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쉰 해가 지났네요! 사문(沙門) 고독의 길에 나섰던 소납의 이 세월은 스물아홉의 나이에 궁성을 넘어 출가하여 사문의 길에 나섰던 싯달타 태자가, 서른 다섯에 대각 성도하여 석가모니 붓다로서 법륜(法輪)을 굴리기 시작한 뒤로 마흔 다섯 해인 여든에 원적(圓寂)하실 때까지의 51년에 근사한 것입니다. 1968년 늦가을, 열아홉의 청년 이영호가 여래께서 보여주신 그 모범의 길을 찾아, 한국 경기도 의왕의 집을 나서 경상도 합천의 가야산 해인사에 이르러 행자가 되고, 다음해 가을에 도원(道元)이라는 이름으로 사미(沙彌), 오년 뒤부터는 진월(眞月)이라는 이름의 비구(比丘)가 되어 지내온 시간입니다. 석존보다 10년 일찍 출가하였지만, 그분이 돌아가신 나이에 이르려면 아직도 10년이 더 남아 있으니, 이제 여생의 합당한 마무리를 위하여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나온 반백년을 잠시 돌아보며, 젊은 후배들에게 무상(無常)의 간접체험과 참고거리로, 노승의 에피소드를 조금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지난 7월 중하순에 미국을 중심으로, 인간의 “달 착륙(Moon Landing)” 50주년을 기념하는 보도를 깊은 감동으로 시청하였습니다. 50년 전 당시에 소납은 아직 행자의 과정에 있었지요. 해인사에는 그 무렵 가야산 계곡의 물을 이용하여 자가발전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전기사정도 좋지 않았고, 흑백이나마 텔레비전은 몇 대 없었을 줄 압니다. 지금은 없어진지 오래되었지만, 당시 가야산 상봉에는 국군의 통신부대가 있었고, 부대장과의 개인적 인연으로 그곳에 올라가서 미국 아폴로11호의 달 착륙 실황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감격하였고, 막사 안에서 환호하며 노래와 춤을 추던 병사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전까지는 대부분이 밤하늘에 뜨고 지던 달을 보며,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또는,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또는 “애들아 모여라! 달 따러 가자, 장대들고 망태 메고 뒷동산으로” 등의 시와 노래하는 대상이었고, 더러는 선녀와 같이 의인화 되었던 인문학적 달에, 인공 탐사선의 기착과 닐 암스트롱의 걸음 뒤로부터는 자연과학적 달로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지요. 지구에서 바라보던 한 뼘 크기의 달에 가서, 그곳의 거대한 지평을 넘어 한주먹 크기의 지구의 모습을 (지구에서 보던 달과 같이)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그 속에서 더불어 사는 수십억명의 인간들이 꾸려가는 갖가지 살림살이를 되돌아보고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환경과 생태계 및 지구촌 인류 공동체의 미래 운명과 광대한 우주속의 인간 존재와 상황을 과학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게 되었지요.
50년 전 가야산 해인사는 두해 전에, 현대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선원과 강원, 율원과 염불원 등을 모두 갖춘 종합수도장으로서 총림으로 재정립되었고, 당시 대한불교조계종 최고 어른이신 종정 고암큰스님이 용탑에 주석하고 계셨으며, 초대 방장으로 성철스님이 취임하여 청정한 수행가풍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당시 행자로서 방장스님의 시자로 임명되어 수계이후까지 몇 달간 더 그분을 가까이서 모시며, 직접 화두를 간택하고 참선수행에 대한 지도를 받을 수 있었음은 매우 다행스런 인연이었습니다. 그 이전 행자시절에는 당시 해인사 주지와 선원 유나 소임을 보시던 지월스님으로부터 밤마다 개인교수로 <초발심자경문>에 대한 강설을 들었고, 수계이후에는 강원에서 강주 지관스님으로부터 <사집>강의를, 율주 일타스님으로부터는 <범망경>과 율행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던 시절이 행복하게 추억되며, 지금은 모두 입적 타계하신 여러 선지식 어른들과의 법연이 새삼 고맙고 그리워집니다. 아울러 30여명의 행자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저녁예불을 마치고는 대적광전에서 <백팔대예참문>을 외며 큰절을 하면서 보현행원을 다졌던 열성, 선원 수좌스님들과 함께 하안거 동안거 기간에 가졌던 일주일간의 장좌불와 용맹정진의 진지했던 분위기, 건조한 봄철에 가끔 일어나는 산불을 끄기 위해서 한밤중에도 대중들과 함께 험난한 산등성이를 날쌔게 오르내렸던 기억 들이 전설같이 추억됩니다.
