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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여행/시사 스크랩 선종시대의 반철학적 사유
한새지기 추천 0 조회 10 08.12.24 19:1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선종시대의 반철학적 사유

 

 

선종은 의식-이성적 영역 철저히 부정
이성적 지능 벗어나 자연 본능 회귀 강조

 

교종시대의 불교사상이 이성의 철학은 아니지만, 인간의 사유를 통하여 이해케 하는 길을 가기에 교종은 철학적 방편을 쓰고 있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선종은 철저히 그런 방편을 무시한다. 그래서 반철학적이라고 부른다. ‘부처님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똥막대기’나 ‘뜰앞의 잣나무’라는 중국 대선사들의 응대는 철저히 철학적 사유를 우습게 여기는 발상이라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선종은 의식과 이성의 영역에 와닿는 말과 심지어 사유 가능성을 철저히 부정한다.

선종은 의식의 언어를 지운다. 선종은 무의식의 영역으로 마음이 직입할 것을 도모한다. 진정한 마음의 무의식적 언어를 발견하기 위하여 오감의 의식과 오감의 데이터를 잠재우는 마음의 평정심을 얻어야 한다. 마음의 평정심은 요별경식(了別境識=오감과 의식)의 느낌을 고요히 하는 길을 통하여 얻어진다. 요별경식의 느낌을 고요히 하는 길은 오감의 작용을 잠재우는 수면으로서 가능하지 않다. 산란한 의식의 마음도 선의 길을 방해하지만, 또한 잠자듯이 멍청해지는 무기(無記)도 선의 입문이 안된다. 선은 의식의 작동을 차단하고 의식을 고요하게 하는 가장 단순한 무의식적 열림의 순간을 뜻한다.

앞의 글에서 무의식의 양식은 사회적 무의식으로서의 제7식인 말나식과 자연적 무의식인 제8식으로서의 아뢰야식으로 나누어진다고 언설한 바가 있었다. 사회적 무의식은 인간이 사회생활을 영위함으로써 자아우선의 이기적 경향을 하나의 무의식으로 터득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사회생활을 통하여 경쟁심과 이기심, 그리고 분별심을 갖게된다. 모든 이기주의적인 인간의 무의식적인 경향은 다 사회생활의 과정에서 얻어지거나 또는 그 습기에서 생긴다. 사회생활은 인간됨의 불가피한 과정이지만, 그 과정이 바로 인간에게 선악의 이중성을 심어 놓는다.

그렇다고 사회생활을 지우고 자연상태로 그냥 지속한다는 것은 인간조건에 맞지 않는 공상에 불과하다. 선(禪)은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사회생활을 지속하면서도 자연상태의 무구한 본능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일종의 자연회복운동과 다르지 않겠다. 선은 사회생활의 불가피한 지능을 자연상태의 본능으로 되돌리려는 마음운동에 다름 아니겠다. 인류는 사회생활을 통하여 본능을 아주 반도덕적인 타락의 양식으로 간주했다. 즉 이기적이고 소유욕적인 욕심의 양식으로 본능을 여겨 도덕적인 지성의 힘으로 그 본능의 이기심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명분상으로 생각한 주장이지만, 새빨깐 거짓말이다.

무의식의 본능은 의식의 주장에 의하여 약간 지연되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극복되지 않는다. 선은 자연에서 모든 동식물이 아주 쉽고 아주 간결하게 알아차리듯이 그렇게 아는 본능을 다시 회복하려는 운동이다. 지진이 곧 일어난다는 것을 동물들은 자연히 알아차린다. 인간만이 그 본능을 사회생활에서 상실하여 멍청하게 앉아서 당한다. 인간은 사회생활을 통하여 그 자연적 본능을 잃고 지능(지성)의 방편을 간접적으로 추론해서 인식하려 한다. 본능은 지능처럼 간접적인 추론을 거쳐 일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높고 물이 깊듯이 직접 직관해서 안다. 간접적인 추리가 아니라, 직접 직관으로 알아차리는 것은 안긴이 자연을 다시 재발견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런 동물적 본능을 인간은 직관이라 부른다. 인간이 순간에서 순간으로 연결되는 직관의 능력을 터득하기 위하여 자연과 공명하는 자연성을 들어내기만 하면 된다. 이 자연성이 불성이다.

