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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루나 칼럼 >
짐바브웨의 사람새
글 | 이원익 leewonik@hotmail.com
한국 불교의 전파와 대중화에 힘을 보태려는 발원으로
태고사를 도와 왔으며 우담바라회 회원이다. 포항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서울 문리대를 졸업했다. 오래 전에
회사 주재원으로 와서 LA 지역에 살며 국제운송업을
하고 있다.
지난 번 평창에서 열린 겨울 올림픽에서였을 것이다. 그 식전이던가 식후 행사 중에 누가 만든 건지는 몰라도 머리는 창백한 모습의 사람 얼굴을 하고 몸은 커다란 두루미 모습을 한 새사람(鳥人)이 나타나 너울너울 춤을 추는 바람에 관중들이 좀 기겁을 하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야릇하고 기괴하면서도 강한 인상을 오래 남기기도 했다.
그런데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후미지다고 여기는 저 아프리카의 남쪽 오지에 자리잡은 짐바브웨(Republic of Zimbabwe)라는 나라에 가면 이와는 거꾸로 독수리 비슷한 새의 머리와 두 날개에다가 몸통과 다리는 사람 모양을 한 사람새(人鳥)가 있다는 소식은 아시는지 모르겠다. 살아 있는 것은 아니고 오래 전에 누군가가 돌기둥 끝을 쪼아 새겨서 조각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한 마리가 아니라 여덟 마리나 나란히 있어 고고학계나 역사학계, 그리고 박물관들이나 국제 미술품이나 골동품상 사이에서는 커다란 이슈가 되어 왔다는 이야기다. 아무튼 이 사람새는 세계 어느 곳에도 없는 처음보는 모양이라 이를 접한 식민지의 백인들은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 혀를 끌끌 찼다. 대체 이게 뭐냔 말이다. 이 미개한 검둥이 소굴에서 이런 희한한 물건들이 다 나오다니 말도 안돼! 이건 틀림없이 저 사하라 사막 북쪽에서 흘러온 것이거나 바다 건너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그럼 이것들이 출토된 이야기부터 해 보자.
아프리카에서도 적도에서 한참 내려간 남쪽 내륙에 남아프리카 공화국, 모잠비크, 잠비아, 보츠와나 등으로 둘러싸인 내륙국이 있는데 약 1,600 만 명의 인구에 한반도의 약 1.8배에 이르는 국토를 가진 짐바브웨이다. 1980 년에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한 신생국가다. 다른 여러 아프리카의 신생국들처럼 혹독한 백인의 식민지 지배 시절에다가 해방을 위한 기나긴 투쟁, 얽히고설킨 세력간의 내전과 외세의 간섭이라는 전형적인 혼란을 거치며 어렵사리 태어난 나라이니 그 중생들의 괴로움이 과거를 이어받아 오늘과 내일에까지 덮씌워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독립투쟁의 영웅 무가베(Mugabe)가 장장 37년 동안 독재 권력을 휘두르며 특히 후반기에 가서는 나라를 개판으로 만들다 결국 2017 년, 측근이던 음낭가과(Mnangagwa)가 이끄는 군사 쿠데타로 실각하였는데 음낭가과도 전력이 만만찮은 인물이라 나라의 장래가 장밋빛은 아니다.
왜 이런 독립 영웅들은 거의 다 포악한 독재자로 떨어져 패가망신하는가? 특히 아프리카에서는? 얼핏 떠오르는 이 검은 인간백정들의 이름만 보더라도 이디 아민, 모부투 세세 체코, 은크루마 등등…, 우리는 긴 리스트를 만들 수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 이런 말도 안 되는 참사들이 우리 마음에 크게 와닿지 않는 것은 우리마저도 희거나 노란 희생이 아닌 그 검은 희생들에 대해서는 마치 검은 돼지나 검은 염소의 주검을 대하는 것처럼 별 심각한 감흥이 없어서인지도 모른다.
