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오피니언 입력 2021-03-12 03:00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캐묻는 삶’[조대호 신화의 땅에서 만난 그리스 사상]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소크라테스는 이 장소의 터줏대감이었다. 튀어나온 이마, 콧대가 움푹 파인 안장코, 넓적한 얼굴 등 남다른 외모가 눈길을 끌었다. 게다가 그는 항상 맨발이었다. 하지만 대화의 기술에서는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석공 일, 구두 수선, 말 조련 등 일상의 사례들을 끌어들이는 데서 시작한 대화는 어느 순간 경건 우정 용기 절제 정의 등 덕(德)에 대한 대화로 바뀌어 있었다. 칼, 가위, 술병, 장신구 등 가재도구 이름을 대며 어디서 그것을 구할 수 있느냐고 묻다가, 갑자기 ‘용감하고 덕이 있는 사람은 어디서 구하지?’라고 묻는 식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일깨운 지혜 : 그의 말은 긴 연설도, 장황한 강의도 아니었다. 물론 돈도 받지 않았다. 조롱과 폭행을 피하면 다행이었다. 사람들의 생각을 끌어내어 ‘묻고 따지고 시험하는’ 그의 대화 방법은 무척 도발적이었다. 반박을 당해 원한을 품는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그의 대화를 지켜보며 즐기는 젊은이들도 생겼다. 겉보기에 장난 같은 대화였지만, 소크라테스는 그것이 ‘정치술’이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최고의 ‘정치가’를 자처했다. 아테네의 정치를 이끈 위대한 정치가들은 “나라를 붓고 속으로 곪게 하는 것”밖에 한 일이 없는 위인들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무엇이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그런 ‘이상한 정치’에 나서게 했을까? 소크라테스가 태어날 무렵(기원전 469년) 아테네는 해상제국으로 힘차게 도약하고 있었다. 그가 태어나기 10년 전 그리스의 작은 도시국가들은 대제국 페르시아의 침공에 맞서 운명의 결전을 벌였다. 그리고 승리했다. ‘코끼리와 모기 떼의 싸움’ 같은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은 아테네였다. 해군이 강력했던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재침공에 대비한다는 구실 아래 에게해 인근 도시국가들을 끌어들여 동맹을 맺고 맹주로 나섰다. 자신들의 정체와 문화에 대한 아테네인들의 자부심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아테네는 ‘다른 나라의 본보기’이자 ‘도시 전체가 그리스의 학교’였다. 하지만 꼭 거기까지였다. 민주정체와 패권에 대한 아테네인들의 확신이 타국에 대한 개입과 지배로 이어지면서 다른 나라들의 원성을 사기 시작했다. 민주국가가 점점 제국으로, 폭군의 나라로 변화해 갔던 것이다.
#잘못된 확신의 위험함 폭로 : 급기야 피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외세를 물리치고 50년 뒤 아테네는 동족과의 전쟁에 휩쓸렸다. 이 전쟁을 기록한 당대의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아테네의 세력 팽창이 경쟁국 스파르타인들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켜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고 썼다. 두 나라를 중심으로 전체 그리스가 ‘함정’에 빠진 것이다. 투키디데스는 특히 이 전쟁이 초래한 가치 전도에 주목했다. 용기가 만용으로, 신중함이 기회주의적 비겁으로, 절제가 속임수로, 사리분별이 태만으로 여겨지는 시대가 왔다. 확신의 정도는 자기 성찰의 빈도와 반비례하는 경향이 있다. 확신이 완고해질수록 성찰의 범위를 점점 더 벗어난다. 제3제국의 건설을 외친 나치의 확신이 독일을 어떻게 파괴했는지, 위대한 미국을 내건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확신이 미합중국을 어떻게 분열시켰는지 소크라테스가 알 리 없었다. 하지만 알았다고 해도 별로 새롭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미 ‘위대한 나라’ 아테네 제국의 확신과 횡포에 대해 잘 알았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적 팽창과 내란의 과정에서 인간들은 타인을 파괴하면서 스스로 파괴되어 갔다. 불필요한 것들에 대한 욕망이 과도하게 부풀어 오르다가 터져 버려 삶의 기본 틀이 무너져 내렸다. 그런 시대에 부와 권력과 명성에 대한 욕망에 취해 혼미한 나라를 흔들어 깨우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정치’였고, 잘못된 확신의 거짓됨을 폭로하는 것이 그의 ‘정치술’이었다. #캐묻지 않는 삶은 가치 없어 : 소크라테스는 무지가 악(惡)의 원인이라고 믿었다. 