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 (제70회 / 이명자)
앉았다가
섰다가 방문을 열려고 했다가 안했다가(방문 밖에 거구의 아버지가 지키고 있을 것 같아서.) 정신이 오락가락 할 정도로 말이지. 내 방이 사방팔방 콘크리트
벽으로 도배되어 있는 착각에 빠진다. 자그만 유리창 하나 없이 말이지.
그러니 나는 내 몰골을 볼 수 없다. 내가 무엇을 위해 무엇 때문에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일까? 생각이 나를 감옥으로 집어넣는다. 나는 콘크리트
벽을 무지막지하게 두들긴다. 손등에서 피가 난다. 피가 나는
만큼 저주를 읊어댄다. “내놔. 코케인을 내 놓으라고. 안 내놓으면 모두 죽여 버릴 거야. 나를 괴롭히는 모두를 죽여 버릴 거야. 지옥에도 못 들어가게 아주
가루로 만들어 오만 곳에 뿌려버릴 거야.”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무슨 저주를
퍼부어대는지..... 내 방에 남아있는 책상을 두들기고 의자를 뒤엎고 침대를 두들겨 패고
손등에 나지도 않는 피가 난다고 우기고 한참 난리를 떨다보면 몸은 물먹은 솜처럼 늘어지고 정신은(운운할
건더기도 없지만) 의아한 기분에 사로잡혀, 나의 미래를 가늠해보기가
영 계면쩍다. 나의
미래; 와중에도 요즘 내가 과거보다 현재보다 미래의 나 자신을 직접 그려보기도 한다.
왜냐면? 아-그놈의 그림솜씨가 하 못마땅해서다. 아무리 그려도 형체가 뚜렷하지 않아 굉장히 불길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속삭임 ‘너는 얼마든지 이겨낼 거야. 이 따위에 주저앉을
리가 없다 너는. 네 곁에 우리가 있지 않니. 조금만 참아내면
좋은 미래가 올 거야.’ 나를 용기백배하게 만들어 주는 이 말이 언제 또 내게 다가올 것인지도 내다볼
수 없다. 한번 난리가(심각한 마약의 후유증이 꼭 끔찍한
일을 저지를 것 같이 위협적이어서 말이지.) 끝나면 매번 나는 더 깊은 수렁에 빠진다. 나를 용기백배하게 해주는 아버지의 말 때문에 그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더 나아가 내 목숨보다 더 사랑했던 코케인에게
배신 때린 후유증이 너무 슬프다. 찌질스럽게 운적이 어디 한두 번이어야 말이지. 코케인을 멀리한 것이 슬퍼서 울었다. 지금도 운다. 눈물이 눈앞을 가린다. 앞날을 가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비싼 치료비를 받고 중독자들을 보살피는 요양소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오전 나절에 빙 둘러 앉아 씨도 먹히지 않는 중독자 자신들의 이야기를 몇 마디, 그야말로 간단하고 싱거운 몇 마디..... 예를 들 수 있다. 나보다 더 마약에 절어 고개도 들지 못하던 한 녀석. 겨우 이름만(또렷이 기억한다. 그 녀석의 이름은 히스였다.) 되풀이 대고 내내 고개도 들지 못하던 녀석이 결국 아무 효험도 보지 못한 체 요양소를 떠나갔고 들리는 소문은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희미한 인생도 있는 것이다. 변명시간이(중독자들은 단체생활을 두려워하는 게 뻔히 보인다. 아무리 단단한 각오로
임해도 말이지.) 끝나면 자유 시간. 입안에 군침이 저절로
흐르는 시간이었다. 요양소의 정문만 벗어나면 얼굴에 복면을 쓰지 않고도 버젓이 마약판매를 하는 젊고
늙고 여자고 남자고 깨끗한 차림을 하고 한 마디로 전과범 같은 모습을 하고..... 우리들을 유혹하는
허다한 마약판매상들이 요양소를 비웃듯 진을 치고 있다. 들어 간지 닷 세인지 엿 세인지 나는 영문 없이
설치다가-끝도 없이 킬킬거려 댔으니까. 생각해 보시라고 안에서도
우리들을 위하여! 밖에서도 우리들을 위하여! 이니 킬킬거림이
가실 시간이 없었다.-비싼 치료비만 챙기고 나에게 아무 효험도 주지 못한 요양소가 나를 내쫒았다. 요양소의 규칙을 하나도 지키지 않고 버젓이 마약을 사는 현장을 누군가가 목격했다는 이유를 들어. 엿 먹어라 이 도둑놈들아. 아버지 등 뒤에 서서 몰래 한쪽 팔을