빼먹을 것 다 빼어 먹고, 이제 못 먹을 밥 재나 뿌린다고, 과연 백인들은 이런 독버섯이 자랄 거름터를 물려주고 손 털고 떠난 것인가? 아니면 역사의 흐름이 보편적으로 어떤 그런 구조를 잉태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제 한 몸 불살라 고난의 민중을 역사의 질곡에서 구하려고 하는 자는 침략자와 그 끄나풀인 지배세력의 하수인들로부터 늘 암살 대상자의 최우선 순위로 지목되어 왔음은 아프리카나 아시아나 중남미 아메리카나 다름이 없다. 이들로부터 자신을 방위하려면 반항의 지도자는 친위세력을 구축할 수밖에 없고 이 친위대마저 변절시키는 교활하고 집요한 적들의 침투로부터 자신을 지키자면 지도자는 더욱 권위적이고 빈틈이 없어야 하며 폭압적으로 되기가 쉽다. 결국 이 지도자와 친위세력은 나라의 독립을 쟁취한 후에도 정적이나 외부의 파괴공작에 대응하여 몸에 익힌 대로 본능적으로 대응하다가 어느 결에 자국민에 대해서도 폭압적인 독재 세력으로 군림한다. 자기 운명에 대한 불안과 함께 미흡한 성취를 상쇄하고자 시작되었던 탐욕은 예외 없이 장기집권으로 이어지다 필연적인 부정부패 등 내부 모순의 틈과 외부 간섭의 빌미를 보이며 결국 실각, 암살, 가택연금, 추방, 까발림, 몰수, 굴욕, 망명, 처형 등 익숙하고도 비극적인 결말을 맺는다. 그리고 그 후계자 또한 매번 비슷한 패턴을 되풀이한다. 진정한 시민 세력의 성장, 어느 정도 정상적인 중산층을 받쳐 주는 경제의 성장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이야기가 좀 옆길로 샜다만 이 나라가 신생국가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사실 신생국가라는 말도 어폐가 있는 것이 이는 아프리카, 특히 사하라 이남에는 본래 나라다운 나라나 문명이라는 것이 아예 있을 수 없는 야만의 땅이라는 전제가 깔렸기 때문이다. 아서라, 이것도 다 우리가 무엇을 바로 보지 못하고 선입견이란 색안경을 통해 보거나 제 눈과 귀가 아니라 남의 눈과 귀를 제 더듬이로 삼고 움직여 살아가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음임을 알아야 할지니, 아프리카 검은 대륙에도 검은 왕국, 검은 제국과 검은 문명들이 오랜 세월 여기저기 꽃피었다 시들었다 했음에 틀림없다.
다만 그 문명들의 존재 양식과 크기와 시기와 우리에게 남겨 준 영향력 따위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구대륙의 문명들과 다를 뿐이다. 그리고 이는 다른 말로 우리가 뭘 잘 배우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못했을 뿐임을 나타냄이다. 우리가 위에서 이야기를 시작한 짐바브웨의 사람새는 그 한 작은 예에 불과하다.
그레이트 짐바브웨
짐바브웨의 동남부 마스빙고(Masvingo)라는 작은 도시의 근처에 가면 원숭이가 뛰놀고 표범이 설치는 해발천 미터의 사바나 지역 수풀에 그레이트 짐바브웨(Great Zimbabwe)라는 느닷없고도 놀라운 석조 유적지가 있다.
높이 11 미터, 길이 250 미터에 이르는 돌로 만든 두 겹의 정교한 성곽이 있고 그 안팎의 성곽 사이에 지름 6 미터, 높이 9 미터 쯤의 원추형 탑이랄까 망루들이 서 있는데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에는 있을 수 없는 거대한 석조 유적지라 경탄을 자아낸다. 짐바브웨의 사람새(Zimbabwe Bird)는 여기서 출토되었다.
