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담은 양측 수석대표만이 발언하는 형식으로 이어졌다. 터너 조이 제독은 휴전선 확정과 포로 교환 및 휴전의 시행과 보장을 위한 방안들을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회담에서 사용한 언어는 한국어와 영어, 중국어였다. 대표가 발언하면 각 언어로 통역하면서 회의는 이어졌다.
유엔 측 수석대표인 조이 제독의 제안에 대해 북측 수석대표인 남일은 외국군 철수를 안건에 넣자고 주장했다. 유엔 측이 그 문제는 정치적 문제이므로 군인들끼리인 휴전회담에서 다룰 사안이 아니라고 했으나 소용없었다. 회의는 길면서도 지루했다. 예상했던 대로 초반부터 난항(難航)이었다.
1951년 7월에 시작한 휴전회담의 북한과 중국 대표들이 회담장인 내봉장 앞에 모여 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중공군 대표 셰팡·덩화, 북한의 남일 수석대표와 이상조·장평산의 모습이다. 북한 측 대표는 한결같이 딱딱하고 모진 표정을 지으면서 회담을 지루하게 끌고 갔다. [미 육군부 자료]
휴전을 이룬다면 어느 선을 휴전선으로 획정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처음부터 논란이었다. 북측은 아예 자신들이 남침을 시작했던 1950년 6월 25일의 경계선, 38선을 휴전선으로 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그 점은 우리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아군은 제공권(制空權)과 제해권(制海權)을 쥐고 있었다. 그런 유리한 상황에서 저들의 요구를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내부적으로 유엔 측은 ‘현재의 전선 접촉선(接觸線)을 휴전선으로 상정한다’는 입장을 세워두고 있었다.
나머지도 마찬가지였다. 무엇을 어떻게 논의할지를 두고 무의미한 신경전이 계속 이어졌다. 따라서 수석대표만이 발언하는 석상에서 내가 할 일은 따로 없었다. 회담에서 최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을 반영하기 위해 나름대로 주의를 기울였지만, 의제 설정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별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도 기억이 새로운 것은 내봉장 본채 건물의 회담장 뒤에서 늘 기름 냄새가 풍겼다는 점이다. 그 기름 냄새는 고소했다. 나물과 고기를 볶을 때 나는 콩기름 냄새였던 것 같다. 북측 대표들의 식사를 마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점심 등 식사를 내봉장 근처에 있는 인삼관에서 했다. 간단한 샌드위치와 음료만으로 짜인 식단이었다. 아무튼, 진전 없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회담장에서 내 시선은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고 있었다.
그래도 회담장에서는 늘 상대편을 쏘아보고 있어야 했다. 달리 발언할 기회가 없으니, 맞은편에 앉은 사람과 눈싸움을 벌이는 게 큰 일이었다. 내 좌석의 건너편에 앉은 이는 북한군 이상조 소장이었다. 인상이 그리 곱지 않은 이상조를 계속 노려보는 것은 고역이었다.
지루한 회담이 계속 이어지던 어느 날이었다. 우리 측 회담 수석대표인 조이 제독이 마지막 발언을 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느냐”는 그의 물음에 회의장이 잠시 조용해졌을 때였다.
6·25전쟁 휴전회담 당시 북측 대표를 맡았다가
나중에 소련에 망명한 이상조씨(왼쪽)가 1990년
서울을 찾았다가 백선엽 예비역 대장과 자리를
함께했다. [중앙포토]
그때 이상조가 뭔가를 종이 위에 끼적거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나를 향해 그 종잇장을 들어 보이는 것이었다. ‘제국주의의 주구(走狗)는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고 적혀 있었다.
나는 불끈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저 친구들이 이제 본격적으로 심리전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짓을 한다는 생각에 이상조가 밉기는커녕 ‘치졸한 인간에 불과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조는 나를 잘못 봤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아무런 표정이 없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대한민국 국군의 대표인 내가 거북스러웠다고 한다. 북측 수석대표인 남일은 함경도 출신답게 우직하고 무뚝뚝한 스타일이다. 이상조는 그에 비해 꾀가 많은 사람처럼 보였다. 나중에 그는 정보 계통 쪽에서 일을 한 뒤 주소련 대사 재임 중에 현지에서 망명했다.
그는 민스크라는 곳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1980년대 말에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나와 두 번 만났다. 서울의 어느 호텔에선가였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그때 휴전회담을 시작했던 무렵에 내게 보여준 쪽지 기억하느냐”고 내가 물었다.
