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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 경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 메시지의 두 거대한 전제에 대해- 살아 계신 하나님, 그리고 죄의 현실- 눈이 멀어 있다. 자유주의 신학의 신론과 인간론은 기독교적 관점과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기독교 메시지는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온다. 메시지를 담은 이 책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기독교적 견해에 의하면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오는 계시의 기록을 담고 있는데, 이것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물론 하나님이 만드신 것들을 통해서, 그리고 사람의 양심을 통해서 주어진 계시들을 성경이 확증하고 놀랍도록 풍성하게 해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이 말은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확증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 말은 양심에 의해 입증된 것을 확증해 준다. 성경은 또한 전적으로 세로운 계시의 기록을 담고 있다. 그 새로운 계시란 죄 있는 사람이 살아 계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그 길은 하나님에 의해서 열렸다. 곧, 1900년 전 예루살렘 성벽 밖에서, 영원한 아들이 사람의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바쳐진 것이다. 구약성경 전체가 이 하나의 위대한 사건을 바라보았고, 신약성경 전체의 중심과 핵심이 바로 이 위대한 사건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따르면, 구원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 성경의 유일성이 있다. 기독교의 모든 관념들은 다른 종교에서도 발견될 수 있지만, 그 다른 종교 속에 기독교는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관념들의 종합이 아니라 어떤 사건에 대한 서술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견해에 의하면, 그 사건이 없다면 세계는 암흑이며 인류는 죄책 아래에서 잃어버린 바 된다. 영원한 진리를 발견하는 것만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죄 때문에, 영원한 진리가 오직 절망만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기 독생자를 내어 주셨을 때 이루신 놀라운 일 덕분에 새로운 얼굴을 가지게 된 것이다.
성경의 내용에 대한 이 견해는 반대에 부딪히곤 했다. 그 반대는 다음과 같다. 그렇게도 오래 전에 기록된 것을 의존해야 하는가? 구원을 위해서 곰팡내 나는 기록을 조사해야 하는가? 그 당시 팔레스타인 역사에 대한 노련한 연구자가 오늘날의 사제가 되며, 이 사제들의 은혜로운 개입이 없다면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말인가? 그것 대신 역사에 의존하지 않는 구원, 곧 바로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있는 것에만 의존하는 구원을 찾을 수는 없는가?
이 반대는 복음 기록의 진리성에 대한 일차적인 증거들 중 하나를 무시하고 있다. 그것은 기독교적 경험 속에서 발견되는 증거로, 구원은 오래 전에 발생한 사건에 근거하고 있지만, 그 사건은 오늘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은 예수가 자신을 믿는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쳤다고 말한다. 이것은 과거 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그 기록을 시험할 수 있고, 시험을 통해서 그것이 참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신약성경은 오래 전 어느 날 아침에 예수가 죽음에서 살아나셨다고 말한다. 역시 과거 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시험할 수 있고, 시험을 통해서 예수가 정말로 오늘날 살아 있는 구주임을 발견한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 치명적 오류가 숨어 있다. 그것은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근본 오류들 중의 하나다. 우리가 방금 말한 기독교인의 경험은 복음 메시지를 확증해 준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그러나 그 경험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오직 그 경험이면 된다는 성급한 결론에 도달한다. 마음속으로 지금 그리스도를 경험하고 있다면, 첫 번째 부활절 아침에 관해 역사가 말하는 것과 무관하게 우리는 그 경험을 견지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는 성경 비평의 결과와 전적으로 무관할 수 있지 않은가? 나사렛 예수가 실제로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 역사가 말하는 것과 무관하게, 그의 죽음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 혹은 그가 부활했다는 이야기에 대해서 역사가 무엇이라 말하는지와는 무관하게, 우리는 여전히 영혼 속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지 않은가?
