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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28일(성령강림주일, 성결교회 주일)
빌립보서 3:12~16
그리스도인의 완전
사각 설교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이 설교문은 1741년에 출판된 존 웨슬리의 설교 “그리스도인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에 기초해서 작성되었습니다: 존 웨슬리. “그리스도인의 완전”. 「웨슬리 설교전집」. Vol 3, No. 40. 조종남, 김홍기, 임승안 공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6. pp. 79~108.
성경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살았던 화가 가운데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화가가 그린 그림 가운데 <강복하는 그리스도>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복을 내려주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의 얼굴은 그 생김새가 왠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적인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며칠을 다듬지 않아 듬성듬성 자라난 턱수염이 난 그리스도의 모습은 이 그림을 그린 라파엘로와 너무나 닮아 있었습니다.
라파엘로가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릴 때 참조한 말씀은 이사야 53장 2절이었습니다. 그곳에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라파엘로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리면서 중세의 성화처럼 신성화된 얼굴이 아니라 길거리에서 우리가 아주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얼굴을 그려놓았습니다.
라파엘로가 자신의 얼굴을 그리면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생각한 것은 라파엘로 자신뿐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커다란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출처: 이재현, 「들리는 예화, 유혹하는 예화」(구리: 선율, 2020), 148-149.
오늘 저와 여러분의 얼굴은 어떨까요? 우리가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면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아로새겨지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며, 동시에 성결교회 주일입니다. 한국성결교회가 이 땅에 ‘성결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지 어언 116년이 지났습니다. 한국성결교회는 웨슬리의 신학과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이라고 하는 사중복음의 기초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성결교회가 강조하는 ‘성결’이란 말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말을 달리 표현한 것뿐입니다(웨슬리, “그리스도인의 완전”, 86). 과연 그리스도인은 어떤 의미에서 완전한 것입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서로 다른 두 주장이 충돌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12절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15절에서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바울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이 완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또 그는 어떤 의미에서 완전하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저는 먼저 두 번째 질문을 먼저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과연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의미에서 완전한 것일까요?
먼저 이 질문을 생각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신앙생활에도 몇 가지 단계의 성장 과정이 있다는 전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사람의 육신 적인 성장도 어린아이와 청년과 노인의 과정을 거치듯이, 영적인 성장도 이와 비슷한 단계를 거칩니다.
요한일서 2장에서, 사도 요한은 “아이(자녀)들아, 청년들아, 아비들아”라고 불렀습니다. 과연 누가 아이입니까? 분명 이는 육신의 아이가 아니라 영적인 아이를 가리킵니다.
신앙 성장에는 저마다 단계가 있습니다. 아마 이곳에 계신 성도 여러분 가운데도 아직 영적으로 아이의 단계를 거치는 분도 계실 테고, 혹은 청년이나 혹은 아비의 단계를 거치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영적인 아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12절)”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14절)”
자녀들의 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용서받았습니다. 또한 아이들은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또한 청년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들 안에 거하기 때문에, 악한 자를 이겼습니다. 또한 아비들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습니다.
과연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들은 완전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비록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들일지라도 그는 완전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요일 5:18). 왜냐하면 그를 낳으신 하나님께서 그를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가운데는 “내가 비록 예수님을 믿지만 난 여전히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도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 가운데 더 이상 살 수는 없습니다(롬 6:1~2).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롬 6:5).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죽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로 인해 죄의 몸이 죽어 우리가 다시는 죄에 종노릇 하지 않게 됩니다(롬 6:6, 7). 다시는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롬 6:14).
저와 여러분에게 죄가 잠시 틈탈 수는 있지만,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지배받습니다. 우리는 죄에 매여 더 이상 종노릇 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을 누릴 자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한 자들입니다.
혹 어떤 분들은 구약성경의 예를 들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계속해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또 모세는 백성들이 물이 없어 불평할 때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도 밧세바를 범한 후에 그의 남편이었던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는 죄를 지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거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거룩한 사람들마저 죄를 범하는 일을 피할 수 없다면 우리도 죄를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1:11).
