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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16일(오순절 후 일곱 번째 주일)
사도행전 9:10~22
평신도를 세우는 교회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who?
하루는 아기 낙타가 엄마 낙타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엄마, 왜 나는 이렇게 커다란 발가락이 세 개나 되나요?” 엄마 낙타가 대답했습니다. “사막을 건널 때 부드러운 모래 더미 위에서 미끄러지지 말라고 있는 거란다.” “그럼, 눈썹은 왜 길어요?” “사막을 건너는 동안 모래가 눈 속에 들어가는 걸 막기 위해서지.” “그럼, 등에 혹은요?” “그건 건조한 사막을 건널 때 필요한 물을 저장해 두기 위해서란다.”
아기 낙타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멋져요, 엄마. 큰 말이 있어서 미끄러지지 않고, 긴 눈썹이 있어서 눈에 모래도 안 들어가고, 혹이 있어서 물을 저장해 둘 수 있으니까요. 근데 엄마….” “응, 아들아?” “왜 우리는 동물원에 있어요?”
-출처: 데이비드 제러마이어, 「생명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 국제제자훈련원, 2008; 「생명의 삶」, 2009년 6월호, 159에서 재인용.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낙타는 사막을 걷기에 최적화된 신체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커다란 세 개의 발가락을 가지고 있고, 긴 눈썹에, 등에 물탱크를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러나 정작 사막 한 가운데를 늠름히 걸어야 할 낙타가 사막이 아닌 동물원 한쪽에 고이 모셔져 있다면 이 어찌 불행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 바로 앞부분인 사도행전 9장 1절부터 9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사울을 찾아오시는 장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사울은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비치고, 사울은 땅에 엎드러져 소리를 듣게 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예수님께서는 사울에게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고, 행할 것을 이를 자를 만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 성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1절에서, 사울이 핍박하려 했던 자들이 “주의 제자들”인 것을 알게 됩니다. 또 2절에서, “주의 제자들”은 다른 말로 “그 도를 좇는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사울이 핍박하려 했던 사람들은 “주의 제자들”, “그 도를 좇는 사람”이었습니다.
과연 이들이 누구입니까? 13절과 32절과 41절에서 반복하여 등장하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성도”입니다. 사울이 그토록 미워하고 잔멸하려 했던 사람들은 다름 아닌 “성도”였습니다. 왜 바울은 그토록 “성도들”을 박해하고 싶어 했을까요? 바로 성도가 예수님께 속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인 13절을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그곳에는 “주의 성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주님께 속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주의 성도”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은 누구에게 속해 있었을까요? 어두움과 율법주의와 종교적 맹신에 속한 자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사울은 분명히 예수님께 속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사울은 어두움에 속한 자였습니다. 복음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기 이전의 사울은 율법에 매인 자요, 종교적 맹신에 매인 자였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기 이전에, 여러분이 누구에게 속했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누구에게 속한 자이십니까? 여러분은 정말 예수님께 속해 있습니까? 여러분의 말과 뜻과 행실이 예수님을 닮아가길 원하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은 “주의 성도”입니다.
원래 ‘평신도’를 나타내는 헬라어 단어는 ‘라이코스’인데,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라오스’라는 말이 성경에는 자주 나옵니다. 그래서 ‘평신도’라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 ‘주의 성도’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왕으로 섬기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켜 ‘평신도’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원래 교회 안에는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분 짓는 어떤 조건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는 이미 “주의 성도”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 말은 교회 안의 어떤 직분도 특정한 계급이나 신분을 가질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주의 성도들은 다 ‘하나님의 백성’이요, ‘성령의 전’이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평신도’라는 단어를 가장 먼저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주 후 3세기 카르타고의 감독이었던 키프리안일 것입니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주 후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내리고, 기독교를 공인하였습니다. 이때부터 기독교인의 수가 늘어나고, 교회에서 행해지던 예배형식들이 다양하게 발전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교회 내에서 종사하는 성직자 그룹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키프리안은 성직자들과 구별되는 일반 성도들을 어떻게 부를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성직자와는 구별되는 평신도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내에서 성직자와 평신도로 구별할만한 성경적 근거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단지 성경에서 구별이 있다면 세상 사람과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들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한국교회가 평신도주일을 지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교회의 주체로서의 평신도를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실제로 교회의 95% 이상이 평신도가 아닙니까?
