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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연적 계승은 거의없고 문화원형적 계승만 있었다.
대륙인구 28%이상이 부여계로 추정됨에도 중화의 허상속에 속고 살아.
한민족이 살아가고 있는 나라의 이름은 대한민국이지만 영문 국호로는 Republic of Korea이고 고려라는 고대와 중세의 국명이라 하기 때문에 그리고 역사서로는 삼국사기에 고구려,백제,신라의 역사가 전해져 온다는 이유 하나 있다는 존재만으로 스스럼 없이 고구려,백제를 한민족의 직계조상의 국가로 여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로 삼국사기를 편찬한 고려려의 문신이자 학자 김부식은 삼국역사 중 신라의 역사를 삼국역사의 반을 할애하고 백제와 고구려의 역사를 나머지를 할애하여 기록하였는데 혼란한 시기 고려 인종의 왕조의 정통성 정립을 위한 역사서 편찬사업에서 신라의 역사를 반이상 할애하였다는 것은 신라의 역사가 중세고려의 역사적 당위성을 이어갔거나 아니면 고려가 신라의 영토 대부분과 그 문화적 혹은 정치사상사적 전통을 이었다고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동시대에 개국한 거란의 정통성은 그들이 고려와 전쟁에서도 명분을 보였듯이 고구려의 옛 영토와 고조선의 전통을 이어갔다고 주장하는 정치 외교적 노선의 유지와 그들의 역사기록인 요사에서도 그 명백한 이유와 당위성을 보여주고 있다. 고조선 그리고 고구려의 정통성을 이어갔다는 거란과 고대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정통을 이어갔다고 보여지는 고려 역시 선대국가 신라가 고구려를 차지했었고 고구려의 유민이나 정치적 지도자들중 극소수가 신라를 통하여 고려로 이어졌다는 민족적 연대성 그리고 고서들을 통해 확인된 고구려 동부 영토의 상당부분을 고려가 차지했다는 이유에서 그렇게 주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20세기를 기준으로 돌아본다면, 지금으로 부터 300여년전인 조선 중후기의 역사를 어렴풋이 아니라 또렸이 이해할 수 있음에도, 즉 이는 국가사서가 아니라도 사대부의 문집이나 유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있는 것처럼,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기록에 대한 김부식의 태도는 편향된 것임을 떨쳐 버릴수 없다.
그 일예로 현대까지 이어진 소위 양반가문의 역사를 보면 대부분이 신라에서 비롯된 성골 혹은 진골 적어도 육두품 출신 이상의 가문으로 그 맥이 이어져 왔음을 어느학자가 밝힌적이 있듯이 그 당시에는 그러한 씨족과 가문중시 사상이 현대보다 엄격 하였을 것을 미루어 볼 때 경주김씨의 김부식이 그 사회적 굴레에서 벗어났으리라 기대할 수 없고 더우기 삼국사기는 正史가 아니라 私著임을 이해하여야 한다.
(한국에는 없는 고려왕조실록은 북경에, 고구려 신집,유기가 카작스탄지방에 남아있다고 한다)
고구려가 멸망한 구당서 고종의 기록을 보면
乾封 원년(666년)
六月壬寅, 高麗莫離支蓋蘇文死. 其子男生繼其父位, 爲其弟男建所逐, 使其子獻誠詣闕請降, 詔左驍衛大將軍契苾何力率兵以應接之.
6월 고려막리지연개소문이 죽자 그 아들 연남생이 그 아비의 직위를 이었고 그 동생 남건이 따랐다. 남생의 아들 헌성을 당에 보내 궐에서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冬十月己酉, 命司空、英國公勣爲遼東道行軍大總管, 以伐高麗.
겨울 10월 사공에게 명하여 이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임명하고 고려를 토벌하였다.
건봉 3년(668년)
正月壬子, 以右相劉仁軌爲遼東道副大總管. 二月戊午, 遼東道破薛賀水五萬人, 陣斬首五千餘級, 獲生口三萬餘人, 器械牛馬不可勝計.
정월 우상 유인궤로 하여금 요동도부대총관으로 삼았으며 2월 요동도 설하수에서 오만명을 깨뜨리고 진에서 오천여명을 참하고 백성 삼만여명을 사로잡고 기계와 우마를 획득한 것이 셀수없었다.