이 새들은 모두 여덟 개가 있는데 그 모양과 크기는 기둥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략 1 미터 정도의 돌기둥 끝에 30센티미터 정도의 새 모양을 본래 한 덩어리인 돌기둥에 조각해 놓았다. 새의 머리나 날개는 독수리나 물수리 비슷하게 생겼고 새의 몸통이나 다리는 사람과 비슷하며 기둥에는 악어가 기어올라가는 모양이 새겨져 있다. 이 조각 기둥이 폐허의 성채 위에 단단히 박혀 있었는데 기둥만 남은 것도 있는 것을 보면 본래 더 많은 조각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백인들이 처음 들어갔을 때 이미 폐허가 되어 있던 이 유적지에 관해 처음 외부에 알린 사람들은 지금의 모잠비크 바닷가에서 무역을 했던 포르투갈 무역상들이었다. 이 상인들이 유적지에 대한 소문을 들었지만 원주민들의 항의로 실제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그때까지도 이 장소는 원주민들에게는 어떤 권위를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이전에 이곳에서 교역을 하던 아랍 사람들을 밀어내고 원주민들과 교역을 한 것인데 그 유적지에 들어가 봤다는 아랍 상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을 해 둔 것이 있다. 그에 의하면 원주민들도 이 유적지를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며 원주민인 쇼나(Shona) 사람들의 말로 큰 집이나 왕궁 혹은 성소(聖所)를 짐바브웨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포르투갈 사람들이 상상을 하기를, 본래 이 지역이 예전부터 금이 나는 유명한 산지인데다 중동 지역과 교역을 한 여러 흔적이 남아 있는 점을 보건대 이곳이 바로 바이블에 나오는 그곳, 솔로몬 왕에게 진귀한 물품을 진상했던 시바 여왕(Queen of Sheba)의 유적지가 아닌가 했다.
하여튼 아는 것이 그것밖에 없으면 모든 것을 일단 거기에 갖다 붙일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이런 포르투갈 사람들도 19세기 초에 남쪽에서 밀고 올라오는 네덜란드 사람들과 영국 사람들에 밀려 이 지역을 떠나는데 아무튼 이 유적지는 유럽에 알려져 사양사람들의 비상한 호기심과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다시 새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본래 이 여덟 마리 사람새가 오래된 왕국의 폐허에서 발견된 것은 맞지만은 이 가운데 다섯 개는 뽑아져 바깥으로 실려 나갔었다. 남은 둘 중 한 개는 두 동강이 나서 한 조각은 땅에 묻혔고 한 조각은 바깥으로 빠져나갔었다. 결국 완전한 하나와 불완전한 하나만 제 자리에 남은 건데 물론 다 백인들이 한짓이다. 왜 그 짓을 했냐고? 왜 남의 물건에 손을 댔냐고? 그야 물론 우리 인간들의 속성, 특히 제국주의 시대 유럽 백인들의 탐욕 때문이다. 죄의식은커녕 너무나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저지른 수많은 행적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아무튼 지금 이 가운데 네 개는 짐바브웨로 돌아와 있다. 깨어진 하나는 도로 붙여 놓았다. 그러니 하나만 빼고 도합 일곱 개가 고향을 찾은 셈인데 왜 이렇게 되었냐 하고 얽힌 이야기를 풀자면 천생 시대를 조금 거슬러 1800 년대 후반으로 가 봐야 한다.
19 세기 후반이라면 미국은 이미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해서 서부로 서부로, 광활한 땅을 집어삼키고 있을 때이지만 이른바 해가 지지 않는다는 대제국을 건설한 영국 사람들은 선발주자인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네덜란드를 제치고 후발주자인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들을 견제하며 이 검은 대륙을 비롯한 세계 곳곳을 들쑤시며 아직도 대영제국의 확장과 확보에 여념이 없을 때였다.
그 당시 영국 사람들을 비롯한 유럽 사람들, 미국 사람들을 비롯한 백인들은 자신들이 본래부터 이 지구상의 여러 인종 중에서 가장 뛰어나게 창조되어 태어났으므로 당연히 전 지구를 지배해야 하며 그렇게 지배하는 것이 동양인 및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들에게도 자비와 은혜를 베푸는 것이고 동시에 그것이 하느님이 주신 사명의 이행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아주 일방적이고도 웃기는 문화와 사고방식에 대부분 젖어 있었다. 바이블의 아전인수격인 이해와 진화론의 잘못된 해석과 적용의 영향이 컸다. 이 대명천지에 아직도 이런 생각을 품고 있는 백인이 많지는 않겠지만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최근의 미국의 정치나 사회 현상을 보면 이 사람들의 본심이 과연 무엇인지 일말의 의구심이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아무튼 그 당시 남아프리카의 사정을 보면 1488 년 포르투갈의 바르톨로뮤 디아스(Bartolomeu Dias, 1451? - 1500)가 아프리카 대륙의 남쪽 끝, 희망봉(Cape of Good Hope)을 발견한 이래로 백인들이 이 땅에 발을 들여놓기 비롯하였고 뒤이어 1652 년에는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케이프타운(Cape Town)에 정착촌을 만들었다. 1679년 동인도회사는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에서 종교 박해를 피해 이민 온 신교도 정착민에게 이곳 땅을 나누어 주었는데 이들은 스스로를 네덜란드어로 농부란 뜻인 보어(Boer)인이라 불렀다. 지금 네덜란드어(Dutch)와 비슷한 아프리칸스어(Afrikaans)를 쓰는 남아공 주민들은 이들의 자손이다. 이 보어인들은 점차 내륙과 동부 해안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원주민과 자주 부딪혔다. 그러다 1795 년에는 영국 군대가 케이프타운을 점령하였고 1814 년에는 이곳을 정식으로 영국의 식민지로 삼았다. 1820 년대부터 영국 사람들이 떼거리로 이주하기 시작하자 보어인은 내륙으로 내몰리면서 둘 사이에 다툼이 잦아졌다.
