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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40 :1-3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다윗은 어떤 큰 위험, 곧 한 가지 위험이 아니라 많은 위험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극히 높게 찬양합니다.
다윗의 영혼은 온 인류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찬양으로 충만합니다.
또 다윗은 자신을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데 드리겠다고 단언합니다.
그러기에 다윗으로서는 하나님은 어떻게 섬김을 받으시고 존귀를 받으시는가에 관하여 간략하게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의 행적을 열거하면서 다시 감사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다윗은 자기 원수들에 대해 하소연하고 난 다음 새 기도로 이 시를 끝맺습니다.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1. 본문 1절은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입니다.
우리의 보편기도가 감사로 시작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의 시작은 감사의 표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감사 중에 다윗은 자기가 위험에서 뿐 아니라 죽음으로 부터 구원 받았음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특별한 이유없이 그런 위험과 죽음이란 병이었다는 견해를 갖지만 오히려 다윗은 여기서 자신이 피해 나왔던 수없이 많은 위험들을 함축해서 말합니다.
다윗은 가장 큰 위험, 곧 죽기까지 할 뻔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그럴 만한 이유와 함께 자기가 사망의 웅덩이에 빠질 뻔했고 ‘수렁’에 빠질 뻔했다고 말합니다.
그런 중에서도 다윗의 믿음은 여전히 확고한 것으로 보입니다.
오래 계속된 그 재난이 다윗의 참을성을 모두 없애 버렸지만 다윗은 중단없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 입니다.
다윗은 단순히 자기가 기다렸다는 것만을 우리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동일한 표현을 반복해서 자기가 오랫동안 간절한 긴장감을 갖고 있었음을 말합니다.
다윗이 당한 시련이 계속됨에 비례하여 마음속으로 말없이, 침착하게 계속되는 그 시련을 견디는 중에 보여진 다윗의 믿음에 대한 증거는 그만큼 더욱 분명했습니다.
시편 40 편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도우심을 지연시키셨지만, 다윗이 낙심하거나 마음이 약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요, 다윗이 인내에 대한 충분한 증거를 보인 다음에 마침내 하나님은 다윗의 간구를 들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이 보여준 모범으로 우리는 대단히 유용한 교리를 얻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돕기 위해 신속하게 나타나시지 않으므로 우리가 불안해지고 당황하게 되더라도 오랜 인내에 의하지 않고는 믿음이 충분하게 연단되지 않으므로 우리는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찬양에 관해 다윗이 말하는 결과 역시 더한 용기로 우리를 고무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바라는 것보다는 더욱 천천히 우리를 구원하실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상황에 유의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이 주무시고 계신 것처럼 보여질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속이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굽힘이 없는 용기와 믿음으로 참을 수만 있게 된다면, 우리가 그 모든 어려움으로 부터 구원을 받는 적합한 시기는 마침내 오고야 말 것이기 때문 입니다.
2. 본문 2절은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황폐의 웅덩이에서’ 라고 번역합니다.
명사 ןואש(샤온)에서 파생되어 나온 동사 האש(샤아)는 ‘울리다’ 혹은 ‘메아리치다’는 뜻이며 물론 ‘멸망시키다’ 혹은 ‘황폐시키다’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물이 세찬 힘으로 솟아나오는 깊은 못을 암시하고 있다고 간주하는 것이 더욱 적합할 것입니다.
이 비유로 다윗은 마치 자기가 격렬한 물이 성난 소리를 내고 있는 깊은 못에 던져진 것처럼, 자신이 절박한 죽음의 위험에 처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같은 목적으로 ‘수렁’에 관한 비유를 사용합니다.
이 말로 다윗은 자기가 당하는 심한 재난 때문에 거의 압도되어 그것으로 부터 자신이 구출되기란 쉬운 일이 아닌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갑작스레 믿기조차도 어려운 변화가 뒤따릅니다.
다윗은 자기에게 내리신 그 은혜가 매우 위대한 사실을 명백히 말씀합니다.
다윗은 전에 물에 압도되었음에 반하여 ‘자기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고 선언합니다.
