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법회가 있었습니다.
법회에 갔다 오면 왜 그런지 마음이 안정되고,
사띠가 더 잘 되는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얻은 것이 있다면,
“마음은 색깔도 모양도 없는데 나중에 이것을 대상으로 하면 무엇이 남습니까?”
“고요함이 남는다.”
아무것도 없게 되는 것에서 고요함이 남는다?
생각의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고요함=죽은 번뇌=지혜=법..
이러한 이해가 들어왔습니다.
“위빠사나 사마디는 깨지면서 생기는 고요다”
번뇌가 깨져서 생기는 고요이기 때문에 고요합니다.
마음을 알아간다는 것은,
결국 번뇌를 하나씩 벗겨간다는 이해와
이 번뇌가 하나씩 벗겨져나간다는 것은 더 고요해진다는 뜻이기도 하고,
지혜가 난다는 표현이기도 하고,
법을 이해해 간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래서 새록새록 알아진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일어나니 그것을 알아차림 하지 않고 사는 것이 무명이며,
이것은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경우(방치/방일)입니다.
번뇌를 잘 관찰해보면 이런 조건이 있습니다.
- 번뇌에 대한 정보가 없다.
- 고정관념이 확실하여 A를 D로 알고 있다.
- 번뇌를 알아보겠다(해결)는 노력이 없다.
색깔도 모양도 형체도 없는 것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모두다 번뇌라고 할 수 있겠지요.
번뇌에 대하여 이제 좀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칠각지에서 택법각지란?
일어나는 마음을 알아차림으로부터 택법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제 느낀 것은,
이제까지 스님의 법문이 일어나는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에 방점이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번뇌를 이해하는 첫 번째 단추이고, 그 안에 더 많은 것들이 있다라는 이해가 있었습니다.
압축파일의 비밀을 열수 있는 첫 번째 Key(열쇠)는 사띠이고, 이 사띠가 두는 사띠/있는 사띠/되는 사띠/아는 사띠(순서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로 성장하면서 각 단계/과정마다 ‘대상과 아는 마음’이 바뀌어가고(알아야 할 것과 아는 것), 이해가 달리되어 새로운 세상에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라졌다, 벗어났다라는 표현으로 이해했습니다.
응당 거기에 맞는 사라짐과 벗어남이 있겠지만요.
『번뇌는 바다에 이는 파도와 같다.』
이 법어가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중도에 머물면 이렇게 되겠지요.
오늘 아침은 바쁜 월요일이지만 마음이 차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차분함 속에서 알 수 없는 기쁨이 쏟아져 가슴이 따뜻함도 알 수 있었습니다.
_(2020년 11월 9일 월요일 출근길에서 스님께 카톡을 띄우며)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