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례
박 정
며칠 전 속마음을 자주 털어놓는 친구와 점심을 먹고 밥값을 내가 냈다. 특별한 음식이 아니더라도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수다에 재미가 쏠쏠했다.
아침에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밥을 사겠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란 말이 생각난다. 우정으로 밥 산 것도 되갚으려 한다.
자녀들 혼사 때 받은 축의금은 꼭 갚아야 한다는 심리는 모두가 똑같을 것이다. 그래도 어떤 이는 받고도 안면 몰수고 못 본 척하는가 하면 혼사 때나 상대가 입원했을 때 자기는 문병을 하지 않고는 상대가 안 오면 궁시렁거리는 이들도 더러 있다.
아이들이 혼기에 접했을 봄, 가을이면 여기저기서 청첩장이 참 많이도 날아오더니 그도 제 철이 지났는지 뜸하다. 한때는 답례하느라 주말이면 서너 건에 발 빠르게 뛰어 다녔다. 주고받는 답례 의식은 참으로 좋은 것 같다. 서로서로 품앗이 격이다. 나도 얼거리 없을 때 축의금으로 자녀들 혼례를 무난히 여러 번 치렀다. 선인들의 지혜의 고마움에 찬사를 드린다.
요즘은 장수 시대, 고령화 시대라지만 건강한 지인들로부터 생각지도 않던 부고장이 날아오는가 하면, 누구누구는 중병을 앓으며 입원 중에 있다는 소식이 자자하다. 친지나 이웃에서 요양원에 간다고 웅성웅성 거린다.
아파트 옆집에 평소 내가 먹는 반찬을 조금씩 나누어 먹던 먼 친척 아지매가 살았다. 그가 볼멘소리로 요양원으로 간다고 어깨를 들추기며 흐느낀다.
“아지매, 울지 마라. 거기 가면 에어컨에 텔레비전도 있고 몸도 자주 씻겨주니 걱정하지 말고 잘 가소. 먼저 가고 뒤에 가는 거지, 나도 곧 간다오,”
술렁이는 마음으로 위로를 했다. 그 아지매가 어저께 정든 방을 뒤로한 채 요양병원으로 떠났다.
젊을 때는 먼 훗날 허리가 휘어지고 걸음걸이가 뒤뚱뒤뚱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세월은 병도 주고 약도 가져다준다는 자연의 이치에 움직이는 바람이 아닌가 싶다.
그 바람으로 애지중지 키운 아들을 어머님은 잘 포장하여 나에게 선물로 주시고 생의 사명감을 마무리하셨다. 자연의 부음을 받으신 것이다. 50년대 아등바등하며 모든 것이 귀할 때라 애면글면 숱한 질곡의 세월을 바람과 함께 하신 애살스런 분이시다. 문득 그분이 그리워진다.
세월의 흐름은 잡지도, 막을 수도 없는 것, 그 사실을 망각하고 갈팡질팡하는 우리네 삶에 유구무언이다. 하지만 이 땅에 태어나 선물을 주고받는 것은 인지상정인가 보다. 나 또한 받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금지옥엽으로 갈고 닦은 사랑의 분신인 아들을 자의건 타의건 잘 포장하여 며느리에게 전했다. 안 보면 보고 싶고 보면 더 보고 싶은 것은 천륜일 것이다. 부모자식간의 인연은 일곱 생애를 거쳐야 만난다고 하니 그 지중한 인연이 얼마이려나.
주고받는 답례의식은 못을 박아 둔 것처럼 한 치의 어김도 없는 것 같다. 내 시어머니도 며느리였고 내 며느리 또한 시어머니가 될 것이다. 서로가 답례로 주고받은 품앗이다. 혹여 서로의 이해관계가 분분하지만 같은 뱃머리에 앉은 동반자가 아닌가?
내 며느리도 제 며느리에게 귀한 선물을 주려고 혼신을 다하느라 여념이 없다. 네다섯 살인 손자 녀석은 구약성서 시편을 좔좔 외우는가 하면 영어 노래와 단어를 척척 암기를 한다. 나는 노파심에 안쓰럽다. “저 어린것이”, 아들 내외는 큰 바소쿠리 마냥 입을 벌리고 웃으며 자랑스러워한다. 키우고 가르칠 때의 즐거움으로 부모에게 미리 효도를 다 한 것이란 말이 맞구나 하는 생각이 절실히 느껴진다.
딸도 다를 바 없다. 외손자들이 어릴 때는 제 집 나들듯 했다. 요즘은 과학 영재교실이다, 영어마을이다 하면서 바쁘다고 혼비백산들이다. 며느리나 딸들도 답례를 받은 터라 이름 모를 그 누구에게 선물하려고 그렇게 바쁘게 설쳐대는 것일까. 누구를 탓하기 전에 선물을 제공한 이에게 늘 고마움을 전하는 자세를 가지면 자녀들에게 산교육이 될 터인데 말이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말이지만, 요새 며느리들은 참, 요새 시어머니들은 참 대단하다. 그리하여 일촌과 무촌의 두 여자와 한 남자는 삼각관계로 이루어져 뾰족한 날이 무디어질 줄 모르고 서 있다. 타인에게 하는 축의금에 대한 답례도 중요하지만 가족 간의 답례 의식의 보답은 더 더욱 고맙고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삼각의 각을 동그란 원으로 탈바꿈시키면 어떨까. 젊은 세대가 들으면 신화 같지만 우리는 어디까지나 현실에 머물고 있지 않은가.
‘있을 때 잘해’란 노랫말이 터무니없지는 않은 듯하다. 위아래 여인들을 제 각기 바른 저울에 달면 평형을 이룰 것 같다.
가족 사랑을 더 받고 더 주려고 사생결단으로 밀고 당겼지만 일상을 놓을 때는 한줌의 먼지가 되어 산으로, 바다로 흩날려질 것이거늘 어찌 그리 아옹다옹 하는 것일까. 아무리 장수 시대라지만 황혼을 맞이하니 인생무상이란 말이 절절이 느껴진다. 인생행로는 담 모퉁이에서 하는 소꿉놀이에 불과한 것인 것을…….
첫댓글 박정 선배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