전에는 다윗의 걸음들이 불안정하고 미끄러울 뿐 아니라, 수렁에 빠져 꼼짝도 할 수 없었음에 반하여 지금은 자기 걸음이 견고하며 안정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시편 40 편
3. 본문 3절은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입니다.
1) 본문 3절상반은 “새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입니다
이 귀절 서두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해 주신 사실을 단정적으로 말씀합니다.
주께서 ‘새 노래를 자기 입에 넣어 주셨다’ 는 말로 다윗은 자기가 온전히 구원을 얻었음을 의미합니다.
주께서 어떤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든 간에 주님은 우리가 그 보답으로 어떤 것을 하도록 요구하지 않고, 우리가 그 구원에 감사하고 기억하기만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우리 위에 은혜를 주시는 만큼 자주 자신을 찬양하도록 우리의 입을 열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관대하게 행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찬송하도록 격려하시므로 다윗은 그럴 듯한 이유와 함께 자기가 그처럼 훌륭하게 구원을 받았으므로 자기에게 새 노래가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다윗은 ‘새’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평범하지 않고 정묘하다는 의미입니다.
자기가 받은 구원의 방법은 특유하고 영원히 기억할 가치라는 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께서 내리신 은혜 중에 가장 높이 찬양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작은 은혜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기 위하여 더욱 전능한 방법으로 그 손을 펴면 펼수록 이 거룩한 일에 더욱 강렬하게 스스로를 격려하는 것은 합당합니다.
이는 우리의 노래가 우리에게 내리신 그 큰 은혜에 부합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2) 본문 3절 하반은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경험한 그 도우심의 성과를 확대하고 더욱 멀리까지 연장시킵니다.
이 성과는 모두에게 공통된 교훈의 수단을 옳은 것으로 증명하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신실한 자들 중에 누구에게라도 내리신 은혜는 하나님이 언제나 그들 모두에게 행하는 선하심에 대한 증거가 된다는 사실은 분명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실예에 의해 교훈을 받는 사람은 동일한 은혜가 자기에게서도 나타나게 될 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두려움’ ‘소망’ ‘의뢰’ 등의 말들은 언뜻 보기에 조화가 되지 않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이 말들을 서로 결합시켜 놓지 않은 것은 부적당합니다.
우선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을 갖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에 대 한 소망을 가질 수 없기 때문 입니다.
우리는 ‘두려움’이란 말이 일반적으로 경건한 감정이라고 이해합니다.
이 경건한 감정은 하나님의 권세, 공평, 그리고 자비를 알 때 우리 안에 생겨납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원수들에게 행하신 심판은 모두에게 두려움을 준 것은 사실입니다.
시편 40 편
그러나 다윗이 얻은 구원으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자신들을 굴복시키게 되었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의 권세 앞에 순복하게 된 사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심판자가 되실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에 진심으로 순복하면 반드시 경건한 소망을 간직할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통상적인 방법으로 이끌어가시는 그 은혜의 증거가 눈 앞에 보일 때는 더욱 그렇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도 그와 동일하게 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가 확신하기 위해 우리가 보기에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자비롭고 친절하게 일하신다고 우리는 이미 말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사용하고 있는 “보고” 라는 말에 관하여 우리는 그 말이 우리 육신의 눈 뿐 아니라, 주로 마음이 갖는 인식의 힘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이 어떤 일이 생겼던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다윗이 얻은 구원이 하나님의 일이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극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에 관하여 소경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총명의 신이 임한 자들만이 하나님의 일을 분명히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겨나는 사건들만을 마음 속에 깊이 생각하지 않고 믿음으로 그 사건들 중에 있는 하나님의 손을 구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로 합시다.
시편 40 편
시40:4-5 여호와를 의지하고
다윗은 자기가 근자에 체험한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많은 놀라운 일들이 자기 주위에서 일어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5).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위하여 이런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지만 다만 사람들이 무지하여 그것들을 보통 일로 여기고 놀랍게 알지 않으며 깨닫지 못하는 것 뿐 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체험한 자는 그런 종류의 일들이 사람들이 모르는 가운데 많이 있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다윗은 이 놀라운 일들이 실상 성도들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상(思想) 표현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놀라운 일들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알려 주는 은혜로운 계시(啓示)의 결과입니다.
