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특별위원회에서 6년 동안 활동을 했고 내년부터 보직 순환의 대상이 되었는데요. 어떤 곳에서든 어떤 일이든 쓰이는 것만으로 감사한 마음입니다. 일에 있어서는 관점이 분명한데, 사람에 있어서는 좀 달라서 마음의 흔들림이 있었습니다. 제가 홍보팀에서 몇 년간 일했었는데 생소한 일을 하다 보니까 담당자에게 의지를 많이 했었나 봅니다. 그래서 헤어진다고 생각하니까 허전한 마음이 많이 들고, 눈물도 좀 나고 했습니다. 이럴 때는 어떤 수행적 관점을 가지면 좋을까요?”
“중생심의 가장 큰 특징을 부처님께서는 의지심이라고 했어요. 물론 경전에서는 탐진치가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표현하고 있죠. 첫째, 욕망에 끌려다니는 것, 둘째, 자기 성질에 끌려다니는 것, 셋째, 인과법을 잘 모르는 어리석음, 이 세 가지가 괴로움의 근원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봤을 때는 홀로 서지 못하고 의지하는 것이 중생심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어린이’라는 말은 순수하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원래의 어원은 ‘어리석다’ 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어리기 때문에 또는 어리석기 때문에 부모에게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의 사랑을 갈구하지요. 그러나 성인이 되면 자기가 자기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자연 생태계를 봐도 어린 새끼는 다 부모에 의지해서 삽니다. 닭을 봐도 계란은 부모의 품에서 깨어나서 병아리가 되고, 병아리는 어미 닭의 품 가까이에서 놀고 다니잖아요. 병아리도 노란 털이 빠지고 닭의 본래 털이 나서 점점 성장하게 되면 그 병아리를 사람이 잡아도 어미 닭이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이렇게 모든 생명은 자기 생명을 자기가 책임지게 되는 이런 과정이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렵 채취 시대에는 한 13살 정도가 자립하는 나이였습니다. 농경사회가 되면서부터는 약간의 농사짓는 기술을 배워야 되기 때문에 한 15세 정도가 성인의 기준이었습니다. 만약에 자연 속에서 동물들처럼 사람이 산다면 15세가 되면 아기를 갖고 성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산업 사회가 되면서 교육 기간이 점점 길어져서 이제 성인의 기준이 외국에서는 만 18세, 우리나라에서는 만 19세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성인이 되는 나이를 높게 잡다 보니까 육체적으로는 성인이 되었는데 사회적으로는 성인의 대우를 안 해 주는 데서 청소년 문제라는 것이 생기는 것입니다. 만약 옛날처럼 15살에 성인의 대우를 해주면 청소년 문제 자체가 생길 수 없습니다. 몸은 어른이 됐는데 사회적으로는 어른 대우를 안 해 주고 규제를 하니까 다양한 갈등이 발생하는 거예요. 그래서 요즘은 미성년자 범죄는 형량을 감해주니까 애들이 덩치가 크고 범죄도 성인 범죄 수준인데 처벌을 안 하니까 이게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촉법 연령을 다시 낮추는 이런 일도 생겨나잖아요.
성인이란 의지하지 않는 존재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사람은 공동체 생활을 하다 보니 아무래도 의지를 많이 하게 되었고, 특히 여성은 가부장적 제도 아래에서 의지심이 더욱 커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이는 부모의 보호를 받지만 동시에 속박을 받듯이 여성도 남자의 보호를 받지만 동시에 속박을 받는, 그런 문화를 2천 년 이상 이어오다 보니까 그게 여성성이 되어버린 겁니다.
정말 여자 아이가 아무런 교육 없이 자연 속에서 그냥 태어나서 자란다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얌전하다’ 하는 여성성이 있을까요. 생물학적으로 여성성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아기를 낳는다든지 이런 여성성만 있어요. 우리가 말이나 개를 봤을 때 달리기를 하든, 뭘 하든, 특별히 암말이 수말보다 못하다는 게 없지 않습니까. 물론 소는 밭갈이를 하다 보면 황소가 더 크고 힘이 센 것이 있긴 하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불평등이라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암소가 수소에게 의지하는 것도 전혀 없어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여성성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까르마, 즉 습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부모가 그런 교육을 받았고, 자식도 그런 환경에서 자랐고, 사회도 그런 분위기가 유지되다 보니까 ‘그렇게 살아야 하나 보다’ 하게 된 거예요. 아프리카 흑인들은 늘 자유인으로 살았는데 미국에 잡혀가서 오랫동안 노예 생활을 하다 보니 노예근성을 갖게 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미국에서는 흑인들에게 법적인 자유를 줘도 완전히 자립을 못 하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여성들도 아무리 법적인 권리를 남자와 똑같이 줘도 오랜 까르마와 습관 때문에 의지심이 강한 거예요.