九月癸巳, 司空、英國公勣破高麗, 拔平壤城, 擒其王高藏及其大臣男建等以歸. 境內盡降, 其城一百七十, 戶六十九萬七千, 以其地爲安東都護府, 分置四十二州.
9월계사 이적이 평양성을 파하고 고려왕 고장과 대신 남건 등을 데리고 돌아왔다 경내는 지쳐 항복 하였는데 그 성이 170이요 69만 7천호 였다. 그 땅을 안동도호부라 하고 42주로 나누었다.
二年五月庚子, 移高麗戶二萬八千二百, 車一千八十乘, 牛三千三百頭, 馬二千九百匹, 駝六十頭, 將入內地, 萊、營二州般次發遣, 量配於江淮以南及山南、並、涼以西諸州空閑處安置.
2년 5월 고려의 2만8천호와 수레1천80승 소3천3백두 말2천9백필 낙타 60두를 내지로 끌고 왔다. 래주,영주 2주백성을 보내어 강회이남과 산남에 병주,량주의 서쪽 빈터에 나누어 배치하였다.
위의 기록으로 보면 당조정은 고구려민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총 170여개 성에 살고 있었던 고구려 인구 69만7천호중에서 2만8천2백호를 변방으로 분산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사학자들은 고구려의 인구를 호당 5명으로 보고 350만명으로 계산하고 또한 변방으로 분산된 호수의 인구를 같은 계산방식으로 14만명으로 추정하였으나 고대의 1호는 지금의 인구계산방식이 아닌 실제로 한집안에 3대가 거주하는 경우이므로 최소7명으로 보아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실제 한호를 7명으로 본다면 인구는 488여만명이고 2만8천2백호의 인구는 실제로 약20여만명으로 보아야 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2만8천2백호의 정체인데 이 사람들이 바로 당조정의 사민정책에 의해서 변방으로 유배간 사람들로 고구려민 가운데 장안으로 끌려가 살았던 최고위관직을 제외한 유력인사의 집안으로 生口(소위 무지랭이)와 구별되는 집단이며 전체 인구수의 2.5%이므로 현대에도 해당되는 법칙인 상위 2%정도로 이는 당시에도 소위 밥걱정 안하고 사는 유력한 인구층이 되는 것이다.
량주로 유배된 당장 고선지의 집안이라던가 산동지방에서 제나라를 일구었던 이정기의 조상 이라던가 모두 그러한 집안의 출신들임을 미루어 짐작할수 있을것이다.
그런데 중국학자들이 추정한 중국대륙의 인구를 보면 수-당 시기를 근거로 한다면 대륙의 인구는 5천만명을 넘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이 통계는 물론 한서,수서,당서등 역대왕조의 지리지를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그 왕조가 정복하지 못하고 병존했었던 대립하던 왕조의 인구수는 분명 이외로 하였음이 분명할 것이며 실제 대륙인구는 이보다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송대에 이르러서는 전왕조의 인구가 5천만명에서 1억명으로 늘어난 것으로 되어있는데 불과 당나라와 200여년 시차에 농업, 의료행정등의 서비스가 획기적으로 나아졌거나 주변국을 제압하고 영토를 늘인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2배로 늘어났다는 통계는 그 이전의 한이나 당나라 시기의 영토가 그들의 기록과 달리 작았다거나 송나라 체제의 안정으로 성실히 인구산정에 협조했다고 볼 수 있어 결국 수백년 사이에서 출생률과 사망률이 높은 고대국가는 거의 같은 인구수를 유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 홍콩대학에서 연구한 중국왕조의 영역 확장도를 보면 중국사학계에서 주장 하는것 보다는 객관적으로 보이며 서기1820년전 까지 실제 중국왕조 영토는 그리 크지 않았음을 증명해 준다.
인구에 관련된 또 하나의 통계를 본다면 청나라와 조선의 인구통계 추이도이다.
즉 초선초기의 인구는 30만1천명 이고 한양에 상주한 인구는 5만명으로 되어있다 즉 한양에 전체인구의 16.7%가 몰려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성종이후에 인구가 갑자기 3배가 늘어나고 임진왜란후 인구가 전란전보다 60%이상 줄어들었으며 17세기 중반 4백여만명 이었고 이후 19세기까지 700여만명을 유지하다가 20세기초 일제의 한반도 인구조사시 갑자기 1300여만명으로 늘어났음이 기록된다.
