츌트림 알리온
우리 인생에서 남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필연과 같다. 아이였을때 인간이 되는 법을 흉내를 냄으로서 배운다. 아이들은 저자의 인생에서 별것도 아니었던 것 같은 이야기라도 흥미롭게 듣는다. 이러한 관심은 그들이 어떠한 참고할 점을 찾기 위한 깊은 내면의 필요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들의 인생을 이해하고 그들이 자라면서 결정을 내리는데 도움이 되는 중요한 정보를 주워간다. 모든 문화는 영웅이든 종교나 문화적인 중요성을 가진 인물이든간에 인물들의 전기를 제공한다. 그런데 우리의 문명에서는 영적인 삶을 추구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많이 없으므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여성의 이야기가 없다. 이야기가 없이는 경험을 전달할 수가 없다.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여성들은 그녀의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때 방향을 잡을 수가 없다. 여성들은 그녀들의 투쟁의 가치를 배울 기회나, 그녀의 힘을 축하할 기회나, 혹은 그녀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이야기가 없이는 그녀 자신들의 깊숙한 내면의 경험이나 영적이나 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는 세계로 부터 여성들은 고립된다. 침묵속에 갇혀 버리게 된다.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높고 먼 티벳에서 왔다. 유대 크리스챤의 틀에서 보면 신비롭고 이해하기 힘들 티벳불교의 수행을 한 여인들의 이야기다. 이 여인들은 영적인 수행 과정 중에 여성을 하대하는 문화적 종교적 편견을 해결해야 했다. 캐롤 크라이스트가 그녀의 책 “깊이 잠수하고 나서 다시 떠오르기: 영성을 추구하는 여류작가들” 에서 묘사한 것과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에서 시작한다. 여성들은 자기혐오와 자기 부정 속에서 희생자로서 남성과의 관계에서 그들의 인생의 모양을 만든 제도와 가치하에서 공허함들 경험한다. 그럼으로서 여성들은 기존의 방식을 거부하고 그들의 인생의 의미를 다시 되물음으로써 그들 자신을 위한 더 깊은 힘과 가치의 세계의 문을 연다. 여성이 위대한 힘에 눈을 뜰때 새로운 자신감과 새로운 세계관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이 새로운 힘에 눈 뜸으로서 여성들은 자기 부정과 자기 혐오를 극복하고 희생자가 되기를 거부한다.
이 여성작가가 표현한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든가 어두움으로의 추락은 낭사 오붐이 그녀의 남편에게 죽도록 매를 맞았을때, 조모 메모가 의식을 잃고 초기의 동굴로 들어갈때, 드렌첸 레마가 그녀의 어머니로 부터 여자는 불법을 공부할 수 없다는 말 을 들었을때, 그래서 그 후 수년간 물과 미네랄만을 섭취하는 수행길에 접어 들었을때, 공통되는 경험이다.
여성에게 원초적으로 영성에 대한 갈망이 있다든가 여성이 영적인 수행의 길을 계속 해 나갈 수 있다는 점은 남성들의 우주에 대한 이해에만 기본을 둔 세계에서도 속속히 드러나고 있다. 여성들은 남성인 성인들의 전기를 읽고 그들의 삶을 본받으려 하기도 하고 기독교의 메리나 티벳 전통에서의 예세쵸겔, 혹은 부처님의 일대기에 나오는 마하파자파티, 수쟈타와 같은 여성들의 역할과 스스로 동일시하려는 노력을 하기도 했다.
여성의 영적인 경향은 기독교에서도 잘 나타난다. 기독교 교회에서 보면 실제 교회에 나와서 기도 하는 사람을 여성이 많다. 이태리에서도 보면 여성은 실제로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남성들은 말과 돈으로 교회를 후원하는 역할을 한다. 불교의 비구니 교단의 원형이 된 자이나교에서도 여성이 남성에 비해 영적인 능력이 떨어진다고 믿어져서 교단내의 고위직은 여성들에게 주어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성비구니의 수는 남자비구의 수의 두 배이다.
여성들이 영성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은 불교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러나 비구니에게는 비구보다 낮은 지위가 주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들이 계속해서 그녀들이 남자보다는 해탈할 가능성이 낮다고 가르치는 교단에 끊임없이 들어와서 계를 받으며 해탈을 위해 노력한다.