밀려난 보어인들은 마차를 몰고 북쪽으로 밀고 올라가면서 흑인들의 땅을 차지했다. 물론 네덜란드 사람이나 영국 사람이나 본토박이 흑인들은 안중에도 없었고 저항하든 안 하든 몰살 내지 복속시키면서 짐승처럼 소모하고 부려먹었다. 그러다 나중에 부려먹기 만만치 않고 인력이 달리자 바다 건너 인도에서 사람을 데려와 부렸다. 아무튼 이런 피지배 인종들을 뭉뚱그려 유색인종(The Colored)으로 가름하여 대놓고 차별을 하였는데 간디(Mahatma Gandhi 1869 - 1948)도 한 때 이곳에 와서 자국 출신들의 지위 향상을 위해 애를 썼다 .
그러면 흑인들, 이 본토박이들은 당시에 구체적으로 어떤 형편에 처해 있었던가?
우리가 지구본이 아니라 통상적인 평면의 지도를 보면 착각하기 쉬운 것이 아프리카 대륙이 적도에 걸쳐서 남북으로 뻗어 있어 지도상으로는 그리 크게 안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착시이고 실은 무지하게 큰 대륙이라 유럽 따위는 그한 귀퉁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 뿐인가! 기나긴 인류의 역사를 보자면 이 대륙의 바깥으로 최근(그래도 21만 년 전으로나 추정된다)에 새어 나가 살갗이나 털의 빛이 바래거나 노랑물이 들어 백인이니 황인이니 혹은 갈색 인종이니 하고 일컫기도 하는 모든 잡다한 인종들은 통틀어 봐야 이들 수많은 흑인 갈래 중의 하나가 변질된 변종일 뿐이다. 아프리카의 흑인들은 겉으로는 다 비슷한 것 같지만은 이들 사이의 유전적 다양성은 백인과 황인 사이의 유전적 차이보다 훨씬 크고 다양하다. 이는 무엇을 가리킴인가? 저 검은 대륙이야말로 우리 모든 인류의 오래 된 옛집이요 수만 년 수십만 년대를 이어 온본가요 종갓집이란 말씀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이 집나간 자식들이 어느 날 핼쑥한 얼굴로 뜬금없이 찾아와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무슨 특정한 물건에 집착하는 정신병자처럼 금이나 다이아몬드라면 눈이 뒤집혀 본가의 안채며 사랑채를 마구 짓밟고 묘지를 파헤쳐 놓은 상황이 아프리카의 근세사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비극의 현대사다.
아무튼 이 백인들이 정말 남의 땅을 빼앗거나 어찌하면서 그 땅에 뿌리박아 살고자 아프리카 남쪽 끝에 상륙하였을 때 주로 부딪친 원주민 세력은 반투(Bantu)족 계열의 당당한 줄루(Zulu)족 전사들이었다. 한 때 천재적인 군사행동으로 백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던 개혁과 혁신의 군사적인 천재, 줄루 제국(Zulu Kingdom)의 샤카 줄루 황제(Shaka, King of the Zulu 1787 - 1828)는 특히 유명하다.