묻고 따지고 시험하는 대화는 그런 무지에 대한 처방이었다. 그는 그런 시험을 통해 인간이 확실한 앎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소크라테스는 어느 누구도 확실한 앎, 흔들림 없는 확신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가 사람들에게 요구한 것은 확실한 앎의 획득이 아니라 앎의 불완전함에 대한 자각이었다. 불완전한 앎에 기댄 확신에 대한 검토의 필요성을 그는 일깨웠다. 소크라테스는 그것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캐묻지 않는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은 아테네 시민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경고이자 요구이다. 번성했던 삶의 빛과 어둠을 속속들이 체험한 한 인간의 실존적 고백이기도 하다. ‘대중의 지배’로서의 민주정에는 항상 ‘대중선동가’의 위험이 따른다. 옳고 그른 것을 따지고 가려내는 능력이 아테네의 민주정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시민적 덕목이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직접 민주정이 간접 민주정으로 바뀐 지금도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런 뜻에서 소크라테스의 비판이 “민주적인 삶을 위해서 필요한 비판”이라는 칼 포퍼의 말에 일리가 있다. #확신에 따른 편향-맹목 경계를 : 그러나 비판과 검토가 정치에서만 필요할까?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고 무언가를 선택해야 한다. 확신이 있다면 선택도 쉽다. 확신이 강할수록 자신의 선택에 대해 질문할 필요도 없고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따져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편하니까 좋다. 하지만 편하고 쉬운 확신과 선택에는 언제나 편향과 맹목의 위험이 따른다. 이런 위험에 대처하는 길은 묻고 따지고 시험하는 것밖에 없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삶을, 타인을, 더 나아가 나 자신을 검토해야 하는지 보여준 본보기였다. 폐허의 아고라에서는 부서지고 깨어져 오랜 시간 속에서 마모된 돌덩이들이 진짜다. 인간의 앎과 확신도 흔들리고 깨어지면서 세월의 시련을 견뎌낸 것만이 안전하다. 흔들림 없는 확신이 가장 위험하다.
* 오늘의 묵상 (220715)
율법의 세부 규정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서른세 가지의 노동이 금지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밀 이삭을 뜯는’ 행동이 포함된 추수 작업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이 규정에 기대어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이 율법도, 말씀의 의미도 제대로 모르고 있음을 지적하시면서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임을 선언하십니다.
살다 보면 알맹이는 보지 못한 채 껍데기만 볼 때가 있고, 의미와 사람은 보지 못하고 규정만 볼 때도 있습니다. 종교적 규범은 세세한 것까지 들여다보지만, 배고픔이라는 인간이 놓인 절박한 상황은 제대로 보지 못하였던 바리사이들처럼 말입니다.
우리도 누구나 개인으로, 또 집단으로 바리사이가 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규범과 관행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행동은 교회를 “박물관의 전시물”로 만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울러 계명과 규정들을 일컬어 “두 얼굴”, 곧 “하느님의 얼굴과 형제의 얼굴을 알아보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58.61항 참조).
여러분은 계명과 규정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과 형제들의 얼굴을 만나고 있는지요? 부끄럽게도 전례와 교회 규범을 조심히 살피는 저 자신을 꽤나 훌륭한 사제라고 여길 때가 있습니다. 그 규범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이를 지적하는 것을 합리화할 정도로 말입니다. 지켜야 할 계명과 규범들과 함께 그것을 마주한 형제의 얼굴을 한 번 더 보아야 하겠습니다.
(김인호 루카 신부 대전교구도룡동성당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