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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와 함께 가장 어려운 성경 가운데 하나는
바로 욥기서입니다.
욥기서에 나오는 욥은
실제로 역사적 인물인가 문학속의 인물인가에서부터
"욥기서에서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라는 이해는
참으로 어려운 난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 가운데 어느 것 하나라도 어렵지 않은 것은 없지만
욥기서와 같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를 찾기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욥기서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이라는 사실을
믿음의 경지로 확신하기까지 험산준령인 것입니다.
욥기서는 잘 짜여진 각본이요,
시나리오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고. 또 사단의 말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욥과 욥의 친구들의 엄청난 지혜와 지식을 이야기합니다.
모두가 욥기서를 기록한 작가의 전지적 관점입니다.
특히 하나님과 사단의 대화는
구약의 묵시문학과 신약의 복음적인 정서와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마치 바벨론의 만신전에서
인간을 두고 신들이 시샘을 하는 신화나 우화와 같이 느껴집니다.
하나님과 사단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의 모습보다
하나님께서 사단을 악한 일에 부리는 천사처럼 느껴집니다.
실제로 구약 성경에서 사단에 대한 기록은
욥기서를 비롯하여 역대기와 스가랴서에 기록하였는데
하나님의 계신 곳을 드나들며 악한 일에 하나님께서 부리는 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욥을 사단이 시샘을 하고....
하나님은 욥을 은근히 사단에게 자랑을 합니다.
하나님과 사단의 이러한 설정은 실제적 상황이 아니라
욥기서 저자의 문학적인 설정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욥기서는 고난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세우고....
하나님과 사단, 그리고 지혜자를 총동원하여
전지적 작가 시점의 창의적 문학으로서의 성경을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천국 복음의 생명을 담아내신 것처럼.......
성경 기록의 저자들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다양한 장르로 기록하는 탁월한 성령의 염감을 받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욥기서의 탁월한 창의성은
욥기 저자의 창의적 신앙의 위대함이 탄성으로 느껴질 따름입니다.
또한 욥기의 배경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성경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동방의 우스 땅 사람입니다.
성경의 우스는 사람의 이름으로
노아의 아들 가운데 셈의 네째 아들 아람의 첫째 아들로 나옵니다.
그 다음의 우스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맏아들 이름이 우스입니다.
고대에는 족장의 이름이
곧 그 땅의 지명인 것을 감안하면 동방의 우스 땅이란
아브라함이 동생과 함께 살았던 갈대아 우르 지방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그리고 우스는 에돔의 후손 가운데 다산의 아들로 나오는데
훗날 예레미야는 우스 땅과 에돔을 동일하게 보았습니다.
어쩌면 욥은 우스 땅 에돔의 후손일수도 있습니다.
에돔의 후손 가운데는 그나스 사람 갈렙과 웃니엘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욥의 고향인 우스 땅이 어느 곳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어쨋던 우스 땅의 사람 욥에 관한 이야기는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하는 이스라엘의 라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욥기의 저자는 미상이지만 여호와의 이름을 아는
이스라엘의 배경을 가졌습니다.
욥은 신앙의 중원인 이스라엘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천외천의 신앙 인물입니다.
이스라엘의 언약 백성의 후손이 아닌 사람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에 관한 신앙을 어떻게 가졌느냐는 것은 영원한 수수께끼입니다.
욥기의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도 하고 사단의 말도 하고
욥의 친구와 욥의 말을 하는 전지적 시점의 작가입니다.
그리고 욥의 신앙을 보아도 아브라함의 언약 신앙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욥이 번제를 드렸다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욥은 자신을 위하여 번제를 드린 것이 아니라 자녀들을 위하여 번제를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께 언약의 복을 감사로 번제를 드렸지만
자식을 위하여 번제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레위기법에서도 번제를 드려라고 하였지만.....
제사장이 아니면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번제를 드리는 것은 모세 율법의 정신이 아닙니다.
그러나 욥이 자녀를 위하여 드린 번제는
창의적으로 하나님을 섬긴 신앙으로 욥기서의 저자는 휼륭하게 평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욥기서의 마지막 부분에도
욥의 친구들에게 "수송아지 일곱과 숫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엘리바스에게 직접 말합니다.
속죄할 사람에게 가서 번제를 드리고....
그 사람의 용서하는 기도를 들어 용서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번제의 정신은
레위기법의 정서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주기도문 정신입니다.
용서할 사람 용서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레위기법의 정서에는 맞지 않지만
욥을 변호하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은 아브라함을 나의 벗이라고 불렀던 것과 같은 정서입니다.
욥기서는 아브라함 언약의 맥을 이은 레위기법의 영향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처럼 욥에게 직접 나타나서 말씀을 합니다.
