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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편
영주가 제 아무리 사념체라지만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살아있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때문에 그가 사념체라는 사실과, 그를 죽일 수 밖에 없는 정당성을 성 내부의 사람들에게 알려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은 영주를 죽인 극악무도한 범죄자가 되어버린다.
무심히 넘길 뻔한 사실을 짚어내자 모두가 작게 감탄했다.
“과연 헤리온님. 안위와 관련된 부분에선 치밀하시군요. 저 카엘은 그저 감탄밖에 안 나옵니다.”
“칭찬이지?”
“물론입니다.”
“헤헤.”
헤리온이 입이 찢어져라 웃자 위르넨은 한심하단 눈빛을 여지없이 보냈다. 멍청이.
그런데 저 백치미가 또 귀여워 보인다. 아무래도 마족하고 계약한 미친 성주의 성에 있다 보니 머리가 조금 이상해진 모양이다.
“그럼 리첼씨. 저희는 병사들과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방으로 찾아갈게요. 그동안 영주의 방에서 시간 좀 끌어주세요.”
“네? 네.”
“아, 그리고 하나 더. 페리엘경하고 영주의 동생과 약혼 이야기가 오가던데 그 이야긴 뭔가요?”
그리 좋지 않은 화제인 듯, 리첼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지만 은인들에게 마냥 감출 수 만은 없는지라, 끓어오르는 속을 삭히고 간신히 대답을 했다.
“아가씨는-.”
“네?”
“아가씨는 페리엘을 좋아했거든요.
영주님은 하나뿐인 동생의 연인으로는 모자르다며 반대하시다, 제가 페리엘과 연인사이라 고백하자 강제로 약혼을 하게 했어요.”
“아가씨가 현재는 행방불명이라던데.”
“영주님이예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흘러나오는 말에 헤리온이 “네?”하고 되물었다.
“페리엘이 죽던 그 날. 그날 검을 휘두르는 영주님을 말리다, 가슴에 상처를 입으셨어요.”
“…….”
“제 연인도 모자라 혈육까지 죽이신 분이에요. 영주님은 그토록 무서운 사람이에요. 저는 그를 용서할 수 없어요.”
헤리온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눈물을 머금고 애처로이 떨고 있는 리첼의 어깨를 가볍게 끌어 위로해 주었다.
“힘내요 리첼. 죄를 지었다면 마땅히 벌을 받을 거에요.”
리첼이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긴 남색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이어 그녀가 복도 저 편으로 사라지자, 위르넨이 팔짱을 낀 채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
“헤리온. 리첼 저 여자 뭔가 수상하지 않아?”
“응.”
“에?”
순순히 긍정하자 말을 꺼낸 위르넨이 오히려 놀라 했다. 카엘도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여서 호기심을 보였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헤리온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설명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거짓말의 냄새가 나.”
“냄새? 그런것도 나냐?”
“분명 그녀의 음성에는 조금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았어. 그녀는 거짓말을 하는 게 아냐. 상황도 어느 정도 적절했고. 그런데도 위화감이 느껴진단 말이야.”
중요한 이야긴데도 자꾸 숨기려 들고. 자신만을 유독 보호하려 하고.
물론 꺼내고 싶지 않은 화제라는 건 알지만, 도움을 주려는 사람에게까지 상황을 숨길 때는 무언가 감추어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내 경험상 하나뿐이야. 거짓된 기억을 진실이라 믿고 있는 경우지.”
비록 사념체라 하지만 사람 한번 죽여보지 않은 여자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살인을 하겠다 한 것 역시 수상쩍기는 마찬가지.
라니아는 손뼉을 짝 치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사기에 능하다 보니 직감이 보통이 아니구나 너.”
위르넨과 카엘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의했다. 확실히 이런 부분은 그의 전문 분야였다.
그들과 달리 카르틴만이 가만히 헤리온의 말을 경청했다.
“사실 말이야. 내가 리첼씨하고 떨어진 이유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함도 있지만….”
말끝을 흐린 헤리온이 구석에 있는 어느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또 다른 ‘진실’을 알기 위해서 이기도 했어.”
