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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
그리스도의 신분(고후5장16-21)
성경본문|고린도후서 5:16~21
16.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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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박조준목사
본문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생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볼 수가 있습니다.
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사람을 볼 때 외모나 육체로 알기가 쉽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키가 큰가, 어떻게 생겼나, 공부는 얼마나 했나, 재산은 얼마나 되나, 세상의 지위나 명성은 어느 정도 되나, 월수입은 어느 정도 되나, 가문은 어떤가, 어디 출신인가 등등입니다.
바울이 예수 믿기 전에는 예수님을 육체대로 알았습니다.
가문으로는 나사렛 동네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요, 학문으로는 학교에는 다녀 본 적도 없는 무식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 자신으로 말하면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 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가말리엘 문하에서 최고의 학문을 터득한 사람이었습니 다.
가문으로나, 혈통으로나, 종교적으로나, 학문으로나, 어디를 보아도 예수라는 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훌륭했습니다.
그런데 예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보고 그를 믿는 사람들을 볼 때 바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그 세력이 퍼져 가는 것을 그냥 놓아 둘 수 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한사코 반대하고 핍박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 그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이 예수를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의 변화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예수를 육체대로 세상 표준으로 보고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그런 사람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예수를 모를 때는 그처럼 조롱하고, 비난하고 핍박하던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을 무시하고 천대하던 사람이 예수를 알고 난 다음에는 완전히 변하게 됩니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예수를 알고 난 다음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 다음 절을 보세요.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새 시대라고 합니다.
새 시대는 과학 혁명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통신만 보더라도 얼마나 달라졌습니까?
옛날에는 무슨 소식을 전하려면 글을 써서 사람이 말을 타고 가서 전하는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전화가 있어서 방안에 앉아서 세계 어느 구석에도 다 연락 할 수 있게끔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전화 시설이 얼마나 잘 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교통도 그렇습니다.
또 이 시대는 매스컴(Mass Communication)의 시대입니다.
대량생산(Mass Pr oduction)의 시대입니다.
또한 소위 오토메이션 (Automation)이라고 해서 모두가 자동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말하려면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이 보이는 세상은 모두가 발전해 갑니다.
모두가 컴퓨터화되어서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그런데 과학 문명의 혜택으로 생활의 양식은 변했지만 사람은 옛 사람 그대로입니다.
비행기는 타고 다니지만 그 속사람은 혈거인(Cave man)입니다.
양복은 입고 다니지만 그 속은 아직도 부시맨(Bush ma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풀 사이에 사는 야만인 그대로입니다.
욕심이 그대로 있고 야심도 그대로 있습니다.
음란한 마음도 그대로 있고, 시기와 교만도 여전합니다.
마음이 편협하고, 잔인하고, 우둔하고, 미련합니다.
겉모양은 변했다고 하지만 그 속은 아직도 굴속에 살던 그대로입니다.
이런 혈거인(Cave man)이 지금은 제트기를 조정하고 원자탄을 운반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 600만 명을 무참히 가스실에서 학살하고도 자기는 죄가 없다고 한 아이히만의 마음을 들여다보세요.
이것이 21세기의 고민입니다.
한국의 고민도 세계적인 고민을 축소한 데 불과합니다.
국민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정치기구가 바뀌면 새로워질 수 있습니까?
법률을 개정하면 됩니까?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을 개조할 수 있습니까?
교육으로 인간을 개조할 수 있습니까?
인간의 개조는 본래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지고 일그러진 인간을 개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것은 사도 바울 자신의 체험을 간증하는 말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서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입니다.
삭개오의 생활이 그랬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생활이 그랬습니다.
성 어거스틴의 생활이 그랬습니다.
오늘도 주변에 주님을 믿고 주님을 만나서 새 사람이 되신 분이 얼마든지 계십니다.
새 사람되면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인생관이 달라집니다.
역사관이 달라집니다.
