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첫번째 수요집단상담모임을 안내드립니다.
6월 마지막주부터 쉬임없이 정신건강에 대해 읽고 나누고 있습니다.
문선생님 발제글을 읽고
반갑게 만났으면 합니다.
부모 면허증도 부모 재훈련도 없이 부모로 사는 일
문은희_한국알트루사 여성상담소 소장, 심리학박사, 계간 「니」 편집장
자동차를 몰기 위해서 운전면허증이 있어야 한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면허증 제도가 없다면 감히 길에 나설 사람이 없을 터이다. 교사 자격증 받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지, 몇 차례고 떨어지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쉽게 본다. 변호사나 의사가 되려면 자격증 시험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상담자 자격증도 종류가 다양하다. 어느 정도 훈련과정을 거친 후에야 상담할 수 있다고 여겨 자격증을 준다. 그런데 자격증을 가진 이들 가운데에도 상담할 자신이 없다고 고백하는 이들을 가끔 만난다. 어쩌면 그렇게 말하는 이들이 더 양심적인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사람을 이해하고 도움을 주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모 노릇, 면허증도 재훈련도 없이>
그런데 우리는 누구보다 더 무거운 책임을 지는 ‘부모 되기’를 위해서는 전혀 준비하지도 않고, 교육이나 훈련을 받지도 않는다. 미국 유학시절에 결혼한 나는 의사의 건강진단서를 가지고 가서 그곳 지방행정부에서 발급하는 ‘결혼 면허증’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아이 둘을 낳을 때는 부모 면허증을 발급받은 바 없다.
어느 한 사람도 예외없이 이런저런 문제를 안고 사는데, 그 문제의 출발은 거의 예외없이 그 가정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 원인제공자들은 대개 부모들이다.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준비가 없이 부모가 되면, 부모의 문제는 대물림된다.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마는 자기의 문제를 해결 못한 채 부모가 되어 자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 문제가 심각해진다. 그렇게 자란 자녀는 문제투성이인 채 또 부모가 되어 그들의 자녀들도 문제를 안고 살도록 하여,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부모 노릇, 어머니만?>
막내인 나를 낳으셨을 때 내 어머니는 46세셨다. 우리 오남매에게 아주 훌륭한 어머니셨는데도 어느 날 나에게 “미안하다”고 하셔서 의아해한 적이 있다. 고황경 선생님(1909∼2000, 전 서울여대 총장)이 만드신 <어머니회>에서 사춘기 자녀에 대한 강의를 듣고 오신 후였다. “내가 몰라서 너를 잘 이해해주지 못했다”며 미안타 하신 것이다. 50년도 더 된 옛일이다.
요즘은 그때보다 어머니들이 배울 기회가 더 많아 육아에 대해 더 잘 알고 아이들을 잘 기르는 것 같으나,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어머니들이 아이들 기르기를 도맡아, 아버지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 아버지들은 가정의 일, 아이 기르는 일을 어머니에게 맡기고 뒷짐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아버지의 권위를 높게 치는 문화권임에도 실제로 우리네 아버지는 ‘속빈 강정’이기 십상이다. 힘이 있다는 것은 영향력이 크다는 것인데, 아버지들은 자녀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속속들이 영향을 미칠 기회를 그만치 가지지 못한다. 자녀를 이해하고 보살피며 실제 삶에서 사랑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역효과인 억압과 폭력을 쓰게 되니 안타깝다.
아무리 엄격한 아버지라도 억지로 강요하지 않을 때에는 아이들도 무리없이 그 뜻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엄격한 뜻을 유연하게 전할 수 있다면 아이들이 듣지도 않으려 귀 막고 외면하는 일은 없을 터이다. 반대로 아이들에게 마냥 “오냐, 오냐”하는 것이 사랑하는 방법도 아니다. 아이들만의 특징, 하나님께서 그 아이에게 주신 달란트를 파악하고 가꾸기에 힘써야 하는 것이다. 아이를 이 세상에 보내 부모 품에 안겨주실 때 하나님께서 그 아이에게 기대하신 사명을 이루도록 적극으로 도와야 한다. 그럴려면 아이를 눈여겨보고, 아이들의 마음을 듣고 이해하는 일이 우선이다. 발달단계에 맞게 능력과 성품이 크도록 적합한 자극을 주어 자라도록 해야 하며, 아이 스스로 자기 삶을 찾도록 도와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엄격하게 지켜가야 하는 ‘높은 뜻’이다.
