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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식에 대해서
개혁파 신학을 잘못추구하면 금식 자체를 매우 부정적으로 보게 되는 데, 그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사람들이 금식을 부정적으로 보게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금식을 통해서만 영적인 순결함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금욕주의적인 경향들,
그리고 40일 금식기도 몇 번했느냐를 신앙의 척도로 삼고, 자기를 자랑하는 경향들,
금식이 공로가 되어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획득하려는 공로주의적 경향들,
또는 금식기도를 통해 계시를 받고 환상을 보며 음성을 듣는 등의 신비주의적인 경향들이 오늘날 많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릇된 현상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정당하게 비판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금식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면 안 됩니다.
오히려 금식은 하나님의 명하신 바요,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 앞에서 세울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그러면 금식이 무엇이며 그 의의가 무엇입니까?
1) 금식은 죄를 깨닫고 자신의 죄로 인한 큰 슬픔과 애통의 표현이다.
첫째로 금식이란 어떤 사람이 큰 슬픔을 당하고 있다는 표시로서 자기 몸에 영양 공급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의 자식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게 되었을 때, 그래서 크나큰 절망과 슬픔에 빠졌을 때, 식음을 전폐함으로써 자신의 극심한 내면의 고통과 슬픔을 표현합니다.
마찬가지로 구약의 백성들도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 앞에서 자신들의 죄를 깊이 깨닫게 되어졌을 때, 그래서 자신들의 죄로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음을 깨달았을 때,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제를 뒤집어쓰면서 통곡함으로써 큰 슬픔을 표현하였던 것입니다(에 4:3).
아합왕도 엘리야가 와서 죄를 책망했을 때,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제를 뒤집어씀으로써 하나님 앞에 겸비하였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왕상 21:27).
그런데 구약성경에 보면 꼭 슬픈 일이 생겼을 때만 금식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하나님이 연중절기로서 매년 대속죄일날 금식하도록 정하셨습니다(레 23:27).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돌아보고 금식을 통해 자기의 육체와 영혼을 괴롭게 하여 하나님 앞에 낮아져 겸비하며 회개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꼭 말씀을 통해 죄를 깨닫고 슬픔과 애통이 가득할 때에만 금식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냉냉하고 내 신앙이 많이 무너져 있다고 느껴질 때에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며 회개하고 마음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금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2) 금식은 단체적으로나 국가적으로 긴급한 일, 위급한 일이 발생했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필사적인 조치이다.
여호사밧 왕은 유다가 침략을 받았을 때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했습니다(대하 20:3).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또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에스더도 자신과 자신의 백성이 학살당할 위험 앞에서 그 위험에서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왕 앞에 나아가고자 했는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해 온 유다백성들로 하여금 금식하도록 하였습니다(에 4:16).
에스라도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전에 백성들의 노정의 안전과 형통함을 위해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스 8:21).
3) 금식은 어떤 영적으로 중대한 사건 앞에서 또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기 전에 자기를 겸비하여 준비하는 것이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 40일 동안 금식했습니다(출 34:28). 그리고 엘리야도 호렙산에 가는 동안 40일 금식했습니다(왕상 19:8). 다니엘 역시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기 전에 금식했습니다(단 10:2-3,부분적 금식).
여선지 안나 역시 아기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메시아 오심과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며 성전에서 금식하며 기도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눅 2:36-37).
그리고 예수님도 사단 마귀와의 단판을 위해 사단 마귀의 시험 받으시기 전에 40일 금식기도하셨습니다(마 4:1-2).
바울은 예수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고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했고(행 9:9), 바울이 선교여행을 하면서 자주 굶주렸고, 교회에 장로를 세울 때나(행 14:23) 안디옥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세울 때에 온 교회가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행 13:2-3).
4) 금식은 자신의 간구를 들어달라고 하는 간절함의 표현이다
다윗은 밧세바를 범한 후 밧세바가 잉태한 아기가 죽게 되었을 때 이 아이의 생명을 살려주시기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삼하 12:16). 그리고 한나도 자식 없음으로 인해서 고통당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며 간구하였습니다(삼상 1:7).
이 외에도 수많은 예들이 있지만, 이정도로도 충분히 금식의 의의와 유익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수많은 예들을 종합해볼 때 금식은 아래와 같은 유익이 있습니다.
* 금식의 의의
1) 자신의 육체를 제어하고 징계함으로써 말씀과 기도와 묵상에 집중하게 하는 유익이 있습니다.
먼저 확실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금식 자체는 은혜의 방도가 아닙니다. 금식한다고 해서 그 금식이 우리의 영혼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말씀과 기도만이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 세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식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이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금식은 육체를 제어하는 것이고 징계하는 것입니다.
(13)나는 저희가 병 들었을 때에 굵은 베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시 35:13)
(10)내가 곡하고 금식함으로 내 영혼을 경계하였더니 그것이 도리어 나의 욕이 되었으며(시 69:10)
(24)금식함을 인하여 내 무릎은 약하고 내 육체는 수척하오며(시 109:24)
금식은 자아를 징계하는 것이며 육체와 영혼을 괴롭게 하여 쓸데없는 육신적 욕망을 약화시킵니다. 그리하여 기도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만일 기도가 보이지 않는 것을 잡는 한쪽 손이라고 한다면, 금식은 보이는 것을 놓아주는 다른 한 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온갖 즐거운 것들로 가득합니다.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고 혀와 배를 기쁘게 하며 몸과 마음에 쾌락을 주는 것들로 가득합니다. 물론 거기에는 우리가 정당히 누려야 할 것들도 있지만, 또한 거기에는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주님을 향해 있어야 할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가는 유혹들도 함께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그런 유혹들이 우리의 육체의 감각을 통해 전해져 옴으로써 우리로 신령한 것을 온전히 추구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육체에 영양의 공급을 중단하면 어떻게 될까요? 육체의 욕망이 어느 정도 약화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즐거움과 죄의 낙은 일단 먹고 육체가 힘을 내야 할 수 있는 것들 아닙니까? 그런데 육체에 영양공급을 중단했으니 이제는 육체가 그것을 추구할 힘을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식은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는 육체의 방종을 제어하고 욕망을 감소시켜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도록 하는 그야말로 육체를 쳐서 복종시키는 방안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충성된 교부 요한 크리소스톰은 금식을 일컬어서 아래와 같이 말했습니다.