문제는 이렇게 유지되는 경험이 기독교의 경험이 아니라는 데 있다. 종교적 경험일 수는 있지만 기독교의 경험은 분명히 아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경험은 어떤 사건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은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가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왔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의를 이루려고 노력해 왔다. 그런데 복음 메시지를 들었을 때, 나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통해 구속의 일을 완성함으로, 내가 성취할려고 노력하던 것이 이미 성취되었음을 배웠다. 만약 그 일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는데 내가 그 성취에 대한 생각만 가지고 있다면, 나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이는 내가 아직 죄악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기독교적 삶은 신약성경이 진리라는 사실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기독교적 경험은 문서의 증거를 확증할 때 정당하게 사용된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로 문서의 증거를 대신할 수는 없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복음 이야기가 등장하는 문서의 이른 연대, 저자에 관한 증거, 복음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내적인 증거, 거짓말이나 신화에 근거해서는 설명될 수 없다는 사실 등에 의해서 복음 이야기가 사실임을 안다. 이 증거는 현재의 경험에 의해 영광스럽게 확증된다. 이 경험은 우리를 두려움으로부터 건져 주는, 놀랍도록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확신을 문서의 증거에 덧붙여 준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이 실제로 발생했다는 것을 기독교 경험이 확신시켜 줄 때에 기독교 경험은 정당하게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이 발생했든지 아니든지, 경험 자체가 우리를 기독교인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경험은 예쁜 꽃이며, 하나님의 선물로 대접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 꽃을 뿌리인 복된 책에서 끊어 내면 곧 시들어서 죽고 만다.
그러므로 성경 기록에 포함되어 있는 계시는 영원한 진리를 재확증할 뿐만 아니라- 사람의 눈이 멀어 진리가 모호해졌으므로 재확증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행동의 의미를 보여주는 계시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성경의 내용은 유일하다. 성경의 완전한 권위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기독교 계시론에 기독교 영감론이 첨가되어야 한다. 영감론이란 다음과 같다. 성경은 중요한 일들에 대한 기록일 뿐만 아니라 그 기록 자체가 참되며, 저자들이 오류로부터 완전히 지켜져 그들의 생각과 표현의 습관이 온전히 유지되면서도, 그들이 쓴 책이 “믿음과 행위의 무오한 규칙”이 되는 것이다.
이 “완전 영감” 교리는 지속적으로 잘못 제시되어 왔다. 이 교리의 반대자들은 완전 영감 교리가 성령이 기계적으로 작동한다는 주장인 것처럼 말해 왔다. 성령이 저자들에게 성경 내용을 불러 주었고, 저자들이 그것을 받아쓴 것에 불과하다는 이론이라고 비판한다. 물론 이런 모든 희화화된 내용에는 아무 근거도 없다. 어떤 사안에 대한 천박한 비판을 그저 따르기에 앞서, 본인이 직접 그 문제를 검토하는 것이 좋은 태도다. “기계적” 혹은 그와 유사한 몇 가지 무례한 말로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는 것은 훨씬 쉬운 일이다.
실제로 완전 영감 교리는 성경 저자들의 개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또한 정보 획득을 위해 그들이 정상적인 방법을 사용했음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성경의 각 책이 만들어진 역사적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완전 영감 교리가 부인하는 것은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주장이다. 완전 영감 교리는 성령이 성경 저자들의 마음을 잘 가르쳐서, 다른 모든 책에는 반드시 있는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했다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진정한 계시의 기록을 포함하지만, 참된 기록을 포함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영감 교리에 따르면, 그것도 실제로는 참된 기록이다. 성경은 “믿음과 행위의 무오한 규칙”인 것이다.
자유주의 설교자는 너무나 자주, 성경의 오류에 관한 미묘한 문제를 피하고자 “기계적 영감설”, “받아쓰기 영감설”, “성경을 부적으로 사용하는 미신” 등에 관해서만 말하려고 한다. 자유주의 설교자도 성경은 “신성하다”고- 실제로 그것이 더욱 인간적이기 때문에 더욱 신성하다고- 말하지 않는가? 덕을 세우는 데 이보다 더 유익한 것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러나 물론 자유주의자들의 이런 외면은 속임수다. 오류로 가득한 성경을 “신성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현대의 범신론적 의미에서 “신성하다”는 것으로, 이에 따르면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불완전함과 죄로 가득한 세계의 진행과정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경배하는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다.
