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 (제73회 / 이명자)
“저는
구르밍(개나 고양이의 털 깎는 직업.) 스쿨을 다니기 시작했어요. 동물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저의 마음과 통하기도 하고요. 환상적인 직업이죠.” 내 말이
끝나자 한 사람이 박수를 친다. 연이어 다른 사람이 그리고 카운슬러가 박수를 친다.
뜬금없는 나의 말에 모두들 기꺼워한다. “그래요
정말 환상적인 직업이 되겠네요. 우리 모두 재민이를 위하여 한 번 더 박수.” 아홉
사람의 박수소리가 꽤 요란하다. 기분이 매우 좋다. 근래에
드문 일이다.
수십 번 수백 번 어머니로부터 들어 온 나의 좋은 성품 수십 번 수백 번 아버지로부터 귀가 닳도록 들어 온 오로지 나를 위한 아버지의
희생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변함없이 인간들을 위하여 쏟아내는 자연의 정기 스쳐 지나가면서 상대방에게
미소를 띠는 세상 사람들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선량한 시민들 애쓰는 카운슬러들..... 머릿속에 입력시키려
노력하지만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악몽은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
기분 좋은 오늘밤은 악마의 그늘을 벗어나 보자. 좋은
품성을 지닌 원래의 나로 아버지가 조종하는 안온한 그늘로 푹 파묻히고 싶은 충동이 인다. 박수소리 때문에
충동이 가슴 속에서 물결친다. 의외다. 아니 그리움이다. 아니다. 그러나, 였다. 항상 이 망할 놈의 ‘그러나,’ 가
문제였다. 그러나는 변명의 시작이니까. 조금 전에 일어난
그리움은 썰물처럼 밀려가 버린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언제나 똑같은 레퍼토리다. 악마의 꼬드김이 혓바닥을 길게 내민다. ‘그러셔, 청각장애 시각장애 행동장애 장애란 장애는 모두 짊어지고 있는 네가 구르밍을 해? 너는 나를 벗어날 수 없어. 손발이 떠는 주제에 어떻게 생명이 있는
동물의 털을 깎겠다고?.....’ 환상과 망상과 환각증, 누가
나를 무섭게 을러댄다고 주장하는 나의 강박관념이다. 나는
탈출을 시도한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지켜봐 주세요. 나는 어머니와 함께 조그만 살롱을 열 계획도
가지고 있어요.”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온다. 박수소리가 나의 강박관념을 저만치 밀어낸다. 후 유 한숨이 다 쉬어진다. 한숨이 내 마음을 진정시킨다. 흐뭇한 밤이었다. 시간이 지나간다. 나도 지나간다. 험악하기만
했던 작년 겨울은 내 생애 기록을 깬 좋은 크리스마스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나는 응접실에 오롯이 세
사람만 모여앉아 한 시간여를 검은 창밖으로 흩날리는 눈을 감상하듯 내다보았고, 평화롭기 그지없는 풍경이었다. 더듬어 생각해 보면 크리스마스마다 우리 집에 모이는 친척들의(아버지의
두 여동생 식구들) 북새통에 나는 항상 뒷전이었다. 밤새껏
떠들고 먹고 마시고 돌아들 가면 난장판이 된 집안을 치우느라 아버지와 어머니는 녹초가 되다시피 했다. 그중
가장 깽판을 치던 한 살 위의 나의 사촌형 우리아버지 바로 밑 여동생의 아들 짝짝이 눈과의 크리스마스는 난장판이 되기 일쑤였다. 사촌형이 태어났을 때 그의 부모는 서로의 경악을 숨기느라 근 한 달 동안 눈도 한번 마주치지 않았다고 했다. 왼쪽 눈은 정상이고 오른쪽 눈은 짜부라진 것처럼 눈가의 가장자리가 밑으로 쳐지고 눈두덩이 혹처럼 튀어나온 상태로
태어난 사촌형은 일 년 후에 유명한 의사에 의해 바른 두 눈을 갖게 되었지만 그래도 짝짝 이었다. 나는
절대로 사촌형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키도 나보다 작고 눈도 짝짝이고 마음씨도 짝짝 이었다. 그러니까 시시때때로 하는 짓도 짝짝일 수밖에. 어른들 앞에서는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나는 그의 짝짝이 눈에 이끌려 내 방으로 들어갔다 하면 영락없이 당하고야 말았다. 내가 아끼는 장난감은 그의 손아귀에 고스란히 들어갔고 그의 기분이 삐딱해지기라도 하면 나는 그 녀석의 주먹질을
당해야했다. 헌데 어린 녀석이 어찌나 영악한지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상처를 내게 입히곤 했다. 그의 주먹질에 배를 감싸 안고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남들 보다
좀 짧아 보이는 그 녀석의 두 팔은 또 어찌나 힘이 센지 내 팔을 휘 리릭 내 등 뒤로 돌려 꺾어 잡으면 그 아픔이란 눈물이 질끈 새어나올 정도였다. 그 짝짝이 눈 녀석은 자신의 훗날을 그때부터 이루어가고 있었던 셈이다. 지금
그는 허가된(?) 싸움꾼이고 싸워서 돈을 번다. 쥐꼬리 만
한(그의 아버지의 넋두리에 의하면.) 돈을 벌면서 까딱하면
목숨이 왔다 갔다 할지도 모르는(큰 골 작은 골에 난타라도 당해보지.