숙생의 인연으로 출가한 본사,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고려대장경>과 그 저장고 판전을 돌며 해인삼매를 마음에 새겼던 영혼의 고향, 성스런 수행총림 해인사, 그곳에서 지냈던 젊은 시절이 새삼 희유하게 생각됩니다.
60년대 말기와 70년대 초기의 산중 불교계는 정화불사의 연장선에서 스님들의 수행분위기가 고조되었고 종단도 안정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동시에 사회 속의 재가불교계도 구도의 열기가 컸었다고 짐작됩니다. 이를테면 당시에 한국 <대학생불교연합회> 줄여서 “대불련”으로 통했던 청년단체의 활동이 왕성했었음을 기억합니다. 이를테면, 해인사에서 열렸던 대불련 지도자대회에는 전국에서 250여명의 학생대표들이 모여 집중 수련대회를 가졌었는데, 그 당시에 대학생 서클 또는 클럽으로는 가장 숫자도 많았고, 참여활동도 돋보였다고 들었습니다. 육 해 공 삼군사관학교를 포함하여 전국의 규모 있는 대학에 대불련 지부가 없는 곳이 없었고, 다른 종교계보다 인기를 누렸다고 합니다. 대한전척 등 유수의 기업을 경영하였던 덕산 이한상 거사가 후원에 앞장섰고, 수련대회 즈음에 발생한 태풍으로 그분이 진행하던 팔당댐공사가 홍수로 낭패를 보게 되었지만 현장수습을 미루면서, 억수같이 쏟아지던 빗속을 달려 수련대회에 참석하여 격려의 말씀을 해주었음을 기억합니다. 그분은 말년에 미국 캘리포니아 카멜로 이주하여 삼보사를 창건하고, 삭발 정진을 하다가 작고하였지요.
당시 대불련 출신의 출가자도 적지 않았고, 불교계의 사회적 위상과 이미지도 좋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요즈음의 대불련 상황 및 종단의 사회적 평가와 비교해보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됩니다.
소납은 70년대를 산중에서 전통적인 수행에 몰입하여 지냈습니다. 1974년 가을, 해인사 법보전문강원 (현해인승가대학)에서 각성스님 지도로 대교과를 졸업하고, 그 즉시 영취산 극락 호국선원으로 가서 조실 경봉선사를 모시고 겨울 안거를 시작하여 다음해 여름안거까지 마치고는, 조계산 조계총림 수선사로 가서 방장 구산스님과 학산, 혜암, 적명, 정광, 무여, 휴암 스님 등의 구참 스님들과 동안거와 하안거 정진을 계속했지요.
1976년 겨울안거는 혜국, 연수스님과 조계산 정상에 구산스님이 지은 인월정사에서 묵언 정진하였고, 그 뒤로 홀로 남아 하안거를 지냈는데, 그 때의 정진체험이 이후 살림에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977년 겨울안거는 비슬산 도성암에서, 성찬선사와 초삼, 헤국스님 등과 지냈고, 월정사 탄허스님의 화엄경 특강에도 참석하였었지요. 1978년 여름 사불산 대승사에서 법경, 무여스님 등과 안거 정진을 하였고, 그 뒤로 건강 등의 사정으로 불암산 불암사에서 홀로 그해 겨울과 다음해 여름안거 기간을 지냈습니다. 아무튼, 제 20대 청춘시절은 오로지 산중에서 전통적인 불학과 참선 정진에 몰두하여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때의 법희 선열과 깨침의 체험을 가능하게 했던 선지식과 도반들에게 항상 감사함을 잊지 않고 지냅니다. 그 시절에 얻은 힘이 그 이후의 정진에 뒷받침과 불퇴전의 원력을 키우는 밑거름이 되었음도 분명합니다. 30대에 접어들어서부터 격동하는 사회변화 속으로 회향하여 수행보람을 나누며 불조와 단월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방편의 여정이 시작되었는데, 그 이후의 이야기는 지면관계상 다음으로 미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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