이상조는 “무슨 쪽지 말이냐”고 되물었다. 나는 “당신이 나를 제국주의의 주구라고 하지 않았느냐”며 “그 뒤에 다시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는 말도 써넣지 않았느냐”고 했다. 둘 모두 노년에 접어든 나이라 얼굴을 붉히며 옥신각신한 것은 아니었다. 평범한 어조로 그냥 물어본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상조는 한사코 “그런 기억이 없다. 그랬을 리가 없다”며 발뺌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원래 부산 동래의 기장 출신이었다. 나는 평안남도 강서군 출신이었다. 남쪽 출신이 북한 정권을 위해 일하고, 북쪽 출신이 대한민국 전선을 지키다가 회담에 마주 앉은 형국이었다. 그 점이 나중에 생각할 때도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조는 나보다 다섯 살 많은 나이였다. 얼굴은 아주 젊어 보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회한이 어려 있었다. 북한을 위해 젊음을 바쳐 일하다가, 마침내는 김일성 정권에 의해 쫓겨난 사람으로서의 착잡한 감회였을 것이다.
회담장에서 이상조가 그런 욕설을 적은 메모장을 보였을 때 나는 사실 화가 나기는 났던 모양이다. 그날 회담장에서 돌아와 휴식을 취할 때, 나는 조이 제독을 만나 이상조의 메모를 거론하면서 “사실은 한 대 패고 싶었다”고 말했다. 조이는 그저 웃고 말았다.
그날 나는 일기를 썼던 모양이다. 나중에 들춰본 일기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저 공산주의자들을 이기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부국강병(富國强兵)이다. 저 자들을 반드시 앞서기 위해서는 그 방법 말고는 다른 게 없다.”
젊은 내가 가슴 깊이 새기면서 적은 ‘부국강병’, 지금도 그 해답은 마찬가지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대한민국 살린 해외 참전 용사들에게 보은을”
중앙일보
입력 2010.06.25 00:14
업데이트 2010.06.25 17:39
“60년 전 대한민국은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했습니다. 전쟁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됐습니다. 국군과 유엔 참전 용사들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자유와 민주, 경제발전은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땅, 한 뼘도 거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발전된 대한민국이 은혜를 갚을 때가 왔습니다.” 지난 21일 창립한 한국전쟁기념재단 이사장 백선엽 장군의 환영사 중 한 대목이다.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올해 국가와 민간 단체들이 주도하는 각종 기념사업들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 그 가운데 한국전쟁기념재단은 외국 파병용사들의 손자녀들을 위한 장학금과 한국 유학을 지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출범한 순수 민간단체다. 국민성금을 모아 이들 사업을 벌여나갈 것이라고 한다.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많은 국민들이 동참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6·25전쟁은 세계 최빈국(最貧國)이던 대한민국이 현재 세계 지도에서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을 수 있게 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전후 우리는 피나는 노력으로 이제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당시 우리를 도왔던 해외 참전국은 전투지원 16개국과 의료지원 5개국 등 모두 21개국. 이 중 일부 국가들은 현재 우리보다 형편이 크게 어렵다. 적어도 이런 국가 출신 참전 용사들에 대해선 어떻게든 실질적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적극 마련해야 한다. 한국전쟁기념재단 사업이 번창하길 기원한다. 창립기념식에서 이홍구 전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의리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운 민족이 우리 아닌가.”
한국전쟁기념재단 출범 생방송
중앙일보
입력 2010.06.25 00:22
업데이트 2010.06.25 00:22
“60년 전 국군과 유엔 참전 용사들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자유와 민주, 경제 발전은 없습니다. 이제 발전된 대한민국이 은혜를 갚을 때가 왔습니다.” ‘받았던 나라에서 되갚는 국가로, 교육으로 보은한다’는 슬로건을 내건 한국전쟁기념재단(Korea War Memorial Foundation·이사장 백선엽)이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다.
재단의 핵심 사업은 참전 용사들의 손자녀에 대한 교육 지원이다. KBS 1TV는 6·25 전쟁 60주년인 25일 오후 5시 40분부터 70분간 한국전쟁기념재단 창립 특별 생방송 ‘대한민국의 약속’을 방영한다.