흔들어 댔던 그 시절이 그래도 그립다. 연락을
받고 나를 데리러 온 아버지의 얼굴이 너무 굳어 있어서 웃음이 싹 가시기는 했다. 내 경험에 의하면
그 때 아버지를 따라갔다가는 치도곤이 매 맞았을 것이 뻔했다. 그런데 달리 어디 갈 곳도 없고 ‘이번에는 제발 정신 차려 너의 앞날을 생각해라. 나도 지친다, 지쳐. 네가 마음만 독하게 먹으면 그 따위 마약쯤 끊을 수 있지
않니. 이번에는 우리를 위해서라도 말이야.’ 이렇게 신신당부
하던 아버지에게 요양소를 한번 죽 훑어 본 나는 아버지를 등지고 요양소 정문으로 들어가기 바로 전에 ‘그럼요. 끊을 게요. 믿어 주세요. 끊는
건 너무 쉬워요.’ 그렇게 뻥을 쳤으니 닷 세도 못 이기고 쫓겨난 마당에 안 죽을 만큼 매 맞을 각오를
해야 했고 그런데 집에 돌아온 우리 부자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쳐다보는 어머니의 눈길도 마주하지 않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가 지치긴 지쳤는지 지금 그 때의 집안 풍경을 샅샅이 확인해보니 야구방망이 같은 아니면 아무튼 물리적으로
나를 꺾어보려는(바른 대로 말하면 나의 중독이겠지.) 무기
같은 것이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역시 나는 분에 넘치는 행운을 타고 난 것이 분명했기는 했다. 타고난
복이 분에 넘치지 않다면 죽을 고비가 몇 번이었던가, 매 맞아 죽는다고 내 머리꼭대기에서 앰불런스 처럼
빨간 불이 앵앵 아우성치던 때가 몇 번이었던가 라야 말이지. 손가락을 꼽아 세어볼 수는 없지만(기억이 나는 것도 있고 나지 않는 것도 있으니까.) 이런저런 생각이
끝이 없다. “또
난리를 폈단 말이요?” 끝없는
생각을 뚫고 아버지의 의문이 내 귀로 들려왔다. 나는 즉각 긴장한다.
몸이 꼿꼿해진다. 무엇 때문에 내가 긴장하지? “들어가
보진 않았지만,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을 거예요.” 그리고
조용하다. 시간이 침묵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는지..... 방밖에서는
더 이상 말소리도 들려오지 않고 내 머리 속에서도 생각이 정지되었는지 얼어붙었는지 감감하다. “금단증상이야. 몇 번의 고비가 더 있겠지. 잘 넘어가 주어 저 녀석이 잃어버린
저 녀석의 청춘 시절을 더 늦기 전에 되찾아야 할 텐데.” 나는
귀를 쫑긋 세운다. 청춘시절. 그게 뭐지? 어린 시절은 내게 있었다는 걸 기억하지만 청춘시절이라는 것은 기억에도 없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대학신입생이던 첫날 피터의 미소를 받아들이던 그 때가 나의 청춘시절이었을까? 그
미소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첫눈에 반했다. 곧바로 그 미소의 정체를 숨기지도 않고 만 천하에 드러냈지만..... 피터는 우리 모두를 조절하기 위해 갖은 수법으로 이약 저 약을 혼합하여 치명적인 마약을 만들어 당연히
돈에 쪼들리는 신입생들을 겨냥하여 싼 값에 팔아먹었고 지독스럽게 숙련된 마약 판매상이었고 겁도 모르는 공갈협박자이였고 등 등..... 고발하자면; 코케인 가루에 비소를 섞고 마리화나에 독성을 지닌 풀뿌리를 섞고 거기다가 또 깨진 시멘트조각들을 긁어모아 가루로
빻고 온갖 병균이 날뛰는 더러움의 상징 담배꽁초를 비벼 섞고(나는 목격했고 치를 떨었고 그러나 내 눈동자도
흐릿흐릿해서 그 이상 더 앞을 내다보지 못했다.) 어쩌면 그렇게 감히 아무리 고약한 마약판매상이라고
하더라도 시도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을 다시 말해 무자비하게 치명적인 것들을 깨고 찧고 부스고 갈아서 오분의 일 정도의 코케인과 섞어 팔아 자신에게
무지막지한 이득을 남겨 금발의 미녀와 호화찬란하게 살았던 기기묘묘한 피터의 재능 다른 말로 뭐라고 해야 하나.