결국 인구조사와 기록에 인구의 증감률이 선형이 아닌 비선형으로 조사 착오 혹은 우리가 알지못하는 전쟁피난민들의 집단이주 혹은 영토의 변화로 인한 인구의 증감이 기록되었을수 있다고 여겨진다. 결국 조선조 말까지도 조선의 인구는 2천여만명이 안되었다는 반증이다.
단위 기간의 인구증가율공식;
처음인구 a, 증가율 r, n년후의 인구는 a(1+r)^n 이 된다 여기서 증가율(n)은 출생율/사망율인데 고대에 인구증가율은 양쪽지수가 높아서 평균적으로 년0.5%를 보고있다.즉 1000년에 5배가 늘어난다는 공식이 통용되는 것이다.
청나라는 1726년까지 2915만명 이었다가 1764년 이후 갑자기 7배 늘어난 2억6백만명이 된다. 결국 이것은 급격한 영토의 확장이라던가 고전적 인구조사시 전체인구가 아닌 농업,토목,전시에 동원될 수 있는 장정 즉 (16세~50)세까지의 인구를 위주로 하였거나 조사시 피조사 인구를 일부러 빼었을수 있다고 본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고구려 패망시의 대륙의 전체인구를 5천여만명이라 가정할 때 실제 대륙에서 차지햇던 고구려의 영토와 인구밀도를 참고하여 산정해야 정확한 인구가 나올 것 인데 고구려가 사학계가 알고 있는 산지, 고원지대에 기거하고 중국왕조는 평야농업지대에 있었다는 주장은 억지이며 실제 고구려는 산지와 평야를 두루 섭렵한 하북을 중심으로,산동,산서,내몽골,요녕,만주를 그 영토로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구당서 혹은 신당서에 기록된 전체 주별 인구를 합산해야 하겠으나 면적비로 본다면 북동과 북서인 현 대륙의 1/3과 인구밀도는 농업평야지대의 1/3으로 계산한다 하여도 실제인구는 구당서에 기록된 69만7천호 (운영자는 호당 인구7명 기준)의 인구 500여만명을 넘는 1200여만명 (실제 하북일부와 만주일부,요녕을 포함한 통일신라의 인구는 이보다 훨씬 적음)이 패망시의 실제 고구려 인구로 추정되어야 한다고본다.
실제로 운영자의 사서연구결과는 수나라와 당나라 초기 모두 하북성을 넘지못했으며 역시 산동의 중부를 넘지못하였고 섬서와 하남의 일부와 그 이남 지역만이 그들의 영토로 유지되다가 당이 고구려를 넘어선 후에도 하북 중부를 넘지 못했음이 이해된다. 개척지역 백성의 반발로 행정은 원주민의 대리통치로 무마하거나 하북성 以東北은 실제 왕조의 관심지가 아님.
이러한 사실을 후대의 인구분포 비례로 본다면 청나라 말기에 고구려 지역 인구의 비율은 1억여명 ,실제 인구학자들은 만주족이 청나라 말기에 1억2천 만명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러한 비율이라면 고구려 지역의 후예는 현재 중국인구 약13억여명중 3억3천여만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북성 6,734.6 만명(2002)
산동성 9,082 만명(2002)
산서성 3,293.7 만명(2002)
요녕성 4,203 만명(2002)
흑룡강 3,813 만명(2002)
길림성 2,699.4 만명(2002)
내몽골 2,378.6 만명(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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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3억2천150여만명
실제 현재의 중국성별 인구중 고구려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주요성의 인구를 합산하면 필자가 추정한 인구수와 비슷하게 산출되는데 강소성과 감숙성, 신강자치구 총인구 1억1853만 명을 제외한 인구이며 위 7개성의 인구중 70%가 북방민족의 후예 그리고 3개성 1억2천만 명의 50%가 그 세력권의 인구라 가정하면 남북간의 인구의 이합집산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최소 3억여 명의 인구가 고구려 문화의 영향권에서 후대를 이었던 인구라고 볼 수 있다.