김재원·윤수영 KBS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생방송 ‘대한민국의 약속’에는 김인규 KBS 사장, 백선엽 장군, 정의화 국회부의장, 홍재형 국회부의장, 유명환 외교통상부장관, 김양 국가보훈처장 등과 국외 참전용사들이 함께 한다.
방송은 16개 유엔 참전국 소개영상과 한국전쟁기념재단 소개영상, 참전용사 후손 현 사례자 소개영상, 한국전쟁기념재단 설립 축하메시지 등으로 꾸려진다.
강혜란 기자
6·25 최전선 누빈 백선엽 장군이 말하는 ‘전쟁과 평화’
중앙일보
입력 2010.06.25 00:26
업데이트 2010.10.13 21:13
백선엽 장군의 이름을 처음 들은 건 삼십 몇 년 전 초등학생 때였다. 직업 군인이던 선친은 종종 6·25전쟁의 영웅 백 장군 얘기를 입에 올렸다. 그 이름이 지금까지도 뚜렷이 각인돼 있는 걸 보면 아마 한두 번 들은 게 아니었던 것 같다.
해서 백 장군을 인터뷰하러 갈 때 마음이 설렜다. 직속 상관은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계급상 선친의 한참 상관이었을 장군을, 기자가 된 그의 아들이 만나러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아마 그런 아들을 기꺼워하셨으리라.
올해로 90세인 백 장군은 정정하다는 표현의 모델 케이스 같았다. 건강 비결을 물었더니 세 가지를 말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 술 담배를 안 한다. 열심히 일한다.
특히 6·25전쟁에 대한 그의 기억력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몇 월 며칠에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장면 묘사는 너무나 생생하고 세밀해 눈을 감고 듣고 있으면 그 전쟁터 속에 끌려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함께 취재 간 후배 기자는 “6·25에 대해 내가 아는 게 거의 없다는 걸 깨닫게 됐다”고 당황스레 말했다.
전쟁기념관 안에 있는 백 장군 사무실은 그 자체로 역사 박물관 같았다. 1950년대의 이승만·아이젠하워 대통령에서부터 현재의 미 국방장관 로버트 게이츠까지 그가 만난 수많은 인물 사진들이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잊혀진 전쟁’이었던 6·25가 60주년을 맞아 역사 속에서 제자리를 찾길 염원했다.
인터뷰가 끝난 뒤 백 장군에게 선친 얘기를 했다. 장군은 기뻐했다. 헤어지기 전에 백 장군에게 선친을 대신해 거수경례를 했다. 좀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러고 싶었다.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던 장군은 일순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기꺼이 맞경례를 하면서 받아주었다. 노(老)장군의 입가에 얼핏 미소가 스쳤다.
6·25, 그날의 회상
백선엽 장군이 24일 전쟁기념관 안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우리를 도와 준
우방국 들의 은혜를 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6·25 전쟁이 터진 지 정확히 60년입니다.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시죠.
“그날 아침 비가 내렸어요. 나는 당시 임진강에 있던 1사단장이었는데, 시흥 보병학교에서 학생 신분으로 공부를 하고 있었어. 아침 7시쯤에 사단 작전참모로 부터 북한군이 새벽 4시에 열차 타고 개성에 들어왔다고 연락이 온 거야.
지나가던 지프를 얻어 타고 육군본부가 있던 용산으로 뛰어갔어요. 채병덕 장군한테 부대에 복귀한다고 보고하고, 근처에 살던 미 고문단 라크웰 중령 집에 가서 문을 두드리면서 전쟁 났다니까 깜짝 놀라더라고.”
-아비규환이었겠네요.
“그랬지. 라크웰 중령 지프로 남대문 살던 최경록 대령을 태워서 임진강 철교로 갔어요. 거기서 12연대 미 고문관 다리코 대위를 만났는데 맨발이더라고. 이 사람이 (개성) 송악산 뒤에 있던 자기 집에서 지프를 몰고 간신히 탈출한 거야.”
-공격을 전혀 예상 못했나요?
“북한이 소련 스탈린으로부터 전차와 전투기를 받았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공격할 줄은 몰랐지.
북한은 20개 사단에다 20만 명의 군대가 있었는데,
우리 군은 9만 명이었고. 전차 한 대 없고 항공기도 없고
무기는 M-3포 90문 있는 게 전부였어요.”
-하지만 북침을 주장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웃으며) 그게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의정부쪽이 전쟁 이틀 만에 뚫려서
미아리에서 2개 사단을 증파해 육탄으로 막았지만 소용 없었어요.