욥을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으로 세웠다면......
아마도 이스라엘과는 또다른 신앙의 문화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욥기서에 나타났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직접 나타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이라는 언약의 후손을 가졌는데
욥은 신앙의 후손이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류의 역사 어디에도 욥의 신앙을 물려받아
독특하게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종족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기서가 실제적 역사 인물이 아니라
문학 속의 신앙적인 교훈을 주기 위한 설정 인물이라고 많은 신학자들은 주장을 합니다.
설정 인물에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욥기서를 기록한 저자는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저자는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계시와 묵시로 기록하는 것입니다.
성경 저자는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대리인과 같습니다.
세상에 기인이사가 많지만
하나님의 신탁을 받은 사람들은 기인이사 가운데서도 가장 신비로운 인물입니다.
성경 저자의 권위는 곧 하나님의 권위요,
성경 저자의 신앙은 등장 인물의 신앙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기서의 욥이 실제로 역사적 인물인지,
아닌지에 관해서는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실제적 인물이었어도 아브라함이 창세기에서 자기에 관한 기록을 모르듯이
욥, 역시도 자기에 관한 욥기서의 기록을 모르는 것입니다.
홍길동전의 홍길동이 실제 인물이었어도
문학으로서 홍길동전의 이야기를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 인물이나 역사적 사실이라고 해서
모두가 성경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담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뜻하신 바를 선하고 아름답게 이루시는 것입니다.
진실이 아닌 거짓에 하나님의 뜻을 담아낸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역동적인 생명력을 가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라"는 욥의 아내의 말은
직접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과 교훈을 담아내는 훌륭한 소스입니다.
양심적인 사람은 진실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거짓도 잘못된 것이 나쁘다는 훌륭한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문학적 설정(비유)으로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담아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해입니다.
바로 눈높이를 맞추어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최선이요, 사람들을 배려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입니다..
이것을 도무지 받아 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양심적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못하는 사랍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눈에 보이는 진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합니다.
눈에 보이는 거짓은
눈에 보이지 않는 거짓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창조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창조와 비교 대상이 아닙니다.
진실과 거짓 모두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담아내는
긍정과 부정의 소스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을 하신다면....
믿음은 고사하고 그 하나님의 영광과 권위 앞에 살아 남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 저자의 기록된 말씀으로 하나님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을 배려한 최고의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지적 작가 시점의 성경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도 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도 알고 결론도 만들어 내며 신본주의적 완벽한 품평도 합니다.
이것을 믿어야 하는 성경 학자의 고민은
결국 자유주의 신학자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욥기서는 분명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욥이 고난을 받아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로 긁고 있을 때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라" 며 욕설을 퍼붓고는 떠나간 욥의 아내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욥의 친구들이 고난 가운데 있는 욥을 찾아와
그럴듯한 말로 욥의 고난을 당연한 것으로 말하지만
욥과의 극단적인 대립을 이루는 그들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욥의 친구들을 향하여 억하심정을 토해내는 욥의 말.....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욥기서의 저자가 따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사단, 욥과 욥의 아내, 욥과 욥의 친구들이 하는 모든 말은
고난이라는 주제를 이해하는 하나님의 뜻과 교훈을 담아내는 창의적인 소스들입니다.
욥기서는 오직 "고난"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가진 완벽한 문학으로
하나님의 뜻과 교훈을 담아낸 최고의 성경입니다.
욥기서를 기록한 저자의 신앙과 지성은
인문학적인 감각으로 볼 때 세익스피어를 훨씬 능가하는 것입니다.
욥기서의 지성적이면서도 역동적인 반전의 드라미틱한 내용은
욥기서의 위대한 작품성을 말해 줍니다.
욥기서를 읽지 않고 욥기서의 내용을 문학적 감각으로 섬세하게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지성과 영성이 메마르고 거친 사막과 같은 사람입니다.
욥기서의 내용은 최고의 지성과 영성이 격돌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완전한 판결이 내려지는
탁월한 문학성을 갖춘 최고의 성경 작품입니다.
욥기서의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총 망라한 인류 역사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등장하고 또 사단이 등장합니다.
인류 역사에 가장 완벽한 신앙 인물이 등장을 하고,
삶에서 오는 불행과 고난의 문제를 탁월한 지혜와 지식을 가진 현자들이 상담사로 등장합니다.
하나님과 사단....
욥과 욥의 친구들이 벌이는 대격돌은
신앙 서정과 진지한 삶이 묻어난 한 편의 초대형 블록버스터 영화와 같은 불멸의 서사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어떤 주제를 가지고
이렇게 갈등과 긴장이 고조되는 논의를 집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성경은 욥기서가 독보적입니다.
