권리로의 도약과 다름없었다.
동구권 국가들과의 긴장 완화 정책으로 선회하다
빌리 브란트 수상의 동방정책은 서독의 대외정책에서 처음으로 중도 좌파 흐름의 길을 닦아주었다.
막강해진 경제력, 그러나 냉전 체제에서 맞닥뜨려야 했던 딜레마
1972년 선거에서 서독 유권자들은 압도적으로 동방정책을 지지했다.
1973년의 오일쇼크를 겪은 뒤에 슈미트가 이룩한 서독의 경제 안정화 사례는 다른 서방 국가들에게는 하나의 롤 모델이 되었다. 아데나워에서 슈미트 내각에 이르는 동안 대외정책의 핵심 목표를 확보하는데는 성공했지만 냉전이라는 국면은 여전히 녹록치 않은 제약 안에서 상아 나가야 하는 과제를 서독에게 안겨주었다.
나치라는 과거의 족쇄, 그를 벗어던지려는 움직임과 그에 대한 반발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서독에서는 나치 과거에 대한 뒤늦은 논쟁이 벌어졌다. 피셔는 아우슈비츠에 대한 독일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만이 서독 국가 이성의 핵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5장 광란의 폭주, 유럽 단일 통화가 탄생되다
유럽연합은, 통일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추진한 것이다
1990년의 동독과 서독의 통일을 기해 독일 문제는 다시 한 번 수면 위로 부상했다. 근 40년에 이르는 세월동안 독일은 둘로 분단돼 있었다.
대륙의 재통일은 프랑스가 아니라, 독일을 대륙의 중심으로 이끌어냈다.
유럽연합은 어떤 면에서는 독일의 힘을 제한하기 위해 설립된 것이었다. 실상 이것이야말로 유럽 통합을 추진한 유일하고도 중요한 동력이었을 것이다. 결국 미테랑은 유럽 통합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로 합쳐진 독일에 대처하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절반의 주권이 아닌, 온전한 주권을 회복하자!-통일 후 독일에서 일어난 역사 논쟁
전후 독일은 패전국으로서 국제 사회가 자신들에게 부과한 전쟁 배상금과 자원에 대한 접근 제한 등 여러 제약과 결핍을 받아들이는 억제의 문화를 규범화했다. 그러나 우파는 이런 제한을 절반의 주권 국가와 동일시하면서 이런 비정상적 상태에서 벗어나자고 주장했다.
광란의 폭주, 유럽 단일 통화의 탄생
1991년 말 정부 간 회담에서 탄생한 유럽 단일 통화는 프랑스와 독일 간의 타협의 산물이었다. 독일과 프랑스의 타협안은 1992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에서 성문화되었다. 이로써 유럽통화연맹의 기반이 다져졌으며, 1999년에 독일 마르크화가 유로화도 대체되는 기틀도 마련됐다.
무력 사용을 요구하는 서방 국가들의 압박
1994년 독일 헌법재판소는 독일의 무장 병력은 의회의 승인 하에 유엔의 제재 차원에서 군사 개입이 필요한 국외 작전에 참여 할 수 있다는 헌법적 입장을 확실히 했다.
무력 사용을 반대하는 입장과, 인도적 차원의 무력 개입을 주장하는 입장 간의 대립
독일 대외정책의 중도 좌파적 이상주의 흐름은 피셔가 사민당과 녹색당이 연합한 적록 연립 정부에서 외무장관이 되었을 때 그 정점에 달했다.
두 번 다시 아우슈비치는 없습니다
1998년 가을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독일 최초의 적록 연립정부의 수장이 되었다.
독일이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일원으로 군사 개입을 하는 문제는 그리 녹록한 문제가 아니었다.
1999년3월24일, 후속 외교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고 상황은 더 악화된 가운데 대레이더 미사일을 탑재한 네 대의 독일 토네이도 전투기가 세르비아의 대공 방어 진지를 폭격했다. 1945년 이후 처음으로 독일이 전쟁에 참여한 것이다.
독일은 이제, 다른 국가가 되어가고 있다
동독과 서독의 재통일 이후 10여 년간의 독일 대외정책은 지속과 변화로 특징지어진다. 독일은 그동안 체코공화국과 헝가리, 폴란드까지 가입해 몸집을 보다 더 키운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일원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1999년1월1일을 기해 유로화가 사용되기 시작했을 때 파랑스의 전략은 먹혀드는 것처럼 보였다. 독일이 통일 이전보다 유럽 기구에 더욱 깊숙이 관여하게 된 데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마르크화조차 포기했기 때문이다.
6장 독일은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이제 서로를 그다지 필요치 않는 미국과 독일
9.11테러는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서 광범위한 미국지지 물결을 일으켰다. 9.11테러가 발생하자 슈뢰더는 미국과 독일의 굳건한 연대를 약속했다.
