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변주곡을 들으면서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피아니스트”를 떠올린 건 우연이 아니었다.
굶어 죽기 직전에 숨어들어간 독일군 장교의 집에서 스필만(애드리언 브로디가 연기했다)이 연주하게 된 쇼팽의 발라드 1번 g단조와 정전 협정 60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김미현씨가 연주한 Bahk
Junsang 편곡의 아리랑 변주곡은 시,공간을 넘어 나에게 같은 멜로디로 다가왔다.
적군인 독일군 장교 앞에서 조국의 작곡가인 쇼팽을 연주하는 스필만과 캘거리에서 제일 좋다는 잭 싱어 홀에서 한국전에 참전한 캐나다의 참전 용사들과 조국을 떠나 온 이민자들 앞에서 연주된 아리랑 변주곡은 물론 다르다.
아리랑은 한국의 혼 그 자체이며 자존심인 것처럼 쇼팽은 폴란드의 자존심이다.영화 “피아니스트"가 배경 음악 전체를 쇼팽으로 사용하고 있음은 쇼팽에 대한 경의이자 전쟁과 인간과 음악의 상호 작용을 표현하고자 하는 영화에서의 적절한 장치이다.
아리랑 변주곡을 프로그램 한 복판에 위치한 것도 같은 의미가 아닐까라는 점에서 난 “피아니스트”란 영화를 떠올렸던 것이다.
프로그램의 전체적인 짜임새도 그런 맥락으로 보인다.
도입부에서 전통 무용과 음악으로 시작함으로 캐나다와 대비되는 오랜 역사를 가진 한국을 시간적으로 도입을 하고 묵직한 첼로 연주로 전개를 한 다음, 절정인 클라이맥스에서 아리랑 변주곡을 시원하게 쏟아 붓고 나서 한인 중창단이 화려하게 장식한 가곡 “향수” 그리고 오케스트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 그 구성이 우리들의 자랑스런 젊은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기획한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하니 대견스러웠다.
음악의 목적이 무엇일까?
아니 음악에 목적이 있을까? 혹 있다면 그 중 하나가 치유가 아닐까?
우리는 흔히 시간이 흐르면 아픔의 기억은 치유된다고 이야기한다.과연 그럴까?시간이 아픈 기억을 흐리게 할 순 있겠지만 말끔하게 치유되었다고 말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
완전한 치유는 그 기억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거기에 음악이 있음은 물론이고 영화 “피아니스트”가 그런 이야기의 하나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전쟁이 끝나면 무엇을 하실 건까요?라는 독일군 장교의 물음에 스필만은 이렇게 답한다.”연주를 해야지요”
우리의 젊은이들은 그 날 참석하였던 참전 용사들의 아픈 기억을 치유했다고 믿는다. 아울러 그들은 계속 연주를 할 것이고 우리는 또 그 연주를 들으며 다른 아픈 기억들을 치유할 것이다.
한 가지 더.
난 이번 콘서트를 통해 와인이나 친구만 오래된 것이 좋은 게 아니라 첼로라는 악기도 오래된 것이 좋다는 걸 알았다.물론 그 첼리스트의 연주도 뛰어났지만 첼로 자체에서 흘러 나오는 그 선율은 콘서트 홀 전체와 나를 취하게 만들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한 번도 못 마셔 본 300년 묵었다는 와인을 마신 것처럼….
전쟁을 다뤘지만 역시 피아노와 "As times goes by"라는 멋진 주제가가 나오는 영화 "카사블랑카"엔 이런 대사가 있다.
“Here’s looking at you, kid”
한국식 번역은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라고 한다. 오역이라고 얘기하지만 이게 훨씬 더 멋있다.
그래서 이 글의 마지막은 이렇게 장식하고 싶다.
“당신의 첼로에 건배! ”
첫댓글 올려 주신 글이 너무 멋집니다. 콘서트에 이은 또 다른 감동이며 마음 한 구석에 조용히 스며있어 깨닫지 못하고 있던 감정을 흔들어 일으킵니다. 글의 힘인가 봅니다.
감사합니다. 과찬이구요. 감동을 잊어버릴까봐 빨리 쓰느라 서둘렀더니 문맥이 영 엉망이네요.
문맥이 엉망이면 다시 쓰세요!!!
ㅋㅋㅋ 죄송...!
집사님 글에 취했습니다.
엉망인 이유는 피아니스트와의 연결 고리가 허술하다는 점과 음악의 치유와 목적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너무 간략하다는 점(먼저 음악의 결을 얘기하고 그 결 속에 치유가 나와줘야....)
그리고 한인 중창단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점(이 부분은 페북에서 얼럴뚱땅 넘어갔지만 어쨋던 젊은층과 중년의 상호 작용을 통한 노년층의 위안을 쓸려다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서 걍 생략)
이 정도만 해도 문제투성이
다시 쓰려했지만 에이 걍 놔뒀지
그래서 엉망이라 표현했던 것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