1. 본문 4절은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받은 구원이 신실한 자들에게 소망의 근거를 주리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세상의 모든 유혹을 물리침으로 말미암아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보호에 자신을 맡기고자 격려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신뢰하는 자들은 행복하다는 사실 뿐 아니라, 이 사실에 일치하지 않은 모든 다른 기대는 속기 쉽고 저주를 받기가 쉽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이 확신은 우리 안에 저절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일부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또 한 부분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봄으로써 얻습니다.
우리가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를 밝혀 주시지 않고 그 자비를 보여주시지 않으면 그가 하신 일을 명상만 해서는 우리 안에 이 불빛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은혜로우실 것을 약속하신 다음에 의심할 여지가 없는 증거들로 자기의 선하심을 나타내시면서 전에 친히 말씀하신 것을 스스로 확증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사망의 깊은 구덩이로 부터 생명으로 회복된 사실을 근거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선언하고 있는 것은 타당합니다.
즉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가 행복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믿기를 본성적으로 꺼려한다는 증거로부터 신실한 자들이 교훈을 얻는다는 것 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본성은 확고하지 못하므로 그 본성에 의하여 타락되기 쉽습니다.
시편 40 편
그리고 우리는 미혹에 끌리기 쉬우므로 많은 악한 행위에 의하여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즉시 덧붙여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םיבהר(레하빔)을 ‘부자’ 혹은 ‘이 세상의 위대한 자’ 라고 번역합니다.
이 말은 그들의 행위를 모방하기 위해 그들이 보여준 행위에 끌려감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어디에서든지 하나님을 경멸하고 최고의 행복은 야망과 속임수와 토색, 그리고 간계에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마음으로 들떠 있는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이 하는 대로 해보고자 하는 그릇된 욕망은 자신도 모르게 우리에게 찾아듭니다.
특히 모든 일이 그들의 소원대로 될 때에는 헛되고 속기 쉬운 기대를 갖게 되어 그들과 똑같이 해 보고자 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지혜롭고 그럴듯한 이유로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언제나 하나님께만 확고히 의존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변절하여 떠나도록 사방에서 끊임없이 유혹하는 악한 행위들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다윗이 교만한 자가 “거짓에 치우치는 자” 라고 말했을 때 다윗은 육신의 어리석은 신뢰를 간략하게 설명합니다.
하나님 대신 자신의 망상을 중시하는 자들의 교만은 헛된 환영(幻影) 일 뿐입니다.
분명히 분별없는 자만에 의하여 부풀어 있는 사람은 어떤 조그마한 것이라도 자기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스스로 우쭐거리면서 자신의 멸망을 불러들입니다.
교만과 허영심은 하나님께만 의존하는 거룩한 신뢰에 반대됩니다.
하나님만 신뢰하는 것보다 육신이 어려워하는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언제나 교만하고 거만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으며 이들은 헛된 매력으로 자신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만일 경건한 자들이 고삐를 매는 것처럼 자신들의 터무니없는 생각을 억제하기 위해 스스로 어거하지 않으면 저 교만하고 거만한 자들에 의해 곧 마음이 부패될 것입니다.
2. 본문 5절은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수도 없나이다(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은 주께 순서대로 헤아려 아뢸 수 없나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말할 수 있는 이상입니다 - 칼빈)” 입니다.
이 말씀에 관하여 주석가들은 모두 일치하지 않습니다.
시편 40 편
그러나 성경 주석가들은 여기서 다윗이 인류를 다스림에 있어서 갖고 계신 하나님의 섭리를 감탄하면서 묵상하는 사실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첫째로 다윗은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다’ 고 선언합니다.