요는, 가부장적인 제도하에서, 여성들은 계속 그들의 영적인 필요와 능력이 남성들에게 못지 않거나 오히려 크다는 것을 증명해 왔다. 이렇게 여성들이 열악한 환경을 헤쳐나가며 영적인 성장을 해 나가는 방법을 발견해 왔지만, 여성들에게는 그녀들의 경험과 이해를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이야기가 부재하다. 인간의 마음의 계발을 다루게 되면, 명백하게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뛰어넘는 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의 경험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이야기에 따라 조건 지어 진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우리가 듣는 타인의 이야기에 연관시켜서 이해하고 우리의 인식을 그 연관 속에서 맟춤 편집한다. 이야기는 경험을 만들고 경험은 또 이야기들을 만든다. 여성들은 다른 여성들이 그들의 삶들 어떻게 묘사하는지를 듣기를 갈망했기에 저자는 이들 여성들을 침묵으로부터 풀어주어 그들의 경험을 살펴본다. 종교적인 체험에 여성이라는 것이 특정한 요소가 된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종교사상에서 영향을 주는 힘으로서의 여성을 재조명한다는 의미를 담아서, 여성의 영성체험이 재평가되고 존중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여성은 영육의 조화로부터 다시 생성되는 새 인류의 대변인이 되어야 한다. 여성은 전통적으로 상대를 자신의 성공의 적으로 보는 남성과 달리 상대의 성공에 참여할수 있는 소통이 가능한 성격을 계발해 왔다.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경험은 고통의 요소를 안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경험들이 고통의 소멸을 추구하는 면에서만 고찰 될 일은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빛과 어둠을 모두 초월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으며, 여성들의 종교관은 이 양면성을 아우르며 그 성스러움을 잘 이해하고 있다. 고전적인 이중성의 개념은 문화를 생성해 가는 남성들이 여성들의 부정적인 성품들을 지적하며 그것을 남성이 여성을 지배해야 하는 정당화의 구실과 모델이 되었다.
불교는 남성 아버지 신을 섬기는 타종교 보다는 덜 가부장적이긴 하나 부처가 되기 위하여 적합한 인간의 형태는 남성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여성을 승가에 받아들이면서 비구니들이 비구들보다 8개의 추가 계율을 지킬 것이며 비구들에게 순종할 것을 명하시면서, 여성의 승가 유입으로 불교승가의 수명이 500년 단축 되었다고 했다고 한다. 이 말씀이 실제로 부처님의 말씀인지는 학계에 논란의 여지로 남아 있다. 당시 여성이 가정을 떠나서 종교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은 안정적인 사회구조를 위협하는 현상이었을 것이다.
7세기경 불교가 티벳에 유입되었을때 여성에 관한 이러한 혼돈스러운 견해 역시 함께 받아들여 졌다. 밀라레빠의 백만송에서 여인이 부르는 노래에 이러한 가치관이 반영된다.
나의 죄많은 업보로 말미암아 하급의 몸을 받았네
… …
나는 불법을 얻고자 하나
게으르고 둔하여 시간을 허비해 버렸다네
여성에게 있어서 다산이란 속박과 구속
여성에게 있어서 무자녀란 가족을 잃는것
… …
티벳 여성들에게 불교의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지만 티벳에는 불교 이외에도 다른 종교의 전통이 있었다. 티벳 불교는 본이라고 불리는 티벳 원주민의 종교와 인도 불교의 다양한 학파들과 중국의 영향까지 여러 사상의 복합체다. 수트라라 불리는 불교의 가르침과 탄트라라 불리는 수행법은 모두 인도 불교에 근간을 두고 있는데 수트라는 마음을 다스려서 인간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려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 8세기 후반 불교가 티벳의 국교로 받아들여졌을때 티벳인들은 수트라와 탄트라를 함께 포용했다. ㅠ탄트라불교의 근원은 인도 문명에서 아리안족 이전의 시대로 돌아간다. 이 시기는 강한 모계중심적이며 성애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진 때였다.
