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암종택 명농당 | ||||||
聾巖 李賢輔 들어가기 앞서 농암 이현보 하면 고등학교 시절 어부가로 낯익은 이름입니다. 농암은 조선 전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는 시기 인물이었던 만큼 한문학이 중추를 이룬시대인데도 불구하고 과감히 우리 노래를 정리 개작함과 아울어 손수 시조까지 지은 국문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분의 작품은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 빠지지 않고 계속 이어오고 있습니다. 시조는 농암 어머니와 아들 및 증손까지 4대에 걸쳐 그 작품들이 전해지고 있어 가문의 빛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살펴 보고자 합니다. 이번에는 귀전록(歸田錄)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서울에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시조를 지어 기록해 놓으면서 귀전록이라 적고 있습니다.
조선 문신. 자는 비중, 호는 농암(聾巖)· 설빈옹(雪賓翁). 정언 재직시 서연관 비행 공박 사건에 의거 유배생활. 중종반정에 의해 복직된 뒤 京鄕 각지의 관직을 두루거침. 농암은 자신의 작품을 짓게 된 동기와 배경을 상술해 놓고 있어 작품의 면모를 아는데 가치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만년(1547)에 벼슬을 그만둔 뒤 그의 향리인 예안(禮安)에 돌아가, 집 주위에 명농당(明農堂)을 짓고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모방하여 「귀전록(歸田錄)」을 지었습니다. 歸田錄(귀전록)은 효빈가(孝嚬歌), 농암가(農巖歌), 생일가(生日歌), 三수의 시조인데 이 역시 창작된 배경을 세밀하게 적어 놓고 있습니다. 효빈가(孝嚬歌) 이 시조(時調)에는 다음과 같은 서문이 있습니다. 가정 임인년 가을에 내가 비로소 벼슬자리에서 풀렸다. 국문을 나가서 돌아가는 배를 빌려 한강에서 음전(飮餞)하였다. 취해서 배에 누웠는데 달은 동산에 떠오르고 부드러운 바람이 잠시 일어나기에 도연명의 ‘배는 흔들흔들 가볍게 달리는데 바람은 휙휙 옷 속으로 불어오네.’라는 구절을 노래하니 귀흥(歸興)이 더욱 짙어졌다. 환하게 웃으면서 이 노래를 지었으니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바탕하여 지은 까닭에 ‘효빈(效嚬)'이라고 일컬었다.
嘉靖壬寅秋 聾巖翁始解圭組 出國門賃歸船 飮餞于漢江 醉臥舟上 月出東山 微風乍起 詠陶彭澤舟搖搖而輕 風飄飄而吹衣之句 歸興益濃 怡然自笑 乃作此歌 歌本淵明歸去來辭而作 故稱效嚬 ※음전(飮餞) : 이별주를 마시다 ※效嚬 (효빈)의 고사 월나라에 서시(西施)란 미녀가 있었다. 그 녀가 위경련을 일으켜 눈살을 찌푸리었다. 어떤 추녀(醜女)가 그걸 보고 ' 미인은 찌푸리는 것이구나'라고 여겨 자기도 찌푸리기를 일삼았다. 이 고사에 의거 효빈이란 '함부로 남의 흉내를 냄'을 이르는 말로 쓰입니다.
농암가(聾巖歌) 이 시조(時調)에는 다음과 같은 서문이 있습니다. 내가 오랫동안 서울에서 벼슬하다가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왔다. 농암에 올라 산과 냇물을 두루 보니 정령위(丁令威)의 느낌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그 옛날 노닐던 자취가 그대로임을 기뻐하여 또 이 노래를 지었다. 聾巖翁久仕於京 始還于鄕 登聾巖 周覽山川 不無令威之感 而猶喜其舊遊陳迹之依然 又作此歌 ※정령위(丁令威) 고사 한(漢)나라 요동(遼東) 사람. 영허산(靈虛山)에서 도술을 배워 학으로 변하여 요동으로 돌아와성문(城門)의 화표주(華表柱) 위에 앉아 있었는데, 이 때 한 소년이 활을 들어 쏘려고 하자 공중으로 날아올라 배회하다가 말하기를, "새가 된 정령위여, 집 떠난 지 천 년만에 비로소 돌아왔네. 성곽(城郭)은 예와 같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네."라고 하였다고 한다. 여기서는 농암 선생이 오랫동안 환로(宦路)에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오니 그립던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이 변했지만 산천의 모습은 그대로여서 반가웠다는 뜻이다. 聾巖 (농암)애 올라보니 老眼 (노안)이 猶明 (유명)이로다. 人事(인사)이 變(변)한들 山川(산천)이 똑 가샐가 巖前(암전)에 某水某丘(모수 모구)이 어제 본 닷하예라. 생일가(生日歌) 이 시조(時調)에는 다음과 같은 서문이 있습니다. 칠월 그믐은 내 생일이다. 자식과 손자들은 늘 이 날 술자리를 베풀어 나를 위로했었다. 신해년 가을엔 성대한 자리를 따로 마련하여 마을의 어른들과 이웃의 고을 원들이 다 모였다. 크게 도구들을 갖추어 놓고 차례로 일어나 술잔을 주고받다가 마침내 취하여 춤추기에 이르렀다. 제각기 노래를 불렀고 나도 화답하였다. 이것은 그 때 지은 것이다. 내 나이 올해 여든 일곱이니 벼슬을 그만두고 한직에 있은 지 또한 한 해가 지났다. 그 늘그막의 거취와 즐겁게 노닌 행적이 이 세 편의 단가에서 다하였으니 애오라지 써서 스스로 자랑하노라. 가정 계축년 4월 16일, 숭정대부에서 물러난 영양 이 아무개는 농암의 작은 누각에 쓴다. 七月晦日是翁初度之辰 兒孫輩每於此日 設酌以慰翁 辛亥之秋 別設盛筵 鄕中父老 四隣邑宰俱會 大張供具 秩起酬酌 終至醉舞 各自唱歌 翁亦和答 此其所作也 翁之年今八十七歲 致仕投閒 亦過一紀 其晩年去就 逸樂行迹 盡于此三短歌 聊書以自誇云 嘉靖癸丑淸和節旣望 崇政致仕永陽李某書于聾巖小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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