그래서 사흘 만에 서울이 떨어진 거예요.
북침을 했으면 그렇게 됐겠어요?”
-당시 장군님 부대는 파주 봉일천에 있었지요?
“26일 밤에 봉일천으로 후퇴해 방어하면서
28일 아침에 군수참모에게 부천 탄약고에서 탄약을 받아오라고 시켰어요.
그런데 중간에 돌아와서 하는 말이
어젯밤 서울이 함락됐고 서대문 형무소가 개방됐다는 거야.
서울시내는 인공기가 휘날리고 적기가를 부르고 있다는 거지.
부대를 행주나루로 이동시켜 시흥으로 후퇴하면서 부하들한테 말했어요.
우리가 시흥에서도 무너지면
지리산에 들어가 게릴라 활동을 해야 한다고.”
-가장 기억에 남는 전투가 뭡니까.
“8월에 대구 근처 다부동에서 벌어졌던 전투지요.
낙동강을 방어해서 북진의 토대를 만들었으니까.
적 3개 사단이 우리를 완전히 포위했어요.
별명이 불독인 워커 장군이 전차와 대포를 갖춘 미군 27연대를 보내줬어.
거기서 6·25 전쟁 최초로 한·미 합동 군사작전을 벌인 거죠.
워커 장군은 12월에 한국군 트럭과 부딪쳐서 사망했어요.
엊그제 미 8군 영내에 워커 장군 동상 건립식이 있었는데 참 좋습디다.
만일 그때 다부동이 뚫렸으면 한국은 북한 손에 떨어졌을 거요.
대한민국 땅 단 1인치도 거저 얻은 게 없습니다.”
-후회스러운 전투도 있을 텐데요.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하고
열흘 동안 미 7사단과 해군 17연대, 국군 해병연대가 서울을 재탈환했어요.
내가 지휘하던 1사단은 미군보다 평양에 먼저 도착했고.
한데 청천강 넘어 운산에서 중공군과 부닥쳤지.
북진하던 국군 4개 사단 중 3개 사단이 깨졌어요.
6사단은 초산에서, 8사단은 덕천, 7사단은 영월에서 중공군에 녹았어.
미군도 2사단의 3분의 1이 없어졌고.
조금만 더 올라갔으면 통일인데
중공군에 밀려 내려온 게 제일 안타까워요.”
-수많은 미국 장군과 함께 전쟁을 치렀는데
그중에서 누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까?
“아무래도 맥아더죠. 대전략가예요.
한국전쟁이 터지자 6월 29일 수원 비행장에 왔어요.
소련 야크기가 공격을 하는데도요.
맥아더가 영등포 제방 둑에 서서 전선을 본 뒤
한국을 구하려면 빨리 미군이 개입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트루먼 대통령에게 얘기한 거죠.
또 인천 상륙은 역사에 남을 작전 아닙니까.”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만나 한·미동맹을 담판하셨다죠.
“53년 5월 미국에 가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났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북진통일한다는데 우린 휴전해야겠다’는 거예요.
해서 우리한테 개런티를 달라고 했어요.
그게 뭐냐기에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맺어달라고 졸랐죠.
그랬더니 ‘In principle, I agree with you(원칙적으로 동의한다)’라는 거예요.
한데 상원 비준을 받아야 한다고 해요.
그런 와중에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바람에
난리가 나기도 했지만
결국 ▶한·미 방위조약을 체결하고
▶한국에 10억 달러를 지원하고
▶한국군을 계속 지원하고
▶한국은 휴전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서로 합의해서
한·미동맹이 시작된 거죠.”
전쟁과 리더십
6·25 60년 … 대동강 철교 찍은 97세 종군기자와
나라 지킨 90세 전쟁영웅이 만났다.
97세 된 종군 사진작가와 90세 장군은 두 손을 굳게 맞잡았다.
그 사이로 60년의 세월이 흘렀다.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12월,
부서진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피란민 행렬을 찍어
퓰리처상을 받은 AP통신 종군기자 맥스 데스퍼(오른쪽)가 방한해
한국 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을 만났다.
퓰리처상 사진전이 열리고 있는 예술의전당에서다.
데스퍼가 백 장군에게
“60년 전 당신을 만났는데 아직 90세라니 한참 젊다”고 말해
두 사람은 파안대소했다.