문고리를 힘껏 잡아당기자 끼익, 낡은 경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
리첼은 긴장한 얼굴로 자신의 드레스를 꾹 쥐었다. 얼마 전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녀는 페리엘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다정다감하고 나이에 맞지 않게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가진 나의 페리엘.
가끔씩 의견이 맞지 않아 다투기는 했지만 그 또한 행복했다. 언제까지고 그와 사랑하리라 믿었다.
그러한 믿음이 깨어진 것은 그 날. 페리엘이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한 그 때였다.
‘예?’
믿기지 않아 다시 묻는 그녀에게 페리엘이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아가씨와 약혼하게 되었습니다.’
‘거짓말.’
‘거짓말이 아닙니다.’
소문을 들었었다. 하지만 아닐 거라 믿었다. 페리엘은 아닐 거라고.
커다랗게 뜨여진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당신이 어떻게 내게 그럴 수 있죠?’
그것은 배신이었다.
믿기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거짓이라 말해주길 바랐다. 리첼은 원망어린 얼굴로 그의 가슴을 두 손으로 내려쳤다. 거짓말이죠? 사실이 아닌거죠? 말해줘요. 영주의 협박에 못 이겨 그녀와 약혼했다고.
아직도 날 사랑하고 있다고.
하지만 페리엘은 고개를 저으며 무정하게도 그녀를 자신에게서 떼어냈다.
‘영주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
‘저 같은 보잘것없는 남자보다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겁니다. 리첼.’
당신이 아니면 필요 없다.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페리엘은 전에 없이 차가운 투로 대답했다.
‘저는 당신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리첼은 심호흡을 하고 열려진 문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까지 오는데 병사들의 저지는 없었다. 주변을 지키는 시종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검붉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는 영주가 있었다.
그는 리첼이 올 것을 눈치 채고 있었는지 놀란 기색도 없이 감고 있던 눈꺼풀을 느릿하게 들어 올렸다.
“이미 죽은 몸이라고 들었어요.”
“…죽지 않았다.”
그는 부정했다. 리첼은 단호히 말했다.
“죽었어요 당신은.”
“나는….”
“제게 무슨 미련이 그렇게 많이 남아 마족과 계약까지 하며 이곳에 머무시는 건가요.”
리첼이 그 사실까지 알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는지 영주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어렸다 사라졌다.
그는 리첼은 고요한 눈동자로 응시했다.
“사라져서는 안 되니까. 나는 네 곁을 지켜야 한다.”
질린다. 저 눈빛, 저 무감정한 말투.
어째서 영주는 자신을 놓아주지 않으려 하는가. 저 끝없는 집착이 싫다. 소유하는 사랑 따위!
“영주님을 뵌 지 이제 10년이 조금 넘었던가요.”
봄이었던가. 하얀 꽃잎이 흩날리던 따뜻한 계절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처음 만남이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 오래된 기억이다.
사실 영주가 처음부터 싫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영지민들이 입이 닳도록 칭찬할 만큼 좋은 통치자였으니까.
하지만 그가 탐욕을 드러낸 이후부터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모든 불운을 초례한 그가 미웠다.
“페리엘은.”
“…….”
영주가 페리엘을 화제에 올렸다. 리첼은 그의 이름을 담는 영주가 미치도록 미웠다. 더러운 입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지 마!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페리엘은 죽음이 와 닿는 순간에도 너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너를 놓아주려 했다. 내게 보내는 것이 더 행복하리라 여겼던 것이지.”
남색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거짓말. 거짓말이다.
나를 사랑했는데 왜 영주에게 보내. 그런 게 어째서 사랑이야.
“그러나 그는 내가 죽였다.”
순간 가슴이 욱씬 했다. 송곳으로 심장을 찌르듯 아찔한 고통이 엄습했다.
“너를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아 그를 죽였다. 그리하면 내게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
“슬퍼하지 마라. 리첼.”
그가 다가와 눈물이 흐르고 있는 리첼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훑어냈다.
슬퍼하게 한 것이 누군데, 이제와 달래려 들다니 우습지도 않다.
마주친 눈동자가 일견 애잔해 보이기도 했다. 살인자 주제에.
쏴아아아아.
밖은 여전히 세찬 비가 내렸다.
리첼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다 그의 품안에 기대었다.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팔이 어깨를 조심스레 감싸왔다.