겉보기에 훌륭한 부모 아래서 자랐다 해도 아이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으며 살아‘버릇’하지 않으면, 학력이 높아도 경제력이 있어도 자기 삶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게 된다. 전문직 부모가 풍성한 기회를 주어 해외에서 교육받고, 번듯한 전문인을 소개받아 결혼한 젊은 여성이 있다. 사회 안에서 성취하는 일에는 부모가 모델이 되어 뒤따를 수 있었지만, 친정과 전혀 다른 시댁의 문화에서 살아가는 것은 혼자 해내야 하는 일인데, 파경에 이를 때까지 어쩔 줄 몰라했다. 어려서부터 바쁜 부모님들이라 할머니 손에 자랐고, 주말에 외식하는 것으로 부모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부모와 아이 사이에 ‘서로 오가는 끈끈하고 생생한 삶의 과정’이 빠져있었다. 때문에 혼자 해낼 안목과 능력이 제 때 자라나지 못한 것이다.
<부모 노릇, 몸으로만?>
60대 어머니를 두 딸이 끌어오다시피 상담실로 모셔왔다. 60년 전의 역사가 지금 와서 우울증을 불러온 것이다. 자기 위주의 아버지가 갓난아기인 자기를 두고 몸냄새 나서 싫다며 엄마를 쫓아냈다고 했다. 계모 밑에서 구박덩이로 자랐다. 머리를 칼로 찔리기도 하고, 산에 끌고가 죽이겠다는 계모의 손에서 간신히 빠져나오기도 했다. 그래도 착한 남편 만나 자식 낳고 감기 한 번 앓지 않고 잘 살았는데 이제 와서 웬 병(우울증)인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어머니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불안정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살아남기 위해 감정의 영역을 아예 (무의식으로) 덮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 어머니는 몸의 나이는 60대이지만 느낌이라는 영역의 나이로는 ‘갓난쟁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의 나이로) ‘갓난아기’가 아이 낳아 충분히 사랑해주며 기를 수 있겠는가? 그 갓난아기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를 데려와 시집가겠다는 딸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때마다 맏며느리로 친척들을 대해온 수십 년의 세월을 ‘마음의 갓난아기’가 제대로 감당해올 수 있었겠는가?
<부모 노릇, 하나님의 자녀를 대신 돌보는 것>
우리 몸은 마음과 영혼을 담고 있다. 그런데 마음과 영혼을 ‘마치 없다는 듯’ 무시하고 눌러두기만 하면 언젠가 폭발하고 만다. 옛날 중국에서 여자들의 발을 꺾고 꽁꽁 묶어 자라지 못하게 했던 풍습이 있었다. 몸 전체를 그렇게 묶어 자라지 못하게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마음도 몸만큼 중요하다. 아니, 기독인들에게는 몸보다 더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사람은 모름지기 (몸의 양식인)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양식인) 말씀으로 산다 하셨으니(신 8: 3, 눅 4: 4), 기독인들은 마음과 영혼의 영역을 무시해서는 ‘절대로’ 안될 것이다.
마음의 영역이 개발되지 않아 우울증에 걸린 아버지들이 새삼 문제되고 있다. 남자답다는 것을 뽐내려는 남자일수록 마음의 세계를 자유롭게 키우지 못한다. 그러니 아이들과도 마음을 잘 나눌 수 없게 된다. 아버지가 우울증에 시달린다는 것이 공개되고 나서야 자녀가 “왜 아버지가 그렇게 예측하기 어려운 분이었던가를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부모가 건강해지는 것이 아이들을 위한 길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 아버지에게서 우울증을 대물림받은 딸이 “나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내 아이의 정신건강을 위해 내가 건강해져야겠다”고 다짐한다. 부모 자격증 받는 마음으로, 부모 재교육을 늘 받는 자세로 하나님의 자녀를 대신 돌보는 부모들이 되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