맥스 데스퍼가 찍은 사진을 배경으로
두 사람이 만난 장면을 그래픽 처리했다.
[사진=김태성 기자], [그래픽= 이혜경]
-6·25 전쟁 때 장군의 1사단은 거의 패배를
모르는 부대로 소문났었는데
도대체 사단장이 어떻게 했기에 그런 결과가 나온 겁니까.
“‘지휘관은 절대 놀라지 않는다(Commander never surprised)’라는 말이 있어요. 지휘관은 항상 긴장을 하면서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준비하고 있어야 해요.
소극적으로 하면 안 돼요.
무조건 선제공격을 하라는 게 아니라
항상 준비를 하면서 적극적으로 임무 달성을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죠.
부하들의 이견을 최대한 참고하면서요.”
-전쟁터에서의 리더십이
기업이나 학교처럼 상황과 조건이 다른 곳에서도 적용될 수 있을까요.
“본질은 같은 거지요.
기업의 리더십과 마찬가지인 거죠.
우선 지휘관은 근면해야 합니다. ”
-6·25 전쟁은 그동안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군사정부 때는 정권 안보를 위한 반공이데올로기로 악용되기도 했고
이른바 진보정권 때는 아예 외면당하기도 했습니다.
6·25가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십니까.
“한국은 오랜 역사 동안 숨겨진 나라였어요.
그렇게 알려지지 않았던 나라가 해방이 되면서 남북으로 갈린 거예요.
6·25가 터지고 난 뒤 한국은 미국과 동맹이 됐고
전쟁에 참전한 16개 우방의 도움으로 공산주의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됐어요.
전쟁의 아이러니이겠지만 전쟁을 통해 우리는 국제사회에 진입한 겁니다.
이제 우리는 세계 12위의 무역대국이 됐고,
국민소득도 2만 달러에 육박하는 나라가 됐죠.
지금의 한국이 있게 된 것,
한국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은 것,
그것이 바로 그 참혹했던 6·25 전쟁을 통해 우리가 얻어낸 것이죠.”
-1960~70년대 세대는 산업화의 역군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러나 1940~50년대 세대는 해방과 전쟁의 격변을 치르고도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데요, 서운하지 않습니까.
“1950년대 세대도 그 나름의 역할을 했어요.
당시 우리는
초근목피(草根木皮: 풀뿌리와 나무껍질)를 벗겨 먹고사는 나라였어요.
그러다 미국하고 유엔 원조 받아서
충주비료, 판유리공장, 문경시멘트 이런 거 시작했고.
그로부터 두 세대가 지났는데 그때 우리가 지켜낸 나라가
이제 이렇게 위대한 나라가 됐으니 그것만으로도 자랑스러워요. ”
-지금의 풍요로움과 젊은 세대의 자유는
바로 1950년대 전쟁터에서 숨진 세대와
전쟁에 참가한 다른 참전국들 덕분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요. 많은 사람이 자유를 위해 죽어갔습니다.
우리 군인들과 국민뿐 아니라
수많은 동맹국의 젊은이가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 와서 죽어갔습니다. 그
걸 잊어선 안 됩니다.”
과거 세대 희생 잊지 말아야
백선엽 장군은 6·25전쟁 60년을 맞아
본지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내가 겪은 6·25와 대한민국’이라는 제목으로
장기 연재를 해오고 있다.
사진은 첫 회인 1월 4일자 10면.
-좀 껄끄러운 질문일지 모르지만
5·16 쿠데타로 박정희 장군은 대통령이 됐고
80년 5·18 이후 전두환 장군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장군님 후배들인데
군인이 정치하는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쿠데타는 지지하지 않아요. 절대 쿠데타 하면 안 돼요.
하지만 5·16과 12·12, 이런 걸 겪으면서
우리나라 국민들이 많이 느끼고 배워서 민주화가 된 거죠.
이것도 진보라고 저는 생각해요.”
-진보성향의 정부가 들어서면 북한에 대해 온정적 태도를 취하는데
전쟁을 치르신 입장에서 거기에 반대하십니까.
“제가 항상 얘기하는 게 있는데
‘프리덤 이즈 낫 프리(Freedom is not free)’라는 거예요.
자유는 공짜가 아니라는 거죠.
진보정권이 치적도 있겠지만
친북 좌파세력을 키워 놓은 것은 정말 잘못한 겁니다.
북한은 끝까지 적화통일을 꿈꿔요.