여기서 말한 ‘천국’은 이 땅 위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구약의 위대한 인물이었던 아브라함, 모세, 다윗도 세례 요한보다 더 위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마저도 하나님 나라에 초대된 지극히 작은 자들보다 더 위대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영적인 아이의 단계를 거치고 있는 사람마저도 구약의 위대한 위인들보다 위대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위대한 선지자라는 의미입니까?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그럼 어떤 면에서 우리가 위대하다는 말입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영적인 어린아이들일지라도 완전합니다. 곧 하나님으로부터 났다는 의미에서 완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있어서 위대한 것입니다.
전통
존 웨슬리는 북아메리카 선교에서 쓰라린 경험을 안고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때 존 웨슬리의 마음은 번민으로 가득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인가? 내가 진정한 기독교인인가? 혹시 여전히 분노의 자녀와 지옥의 자손은 아닌가?” 웨슬리는 자신의 신앙의 상태가 어디에 있는지를 묻고 고민하고 번민했습니다.
이 때 웨슬리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은 모라비안(Moravian)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에 와 있던 모라비안 선교사 피터 뵐러(Peter Bὄhler)는 고민하는 웨슬리에게, “구원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체험적이며 내적인 확신을 추구하던 웨슬리는 뵐러와 함께 1738년부터 모임을 시작합니다. 웨슬리는 이 모임에서 설교하고, 규칙을 만들었으며, 일주일에 한번씩 모이는 모임을 통해 서로의 신앙을 점검하고 격려하는 대화를 자유롭게 나누었습니다.
드디어 1738년 5월 24일. 존 웨슬리는 그토록 바라던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녁에 나는 내키지 않은 마음으로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거리에 있는 한 모임에 참여했는데, 그곳에서 어떤 이가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9시 15분 전쯤에 이르러서, 그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심령에 일으키시는 변화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따뜻해지는 것(strangely warmed)’을 느꼈다. 내가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그리스만이 구원이시며, 그분이 나 같은 죄인의 죄를 사하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생겼다.”
이날 밤, 존 웨슬리는 분명 내적으로 변화시키는 은혜의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확신의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죄를 사하셨음과 함께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웨슬리는 그토록 갈망하던 확신을 갖게 되었고 그해 6월에 옥스퍼드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Salvation by Faith)이라는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설교에서 웨슬리는 “구원하는 믿음은 그리스도의 전 말씀에 대한 동의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며, 그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공로를 신뢰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시고, 우리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께 우리의 속죄와 우리의 삶을 의탁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후 웨슬리는 모라비안들이 말하는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이라는 이분법적인 생각이 아니라, 어린아이에게 장성하기까지 여러 정도(degree)의 믿음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웨슬리는 올더스게이트 체험 이전의 신앙을 ‘종의 믿음’이라고 보았다면, 체험 이후로는 ‘아들의 믿음’을 갖게 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즉, 우리가 더욱 성장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계속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출처: 박창훈, “올더스게이트 가는 길”, 「활천」, Vol. 618, No. 5, pp. 52~55, 2005.
이는 인간이 태어남은 순간적인 사건이지만, 인간이 자라나는 과정은 점진적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성
최근 저는 막내아들이 숫자로 하나부터 열까지 세는 것을 보고 매우 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아이가 나이에 비해 말이 느려서, 저는 아이에게 언어치료를 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점차 색깔도 구분하고, 숫자도 세기 시작하고, 최근에는 비록 서툰 발음이지만 영어 알파벳 노래를 부르기도 합니다. 제가 그런 막내를 보면서 아이의 수준에 맞게 자라는 것이 부모에게 기쁨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이제 막 하나부터 열까지 밖에 세지 못하는 아들에게 고등학생이 배우는 수학의 미분, 적분 공식을 가르쳐 주면서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아이를 다그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어린아이가 문제입니까, 아니면 제가 문제입니까?
또 이제 막 “가나다라” 밖에 알지 못하는 제 아이에게 제가 삼위일체 교리나 교회사에서 있었던 이단 논쟁을 가르친다면 과연 제 아이가 문제입니까, 아니면 제가 문제입니까? 아마 지혜로운 여러분은 이미 그 답을 알고 계실 겁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 교리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완전은 천사의 완전이나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에 가졌던 완전이 아닙니다. 또 장차 우리가 죽은 후에 경험하게 될 절대적 의미의 완전도 아닙니다.
