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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왕의 일과와 업무 관찰 일기
조선시대에 왕명(王命)의 출납(出納)을 관장하던 승정원에서 매일매일 취급한 문서와 사건을 기록한 일기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입니다.
조선시대 왕의 비서실인 승정원(承政院)에서는 날마다 일기를 썼습니다. 왕의 일과와 지시내용, 조선 곳곳에서 보고한 내용, 신하들이 올린 상소문 등을 기록했지요.
조선 초기부터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뺏길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한 승정원 일기(承政院日記)는 1999년 4월 국보 303호로 지정되었고,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는 288년동안 2억 4천 2백 50만자로 기록된 총 3,243책으로, 보통 한 달 단위로 묶어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승정원 일기(承政院日記)는 조선 개국 초부터 일기가 있었으나, 광해군 이전의 일기는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때 불타 버렸고, 1623년부터(인조 1) 1894년(고종 31)까지 270여 년간의 일기만이 현존합니다.
매일 매일의 기록인 <승정원의 일기>는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① 제일 첫 머리에는 날짜와 날씨
② 그날 근무한 승지와 주서(注書)의 이름을 기록
③ 국왕의 소재
④ 일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그날의 국정을 자세히 기록
🤳 원전 맛보기
"임금이 양정합(養正閤)에 나아가 영의정 이광좌를 비롯한 신하들을 만났다. 이때 동궁도 함께 하였다."
영의정 : 오늘 동궁이 책을 읽으려고 할까요?
영조 : 오늘 동궁이 책을 읽고 싶어한다.
(동궁이 나지막한 소리로 글을 읽었다.)
영조 : (웃음을 지으며) 글씨를 쓰겠느냐?
내시가 종이 두 장과 함께 붓과 벼루를 가져왔다.
동궁이 붓을 잡고 글자를 썼다.
영조 : 글자 쓰는 건 어려워하지 않는데, 글 읽는 건 몹시 싫증을 낸단 말이야.
- 1738년 (영조 14년) 1월 21일 -
💬 저자파일
승정원의 정7품 관원인 주서(注書)
승정원(承政院)은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처럼 국왕 옆에서 나랏일에 관한 모든 업무를 도와 처리하던 기관입니다. 승지 6명(정3품 당상관), 주서 2명(정7품), 서리 28명으로 구성되어 있지요.
왕조국가인 조선시대에는 국왕이 판단하고 결정을 내려 명령을 내리면 그것이 곧 법이었어요. 그러니 국왕의 명을 출납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고, 이를 맡아서 처리하는 곳이 바로 승정원(承政院)이었답니다.
승정원의 승지(承旨)가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고위 관직이라면, 주서(注書)는 그 밑에서 문서를 작성하던 행정 실무자로 그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기록이었습니다.
주서 2명은 매일 상, 하번으로 나뉘어 국왕이 신하들과 국정을 논의하고 처결하는 모든 자리에 입시(入侍)해 그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어떤 기계의 도움도 받을 수 없던 그때, 대화를 기록하는 방법은 그저 붓으로 최대한 빠르게 쓰는 것이었어요.
지금도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통역하는 일은 쉽지 않은데, 음성으로 발설된 한국어를 전혀 다른 표현 수단인 한자로 그 자리에서 바꿔 적는 작업의 어려움은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서(注書)는 국왕과 신하의 대화를 일단 될 수 있는대로 모두 받아 적어 속기록에 해당하는 초책(草冊)을 만들었고, 그날그날 기억을 더듬거나 예문관의 사관인 한림(翰林)이 쓴 기록과 대조해 그 내용을 보충했지요.
상소처럼 서면으로 된 문서는 서리(胥吏)가 베꼈고, 이 두 자료를 합쳐 하루치의 일기가 완성되면 그것을 보통 한 달, 또는 반 달씩 묶어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표지에는 그 일기가 해당하는 연월일을 적어 승정원에 보관했답니다.
승정원의 주서(注書)가 얼마나 책임감을 가지고 일기를 썼는지 그 예가 있습니다.
승정원의 주서(注書) 민응세(閔膺世)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왕이 있는 곳이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어요. 그런데 갑자기 공부하던 영조가 천둥소리에 놀라 책상 밑으로 몸을 숨기는 게 아니겠어요?
주서 민응세(閔膺世)는 이 상황을 재빨리 적었답니다.
"영조 40년 10월 1일, 여느 때와 마찬가지고 저녁 공부를 마치고 약방에서 들인 탕제를 마시던 영조는 갑자기 들려오는 천둥소리에 놀라 책상 밑으로 몸을 숨겼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는 매일 매일 기록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으며, 나라에 일어난 일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우리 조상의 위대한 기록 정신을 엿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료적 가치에 있어서도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비변사등록과 같이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에 자랑할 만한 자료입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는 그 내용이 방대해 번역만 해도 100년이 걸리는지라 아직 완역판을 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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