핵무기 개발하고, 미사일 수출하고, 120만 명 군대에 특공대가 20만 명이지.
또 지난 60년간 해온 걸 보세요.
박정희 대통령 암살하려고 청와대에 무장공비 침투시켰지,
버마의 랑군에서 폭탄테러 했지, KAL기 격추시켰지,
동해안에 잠수정 내려보냈지,
이번엔 또 어뢰 쏴서 천안함 침몰시킨 거 아닙니까.
지금까지 북한이 휴전협정을 어긴 게 한두 번이 아니에요.”
-미군과 동맹해 전쟁을 치르셨는데 우리 사회의 반미 분위기는 어떻게 보십니까.
“강력한 동맹이 없으면 절대 전쟁하지 말라는 원칙이 있어요.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하고 동맹인 건 우리의 자산인데
그걸 왜 스스로 차버립니까.
전략적으로, 정치적으로 어리석은 짓이죠.
우리가 이 정도 성공할 수 있었던 바탕은 한·미동맹인데
그걸 잊으면 안 되죠.
제발 반미를 정치적으로 악용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와 전쟁을 했던 중국은 이제 한국의 최대 교역국이 돼 있습니다.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중국이 아주 약고 잘하는 거죠.
올림픽도 하고, 상해 엑스포도 하고.
이젠 신흥 경제대국이고 미국을 능가하려고 해요.
그런데 북한은 여전히 세계사의 흐름과 동떨어진 채
문을 닫고 폐쇄적인 왕조로 지내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는 거죠.”
-당시 9만 명이던 국군은 이제 60만 대군이 됐습니다.
국군을 보면서 자랑스러우십니까.
“옛날에는 군인들 절반 이상이 편지를 못 썼어요.
이제는 다 고졸 이상이고 대학생도 많죠.
이 정도 학력은 세계적으로 없어요.
게다가 사관학교 졸업한 사람들이 1만5000명, ROTC가 16만 명,
3사관학교 졸업생이 15만 명이죠.
여러 우여곡절이 있지만 우리 군이 다가올 시대에 잘 적응하리라 믿어요.”
-젊은 세대에게 뭘 전하고 싶습니까.
“젊은이들이 한국전쟁을 잘 모른다고 비관하지 않아요. 벌써 두 세대가 지났잖아. 모르는 게 당연하지. 잘 가르치지 못한 책임이 우리 참전세대한테도 있고.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어요. 한국전쟁의 진상을 알려야 해요….
올해가 전쟁이 터진 지 60년인데,
이걸 계기로 젊은 세대가 과거 세대의 희생과 공헌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되돌아보길 바랍니다.
자유는 공짜가 아닙니다.”
글=김종혁 문화스포츠 에디터, 정선언 기자
사진=오종택·김태성 기자
그래픽=이혜경
“지난 10년, 북침설 믿게 놔둔 우리 기성 세대 반성해야”
중앙선데이
입력 2010.06.27 00:06
김수정 기자
인요한 소장은 “한국민들에게 ‘정부를 좀 믿으라’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김태성 기자
6·25전쟁 발발 60년을 며칠 앞둔 지난 21일 서울 용산전쟁기념관. 해외참전 용사들의 후손 지원 프로젝트인 한국전쟁기념재단(이사장 백선엽 예비역 대장) 창립식이 끝난 뒤였다. 조영길 전 국방장관(재단 고문)이 인요한(51·미국명 존 린튼) 연세대 신촌세브란스 병원 국제진료소장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한국말을 잘하십니까. 놀랐습니다.” 1m90㎝의 거구, 푸른 눈의 금발 신사가 유창한 한국말로 한 인사말이 퍽 인상적이었던 듯했다.
“조 장군님. 만나 봬서 영광입니다. 근데 장군님 고향이 어디세요?”
“전남 영광입니다.” 인 교수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이고, 저는 순천입니다. 어쩐지 우리 고향 말씨라고 생각했습니다. 반갑습니다.”
순천서 태어나 순천서 자란 미국 사람
인요한 교수는 구한말인 1895년 호남지역 최초의 선교사로 발을 디딘 미국인 유진 벨(1868~1925)의 4대손이다. 인 교수의 할아버지인 윌리엄 린튼(1891~1960·대전 한남대 설립자)이 벨의 사위가 되면서, 벨-린튼 가문은 4대에 걸쳐 115년째 한국 땅에서 교육과 선교, 의료 봉사를 하고 있다.