잠자는 그들을 깨워 평신도의 자아상을 회복시켜 주고, 사명을 회복시켜 주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기 때문입니다. 목사 혼자 주의 사역을 감당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주의 성도들인 평신도들이 각자의 부르심과 은사를 따라서 주의 사역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what's problem?
그런데 우리가 평신도로서의 자아상을 회복하고, 평신도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실제 적으로 부딪치는 몇 가지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편견의 장애물입니다.
오늘 본문은 다메섹에 살던 아나니아의 이야기입니다. 아나니아는 주님의 제자로서, 어느 날 환상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11~12절).”
아나니아는 눈먼 사울을 찾아가 안수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13절에서 아나니아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는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주님의 명령을 들었던 아나니아는 즉각적으로 순종하지 못하고, 평상시 사울에 대해 갖고 있던 자기 생각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사람은 예루살렘에서도 주의 성도들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던 사람이고, 이곳 다메섹에서도 성도들을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에게 받았던 사람입니다.”
아나니아의 눈에 비친 사울은 부정적인 모습을 띠고 있었습니다. 이는 일종의 편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예전에 우리가 부르던 크레용 가운데 살색 크레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살색이라고 부르지 않고 살구색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시아인의 피부 색깔과, 유럽이나 아프리카인들의 피부 색깔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준으로 볼 때는 살색이라고 부를 수 있어도, 다른 피부색을 가진 인종들의 기준으로 볼 때는 살색이라 부를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도 모르게 내 생각과 관습에 젖어 있는 편견이 무섭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만 듣고 생기게 된 편견은 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의 장애물은 두려움입니다.
다메섹에 있던 아나니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던 제자들도 사울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에 그는 삼 년간 아라비아의 광야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후 사울은 예루살렘에 방문하여 그리스도인 형제들과 사귐을 갖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했지만, 제자들은 모두 두려워하여 사울의 제자 됨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제자들도 사울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what?
자,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편견과 두려움의 장애물을 극복하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던 아나니아에게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15~16절)”
주님께서는 사울을 가리켜 자신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많은 해를 받게 될 것이라고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사울이 살인자요, 핍박자일 수 있지만, 주님의 시선으로 사울을 볼 때, 그는 택한 그릇이요, 일꾼이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시선과 주님의 시선이 이렇게 큰 차이가 납니다. 사람들은 과거에 사울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앞으로 사울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바라봅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실수를 덮어주되 그의 가능성에 주목하신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자신이 가졌던 편견을 내려놓고, 주님의 시선으로 사울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울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17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형제 사울아!”
놀랍지 않습니까? 핍박자 사울도 아니고, 살인자 사울도 아닙니다. 주님의 눈으로 바라볼 때 그는 존귀한 ‘형제’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 안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놀라운 특권입니다.
혹시 아나니아가 말로만 사울을 형제라고 불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나니아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울에게 안수하였습니다. 그러자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닐 같은 것이 벗어져 사울이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아나니아에게 세례를 받았던 사울은 음식을 먹고 강건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아나니아는 사울을 다메섹에 있던 제자들에게 소개하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며칠 동안 다메섹의 제자들과 함께 머물며 영적인 교제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또한 사울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다메섹의 제자들은 밤 중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 밑으로 내려 그의 목숨을 살려주었습니다.
