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장기려 박사
함석헌
나는 나 자신이 잘못이 많은 사람이요. 또 세상이 일반으로 잘 잘못에 따라 사귐 관계를 가리는 경향이 많기 때문에 감히 누구를 내 친구라고 마음 놓고 부를 수가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친구라 하고 싶어도 그 쪽이 나를 친구로 대해 주기를 꺼리는데 내가 어떻게 감히 친구라하며, 그랬다가 도리어 그에게 욕이 돌아갈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장박사만은 내가 마음 놓고 내 좋은 친구라고 감히 부를 수 있는 지극히 적은수의 친구중의 한 분입니다. 그는 내 모든 잘못을 다 알고도 그 때문에 대해 주는데 아무 변동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장박사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그 연대를 기억 못하나 1930년대 매년 겨울마다 무교회모임을 하던 때 어느 모임에서인 것 같습니다. 손정균 박사와 서로 아주 가까운 친구라고 하면서 같이 왔던 것을 기억합니다. 사실 고향은 같은 용천인데 서로 알기는 그 때가 처음이고 그 이후 오늘까지 변함없이 사귀어 오고 지금은 달마다 한 번씩 그 댁에서 하는 성경모임에 가는데 그때에 가서 하루 오전 중을 지내는 것이 요새 내 생활 중에서 가장 즐겁고 영감 얻는 시간입니다.
장박사님의 성격에 대해 내가 처음으로 놀란 것은 평양 기독병원에 오셨을 때입니다. 서울에서 몇 번 만나서 가까워는 졌으나 그때 우리나라 외과계에 백인제 박사가 제1인자요 그 다음은 그 제자인 장박사라는 것 밖에 더 자세한 것을 몰랐는데 1940년 내가 평양시의 송산리의 고등농사학원을 인계 받아 가지고 나간 때에 장박사는 마침 기독 병원에 원장으로 오게 됐기 때문에 자주 오고감이 있게 됐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원장으로 온지 얼마 아니되어 내부에 무슨 문제가 생기어서 원장을 그만두고 그저 평직원으로 있으라는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봐도 그것은 도저히 있을 수 있는 사람대접이 아닙니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그냥 있지 않을 것입니다. 당장 짐을 싸가지고 가면 갔지 그 모욕을 받고 그저 있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장박사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 태연히 있었고 우리가 옆에서 더러 물어도 아무 불평은 그만두고 별로 설명조차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보통 성격이 아닌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그 비슷한 관계는 해방후 서울대학 병원에 있을 때에도 있었던 듯한데 언제나 아무 불평이 없습니다.
신앙에 관해서 내가 아는 것으로는 그 단순성입니다. 거의 어린이를 연상하리만큼 그저 단순히 믿습니다. 나 같은 것은 생각이 많아서 이런 설명 저런 설명이 있고 의심도 많이 하고 변하기도 많이 했는데 장박사는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70년 80년전 장로교가 처음으로 들어오던 때의 신앙 그대로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평양서는 산정현 교회의 장로였고 여기 왔어도 다시 세워진 그 교회의 장로입니다. 그럼 아주 보수주의요 어떤이들 같이 신사 참배들 하고 요새 같이 개방적인 신앙을 가지는 사람은 마귀의 자식이라 해서 사귀기도 싫어하는그 하면 그런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아주 재미있습니다. 보수적인 산정현 교회의 장로 노릇을 하는 한편 무교회의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야나이하라(矢內原) 후지이 다께시(藤井武)를 아주 존경하고 그 글을 많이 읽고 주일마다 오후는 자기 댁에서 무교회 성경 연구 모임을 합니다. 그리고는 한달에 한번은 무교회에서는 용납도 못되는 나를 허락하여 그 모임을 인도하게 하지 않습니까? 나는 또 나여서 내 실생활을 쥐구멍이라도 없어 못들어가는 형편이지만 내 생각에는 어느 정도의 자신이 있으므로 무슨 비판 시비를 받아도 내 생각을 숨기지도 굽히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자기 신앙이 그 바닥에서 흔들릴만한 그 이단의 소리를 들으면 목에 핏대를 돋히며 반박을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당장 거래를 끊겠는데 그는 조금도 그런 기색이 없습니다. 말로 표시할 정도도 아니되어 나도 그저 가만 있습니다마는 참말로 탄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보다는 더 놀라운 것은 가정 생활입니다. 지금은 아드님도 다 어른이 됐고 며느님 맞아 손자도 나고 했으니 좀 나을지 모릅니다마는 이북에서 혼자 갑자기 오신 이후 어려움이 많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부인과의 사이에 사랑이 각별히 두터운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그러니 슬픔은 얼마나 했으며 외로움은 얼마나 했을까? 시험도 많았고 유혹도 많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장박사 같은 인물과 학식과 재주와 인격과 신앙과 사회적 지위를 겸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점에서는 나는 장박사를 대할 때마다 부끄럽고 미안하고 송구스러워 견딜 수 없습니다.
내가 보기엔 돈의 욕심도 권세의 욕심도 명예의 욕심도 사업의 욕심도 없습니다. 욕심이 있다면 하나, 어떻게든지 남에게 좋은 일을 하자는 욕심일 것입니다. 어느 모로 보나 사업의 재주는 없는 분입니다. 집 세간 살림도 잘 모르는데 사업을 알 것 있습니까? 그런데 20년전 천막에서 기도로 시작한 복음병원이 오늘의 크기에 이른 것은 참 기적입니다. 물론 하나님 은혜라면 은혜지만 사람 편에서 한다면 그 욕심 없음이 그 요인이라 할 밖에 없습니다. 그밖에 하나를 더 곱는다면 환자에 대한 그 정성입니다. 재주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정성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나이 회갑이 되는 오늘에도 대수술을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하고 중환자인 다음에는 안심이 아니되여 맘 놓고 잘 자지 못한다 하니 대개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만 더 말하겠습니다. 의사면서 환자가 오면 전도부터 먼저 하는 것도 그렇지만 병은 의사가 고치는 것이 아니라 제 속의 제 힘으로 낫는 것이라 역설을 하니 이런 의사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마운 것은 이런 된 소리 못된 소리를 하면서도 내 마음이 평안한 것입니다. 그가 나를 믿어줄 줄을 내가 믿습니다.
1971년9월29일
이글은 장기려 박사 회갑을 맞으며 쓰신 글이다.
부산모임 1971.10월 26호
저작집30; 없음
전집20;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