항일 운동에도 나섰다. 1995년 후손들은 벨의 한국 선교 100년을 맞아 ‘유진벨 재단’을 설립했다. 인 교수의 형인 인세반 이사장과 인 교수는 북한 주민들의 결핵 퇴치 등 의료 지원을 위해 20여 차례나 방북했다. 선대의 한국 사랑이 북한으로 확대된 것이다.
신촌세브란스 병원 진료실엔 인 교수가 개구쟁이던 시절 땟국물 가득한 얼굴로 친구들과 찍은 사진이 커다랗게 걸려있다. “내 친구들입니다. 지금도 만나죠. 항상 편안한 친구죠.”
인 교수는 ‘고향 순천’을 우주의 중심이라고 말하고 다닌다. 친한 사람들한테는 구수한 호남 사투리로 말한다.
인 교수에게 6·25전쟁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아버지 휴 린튼(한국명 인휴·1926~84)과 외삼촌(81·제프 플라워스)이
장교로 한국전에 참전했다.
그는 “자유의 소중함, 그리고 아버지가
전후 한국인의 삶에서 찾아낸 희망의 메시지가 떠오른다”고 했다.
인 교수의 아버지 고 휴 린튼 목사의 군인 시절 사진(오른쪽).
위는 린튼 목사가 인천상륙작전 때 탔던 구축함 히그비호.
-아버지는 어떻게 참전하셨는지.
“한국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미국에서 해군 장교로 활동하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때 참전했습니다.
전쟁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으셨지만
‘민주주의와 자유는 피와 땀, 생명을 바쳐서 얻은
너무나 소중한 것’이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아이구, 우리 아버지 또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얘기하시네.
귀찮아 죽겄네’라고 속으로 생각했죠.”
인휴 목사는 전쟁이 끝난 뒤 54년 한국에서 예편했다.
곧바로 선교와 교육 활동으로 선대의 뜻을 이은 것이다.
“아버지는 농촌 선교를 하면서
이 나라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고 했습니다. 당시 전라도 땅은 몹시 궁핍했는데, 아무리 어려워도 이쪽 논 주인이 옆 논의 곡식을 넘보지 않더라는 겁니다. ‘이 나라 국민들의 마음엔 5000년 역사를 흐르는 도덕이 있다’고 하셨죠.”
6·25 뒤 선친이 유산 1만 달러 한국 투자
그런 믿음으로 인휴 목사는 1962년 윌리엄 린튼이 남긴 유산 1만 달러를 미국인 친구 칼 밀러(민병갈·최초의 귀화 미국인)에게 맡기고 한국에 투자하도록 했다. 당시 한국에 투자하는 외국 자본은 찾기 어려웠다.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는 성경 말씀 그대로죠.
한국의 미래를 믿은 겁니다.
미국의 작은 교회를 찾아 다니며 한국에 대한 지원을 호소할 때도
‘한국은 희망이 있는 나라다.
도덕이 살아있고, 근면하다.
미신만 털어버리면 된다’고 호소했습니다.”
인 교수의 아버지는 84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평생 검정 고무신을 신고 살았다고 한다.
“돌아가신 날도 검정 고무신을 신으셨어요. 그땐 검정 고무신이 창피했습니다.
연세대 의대에 입학하러 가는 날, 순천역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나온 아버지가 부끄러웠던 기억이 있어요. 지금은 그 모습이 정말 자랑스럽죠.”
인 교수는 아버지의 장례식 날 미국인 친구분이 “자네 아버지는 한국인처럼 살았고, 한국 사람처럼 죽었네”라고 한 말이 두고 두고 가슴에 남는다고 했다.
인휴 목사는 교통사고 후 큰 병원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숨졌다.
순천에 응급차가 없었기 때문이다.
인 교수는 93년 한국형 앰뷸런스를 개발,
순천 소방서에 기증하고 응급 시스템을 갖췄다.
순천에서 30년간 결핵요양소를 운영하며 결핵퇴치운동을 해온 어머니 루이스 린튼(83·인애자)은 96년 호암상(문화봉사대상) 수상 때 받은 상금 5000만원을 모두 들여 북한에 응급차를 지원하기도 했다.