Dakini
불교와 힌두의 탄트라 전통에서의 여성상의 차이는 매우 크다. 흰두 탄트라의 상징인 위대한 어머니 혹은 삿티는 누워있
는 시바 위에서 춤을추는 것으로 표현되는 활동적인 신이다.
이 때 시바는 정적인 남성의 원리를 상징한다. 티벳 불교에서는 이 상징성이 반대로 되었다. ㅠ즉 역동적인 양상은 남성으로, 공과 지혜는 여성적인 것으로 나타냈는데, 이는 힌두의 탄트라가 티벳에 들어왔을때 이미 티벳에는 강한 가부장적인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티벳불교에서의 남성과 여성의 성격이 확실히 나누어 진 것은 아니다. 남성과 여성의 결합을 나타내는 형상에서는 남성이 그 보다는 작은 여성을 포옹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반면, 또 다른 강렬한 여성의 상징이 있다. 여성 에너지의 상징인 다키니는 분노에 차 있으며 남성의 위에서 춤을 추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타라나 프라쥬나 파라미타의 평화로운 여성의 모습과 대비 된다. “탄트라의 전통” 의 저자인 아게하난다 바라티는 그의 책에서 이러한 점을 지적한다.
금강승 불교는 두 가지 타입의 신성을, 특히 여성의 신성을, 만들어 냈거나 흡수했습니다. 하나는 인도인들에게는 여성의 에너지라로 받아들여지는 순수한 샥티스인데 이것이 탄트라 불교에서 역동적인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금강승의 이론적인 개념, 온전한 지혜, 즉 반야를 상직하는 우주의 어머니 프라쥬나 파라미타입니다.
종합하면, 티벳 탄트라 불교에서의 여성의 상징은 세 가지로, 언제나 서 있거나 춤을 추고 있는 역동적이고 분노에 찬다키니, 앉은 자세로 인도불교의 철학적인 개념을 대변하는 프라쥬나 파라미타, 그리고 얍윰이라고 불리는 덩치가 더 큰 남성과 성적인 결합을 하고 있는 여성이다. 이 얍윰이 티벳 불교에서 성적인 이미지로 표현되어 있다.
서양의 문화에서는 창녀가 아니면 마돈나로 여성의 이미지를 양극화하여 분리한 것과 반대로, 탄트라의 전통에서는 여러가지 모습의 여성의 모습이 모두 복합되어 있다. 탄트라에서의 여성은 성적이면서도 영적이며, 세속의 성애의 환홀경을 표현하면서도 지적이며, 분노에 차 있는 동시에 평화롭다.
영성을 추구하는 여성은 눈은 반쯤 감고, 순결해야 하며, 평화로워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신선한 일인가!
벌거벗은 모습으로 분노를 표출하며 춤을 추고 있는 다키니는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성모와는 확실히 다르다. 그렇다고 티벳의 여신의 모습이 자비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고통받는 중생을 도우러 나설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로 한 발을 내딛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타라는 티벳 불교에서 가장 널리 숭앙되고 있는 신성이다. 위에 언급된 모든 모습의 여성상을 모두 인지하고 받아들일 수 없도록 제한될때, 여성은 왜곡되고 그녀 자신의 에너지로부터 고립되어버린다.
마지막으로, 티벳불교에서의 여성 수행자상과 다키니의 개념을 뗄레야 뗄 수 없다. 티벳불교에 영향을 준 또 하나의 전통은 쫑첸 (마하 아티)이다. 쫑첸은 티벳에서 가장 오래된 명상학파인데 족첸에서도 여성성을 존중했다. 쫑첸의 철학은 우리는 모두 이미 깨달은 존재라는 가설에서 비롯되며, 권한이 있는 스승에게 지도 받으며 직접 우리의 에너지를 운용할때, 눈이 물에 떨어진 순간 녹듯이 원초의 빛나는 상태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쫑첸의 가르침은 고대 인도 북서부에 있는 오르겐 에서부터 왔는데, 이곳은 다키니의 땅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다키니란 신비한 여성존재 들로서 꿈으로 환영으로 혹은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여셩의 영성의 힘인 다키니는 쫑첸 전통의 완전체의 절대적인 일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