이 말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항상 함께 하시는 측량할 수 없는 지혜로 사람들의 일을 다스리고 계시므로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이 가진 이해력을 초월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특별한 종류에서 전체의 부류로 올라가면서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 특별한 행위로 사람들을 향하여 보여주신 아버지로서의 돌보심 뿐 아니라, 그의 신기한 섭리가 창조의 여러 부분 속에 전반적으로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셨다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다윗은 계속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은 극히 높고 숨겨져 있어서 그 생각을 본질대로 순서에 따라서 분명하고 합당하게 인식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ונילא(엘레누; 우리를 향하신)라는 말이 비교를 위해 쓰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 이해 한계 밖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베푸시는 그 보살핌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해석에 있어서는 말의 연결이 잘 안되므로 그들은 우리가 ‘순서대로 헤아리다’(칼빈) 라고 번역한 ךורע(아로크)를 다르게, 즉 ‘하나님께 대등한 자는 아무도 없도다’ 혹은 ‘하나님께 비교될 자는 없다’ 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긴 논박을 시작하지 않아도 지성을 가진 신자는 이 말의 참된 의미를 하나님은 그의 무한하신 지혜로 세상을 다스리시되 우리의 마음이 극히 우둔하여 우리가 그처럼 위대한 결정에 이를 수 있게 되기 전에 실패하므로 하나님의 일들을 그 적절한 순서에 따라 낱낱이 헤아릴 수 없는 그러한 방법으로 다스리신다고 간주함에 있어서 일치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앞에” 라는 말이 쓰였습니다.
우리는 주께서 우리의 필요를 위해 온갖 것들을 얼마나 훌륭하게 마련하셨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하지만 우리의 이해력은 불완전하며 생각도 한정되어 있으므로 하나님의 그 무한한 영광을 알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일이 우연과 운명에 의한다고 상상하기에, 마치 다윗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지 않는 자들의 배은 행위를 지나가는 말로 나무라고 있는 것처럼 ‘주의 생각’ 이란 주께서 하시는 생각이 아니라고 설명하는 자들은 이 말씀의 의미에 관하여 과오를 범하고 있다고 의심할 것입니다.
이어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열거하려고 아무리 애를 쓰더라도 그것들의 절반도 말하기 전에 실패했다고 진술합니다.
시편 40 편
이 진술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간혹 경건하고 신앙적인 명상을 하게 되는데, 그 명상을 통하여 그들은 하나님께서 해 주신 일에 대한 희미한 맛만을 볼 뿐, 더 이상은 알지 못함을 충분히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구원을 우선 말하고 나서 이 구원을 근거로 사람들을 양육하시고 지속시키시는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일반적인 섭리를 설명합니다.
다윗이 이렇게 하는 의도는 신실한 자들이 그들의 모든 근심을 지체 없이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고 그들이 그 섭리를 깊이 생각하도록 격려하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자들은 자신의 근심과 불안으로 계속적인 고통을 당하고 있거나 가냘픈 미풍에 의해서도 동요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땅의 도움으로 자기의 생명을 강하게 하고 보존하려고 열심히 수고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 모든 행위는 하나님께서 그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이 세상의 일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교리를 알지 못하는 데서 생깁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이해력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헤아려 그 섭리를 악하고 모호하게 하거나 그 품위를 떨어뜨리고 있기에 다윗은 하나님의 섭리를 바른 위치에 올려놓고 이 방해를 지혜롭게 제거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장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서 사람이 자신의 이성(理性)으로 이해 할 수 없는 것은 공손한 마음으로 이를 우러러 예찬해야 하며, 육신의 마음이 자기를 반박하거나 불평할 때에는 세상에서 자신들을 위로 들어 올려야 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일하기를 멈춘다면 주무시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을 눈에 보이는 수단에 묶어 둠으로써 하나님께서 은밀한 수단으로 일하고 계시는 것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이유가 우리에게 숨겨져 있고 알려져 있지 않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생각하심에 있어서 훌륭하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5절은 4절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외적 환경을 향해 눈을 감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좆아 다스리심을 받고자 하지 않으면 어떤 사람도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만큼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삼인칭으로 말해 왔으나 다윗은 지금 급히 자신의 말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해 분별없이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는 다윗이 우리를 더욱 효과적으로 이 근엄과 신중함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분명하게 알 수 없다고 다윗이 주장 했을 때, 다윗은 우리가 그 일을 알고자 하거나 살펴 보려는 것을 막으려는 목적이 아니었으며 우리의 경솔함을 제지하려는 것 뿐 이었습니다.