이들 반투족이 남아프리카에 도달하기 전에 이 땅의 선주민은 카포이드(Capoid) 인종이라고도 불렸던 부시맨(Bushman) 등 코이산(Khoisan) 족으로 여타의 흑인들과 달리 동양인을 연상시키는 황갈색 피부와 동북 아시아인의 눈과 닮은 몽고주름(蒙古皺襞 Epicanthic Fold)을 가졌으며 언어에 있어서는 날숨소리가 아니라 들숨소리(吸着音) 또는 혀 차는 소리(舌打音)로도 말을 하는(Click Language) 독특한 인종이었다. 본래 반투족은 지금으로부터 3천 5백 년 전 무렵부터 아프리카 서부, 지금의 나이지리아 부근에서 갑자기 팽창하여 주로 동쪽이나 남쪽으로 퍼져 나갔다. 이들은 소떼를 몰고 이동하며 피그미(Pygmy Peoples)나 호이산 등 그곳 원주민을 흡수하거나 밀어내며 마침내 아프리카 동안 및 남단까지 퍼져나간 것인데 거의 700 개에 이르는 반투어군으로 분화하며 대륙의 많은 부분을 석권한 이 팽창과 이동은 그 규모나 의의에 있어 인도 아리안족의 팽창에 비견된다. 사실 백인들이 희망봉에 도달할 당시 반투족들도 코이산 족을 밀어내며 이곳에 정착한지 얼마되지 않았었고 이 점이 유럽에서 이주해 온 백인들에게 빌미를 주어 흑인들도 이 땅의 원주민은 아니라는 궁색한 주장의 핑곗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나저나 희망봉 지역은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무더운 아프리카스럽지 않게 사람 살기에 알맞은 기후에다가 해상교통의 요지이므로 백인들은 상륙하여 교두보를 마련하고서는 우수한 무기와 군대를 배경으로 이미 소수가 된 코이산 족은 물론이고 마구 팽창해 오던 반투족의 물결을 맞닥뜨려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들소 떼를 도륙하듯 이들을 잔인하게 꺾어 잠재웠다.
조금 시기와 지역을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자면 이러한 반투족의 일파로 서쪽에서 건너온 쇼나 족이 4세기 무렵부터 지금의 짐바브웨 고원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이들은 아프리카 동해안을 따라 항해해 온 아랍 상인들과 교역하기 시작했는데 쇼나족의 주 생산품은 금과 상아였으며 멀리 페르시아, 인도, 이집트, 중국의 물품과 교역하며 부를 일구었다. 그러다 10 세기 무렵에는 쇼나 왕국을 건설하여 인도양으로 동류하는 림포포(Limpopo) 강 쪽으로 진출하였다. 현재 짐바브웨 남쪽 국경으로는 림포포 강, 북쪽 국경으로는 잠베지(Zambezi) 강이 흐르며 동쪽으로는 모잠비크, 서쪽으로는 보츠와나를 경계로 한다. 이곳의 주민 1600 만 명의 대부분은 반투족 계열로 이 가운데 쇼나 족이 다수를 차지한다. 현재 이 유적지는 11 세기부터 건설이 시작되어 14 세기까지 이어진 쇼나 왕국의 왕궁 터로 밝혀졌다. 그러다 14 세기 이후 어느 때부터 무슨 이유에선지 이 왕궁은 쓰이지 않고 유적지로 남게 된 것이었다. 아마도 기후의 변화, 금광의 고갈, 외침과 정치적 내분 등으로 왕국이 약화되자 왕궁도 차츰 피폐해 갔지 않았나 한다.
16 세기 초 아프리카로 진출한 포르투갈 사람들은 아랍 상인들을 몰아내고 원주민들과 교역하며 300 년간 틈틈이 쇼나 왕국을 침략했지만 끝내 정복에는 실패하였다. 그러다가 포르투갈 사람들은 결국 남쪽에서 올라온 네덜란드와 영국 사람들에게 쫓겨난 것이다. 특히 떼지어 올라온 네덜란드인(보어인)들로 인하여 마침내 1866 년 쇼나 왕국은 멸망했는데 그로 인하여 이 유적지는 더욱 폐허로 남게 되었다.
짐바브웨 지도
때가 흘러 1871 년, 독일 사람 카를 마우흐(Karl Mauch)가 유럽 백인으로는 처음으로 이 유적지에 들어갔는데 상세한 스케치와 기록을 남긴 그는 한 술 더 떴다.