X 같은 새끼. 초보자만을 선택해 선심을 쓰는 통에 희망에 부푼 날개 짓을 한번 펼쳐보지도
못하고 저승길을 가버린 녀석이 있었다. 그 때
잠깐 소란이 일었었다. 억울한 죽음의 원인을 밝혀내야 한다고 말이지.
그러나 신입생들은 너무나 분주했고 넘쳐나는 자신들의 혈기도 쓸 곳이 너무나 많아서 한 번 의아한 눈빛들을 던졌을 뿐 경찰의 임무에
맡겨 버리고 그만이었다. 그 때의 나도 그만이었다. 정말이었을까. 아니었다. 나는 뭔가가 찜찜하여 피터의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갖은 아양을 떨며 슬쩍 물어보았다. “그
녀석 말이야.” “누구?” 나는
묻는 피터의 시선을 못 본 척 얼굴을 돌리고 뜸을 들였다. “이
그림 비싼 거니?” 검고
빨갛고 노랗고 티도 잘 나지 않는 옅은 보라색의 줄들이 온 화폭에 가로로 세로로 위로 아래로 죽죽 그어져 있어 어떤 것은 노란 다이아몬드모양이고
또 어떤 것은 뾰족한 새부리 모양이고 또 어떤 것은 닌자 들이 사용하는 기다란 칼 모양이고 또 별모양이고 아무튼 눈을 까뒤집고 들여다보아도 알쏭달쏭
하기만한..... 그런 것들을 온갖 색으로 덧칠해 놓은 것 같은 내 눈에 쓰잘데라곤 없어 보이는 난삽한
그림을 가리켰다. “응
그거 비싼 거지. 너는 상상도 못할 거야. 나와 너는 노는
물이 다르잖니?” “그렇구나..... 그 녀석 참 너무나 빨리 세상을 등지다니. 누가 그 녀석을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었을까.” “뭔
말이야 아까부터. 어떤 녀석이 뒈지기라도 했니?” “고등학생
때 럭비선수였대. 딱 봐도 그 녀석의 몸집은 건강의 극치였지.” “그런데? 너 나하고 잡담이나 하려고 수작부리는 거면 대갈통을 부서 버릴 거야.”
서 너
마디 끝에 피터의 머리꼭지에 불이 붙었다. 전형적인 마약중독자들의 심리다. 저 난삽한 그림만 보아도 빨 주 노 초 파 남 보가 미친 것처럼 서로 뒤엉켜 있지 않는가 말이지. 뒤엉켜져 있으니 자신이 뭔가를 이해하지 못하면 화부터 내니까. 나도
그때 곧바로 불이 붙었을지 모른다. 왜냐면 나는 피터를 의심하고 있었으니까. 키 크고 신체 건강하고 근육이 울뚝불뚝하여 기막힌 건강미를 지녔다고 자타가 인정했던 그 녀석을(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은 나의 심정을 누군가는 이해하리라 믿는다.) 죽음으로
몰고 간 놈은? 피터였을 것이다. 혹시 사람들은 ‘자업자득이야. 다 큰 녀석이 못나게 스리 마약 때문에 죽어?’ 라고 판단 내릴지 모른다. 제발 행여 라도 그런 참담한 판단은
삼가 주기를 당부하고 싶다. 죽은 녀석은 피터의 꼬임에 넘어 간 것이 분명하다. 거 아무리 여러분들이 세상만사 다 아는 것처럼 판단을 내려도 사람의 일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게 아닌가. 다행인지 뭣인지..... 경찰의 집요한 추적은 결국 피터에게 종말을
안겨주었고 그래도 싸다는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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