울지 마라, 나를 미워해라. 그것이 네 삶의 이유가 될 수 있다면. 그가 그렇게 속삭여 온다.
모든 게 부질없는 것 같기도 하다. 영주를 죽인다 해도 페리엘이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닌데.
가느다랗게 숨을 몰아 내쉬던 리첼이 그를 향해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게 원하는 게 뭔가요 영주님-.”
“내가 원하는 것. 너는 무엇을 원하지?”
탁탁탁, 멀지 않은 곳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당신이 제 눈앞에서 사라지길 원해요.”
그는 방심하고 있었다. 리첼은 품안에 숨겨 두었던 단도를 꺼내들었다. 동시에 문이 열렸고, 기다리던 이들이 들이닥쳤다.
리첼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꺼내든 단도를 그의 심장에 박았다.
아찔한 고통이 그를 휘저었다.
“헉!”
그가 놀라 숨을 들이켰다. 이미 죽어버린 육체에 상흔을 가할 수 있는 검이라니. 계약할 당시 ‘그’가 말하기는 했었다.
신의 무기는 조심하라고. 하지만 보통의 인간은 소지할 수 없는 물건이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했다.
그런데 이런 물건을 리첼이 어떻게.
역시 마족이란 온전히 믿으면 안 되는 존재였나.
그래서 그 검은머리의 아이가 어리석은 짓을 했다 일렀나.
하지만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그의 선택지는 이것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가까 스럽게 되살아난 신체가 점차 무너져 내려간다. 응집된 기운이 소멸되어 가는 것이 스스로도 느껴졌다.
“어떻게?”
리첼 역시 묻고 싶었다. 어째서 내 삶을 무너트렸냐고. 그는 자신의 심장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나는 아직…. 아직, 사라져서는 안 되는데.”
“날 그만 괴롭히고, 이제 그만 사라져주세요.”
“리첼….”
안타깝고 미련이 남은 듯한 애틋한 목소리.
마치 그날의 페리엘이 연상되는 얼굴과 말투였다.
콰르르르릉. 천둥이 요란하게 치며 창가에 놓인 꽃들이 흔들렸다.
내밀어진 손을 매정하게 뿌리쳤다. 거부하자 그의 얼굴에서 일순간 슬픈 기색이 어렸다.
영주는 끝까지 눈을 감지 못하고 리첼을 바라본다. 박힌 검을 뽑았다.
이어 그는 눈앞에서 검은 연기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툭, 하고 하얀 정장만이 그의 흔적을 알리듯 바닥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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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즈돋는 여러분들을 피해 연참을 시전했습니다. 이제 막편 남았뜸요.
흐억.. 지쳤음.
퇴고 안하고 바로 올려서 오타가 좀 많을지도 몰라요. 독수리의 비애.. 발견하는 즉시 다 짚어주세요. ㅋㅋ; 천천히 고쳐야지요.
여하간 이번파트는 그리 길지 않습니다. ;ㅂ; 쉬어가는 파트이기도 하고, 얼른 물의 나라 가야죠. ㅋㅋ
이래서 물, 불, 땅 언제 다 돔...? 헤리온 언제 왕되죠? ㅠㅠㅠㅠㅠ?
어? 이러면 안돼는데!! 영주님 성격 딱 내 스탈인데!!!
리첼뭔가이상해..영주님이나쁜앤줄알았더니리첼이나쁜애네ㅡㅡ
영주님도 은근 불쌍하네..
...리첼...뭐...뭐냐넌?!?
리첼....ㅠㅠ 무섭다ㅜㅜ
아아-, 이제 일행들은 경악하고(물론 라니아는 빼고) 리첼이 후회할 일만 남은 건가요?
.......영주 진짜 그리 나쁜사람같지않은데??
뭐지...??
음.............영주가 굳이 마족하고 계약을해서라도 리첼옆에 남아있으려 했던 이유가 뭔지 궁금하네요......//
영주 그렇게 나쁜사람같지않은데? 오히려 리첼이 별로...
마져 영주도 쫌 불쌍하다..
영주가 제일불쌍한것같아요ㅜㅜ
재밌네요
뭐죠... 영주님만비극인가ㅠㅜ 리첼나빠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