세계관이 달라집니다.
주님을 영접하여 새 사람이 되는 축복이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바랍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까?
19절 말씀에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 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했습니다.
여기 화목이라고 하는 말이 거듭 나타납니다.
이 말은 요즘 말로 화해라는 말입니다.
화해란 피차에 떨어졌던 이들을 다시 가까이 하게 해서 화친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해케 하셨다고 기록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의 중심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화해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화해의 복음입니다.
여기 주신 말씀에 보면 “하나님과 화해하라. 서로 간에 화해하라. 화해자가 되라‘ 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왜 떨어졌습니까?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범죄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멀리하고, 피하고, 하나님과의 사이에 큰 담을 쌓게 되었습니다.
이런 처지에서 사람이 먼저 화해를 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화해를 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화해를 구하십니까?
여기 말씀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라고 했습니다.
무슨 화해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 아니라 친히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시고 피흘려 고난받으시고 죽으심으로, 인간의 죄를 사하시고 다시 부활하심으로 의롭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셨으니 우리 인간의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돌아와 화해할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죄인을 부르십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크신 두 팔입니다.
그의 음성은 부드럽습니다.
간절합니다.
‘오라, 오라! 죄 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화해하자’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다 화해했습니까?
그리고 사람끼리 서로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가인이 아벨을 쳐죽인 이래 사람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불화와 불목과 분쟁과 분열이 있습니다.
개인이든 단체이든, 계급이든 정당이든, 민족이든 나라이든 분쟁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사는 것이 이 불화의 근본 원인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산상보훈에 주신 말씀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화해하는 데 꼭 필요한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먼저 화해를 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대가를 치르시고 우리에게 화해를 청하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나는 아무개와 화해 할 마음이 있기는 하지만 저가 먼저 말하지 않는데 왜 내가 먼저 말을 해야 되지? 하고 생각합 니다. 상대방도 똑같이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내가 먼저 화해를 청해 야 합니다.
내가 먼저 잘못했다고 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 말을 못해서 우리가 화해를 못합니다.
다른 한 가지는 내게 잘못한 것을 무조건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전에 요셉이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애굽에 팔려가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습니까?
그후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형들이 곡식을 구하러 애굽에 왔다가 요셉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들은 동생을 만나 기쁜 것이 아니라 저희가 범한 죄를 만나 무서웠습니다.
그때 요셉이 뭐랬어요?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했으나 하나님은 이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었습니다. 무서워 말고 근심하지 마세요. 나는 벌써 다 용서했어요.’
이것이 필요합니다.
요셉은 형제 간의 불화로 큰 고생을 했습니다.
인간의 불화는 옛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겐 없습니까?
형제 간에, 고부 간에, 부자 간에, 모녀 간에, 친척 간에, 친구 간에 불화가 없습니까?
먼저 잘못했다고 후히 용서하고 화해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마음속에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면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미국 문필가 마크 트웨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용서는 자기를 짓밟는 발꿈치를 향수로 발라 주는 앉은뱅이 꽃의 향기와 같다.’
용서는 가장 고상한 일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화해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실 때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Peace maker)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크게 두 가지 종류입니다.
한 가지 종류는 어디가나 싸움을 붙이는 사람이요, 다른 한 종류는 어디 가나 싸움을 말리는 사람입니다.
성경에서는 싸움을 말리는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전에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 사업에 그렇게 분주한 가운데도 자기 고향에 있는 맨스필드라고하는 친구 백작의 가정에서 재산 문제 때문에 형제간에 싸움이 벌어졌다는 말을 듣고 가서 권면하기로 했습니다. 그때 루터의 나이 63세였습니다.
그는 고향까지 가서 밤새도록 권면을 했고 결국 그의 권면대로 친구는 형제간에 화해하기로 했습니다. 하루 저녁 더 자고 이튿날 떠날 계획으로 잠이 들었는데 그날 밤에 병이 나서 이튿날 아침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마틴 루터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해를 시키려고 많은 애를 썼을 뿐더러 자기 생명까지를 바쳤습니다.