그래서 주석가 바클레이는 아나니아를 가리켜, “기독교 교회의 잊혀 진 영웅 중 하나”라는 찬사를 남겼습니다. 만약 아나니아가 없었다면 어떻게 기독교 역사 가운데 가장 뛰어난 전도자요, 목회자인 사도 바울이 태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아나니아 말고도 바울에게는 또 한 사람의 중요한 스승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 당했던 스데반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순교를 당하면서도, 무릎을 꿇고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라고 큰 소리로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의 죽음에 대해서 증인을 섰던 사람이 바로 사울이었습니다. 청년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의 기도가 훗날 사울에게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학자 R. B. 랙햄은 “바울의 진정한 스승은 가말리엘이 아니라 스데반이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의 스승 중 또 한 사람은 바나바였습니다. 그는 원래 구브로 출신의 레위 가문 사람이었고, 예수님을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행 15:25). 또 사도행전 11장 24절에 보면,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바나바라는 이름은 ‘위로의 아들’(son of consolation)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울이 3년간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할 때, 제자들은 다 사울을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때 사울을 세워준 사람은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어떻게 그가 예수님을 만났고, 그동안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을 전했는지를 소상하게 설명하였습니다. 바나바의 추천에 힘입어, 사울은 예루살렘에 있던 제자들과 함께 지내며, 예루살렘에 있던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히 전할 수 있었습니다.
훗날 안디옥 교회에 지도자가 필요할 때, 바나바는 바울의 고향 다소까지 가서 바울을 안디옥으로 데리고 옵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바울을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로 세우고, 둘이 일 년간 안디옥에서 말씀을 가르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바나바의 모습을 보면서 무엇을 느낍니까?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중요한 두 가지 중요한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위대한 전도자요, 설교자요, 신학자요, 목회자였던 사도 바울은 하루아침에 태어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그의 뒤에서 그를 도왔던 위대한 스승들이 없었다면 결코 바울은 위대한 삶을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스데반, 아나니아, 바나바는 모두 바울의 위대한 스승들이었습니다.
what's then?
성 베드로 성당에 가면 미켈란젤로의 걸작품 피에타상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십자가에 내려진 그리스도를 끌어안고 슬퍼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표현했습니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서명을 마리아의 옷자락에 남길 정도로 특별히 아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수년 전 망치를 든 한 청년에 의해 무참하게 훼손된 일이 있었습니다. 박물관은 이 작품을 복원하기 위해 세계적인 조각가 팀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이윽고 팀이 조직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 복원작업에 착수하지 않고, 우선 몇 달을 깨진 작품을 감상하는 일에 보냈다고 합니다. 감상을 통해 미켈란젤로의 눈과 가슴을 갖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이 미켈란젤로의 눈이 되어 이 작품에 나타난 마리아의 연민과 고통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의 가슴이 미켈란젤로의 가슴이 되어 그 연민과 고통을 함께 느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마침내 그들은 훼손된 작품을 거의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상처 나고 깨어진 형제, 자매를 붙들고 그를 빚어 만드신 하나님의 눈과 가슴이 되는 것, 그래서 그들의 고통과 비참함을 함께 느끼고 마침내 그들을 회복시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성령의 사역이며 우리가 해야 할 회복의 사역입니다.
-출처: 이동원, 「우리가 사모하는 푸른 목장」, 압바암마, 2013; 「생명의 삶」, 2103년 7월호, 105에서 재인용.
우리가 예수님의 눈과 마음으로 형제를 바라볼 때 하나님의 사람이 세워집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진 사울은 가는 곳마다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울은 다메섹에서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였습니다. 또 유대인의 핍박이 더 거세어질수록,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였습니다(22절).
또한 사울은 예루살렘에서도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그들에게 복음을 변론하였습니다(29절). 이러한 사울의 열정적인 전도로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31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사울의 열정적인 전도로 복음이 널리 전파되고, 교회에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유대와 갈릴리, 사마리아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교회’는 헬라어 단수형 ‘헤 에클레시아’로 쓰였습니다.
이 말은 유대, 갈릴리, 사마리아가 전혀 다른 이질적인 교회들이 아니라, 영적인 동질감을 가진 하나의 교회로 연합하였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각 지역마다 세워진 교회들은 내적으로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갔고, 믿는 자의 수가 더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높이고, 사람을 세울 것인가?”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저 주일에 와서 자리나 채워주고, 헌금이나 하고 돌아가면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을 다 했다고 여기는 동물원의 무기력한 낙타와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세상 한복판에서 주님의 용사로서, 당당히 믿음의 길을 걸어야 할 야성 있는 낙타와 같은 분들입니다.
여러분은 주의 제자, 주의 성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편견과 두려움의 장애물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찾아가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영적인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눈과 마음을 가진 그가 바로 평신도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이렇게 부르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