이라크 전쟁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독일
슈뢰더는 독일의 길을 언급하며 미국과 거리를 두었다. 그런데 독일은 알게 모르게 상당한 양의 군사적 원조를 미국에 제공하고 있었다. 먼저 독일은 터키 상공을 정찰하기 위해 독일의 공중 조기 경보 관제기를 투입하는데 동의했다. 또 터키가 이라크의 공격을 받을 경우를 대비해 패트리어트 지대공 미사일의 임무를 돕는 축전지용 미사일을 제공했다. 독일 해군은 미국 함대가 페르시아 만으로 이동하는 길목을 지켰다.
미국을 반대하는 낡은 유럽 VS. 미국을 지지하는 새로운 유럽
이라크 전쟁은 독일이 처음으로 중간순위와 절충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라크 전쟁이 벌어질 무렵데 독일의 국가 정체성에도 미묘한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독일, 자신들을 피해자로 인식하다
코소보 사태를 두고 벌어진 논쟁이 가해자로서의 독일인이라는 집단기억을 지배했다면, 2002년 후반부터 2003년 초중반을 달궜던 이라크 전쟁에 대한 논쟁은 피해자로서 독일인이라는 집단기억에 지배당했다. 이처럼 피해자로서 독일이라는 국민정서를 유발한 것은 2002년11월, 독일의 역사학자 예르크 프리드리히의 책『화재 Der Brand』의 출간이었다.
이제는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정상적인 국가가 되어야 한다
독일은 다른 주권 국가들처럼 자국의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정상화이다. 2003년 전쟁이 끝난 뒤 출간된 『독일의 길』에서 에곤 바르는 슈뢰더의 독일 길 개념을 다시 거론하며 그것을 정상성이라는 개념과 연결지었다.
두 번 다시 전쟁은 없다
맺는 글: 지정학적 딜레마에서 지경학적 딜레마로
다시, 독일문제가 출현하다
유럽연합의 차원에서 보면 독일의 경제는 2010년에 하버마스가 거인이라 칭할 만큼 프랑스를 비롯한 여타의 인접국들이 대적하기 어려우리만큼 팽창했다. 이렇듯 지경학적 형태로 보면, 독일 문제는 다시 출현한 것 같다.
독일은 패권 국가가 될 수 없다
현실은 이른바 패권 안정이론에 바탕을 두고 독일에게 리더십을 요구하고 있다. 유로존 위기가 발발하고 나서 독일이 수출한 것은 규율이었지 규범은 아니었다.
반독일 연합 세력은 구축될 수 있는가
늘 러시아의 위협을 느껴온 폴란드 같은 나라는 독일의 투자를 일종의 안보 보장책으로 여겼다.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힘이 채무국들에게 넘어갈까봐 노심초사하고 있다.
한스 쿤드나니 Hans kundnani
유럽을 무대로 활동하는 저널리스트이자 독일 문제 전문가이다. 옥스퍼스 대학교에서 독일어와 철학을, 콜롬비아 대학교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했으며,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옵저버 Observer》의 독일 특파원을 역임했으며 최근까지 유럽외 교협의회의 책 편집자로 활동했다. 현재는 영국 버밍엄 대학교에 있는 독일연구소의 선임연구원이자 베를린에 있는 독일 마셜 펀드의 수석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파이낸셜타임스, 월 스트리트 저널, 디 차이트, 르몽드 등을 포함한 전 세계 신문과 잡지 등에 독일과 유럽 위기에 대한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칼럼니스트로도 활약하고 있다.
동서독 통일 비용의 여파로 1990년대에 경제적으로 허약했던 독일은 이제 강한 제조업을 기반으로 한 수출 호황과 중국과 러시아의 우호 관계를 바탕으로 전 세계에 몰아닥친 경제 위기 속에서도 정치력이 아닌 경제력으로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있다. 하지만 독일은 본질적으로 동맹국들에게 얹혀 무임승차를 하고 있다. 마르크화에 비해 약한 유로화 덕분에 자신들이 취하게 된 부당한 이득은 결코 빼앗기지 않으려 하면서도 주변국들에게는 가혹하리만큼 엄격한 제재를 가하는 등 작금의 위기에 대처하는 독일의 모습은 총과 칼만 사용하지 않을 뿐 경제라는 도구를 무기로 활용하는 경제민족주의, 경제제국주의의 출현을 보는 듯 하다. 독일인들은 나치 집권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뼈아픈 역사를 통해 배웠고 이제는 그 교훈을 바탕으로 자신들이 변했다고 말하지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그들은 아직 변하지 않았으며 역사는 다시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옮긴이 김미선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원 불어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며 옮긴 책으로는 체 게바라 평전,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마야, 잃어버린 도시들, 보르레스와 아르헨티나 문학, 아이들이 너무 빨리 죽어요, 종이괴물, 몽테스키외의 로마의 성공 로마제국의 실패 등이 있다.
독일의 역습
1판1쇄 찍음 2015년9월1일
1판1쇄 펴냄 2015년9월5일
지은이 한슨 쿤드나니
옮긴이 김미선
펴낸이 권선희
펴낸곳 사이
전화 02-3143-3770
값 13,9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