완전 영감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 내에는 이와 같이 성경의 중심 메시지를 받아들이면서, 성경 저자들이 작품을 쓸 때 성령의 초자연적인 지도를 받지는 않았지만, 오직 그 증언이 신뢰할 만하기 때문에 성경 메시지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자유주의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독교의 근거가 되는 메시지를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생사가 달린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을 부인하는 사람들과 그들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견해는 매우 다르다. 현대 자유주의자는 완전 영감을 거부할 뿐 아니라, 신뢰할 만한 모든 책에 대해 갖는 정도의 존경심마저 성경에 대해서는 갖기를 거부한다. 기독교적인 성경관을 무엇으로 대체했는가? 종교의 권위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자유주의의 견해는 무엇인가?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 성경의 권위 대신 내세우는 것이 그리스도의 권위인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자유주의자는 구약의 잘못된 도덕적 가르침, 혹은 바울의 궤변론적 논증으로 보이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간주한다. 왜냐하면 성경의 나머지 부분을 거부하고 오직 예수만을 의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인상은 완전히 거짓된 것이다. 현대 자유주의자들은 사실 예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예수의 구원 사역의 의미는 그 일이 성취되기 전에는 완전히 제시될 수 없었다. 예언을 통해 제시될 수도 있었으며, 예수가 지상 생애 동안에 그 의미를 설명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완전한 설명은 당연히 그 일이 성취된 후에 주어졌고, 그것이 실제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사도들을 통해 주어진 성령의 가르침을 예수의 가르침보다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성령뿐 아니라 예수 자신에 대한 모욕이다.
그러나 실제로 현대 자유주의자들은 예수의 권위마저도 굳게 견지하지 않는다. 분명 그들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기록된 예수의 말씀 속에는 현대 자유주의 교회가 가장 혐오하는 것들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서 예수는 나중에 사도들을 통해서 드러날 더 충만한 계시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대 자유주의 신학에 의해 권위를 인정 받을 수 있는 예수의 말씀들은, 기록된 말씀의 더미 속에서 비평 과정을 통해 걸러져야 하는 게 분명하다. 이 비평 과정은 확실히 매우 난해하며, 비평가들 자신의 선입견에 맞는 말들만이 역사적 예수의 진짜 말들로 선택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자주 일어난다. 현대 역사가들에 의해 재구성된 “역사적” 예수의 말 가운데서도 어떤 말들은 참되지 않다고 받아들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대개 많은 부분이 예수의 말씀으로 여겨지고 있다. 설령 예수가 말한 모든 것이 참되지는 않다 하더라도, 그의 중심적인 “삶의 목적”은 교회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질 만하다고 주장된다. 그렇다면 예수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 가장 짧은 복음서이며 현대 비평주의가 인정하는 가장 초기 복음서에 따르면, 인자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는 본문이다(막10:45). 여기서 대속의 죽음이 예수의 “삶의 목적”이 되고 있다.
그런데 현대 자유주의 교회에서는 이런 말이 당연히 한쪽으로 밀쳐진다. 진실을 말하자면,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 발견한 예수의 삶의 목적은 예수의 진짜 삶의 목적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 중에서- 격리되고 잘못 제시된-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프로그램과 우연히 일치하는 요소들일 뿐이다. 그렇다면 참된 권위는 예수가 아니라, 예수의 기록된 교훈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지를 결정한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원칙이다. 산상수훈에서 뽑힌 윤리적 원리들이 받아들여졌는데, 이는 그것들이 예수의 가르침이기 때문이 아니라 현대의 관념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 예수의 권위에 근거해 있다는 말은 전혀 참이 아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의 모범과 교훈에서 절대적으로 본질적인 의미를 가지는 상당한 분량을- 대표적으로 자신이 하늘로부터 온 메시아라는 의식- 거부할 수밖에 없다. 자유주의 신학에서 진짜 권위는 오직 “기독교적 의식” 혹은 “기독교적 경험”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독교적 의식이 만들어 낸 결과물들을 어떻게 확증할 수 있는가? 제도 교회의 다수결 투표에 의해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방법은 양심의 자유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결과가 되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유일한 권위는 개인의 경험일 수밖에 없다. 각 개인을 “돕는” 것만 진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권위는 전혀 권위가 아니다. 개인의 경험이란 무한히 다양하며. 진리가 어떤 특정한 때에 작동되는 것으로만 간주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그 결과는 끝이 보이지 않는 회의주의다.
반면에, 기독교인은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한다. 한 책을 의지하는 것은 죽은 것이거나 인위적인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16세기 종교 개혁은 성경의 권위를 근거로 했으면서도 세상에 불을 붙였다. 사람의 말을 의지하는 것은 맹종이 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은 생명이 된다. 만약 우리 자신의 수단만 남아 있고 하나님의 복된 말씀이 없다면, 세상은 어둡고 우울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신학이 기독교와 전혀 다르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근거가 다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성경 위에 서 있다. 기독교는 그 사상과 삶에서 성경을 근거로 한다. 반면 자유주의 신학은 죄 있는 사람의 무상한 감정에 근거해 있다. (P 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