어떻게 되나.) 싸움꾼을 그것도 자신에게 딱 들어맞는 천생직업이라고 줄 창 얻어터져 온
몸에 붉고 푸르죽죽한 무늬를 새기고 다니면서 말이지.
그 녀석은 싸움꾼이지만 수무 살이 넘도록 단 한 번도 부모를 떠나 나가 살아 본적이 없는 녀석이다.
싸움이 없는 날은 빈둥거리며 아직도 어머니 젖이나 빨아먹는 녀석처럼 산다고 했다. 세상에는
벼라 별 녀석들이 있지만 영 꼴불견이다. 이제는 저나 나나 서로 바빠 왕래는 없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녀석이 나를 걱정한다는 것이다. ‘너나 잘해’ 라고 나는
코웃음 친다. 여타 간에. 그 겨울이
가고 봄이 지나가고 여름도 지나가고 개들마다 색다른 털깎기를 배우고 실습하고 나는 졸업장을
받았다. 일 년여를 스쿨에 다니면서 지난하기 그지없었지만 말이지. 왜
지난했느냐고? 필시 마약 때문이겠지, 라고 일초도 생각해보지
않고 지적한다면 아무리 여러분이라고 해도 너무 초랑 방정이잖아. 아무튼 여러분이 궁금해 할까봐 한 가지만
알려주지. 어느 날 크기가 쥐방울만하고(하도 작아서 티 컵이라
부른다.) 번잡스러운 기스모란 이름을 지닌 욕 테리어를 실습했다. 어찌나
번잡스러운지 내 정신을 쏙 빼놓았다. 그동안 잠잠하던 수족이 떨리기 시작했고 기어이 사고를 쳤다. 기스모란 놈은 죽어 나자빠지듯 깨갱거렸다. 열여섯 명의 학생들이
동시에 나를 쳐다보았고 기스모의 눈가에 난 상처에서 피가 방울방울 떨어졌다. 대 소동이 일어났다.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학생들이 모두 나서 기스모의
상처에 약을(Syptic:박테리아나 바이러스를 죽이고 피를 멎게 하는 노란색깔인 약.) 바르고 달래고 어르고 개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낵을 먹여(소고기
말린 것.) 진정시키고, 기스모의 상처는 아물었지만 배우는
학생들을 위하여 자신들의 자식 같은 강아지를 우리에게 대여해준 주인에게 사실을 고백했다(고백하지 않고
뒤늦게 개 주인이 알았다가는 백 프로 큰 낭패를 본다.). 기스모의 주인은 진짜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기스모를 살펴보고 위로하고 마지막으로 우리들을 위로했다. “여러분들이
놀랐겠군요. 불행 중 다행이에요. 실수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이번 일로 여러분들은 다시는 실수하지 않을 거예요.
우리 아기는 후유증이 생기지 않도록 내가 최선을 다 하여 보살필 테니 열심히들 하세요.”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해서, 했다.
허지만 나는 사고의 책임을 무자비하게 받고야 말았다. 사실 그 일도 있지만, 지각을 하는 날이 잦았고 두통에 배앓이에 출석하지 않은 날도 있었다는 이유로 졸업장은 받았지만 증명서는 못
받고야말았다. 뿌린 데로 거둔다는 말이 어찌나 딱 들어맞는지.....
그래도 아무튼 일 년이란 긴 세월을 씨는 뿌렸으니까.
나는 어머니를 안심시킨다.
“어머니
증명서는 다음에 종류가 다른 다섯 마리의 털깎기를 끝내면 준대요. 뭐 증명서가 없어도 졸업장만으로도 충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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