포르투갈 사람들의 상상력을 뛰어넘어 성서에 나오는 시바 여왕의 궁성이 맞다고 거의 단정을 하는데 침판지나 고릴라보다 조금 나을 뿐인 열등한 검둥이들이 이런 훌륭한 건축물을 만들 능력은 아예 없을 것이므로 처음부터 원주민이 주인공일 가능성은 확실히 제외시켜 버린것이다. 이는 마우흐 뿐만이 아니라 그 당시 백인들의 일반적인 믿음이요 상식이었다. 그러면서 당시의 유럽인들은 이 거대한 유적지를 두고 ‘짐바브웨의 수수께끼(Riddles of Great Zimbabwe)’라고 하여 성경에서 근거를 찾거나 ‘사라진 문명의 재발견’이라는 쪽으로 쏠려서 온갖 설이 난무했다. 멀쩡한 주인을 눈앞에 두고도 이게 누구 집인가 빈 집인가 버리고 간 집인가 온갖 궁리를 하며 설을 푸니 이를 안하무인 무뢰한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천하 등신 까막눈이라 해냐 하나?
그런데 이러한 안하무인에다가 자기 목적을 위해 이 수수께끼를 확대재생산하는 영리함과 교활함까지 갖춘 자가 있었으니 다이아몬드로 억만장자를 이룬 영국 사람 세실 로즈(Cecil John Rhodes 1853 - 1902)다. 1853 년 영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로즈는 본래 몸이 약해서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울 지경이라 공기 좋은 곳에 가서 회복하라고 열일곱 살에 남아프리카로 보내졌다. 비록 몸에는 문제가 많았지만 그나마 이 따뜻하고 햇빛 밝은 남쪽나라에서 많이 좋아졌는데다 장삿속은 비상하게 돌아갔는지 이 젊은이는 남아프리카에서 몇 해 만에 세계 최대의 광산 재벌이 되어 다이아몬드 광산을 석권하며 거부가 되었다. 그가 세운 다이아몬드 채굴 회사는 한 때 전세계 생산량의 90%를 차지하였다. 물론 그 과정에 신속정확한 정세 판단과 예견력, 민첩하고 과감한 행동력과 수완, 정치권 및 재계를 잘 이용하는 친화력과 현명함도 있었지만 그와 더불어 안면몰수하는 야비함과 매수와 부정, 귀신도 곡할 속임수가 자주 동원되었으며 그까짓 원주민들의 피해와 희생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로즈는 이렇게 이룩한 부를 바탕으로 남아프리카의 식민지 정부에서 의원으로 선출되었다가 마침내 그곳 수상의 자리에까지 올라갔다. 뒷날 악명 높은 흑백 분리의 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드(Apartheid)의 기초를 놓은 이도 그다. 게다가 그는 지독한 제국주의자요 몽상가였다.
세실 로즈
그는 영국이, 앵글로색슨이, 대영제국이 세계를 지배해야 된다고 굳게 믿었다. (여기서 앵글로색슨 대신 게르만의 이상적 조상인 아리안족을 넣고 실제로 대량 인공청소를 조직적으로 행한다면 바로 히틀러가 된다.) 영국과 미국, 그리고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등 지구상의 모든 영연방 제국들과 식민지들이 연합하여 영국에 단 하나의 정부를 두고 통제받으며 다시 뭉쳐서 세계를 석권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확고한 지론이요 목표였다. 그리하여 자신은 케이프타운에서 카이로까지 아프리카를 세로지르는 식민지를 개척하여 그 위에 아프리카 종단 철도를 깔리라는 목표를 세우고 매진하였다. 자기가 이룩하는 부와 지위는 단지 이 목표에 기여하는 수단일 따름이었다.
그러면서 본국 정부까지 매수해 식민지의 치안, 통치권을 가진 ‘대영제국 남아프리카 회사(BSAC)’의 설립 허가까지 받아내기에 이른다. 이 남아프리카 회사의 군대를 동원하여 남아공의 북쪽, 지금의 짐바브웨를 비롯한 광대한 지역의 영토를 점령한 다음 제 이름을 따서 로데시아(Rhodesia)라고 명명하였는데(1895 년) 그 크기는 영국 본토의 4.5배에 달했다. 그리고 더 많은 백인 이주자와 투자자를 유인하려고 어용 학자, 어용 언론인들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이 그레이트 짐바브웨의 유적지를 엄청 부풀려 광고를 했다. 가라사대, 이 유적지가 성서에 나오는 도시라는 것이고 혹시 그게 아니더라도 이스라엘의 사라진 지파가 이룩한 도시임에 틀림이 없는데 저 짐승같은 검둥이 야만인들이 장기간 차지하여 더럽혀 놓았으니 백인들이 이를 다시 빼앗아 원상복구해야 된다는 소리를 대대적으로 나발 불었다. 자고로 잘못된 언론의 폐해라는 것이 하루이틀 전에 시작된 게 아니란 말씀이다. 그러면서 그는 어용 학자들을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유물 발굴을 했다.