우리는 절대적인 의미의 완전이란 이 땅 위에서는 존재하지 않은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완전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수준의 완전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지식에 있어서 완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다고 해서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알아야 한다거나,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오류가 하나도 없는 완전한 지식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 우리는 실수를 전혀 범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간혹 착한 사람을 악한 사람이라고 잘못 판단하기도 하고, 악한 사람을 더 악한 사람이라고 잘못 평가하기도 합니다.
또 우리가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기도한다고 하지만, 간혹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에 있어서 실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왕으로 기름 부을 자를 찾기 위해 나섰던 사무엘이 이새의 큰아들 엘리압을 보자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삼상 16:6)라고 잘못 판단하지 않았습니까?
또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의 연약함을 떠나 완전해질 수 없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는 연약함은 고의적인 죄를 범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력이 부족하거나, 상상력이 부족하거나, 기억력이 부족한 것과 같은 연약함을 말합니다. 더구나 누구나 사람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러한 능력들이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또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이런 의미에서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느 정도의 신앙단계에 이르렀던지 그것에 만족하지 말고 “은혜 안에서 계속 자라가야”(벧후 3:18)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함을 받은 이후에도 계속 성화 되고 완전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제한된 완전’(limited perfection)입니다. 그것은 죄가 없는 완전이 아니라 오히려 본질에 있어서 ‘완전한 사랑’이며, ‘의도의 순수성’을 갖는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출처: 조종남, “요한 웨슬레의 기독자의 완전(Ⅲ)”, 「활천」, Vol. 333, pp. 25~27, 1968.
우리는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은혜를 어떻게 누릴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 은혜를 회개와 믿음으로부터 얻을 수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중생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회개와 믿음이 필요했듯이, 우리가 성결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도 우리에게 회개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은총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은혜는 우리의 선행이나 봉사나 공로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으로 행하심을 믿는 믿음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성결의 은혜는 순간적으로 주어지는 은혜이며 동시에 점진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임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은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교만을 경계하여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비롭다고 하여 함부로 빠지지 말고, 하나님의 영의 역사인지 말씀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함부로 비방하거나 조소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공동체의 분열을 경계하고 성령께서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날마다 우리가 은혜의 찬송을 부르고, 하나님께 전심으로 예배드리며, “아멘”으로 주어진 말씀에 화답할 때 우리는 이 은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실천할 때 우리는 성결의 은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조종남, “기독자의 완전”, 「활천」, Vol. 342, pp. 28~31, 1969.
경험
장로회신학대학 기독교교육학과 명예교수로 있는 주선애 교수가 「주님과 한평생」이란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의 내용 중에 “지성보다 강한 영성”이라는 글이 있어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1905년 음력 3월생인 어머니는 만 96년을 사셨다. 건강하셨으나 90세쯤부터 조금씩 기억력이 약해지셨다.
어느 날, 새로 이사 온 옆집 사람들이 교회에 처음 나왔다는 것을 기억하셨는지, 혼자 그 집을 방문하셔서 기도하셨다. 할머니가 힘 있는 음성으로 자신들을 위해 기도하고 가셨다고 그 집 식구들이 놀라서 전했다.
한번은 총장님 내외분이 방문했을 때 어머니께 기도 부탁했는데, 얼마나 은혜롭고 능력 있게 기도하시는지 내외가 눈물을 흘리며 가셨다. 어머니 장례식 때 총장님이 설교하시며 그때의 감격을 말씀하셨다.
나는 지력이 흐려지기 때문에 인격이 파괴되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지력이 어두워져 알던 사람도 잊어버리셨지만,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은 그대로였다.
‘사람은 온전한 인격을 지향해 끝없이 발전해야 하고, 그럴 때만 발전할 수 있다’라고 내가 강의한 적이 있는데 한 학생이 질문했다. “할머니가 치매에 걸려 아무것도 모르시는데 그래도 발전하는 것일까요?”
잠시 생각하는데 기독교 교육학자 셰릴의 글이 생각났다. “인간의 지성이 늙어서 무너져 내려도 그리스도만 붙잡고 있으면 성장하는 것이다.
겨울에 나무가 죽은 것 같지만 연륜은 더해 가는 것과 같다. 나뭇잎이 다 떨어졌어도 나무 생명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머니는 그 실례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우리 영은 날마다 성장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오직 성령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주어질 때, 여러분은 성결의 은혜를 유지하며 은혜 안에서 자랄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중에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아로새겨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