오늘도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 각계 각층에 불화, 불목, 분쟁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믿는 사람은 어디가나 화해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화목케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믿는 사람의 사명입니다.
끝으로 20절 말씀에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신이란 말은 옛날 군주 시대에 쓰던 말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대사 혹은 공사라고 하는 말입니다.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에 보냄을 받은 이를 사신이라고 하고 대사 혹은 공사라고 부릅니다.
임금이 있을 때는 임금이 보냅니다.
민주주의 국가로 대통령이 있는 나라에서는 대통령이 대사나 공사를 임명해 보냅니다.
본문에는 그리스도의 사신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보낸 사신, 대사, 공사 같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1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대사로 보내셨습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우리 믿는 사람들을 향하여 항상 세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오라고 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목마른 자들은 누구든지 내게 와서 마시라”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배우라” 하셨습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나의 짐을 지고 나를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혹은 “나와 함께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즉 주님에게 오고, 주님께 와서는 함께 있으면서 그리스도를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 너희는 온 천하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깊은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보내신 사신들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디에서 일하든지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그곳에 보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관공서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사 로 관공서에 보내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군대에 있으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군대에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회사에 있든지 상점에 있든지, 학교에 있든지 가정에 있든지,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신으로 그곳에 보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사는 국가의 대표로 가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천국의 대표로 이 세상에 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 믿는 사람의 신분이 얼마나 고귀한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그곳에서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를 보여 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내 생활의 모습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여 줄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나 우리의 생활을 조심해야 하며 얼마나 경건한 생활을 해야 되는지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대사는 자기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본국의 지시를 받아서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대사가 된 우리는 어디서나 내 말을 할 것이 아닙니다.
어디서나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대변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믿는 사람은 항 상 말에 조심해야 되고 언제 어디서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대변하는 것을 기억하고 그리스도의 말씀만 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고 최대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한 나라의 명예는 그 나라의 대사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의 나라는 그 대사에 의해서 판단받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 그의 행동을 보고 아, 한국 사람은 저렇게 말하고 저렇게 행동하는구나라고 알 게 됩니다.
대사는 그가 있는 나라 국민들에게 자기 나라를 좋게 보이게 할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명예는 그리스도인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의 모든 말과 행동에 의해서 사람들은 그가 속한 교회와 그가 섬기고 있는 주님을 좋게 볼 수도 있고, 나쁘게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느 여성 잡지에 강남 지역에 있는 몇 교회를 들어 말한 것을 보았습니다.
저를 만난적도 없는데 사진도 내고 여러 가지 내용의 기사를 실었습니다.
그것을 읽으면서 아,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이렇게 보는구나! 하는 것을 깊이 느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의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로 다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대사는 본국에 사는 것이 아니라 타국에 보냄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말을 사용하고, 다른 생활 양식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삽니다.
그리스도인도 그와 같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해 있으면서도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고 모든 생활과 활동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디까지나 천국의 시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입니다.
그러므로 윌리엄 바클레이가 말한 대로 세상 사람과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하지 않는 사람은 사실 그리 스도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대사는 할 일이 많이 있지만 최대의 사명은 그 나라와 화평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의 대사로서 이 세상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이 세상 나라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죄 가운데 사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해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과 화목한 생활을 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과 화평한 생활을 하게 될 때 비로소 참된 마음의 화평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평하지 못할 때 인간의 마음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과 화평할 때 우리의 양심도 평화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신임을 믿으십시다.
어디에서든지 그리스도의 사신 노릇을 잘 하십시다.
이것이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뜻인 것을 믿습니다.
이 사명을 잘 감당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좋은가를 만인에게 우리를 통해 보여 줄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 됩시다.
화해하게 하는 일을 감당합시다.
그리스도의 대사로 바로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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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