여성이기 때문에 의지심이 강하다는 뜻이 아니에요. 가부장적 제도로 인해서 의지심이 강하게 생겼다는 의미입니다. 흑인이라서 의지심이 강하다는 뜻이 아니에요. 노예로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노예근성이 생겼다는 의미입니다. 인도에 가면 구걸하는 사람들이 주로 불가촉천민인데 이 사람들은 원래 천민의 근성이 있었던 게 아닙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런 까르마를 갖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여성들은 사회적으로나, 법률적으로나, 교육적으로는 독립된 존재가 되었는데, 관습적으로는 아직 독립이 안 되었기 때문에 지금 모순 관계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권리는 똑같이 달라고 주장하는데 한편 의지하려는 모습이 나오는 거예요. 여러분들의 자녀도 20살이 넘으면 권리에 대한 주장을 하면서 부모한테 의지하려고 하는 게 있지 않습니까. 자녀가 사춘기일 때부터 부모가 성인이 되도록 성인 취급을 해 줘야 하거든요. 권리도 주고 책임도 지도록 해야 하는데 그냥 보살펴주기만 하다가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책임져라’ 하니까 책임을 질 수가 없는 겁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형성된 거예요.
옛날 사람들은 ‘여자는 원래 그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즉, 까르마를 종자 또는 아트만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까르마는 형성된 것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까르마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을 가르친 것이 불교입니다.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는 뜻이 ‘열반’이고, 모든 속박과 의지심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뜻이 ‘해탈’입니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고 나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나는 신과 인간의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났다!’
그래서 우리는 붓다를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고 부릅니다. 반대로 중생은 항상 얻으려 하고, 받으려 하고, 이해받으려 하고, 사랑받으려 하고, 도움받으려 합니다. 이런 것은 다 의지심에 속합니다. 어른이 되면 아이들을 돌보고, 보살피고, 이해하고, 도와주잖아요. 그것처럼 붓다는 어른 같은 존재이고, 중생은 아이 같은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행이란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습관대로 일어나죠. 모든 물체에는 관성이 있습니다. 움직이는 물체는 계속 움직이려 하고, 멈춘 물체는 계속 멈춰 있으려는 관성이 있듯이 우리가 어떤 음식을 계속 먹으면 그 음식에 습관이 듭니다. 심하면 중독이 되죠. 우리는 지금 많은 습관을 가지고 생활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습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수행입니다.
습관이라는 것은 거의 자동 반응에 해당합니다. 자동 반응을 한다는 것은 거의 노예나 다름 없다고 볼 수 있어요. 자랄 때 집에서 부모의 보살핌을 많이 받고 자라면 의지심이 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대신에 보호를 잘 받으면 사랑고파병은 적어지죠. 반대로 보호를 못 받으면 사랑고파병이 생기게 됩니다. 저처럼 시골에서 별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자라더라도 주변이 다 가난해서 비교할 대상이 없으면 사랑고파병이 안 생깁니다. 오히려 장난감도 스스로 만들어야 하고, 학교도 자기가 알아서 가야 했습니다. 누가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오히려 자립심이나 자기 결정권이 커지죠, 그래서 가난한 집에 태어났기 때문에 유리한 게 있고, 불리한 게 있어요. 또 부유한 집에 태어났기 때문에 유리한 게 있고, 불리한 게 있습니다.
수행이란 이렇게 점점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배려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내가 남의 의지처가 되어주는 쪽으로 가는 게 수행입니다. 그러나 일상에서는 항상 의지하고 도움받으려고 하는 게 또한 현실입니다. 이 현실을 인정해야 해요. 현실을 인정 안 하면 자학을 하게 됩니다. 내가 문제라고 자꾸 생각이 들죠. 이 현실에서 출발해서 점점 자유인이 되어가는 과정이 수행입니다.
그러니 질문자도 오랫동안 활동을 같이 한 사람과 헤어진다고 하니 섭섭한 마음이 들 수는 있지만은 여기에 너무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커피를 먹는 건 괜찮지만 커피를 안 먹으면 못 견딜 정도가 되면 집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현실은 인정하되 조금씩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자꾸 연습하다 보면 나중에는 ‘헤어진 게 꼭 잘못된 것도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옛날에 저를 운전해 준 보살님 중에 남편이 너무 자상해서 기름도 다 남편이 넣어 주고, 바퀴도 남편이 다 갈아주고, 고속도로 운전도 다 남편이 해준 분이 있었어요. 그래서 운전이라고는 집에서 동네 시장에 가는 것 밖에 할 줄 몰랐어요. 그러다가 스님을 태우고 운전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스님은 남편하고 다르잖아요. 본인이 차를 주차해야 하고, 본인이 문을 열어 주고 스님을 태워야 하고, 본인이 고속도로 위를 달려야 하고, 본인이 바퀴도 갈아야 하니까, 엄청나게 어려운 상황에 봉착한 겁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분은 남편 없이도 운전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해갔습니다. 자립을 하려면 그런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누군가가 다 해 주면 일시적으로는 좋을지 몰라도 남편이 갑자기 죽거나 하면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져요.
옛날 왕들이 좋아 보이지만 만약에 전쟁이 나서 고립되면 왕들은 자립을 못해서 죽습니다. 먹는 것과 입는 것, 자는 것을 모두 옆에서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삶이 과연 좋은 인생이냐, 이런 점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질문자도 현실은 인정하되 거기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야 해요. 의지심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는 관점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