“천사들의 삶을 본받는 것이며 현세적인 일들을 멸시하는 것이며, 기도의 학교이며 영혼을 육성시키며 입에 재갈을 물리고 욕정을 감소시킨다. 분노를 누그러뜨리며, 기질을 온유하게 만든다. 분별력을 높이고 마음을 정화시키며 육신의 짐을 덜어준다. 악한 충동을 몰아내며 두통을 없애주고 자신의 행동과 혀를 조절하여 올바른 생각을 갖게 한다.”
그리고 루터와 칼빈도 아래와 같이 각각 말하였습니다.
“몸을 억제하고 통제하기 위해 자주 금식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왜냐하면 뱃속이 차면 몸은 설교나 기도나 공부 또는 다른 좋은 일을 하기에 거북해지기 때문이다.”(루터)
“거룩하고 유효한 금식은 세 가지 목표를 지닌다. 첫째로, 우리는 육신을 약화시키고 제어하여 방종에 빠지지 않기 위해, 둘째, 깊은 기도와 거룩한 묵상을 보다 잘 준비할 수 있기 위해, 셋째 하나님 앞에 우리 죄를 자백할 때 우리의 겸손을 증거하기 위해 금식을 이용한다.”(칼빈)
금식을 통해 우리는 그야말로 감각세계의 수많은 것들에서 벗어나 말씀과 기도에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2) 금식은 겸손의 표현이요, 하나님께 매달리는 간절한 마음을 고취시킵니다.
금식이란 죄를 깨닫고 애통하며 슬퍼하면서, 자기를 낮추어 회개하려는 겸손의 표현이며, 또한 하나님 앞에서 변화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육체와 영혼이 괴로움 속에서 기도에 집중하게 되어 더욱 그 마음이 하나님께 매달리며 간절히 간구하게 됩니다. 이것은 아래의 내용과도 연결됩니다.
3) 금식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겠다는 자신의 결의를 표현하는 신앙고백입니다.
(12)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13)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 여명이더라(행 23:12-13)
위의 구절은 유대인들의 그릇된 금식을 보여주지만, 그러나 금식의 의의가 무엇인지를 한편으로 잘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즉 금식이란 하나님 앞에서 아래와 같이 자신의 결의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주님 내가 죄를 버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사람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습니다. 주님 성령으로 충만케 해주시지 않으시려면 차라리 저에게 죽음을 주십시오.”
금식은 내 육신의 생각, 자아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고자 하는 필사적인 예식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결의의 기저에는 내가 생명을 포기할 만큼 하나님께 대한 소망과 사랑, 믿음이 있다는 신앙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겸손과 회개의 한 표현으로 금식하며 우리의 육체적 욕망을 거부하는 의미로 금식합니다. 금식은 우리의 기도를 더욱 간절하게 그리고 강력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간절하게 밤낮 부르짖는 성도들의 기도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응답하셔서 가장 좋은 성령 충만의 선물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말했던 것처럼 “오늘날 은밀한 기도는 많이 강조하지만 은밀한 금식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은밀한 기도를 명하셨듯이 은밀한 금식도 명하셨다.”고 말하며 금식기도생활을 회복해야 합니다. 특히 마태복음 17장 21절에서처럼 사단 마귀와의 영적전투의 삶에서 승리하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기도와 금식을 통해 하나님의 성령의 권능을 덧입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금식과 기도생활을 통해서 주님의 나라를 위해 밤낮 부르짖는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금식할 때 꼭 아래의 주의사항을 기억하십시오.
1) 절대로 하나님께 자신의 이기적인 소원성취를 위해 단식투쟁하는 식으로 금식해서는 안 됩니다. 금식으로 협박하려고 하거나, 금식을 공로로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획득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2) 요즘 건강을 위해 간헐적 단식을 하는 것이 유행인데, 그것은 금식이 아닙니다. 물론 금식기도를 열심히 하다보면 그에 따라 건강의 유익을 따라올 수 있지만, 건강의 유익 때문에 하는 금식은 금식이 아닙니다. 금식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3) 남에게 절대로 알리면 안 됩니다. 절대로 금식하는 티를 내면 안 됩니다. 불가피하게 가족에게는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만 결국 금식기도의 생명은 은밀성입니다.
4) 40일 금식기도를 자랑하거나 절대로 신앙의 척도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5) 마음에도 없는 형식적인 금식, 금욕주의적인 금식,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지 않는 금식은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아래의 말씀에 주의하십시오.
(23)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골 2:23)
6) 다름 사람들에게 금식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자원함으로 하는 금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교회에 중요한 사안이 있을 때 이를 위해 온 교회가 금식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입니다. 교회에 세례 입교자가 있을 때, 선교사를 파송할 때, 직분자 임직식을 할 때, 중요한 사항에 대해 결정해야 할 때 등...
7) 금식할 때는 자신의 건강상태에 맞게 금식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