욥기서의 총 주제인 고난이라는 문제를
최고의 패널들이 어떻게 이해를 하고 풀어가는 가는가를 살펴 보겠습니다.
첫번째로 고난을 당한 욥 자신입니다.
욥은 어느 날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 많은 재산 다 잃어 버리고 귀한 자식들마저 모두 일어 버렸습니다.
부귀 영화를 함께 누렸던 아내마저 저주의 말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몸의 헌데를 앓으며 중병에 걸려 불행의 밑바닥을 경험하였습니다.
세상 어떤 사람이 격는 크나 큰 불행도
욥의 불행에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고....
오직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숨을 몰아 쉬고 있는 욥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욥은 잃은 것을 원망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하시는 모든 일에 대하여 감사하며 찬송하였습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고난을 감사로 예배하며 찬송하는 욥의 신앙은
환난과 핍박을 받으며 하나님의 계시와 묵시를 전하였던 선지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예배와 찬양으로 고난을 반전 시키는 욥의 신앙은
복음을 전하다가 채찍질 당하고 능욕받는 일을 합당하게 생각하며 기뻐하였던 사도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병으로 고통받으며 죽음을 앞두고도 원망하지 않는 욥의 신앙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며, 쇠사슬에 매여 감옥살이하면서도
항상 주 안에서 기뻐하고 또 기뻐하라고 외쳤던 바울의 모습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고난을 기뻐하는 신앙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분명한 인식에 의한 믿음입니다.
이것이 신본주의 믿음입니다.
욥의 신앙은 신본주의 믿음으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고백하는 생명의 향기를 아름다운 믿음으로 가졌습니다.
둘째로 욥의 아내의 모습을 살펴 보겠습니다.
욥의 아내는 동방의 부자요, 흠 없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욥과 함께 살면서
일곱 아들과 세 딸을 낳아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욥의 의로운 삶으로 인하여 부귀와 존귀와 영광을 누리며 살았던 욥의 아내......
그러나 환난의 비바람이 몰아 쳤을 때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라"며 저주의 욕설을 퍼붓고 떠났습니다.
욥의 아내.....
오늘날 욥의 아내와 같은 부인을 두고 사는 남편들이 많습니다.
어쩌면 모든 남편들이
욥의 아내와 같은 부인을 두고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잉꼬 부부와 닭살 커플들......
욥과 같은 극심한 환난의 시련을 겪고서도 그 사랑 변하지 않으면.....
욥의 아내보다 나으며...욥의 복을 뛰어넘는 처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단에게
욥처럼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욥의 성품과 신앙을 한평생 곁에서 지켜보며
부귀와 존귀와 영화로 누렸던 욥의 아내였습니다.
욥보다 더 어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 없다고 볼 때
세상의 모든 남편들은 욥의 아내 보다 더 나은 아내를 사실상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사실상 욥보다 더 나은 신앙 인품으로 부부로 살면서 생활 속의 감동을 주어도
욥의 고난을 당하면 어떤 상항이 발생할찌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옛 말에 "돈 없으면 친구도 없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영광은 함께 누려도 고난을 함께 누리지 못하는 것은 사람의 한계 상황입니다.
지난 1998년 IMF가 찾아 왔을 때......
직장 잃은 남편들은 아내의 따뜻한 밥상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사랑해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여 자녀를 낳았지만
돈 없고 직장 잃었다는 그 하나만의 이유로 집에서 쫓겨나 노숙자가 되었습니다.
욥의 아내를 경험하였던 수 많은 남편들은
욥처럼 신앙의 내공을 쌓지 않아 욥의 신앙으로 응수를 하지 못하였고,
세상을 비관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허다하였습니다.
영광은 함께 하여도
고난을 함께 하지 못하는 현실을 미처 대비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극찬을 아끼지 아니하였던 욥은
재산과 자녀를 잃었을 때 예배와 찬송으로 반전의 신앙으로 담아내었고......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욕하며 저주하는 아내를 향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였습니다.
욥의 아내는 단순히 갑작스런 불행에 대한 원망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불행에서 지켜주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분노의 불신과 반역이었으며,
욥의 지극한 사랑에 대한 모독이었습니다.
성공과 번영의 무속적이고 기복적인 인본주의 신앙은
환난과 고난을 당할 때 욥의 아내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아직 큰 고난과 환난을 겪지 않고 .....
잉꼬 부부로 살 때 행복을 사랑과 행복을 많이 저축해 놓아야 될 것입니다.
재난이 닥치면 탄식과 배신만이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일에 범죄치 아니하는 욥처럼
유비무환의 임전태세 신앙을 굳건히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욥과 욥의 친구들이 벌이는 난상토론은
아무래도 다른 관점에서 새로운 주제로 이야기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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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서의 하나님 말씀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실제적 믿음의 도전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