원주민을 완전히 제외시켰음은 물론이다. 미리 목표를 정해놓고 거기에 맞게 파헤치고 해석하고 기록하고 전시하고 빼돌리고 가르쳤다. 일제의 조선사편수회, 중국의 동북공정이 다 어디서 배워 온 것이겠나? 로즈는 제멋대로 마구 파헤쳐 빼돌린 수만 점의 유물을 반출하여 남아공이나 영국의 박물관 혹은 남아공에 있는 자기의 저택(Groot Shuur)에 소장하였다.
이러한 로즈가 짐바브웨의 사람새를 몇 개 차지했다고 해서 그리 이상할 건 없겠다. 로즈의 발굴에 앞서 이 유적지에 마우흐에 이어 1889 년, 백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들어온 자는 남아공의 사냥꾼이자 보물 수집가인 윌리 포셀트(Willy Posselt)였다. 그는 주민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유적지에 침입하여 지키는 원주민에게 담요 몇 장을 뇌물로 주어 구워삶고는 사람새를 들어내기 시작했다. 가장 상태가 좋은 조각 하나를 골라 먼저 반출하여 로즈에게 팔았다. 이 조각은 지금은 박물관이 된 로즈의 사저에 아직도 보관되어 있다.
위의 것을 포함하여 여덟 개 가운데 여섯개는 로즈에게 반출되었다가 로즈가 위에서 말한 하나만 자기가 갖고 나머지 다섯 개는 남아공의 박물관에 기증하였었는데 이 다섯 개는 뒷날 짐바브웨의 독립 직후 남아공에서 반환되었다. 무조건 반환이 아니라 세계적 곤충학자인 조지 아놀드(George Arnold) 박사가 수집해 놓았던 벌 표본 일천 점과 맞바꾸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유적지에 본래 대로 남아 있던 두 개 중 하나는 포셀트가 혼자 들고 나오기 무거운지라 나중에 몰래 가져가려고 함부로 두 동강을 낸 것이었는데 상반부는 제 자리에 묻어 둔 채 들고 나온 하반부를 로즈에게 넘겼었다. 이 하반부는 로즈에 의해 독일 선교사에게 넘겨져 독일로 갔다가 2차 대전 후 소련 차지가 되었었다. 그러다가 종속국 회유의 차원에서 동독으로 갔는데 독일 통일 후 우여곡절 밀고 당기기 끝에 영구대여 조건으로 짐바브웨에 가까스로 반환되어 장물로 땅에 묻혔었던 본래의 상반부와 비로소 재결합될 수 있었다. 이렇듯 내어주기는 쉬우나 되돌려 받기는 어려운 것이 어디 이런 유물뿐이랴!
화무십일홍 권불십년(花無十日紅 權不十年), 이렇듯 남아프리카 식민지에서 무소불위의 부와 권력을 휘두르며 남아프리카의 나폴레옹이라 불리던 세실 로즈도 말년의 정치적 몰락과 건강 문제만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대영제국의 지배하에 전체 남아프리카를 통일한 연방을 건설한다는 최종 목표를 향한 걸음이 갑자기 구렁텅이에 빠졌다. 북쪽으로 밀려난 보어인들이 원주민들을 제압하여 건설한 트란스발 공화국(Transvaal Republic)을 집어삼킬 음모가 그만 꼬여 버린 것이다. 트란스발에 있는 소수 영국인들에게 몰래 무기와 탄약을 보내 반란을 선동하고 공화국이 이를 진압할 때 일어날 소요를 빌미로 자신이 미리 보내 놓은 남아프리카 회사(BSAC) 군대로 한 입에 집어삼킬 계획이었는데 반란은 안일어나고 보낸 군대는 이미 국경을 넘어가 있고…, 게다가 이 군대는 보어인들에 포위당해 전군이 사로잡히는 낭패가 생긴 것이다. 대영제국 자체의 굴욕이요 엄청난 스캔들이었다.