시편 40 편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경우, 이런 점에 있어서 우리의 경솔은 한계를 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목적 밑에서 ‘주께’ 또는 ‘주의 앞에’ 라는 말이 분명히 사용됩니다.
이 사실에 의해 우리는 사람이 아무리 열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깊이 묵상한다 하더라도 그 일의 끝이나 테두리에만 우리의 생각이 미칠 뿐이라는 교훈을 얻습니다.
그처럼 위대한 높은 경지가 우리의 노력이 미칠 수 없는 곳에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할 수만 있다면 쉬지 않고 그곳을 향해 더욱 접근해 가야 됩니다.
우리들 스스로가 발견할 수 없는 신기한 것들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유익하기만 하다면 손을 펴서 보여 주시기 때문 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섭리에 관해 더 무지하게 되는 것보다 상식을 벗어난 일도 없습니다.
아직 우리는 그 섭리를 온전히 이해 못하고 단지 부분적으로만 분간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망각 속에 묻어 버리려고 자기들의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이는 것을 봅니다.
마치 우리의 육적 이성에 따라 옳고 합당한 것으로 보이는 것 이상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하는 것이 비합리적인 것처럼,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이해를 초월 한다는 구실 만을 내세워 그렇게 합니다.
이 점에 관해 다윗은 극히 다르게 행동합니다.
다윗이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상상할 수 없는 위엄과 광채에 그의 모든 감각이 도취되어 자기가 그 이유를 이해할 수는 없으나 그 위엄과 광채는 훌륭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다윗은 전적으로 그리고 어디에서나 그것들을 말함에 있어서 주저하지 않았으며, 자기 능력대로 경건하게 그것들을 묵상했습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과 목적이 이해할 수 없기에 누구든지 그것들에 관하여 논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로 말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무익함을 알게 됩니다.
다윗은 이와는 반대로 심한 고통 아래 눌리게 되었지만 그것들을 끊임없이 묵상하고 그것들에 관하여 말하기를 삼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생각과 목적을 상세히 설명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으나 다윗은 이것들에 관한 자기 믿음을 선언한 다음에 경탄으로 자기 말을 끝내는 것에 만족했습니다.
시편 40 편
시40:6-8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다윗은 저렇게 위험 중에서 건짐을 받고 주님의 의지를 순종하기 원하며, 또한 주님을 증거하기 원합니다(6-10). 순종에 대하여 다윗은 8절에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감심으로 순종함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억지로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1. 본문 6절은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입니다.
1) 본문 6절 초두는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입니다.
사람들은 이 말씀이 ‘하나님을 섬기기에 적합하거나 자격을 얻게 한다’ 는 의미로 더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다윗은 한쪽 귀만이 아닌 양쪽 귀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기로도 사람들은 본래 귀머거리들입니다.
사람들은 우둔하여 하나님이 그들의 귀를 뚫기 전에는 귀가 막혔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성령의 은혜에 이끌림 받아 만들어진 유순성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처럼 표현된 말씀을 본문 말씀에 더 밀접하게 적용하여 설명합니다.
다윗은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듣는데 느리거나 둔하지 않았으므로 제사에는 어떤 점이 땅에 속한 것인가를 분간할 수 있고, 다윗의 귀는 소제되었으므로 율법을 잘 설명할 수 있었으며 모든 외적 의식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봉사에 관련시킬 수 있습니다.
