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군 함라출신 이집천씨(1899~1959)는 혼자 힘으로 당대에 만석 가까운 재산을 모았던 조부 석순씨가 외아들우석 이배원씨의 8남 8녀 중에서 장남이였다.
우석 이배원씨는 아버지 석순씨로 부터 재산을 물러 받으면서 석순씨와 같이 일을 했던 작은 아버지 재산까지 같이 상속 받았다.
석순씨는 슬하에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웠으며 석순씨의 동생은 슬하에 딸만 3형제 뿐이였기 때문에 배원씨는 작은 아버지 재산까지 같이 물려 받았던 것이다.
이에따라 배원씨는 아버지 석순씨가 당대에 모은 재산을 물려 받아 상업을 그만두고 농업에 전념 재산을 더욱 늘려 매년 1만 5천석 가까이 거두어 들이는 부를 형성하였다.
석순씨는 항시 아들 배원씨나 집에서 일을 보는 사람에게 자기가 고생하여 어렵게 재산을 모은 점을 상기 시키면서 賭祖(小作料)를 비싸게만 책정 하려고 하지 말라고 얘기 하는등 소작인들에게 덕을 베풀것을 늘 당부하곤 했다고 한다.
석순씨의 이러한 늘 사려깊고 높은 인품은 가풍으로계속 이어져 내려와 소작인들과의 마찰이나 불화가 없었으며 해방 후와 6.25전후 의 살벌했던혼란기에도 賭租를 안내려는 소작인이 없을 정도로 덕을 베풀며 지내온것 같다고 집천씨의 장남인 이화영 이리시장은 말하고 있다. 집천씨는 영농 자금은 거의 무이자로 대여 해주웠으며 가마니 짜는 기계를 구입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무료로 나누워 주웠고 4km이내의 토지에 적응했던 병작제도 소작인들에게 분배비율로 책정 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소작인들에게 착취 관념을 주지않고 덕을 베풀려고 애썻던 것이다.
집천씨의 부친 배원씨가 현 황등여상 이사장인한용석씨의 부친 한덕교씨와 친분 관계를 맞었다.
그후 한일 합병이 되면서 한씨는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쟁하다가 힘이 달려 금강산 어느 절에 들어가 어렵게 은둔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한다.
어느 해 유람차 금강산을 찾아가 우연히 한씨를 만난 배원씨는 한씨와 같이 함라로 왔다.
그러나 일경들의 눈초리 때문에 함라에 같이 있을 수가 없었던 배원씨는 현재 황등면 <수름고지>에 거처를 마련 해주고 뒷바라지를 하며 형제간 처럼 지냈다 한다.
이런 인연으로 한씨 집안은 황등에 정착하게 됐으며 두 집안은 두터운 친분 관계를 유지 했었다.
8형제나 되는 아들들의 교육을 위해 서울 혜화동에 당시는 5만원을 들여 99칸의 집을 마련했다 한다.
서울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일본 본대를 마쳤던 집천씨는 큰아들 화영씨 (전 이리시장)를 경기중 졸업후 동경 중앙대를 유학 보낸것을 비롯 둘째 우영이씨 (현이리상고 교사)등도 모두 서울에서 교육시켰다.
현재의 함라는 1920 호남선이 개통 될 당시 함열로 불러지던 면소재지로써 익산 북부의 중심지였다.
지금의 함열은 철로가 이곳을 통과하면서 발전 함함라의 옛지명을 그대로 사용 현재도 함라면의 소재지는 함라면 함열리로 불려지고 잇다.
<첨언 : 그때 함라로 지나가야하는 철로를 함라에 세부자는 땅이 울리면 농사가 안된다고 힘을 함쳐 돈을 써서 지금의 함열로 선로를 옮기게 했다 한다.)
집천씨 당시 이곳에는 세 갑부가 살고 있어 마을 전체가 흥청거렸기 때문에 이들 집안 덕분에 땀흘러 일 않고도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꽤 많았으며<인심 좋은 함열>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한다.
집천씨의 땅을 비롯 이들 소유 토지가 함라부근 일대에는 거의다 분포되여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함라가 익산군 내에서는 제일 먼저 전기가 가설돼 문화 혜택을 보았었다.
호남선 철로가 개통되면서 대전에서부터 전주 설치공사를 할때 함라면 금성리에서 농장을 경영하던 일본인 년종일랑씨가 이들을 찾아가 이들의 토지 위에 설치될 전주 설치 승락 도장을 안찍어주면 자기가 남선전기 회사와 교섭 전기를 끌어들이겠다고 장담을 했다는 것.
이들 갑부들의 토지를 거치지 않고는 전주설치 공사를 할 수 없음을이용 전기회사에 찾아간 일본인 관종씨는 전주공사를 승낙하지 않겠다고 회사측을 설득 함라로 전기를 끌ㄹ어들여 오는데 성공했다 한다.
한 때 익산군의 모든 주요기관이 있었으며 부의 중심이 되였던 함라가 이제는 교통의 불편등으로 낙후되 고색창연한 구가들만 옛날의 영광을 말해주고 있다.
첫댓글 아! 흘러간 옛 교훈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