결국 이로 인하여 로즈는 모든 직을 내려놓고 사임한다.
하지만 좀 시간이 지나자 영국은 그 굴욕을 잊지 못하고 도리어 복수심에 불타 제2차 보어 전쟁을 일으키지만 졸전만 거듭한다. 로즈도 당연히 이 전쟁에 끼어들지만 그 전쟁은 이기지
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후유증으로 종전 직전에 마흔아홉살의 나이로 죽고 만다. 사인은 어릴 때부터 문제가 있던 심장의 마비였다.
혹시 동성애자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로즈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다. 죽기 얼마 전에 그는 전 재산의 대부분인 600만 파운드를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 기증하며 장학 재단을 만들게 했는데 이것이 빌 클린턴도 받았다는 저 로즈 장학금이다.
로즈의 뜻에 따라 미국과 영연방에 속해 있는 나라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학문적 성과와 야망이 있고 봉사심과 리더십을 갖췄으며 반드시는 아니지만 스포츠를 오래 해와서 지덕체를 완벽하게 갖춰야 대상이 되지만 로즈의 본마음은 대영제국의 이상을 실현할 인재를 키우는 데에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영국을 비롯한 영연방의 백인 남학생 만을 대상으로 했으며 1970 년까지는 흑인 학생은 안 되었고 1977년까지는 여학생도 제외였다. 그러다 세월이 지나면서 세계적인 추세를 외면할 수 없어 전세계의 우수 인재들을 가리지 않고 뽑게 되었는데 세월이 얼마만큼 지난다고 해도 단군의 자손이 아무 거리낌 없이 이토오 히로부미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름을 걸고 설립한 장학금을 받을 수가 있을까? 아마 없겠지? 받아도 괜찮다고? 장물 회수라고?
그런데 드러내 놓고 말을 안 하고 노골적으로 이름을 걸지 않아서 그렇지 일제 때 우리 할머니들을 능욕한 전범 기업들이 뒤를 받치는 숱한 장학금을 지금 한국의 이른바 지도급 학계, 정계, 실업계 인사들이 받았고 받고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작금의 저 뜬금없는 신친일 기조들을 설명하기가 어렵다. 아무튼 우리가 뭐든 이렇듯이 그 이면을 들춰 들여다본다면 참 부끄럽고 황당한 것이 많은 흑역사가 세상사요 남들이 부러워하는 장학금도 그 예외가 아닌 것 같다.
그나저나 짐바브웨의 사람새는 과연 어떤 용도와 상징을 갖고 있는 것일까? 아무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한국 솟대에 앉아 있는 기러기 상처럼 아마도 하늘과 지상을 연결하는 메신저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아니면 카리스마 강했던 쇼나 왕국의 왕들을 상징하거나 그도 아니면 그 이전의 토템 신앙이나 샤마니즘의 유흔인지도 모른다. 그야 어떻든 훔친 물건이나 빼앗은 물건은 본주인에게 군소리 없이 되돌려져야 하고 되돌려 받은 자는 이 새를 본뜬 도안이 이제 자기들의 국기나 온갖 휘장에 배타적으로 쓰인다고 해서 자기만의 것으로 간주할 것이 아니라 전세계 인류 공통의 자산임을 자각하여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
짐바브웨의 돌기둥에 앉은 일곱 마리의 사람새, 과거의 영화를 노래하던 예리한 부리는 부러지고 뭉개지고 미래의 꿈을 아로새긴 깃털무늬는 이지러지고 떨어져 나갔구나. 하지만 저 헛된 몽상가의 유리장에 갇힌 마지막 한 마리마저 날아 돌아와 다시금 이전처럼 평화의 울타리에 나란히 날개 접고 올라앉을 날이 언제련가. 이제는 비굴도 오만도, 무시도 현혹도 없는 평온과 화합의 여덟 가닥 밝은 길, 이를 바라보는 여덟 마리 오롯한 가릉빙가(Kalavinka 妙音鳥, 極樂鳥)가 될지니, 목놓아 울라 노래하라 짐바브웨의 사람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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