실제 고구려가 패망한 뒤 그 중심지 평양성이 위치한 하북중부 및 요녕은 당조정에서도 92여년 동안 직접통치를 하지 못하였고 나머지 고구려 유력인들이 돌궐, 말갈, 발해, 일본으로 이주했으며 실제 적국인 신라로 이주한 고구려 유민은 신라기록에 나올 정도로 미미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신라가 명목상의 통일신라를 이룬 후 인구는 한반도와 요녕 ,하북,길림 일부로 축소되었기 때문에 대당 통일전쟁에 귀순하여 참가하였던 고구려 귀족, 권문세가,군인들은 통일신라 인구의 1%도 안 될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이를 계승하였다는 후대의 전체 고려인구 구성원을 현대인구로 추정하면 신라에 귀순한 고구려인들의 후예는 통일신라지역인 한반도,길림,하북,요녕에 일부적으로 존재할 현대 인구 1억2천여만 명 (하북,요녕,길림,흑룡강의 일부) 중 약 120여만 명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도의 인구가 현재 남북한 인구중에 차지하는 비율로 보면 70여만명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이로서 본다면 고구려의 왕족,귀족,군인,권문세가,학자등 소위 핵심인력은 전부 현 중국대륙에 녹아들어 한족으로 인식하며 살고 있을 것이므로 한반도 주민들의 지역적이나 문화적 연고권으로 볼 때 고구려보다는 신라에 더 가까운 것이다.
실제 근세조선이 피로서 고려를 뒤엎고 역성혁명을 무릅쓰면서까지 보여준 정신적 모티브는 썩고 무능한 고려왕조 타도보다는 조선초기 사대부와 왕족에게서 보이는 DNA 분석결과로 볼때 조선이 고려보다 더 북방민족적요소 즉 고대청동기인(홍산인으로 추정)의 민족적 요소가 컸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볼수있다.
즉 민족간의 정체성과 북방민족과 고려라는 이름으로 민족화된 선비족간의 종족전쟁이었다고 볼 수 있기도하다. 그 에를 아래 그림이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고구려의 후예라고 주장하기에는 혈통적으로는 고구려 백제와 멀어졌지만 문화적으로 그 후예임을 주장할 수 있는 역사적 Heritage는 중국보다는 한반도의 한국인들에게 더 가까이 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즉 북방민족의 오롯한 문화적 요소 승계와 북방민족적 기질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려는 문화적 노력은 이 나라 이 민족에게 가중치가 부여된다고 볼수있다.
운영자 심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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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백제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기록은 키가크고 곱슬머리라고 합니다 실제로 일본에 있는 백제왕가의 직계후손은 약간 큰키에 곱슬머리죠 ,백제의자왕의 후손인 우리가문도 비슷한 체질을 보이고요 살면서 주변에 저와 비슷한 체질의 사람을 살펴보면 약 1/30정도 될까? 고구려벽화에 나온 고구려 무사와 비슷한 키가크고 곧은머리에 얼굴이 긴 사람들은 역시 1/20정도 될까? 한가지 들은 사실인데 하얼빈에 가면 저처럼 흰피부에 키가크고 눈썹이 진한 사람들이 많다는 군요 그게 여진족의 특징이었으니까요 현재 한반도인은 주류가 마한의 후예로 보입니다. 보통키에 작은 눈매 약간 흰피부가 특징이었지요 백제와 신라는 어차피 마한에 속한 소국
이었기에 그중에서 백제인과 신라인이 덩치도 크고 전쟁도 잘하였기에 60개가 넘는 소국을 병합할수 있었던 것이죠
history auther님// 언급하신 여진족의 특징이 일반적은 아니고 '황두여진'등 여진족 내의 어떤 부족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황두여진 후예라고 말하는 사람을 중앙아시아에서 작년에 일부 봤었는데 머리도 황갈색이었으나 직모였고 눈은 검은 색이 아닌 어두운 녹색이라고 해야 하나요 그런 색이었습니다. 피부는 하얀 편이었구요. 얼굴형은 동양형에 가까웠습니다. 동서양이 형태로 섞인 느낌이 아니라 색으로 섞인 느낌이었습니다.
어쨋든 흉노나 여진, 말갈 안에는 유목영역 내에서 널리 교류하면서 유전자 스펙트럼이 넓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위 글의 분석대로라면 계승은 하였으나 청나라 조선 때 부지불식간에 영토와 인구가 넘어갔다라는 것이 된다는 얘기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