 

불교는 존재자적 사고 방식 멀리할 뿐
존재론적 사고 방식 멀리하는 것과 달라

 

우리는 지금 본능이란 말을 왜곡되게 쓰고 있다. 본능은 인간에게 남아 있는 충동적인 육체적 경향을 지칭하는 것으로 읽고 있다. 성욕이 그것의 대표적 보기에 해당한다. 물론 성욕이 동물의 생물학적 욕망이긴 해도 인간의 성욕은 종족을 보전하려는 자연적 본능인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성욕은 인간의 사회적 욕망이라고 읽어야 한다. 성욕은 동물처럼 어떤 일정한 주기의 제약을 받는 것이 아니라 수시적이다. 성교는 근친혼의 금지는 물론 결혼식의 제도를 통하여 사회적 인정의 절차를 밟아야 한다. 성욕은 자연적 본능의 기원을 갖고 있지만, 나머지는 모두 사회적 규범을 따른다. 성욕을 해결하려는 성교는 남들의 부러움과 인정을 받으려 하는 소유적 가치의 취득을 은연중에 노린다. 사회가 공인하는 성교가 아니라도, 모든 성욕은 자연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적 지배욕의 표현이다.

자연은 살려고 하는 생존욕망(의지)을 위하여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자발적인 힘을 발양한다. 참선은 자연의 원초적인 그 힘을 일깨워 우주적인 일심과 회통하려 한다. 자연의 그 힘이 존재론적인지 소유론적인지 애매모호하다. 동식물이 자기의 생존을 위하여 타자의 에너지를 취득해야 한다. 이것은 소유론적이다. 그러나 동식물은 타자의 기(氣)를 흡입하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또한 타자에게 준다. 받으면서 준다. 이것은 마치 자연에서의 존재양식은 받으면서 그 이상을 주는 거래와 같다. 인간사회의 거래는 시장에서처럼 주는 것보다 오히려 이윤이 많은 것을 선택하는 경제거래인데, 자연의 교환은 그만큼 받고 그 이상을 주고 가는 비경제적 교환이다.

선종은 인간이 이와 같은 자연의 우주심(일심)에 참여하여 비경제적 교환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자연의 본능적 사고방식을 터득하는 길을 익힌다. 그 사고방식이 바로 불성의 존재방식에 속하기에 선종은 인심이 사회생활의 감옥에 갇히지 않고, 바로 자연처럼 본능적으로 불성의 꽃을 피워 올릴 것을 발원한다. 그러나 선종은 사회생활을 마음에서 지우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선종은 송나라 대혜종고 선사의 말처럼 시중의 중생들과 함께 활동해야 살아 있게 된다고 한다. 사회적 무의식인 중생의 말나식이 우글거리는 바로 거기에 자연적 무의식인 아뢰야식의 원본인 공사상이 실존적으로 체험되기 때문이다.

공사상이 실존적으로 체험되기 위하여 요별경식에 의한 존재자적인 생각이 다 중단되어야 한다. 존재자적인 모든 명사적 분류가 사라지고 그 뿌리가 하나로 존재하고 있다고 밖에 달리 표시할 수 없는 ‘구지일지(俱一指=불법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단지 구지화상이 손가락을 하나 들어 보이다)’의 행위는 선이 지닌 본능적 깨달음을 알린다. 존재의 동사가 삼라만상에 다 술어로서 적용된다는 것은 바로 삼라만상이 원효대사가 기술했듯이 모두 허공이라는 ‘무본지본’(無本之本=바탕이 없는 바탕)에 담겨 있다는 것과 같다. 이 허공이 아뢰야식의 본바탕이다. 이 이뢰야식의 청정한 본바탕은 원효대사가 읊은 것처럼 제9식으로서의 아말라식이다. 아말라식은 아뢰야식이 존재자적(의식적)인 사고방식으로 물들지 않으면 된다. 그것이 불성이고 공성이다.

가끔 불교가 공사상을 강조하니까 불교가 존재론적 사고방식을 아주 멀리 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착각한다. 불교는 존재자적인 대상적 사고방식을 멀리하고 소유론적 생각을 기피하지, 결코 존재론적 사고방식을 도외시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아직도 이것을 오해하는 경향이 짙다. 이것은 틀렸다.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www.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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