“어릴 땐 검정 고무신만 신는 아버지 창피”
미 2사단 탱크 부대 소령으로 참전한 인 교수의 외삼촌은 한국전 얘기를 많이 들려줬다. 인 교수는 “민감한 얘기를 하나 해야겠다”며 해외 참전 용사들이 흘린 피를 생각하자는 뜻이라고 했다.
외삼촌으로부터 들은 장진호 전투 얘기였다.
“인산인해로 밀려드는 중공군과 밤새 처절하게 싸운 다음 날,
동이 트는데 외삼촌 주위의 부하들이 많이 보이지 않더랍니다.
둘러 보니, 움푹 파인 땅에 병사들이 머리를 박고 있었고
다들 얼이 빠져 있었답니다.
정신을 차리라고 뺨을 때리고, 찬찬히 얼굴을 봤대요.
가슴이 무너져 내렸답니다.
15살, 16살. 삼촌이 울부짖듯 소리쳤대요.
‘These are boys! not men!’(얘들은 아이들이잖아).
2차대전 후 궁핍하던 시절,
장학금을 받고 학교에 다니려고 나이를 속여 입대한 거죠.
‘이 전쟁의 명분을 나도 모르겠다.
묻지 말라.
내 의무는 자네들을 엄마 품에 다시 안겨줄 의무 그거 하나밖에 없다.
총을 들고 싸워라. 죽지 말고 살아남아라’고 했답니다.
한국땅에서 숨진 4만5000명의 해외 용사 가운데는
이런 소년병들도 많았던 겁니다.”
-한국에선 6·25 북침론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북한도 북침이라고 하죠.
제가 평양 가서 이북 사람들 앉혀놓고 얘기했어요.
‘동무들, 준비를 많이 한 남한의 침공을 당한 북한이
돌아서서 사흘 만에 서울을 함락한다.
난 상식적으로 못 믿겄어.
물리적으로 가능한지 근거 대보라’고 하면
그 사람들 그냥 조용해집니다.
남한 사회에서 북침론이 확산된 것은
지난 10년 기성 세대가 교육을 잘못한 것이고 반성해야 할 일이죠·”
인 교수는 최근 한국 사회가 잊어선 안 될 일을 잊고 있다고 했다.
“민주주의는 원래 시끄럽죠.
4대 강이나 세종시를 두고 다툰다고 국가 정체성을 잃는 것은 아닙니다.
근데 전쟁에 대한 올바른 역사 인식,
전쟁 중의 희생을 바탕으로 일궈낸 소중한 자유를 잊어선 안 되는 겁니다.
백선엽 장군 같은 분들과 수많은 장병들,
16개 해외 참전 용사들이 흘린 피 위에 한강의 기적이 가능했던 겁니다.”
그는 덧붙여 “가장 안타까운 것은
한국인들이 60년 동안 해낸 그 소중한 성과를
온 세계인들이 존경하는데
정작 한국인들은 이를 과소 평가하고 자학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천안함 조사를 믿지 못하겠다는 의견은 어떻게 보시는지.
“천안함 외국인 조사단 중 한 명이 축농증에 걸려서 저를 찾아왔어요.
제가 말했죠.
‘1%가 아니라고 한다면 북한이 저지른 일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101% 확실해야 한다’고 했더니, 그 사람 말이 ‘110%다.
절대 사고가 아니고, 북한의 어뢰다’라고 했어요.
내 진료실에서 오간 얘기를 나는 믿고 싶습니다.
한국인들이 정부와 여당을 믿지 않는 것은 이해합니다.
일제 시대, 독재 정권 때 워낙 많이 속아본 긴 역사 때문이죠.
그러나 지금은 투표를 통해 내가 만든 여당입니다.
정부를 좀 믿으라고 말하고 싶어요.
경부선을 보십시오.
그때 야당이 다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지나놓고 평가해야 맞죠.”
-귀화하지 않은 이유는 있는지요.
“어머니의 생각 등 여러 이유가 있었습니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지금은 귀화 안 하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을 인도적으로 돕기로 나섰을 때, 미국 국적이 훨씬 자유로웠습니다.
또 의료 관광 유치 등 제가 한국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는데,
한국인으로서 얘기하는 것보다
미국인 자격으로 얘기하는 게 훨씬 효과적입니다.
다행히 내년 1월 복수국적이 허용되는데,
어머니의 의견을 들어 신청할 계획입니다.”
선친 얘기를 하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한 인 교수는
"나도 주민등록증을 가질 수 있게 됐다”고 말할 때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