다윗은 제사에 관하여 공공연히 말하면서, 괄호 안에다가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라는 문장을 짤막하게 잘라서 썼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주님은 나의 귀를 열어주셨습니다. 이는 주께서 제사에 관하여 명령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똑똑히 이해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제사들에 관한 명령이란 제사 그 자체로는 주님께 기쁨을 드릴 수 없고, 영이신 주님께서는 이 같은 땅의 요소들을 좋아하지 않으시며 살과 피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는 더 높고 더 뛰어난 성질의 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로 설명돼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으로 제사들을 드리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 드리는 신령한 예배와 외적 상징과 그림자들로 구성된 것들을 분간하고 있습니다. 이 비교에서 다윗이 제사들은 아무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을 알고 크게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제사는 사람들을 참된 경건으로 이끌어가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40 편
제사 방식이 그 겉모습 보다는 훨씬 높은 목표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믿음과 회개를 실행하도록 유도하시기만을 위하여 이러한 요건들을 사용하셨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제사에 의하여 섬김 받으시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셨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것 자체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고 그것이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하여 있는데, 만일 그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와 섬김에 대치하게 되면 하나님은 그것을 배격하시고 제거하신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2) 본문 6절 후반은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찬양의 제사 또는 호세아 선지자의 말처럼 “입술의 수송아지”(호14:2) 를 드릴 뿐 아니라 자기 감사의 표로 자신을 하나님께 전부 드리며 성별시킵니다.
다윗은 마치 ‘나는 지금 내 전부를 하나님께 드렸다. 그의 놀라운 능력으로 구원받아 나는 내 생명에 관하여 하나님께 이중으로 빚을 졌기 때문이다’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이와 동시에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에 관하여 말하면서 다윗은 예배가 눈에 보이는 의식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예배는 영적인 것임을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6절의 의미는 그가 외적 허식이나 율법의 의식과 모양 뿐 만 아니라 마음으로부터의 참된 헌신으로 하나님 앞에 왔다는 것 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은 마음에 새겨진 종교적인 감각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누구라도 감히 자기가 섬기는 대상에서 공공연히 완전하게 물러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대부분이 비뚤어진 길로 들어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형식적인 방법으로 섬기는 일이 생깁니다.
그들의 예배는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윗이 현재의 경우에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그 이유는 다윗이 자신과 위선자들을 구별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위선자들은 입술만을 갖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거나 차갑고 의미 없는 의식들로 하나님과 화해를 구합니다.
이제 본문의 단어들을 설명합니다.
다윗은 여기 열거하는 네 가지 유형의 제사로 율법의 온갖 제사들을 포괄합니다.
다윗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섬기는 자들이 행하는 의식들만 바라지 않으시고 믿음과 거룩한 생활이 합쳐진 신실한 마음을 만족히 여기신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성소, 제단, 분향, 짐승을 죽이는 것, 등대, 값진 의복, 그리고 씻는 것만으로는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시편 40 편
이 사실로부터 다윗은 자기가 이 모든 행사에만 유의하는 것보다 또 하나의 원칙에 의하여 인도되어야 하고,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또 하나의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 원칙 및 규칙은 하나님께 자기를 전적으로 굴복시켜야 한다는 것 입니다.
3. 본문 7-8절은 “(7)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8)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입니다.
1) 본문 7절 상반은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입니다.
‘그때에’라는 부사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귀를 뚫어주시기 전에는 자기가 좋은 학자가 될 수가 없고 교훈을 받아 유익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성경의 은밀한 영감에 의해 가르침을 받게 되는 순간, 다윗의 마음은 자원하여 기꺼이 순종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여기에 참된 순종은 마지못해 하는 노예적인 굴복과 확실히 구별됩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동시에 드리지 않는다면 사람이 하나님께 어떤 형식의 예배를 드린다 해도, 이는 하나님이 보실 때 헛되고 싫어하시는 것이 됩니다.
자신을 드리는 것도 자원하여 드리지 않는다면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내가 왔나이다” 와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라는 말씀을 눈여겨 보십시다.
히브리어 יתצפח(하파츠티)는 ‘나는 참으로 기뻤다’ , ‘나는 자원하여..... 하다’ 입니다.
이 말씀 중에서 다윗은 자기 마음의 진지한 감정과 결의를 지속하겠다는 것이요, 또 기꺼이 순종하겠다고 말합니다.
다윗의 말은 자기가 다른 모든 욕망과 관심에 앞서 하나님 섬기는 일을 마음에서 택하고 자기가 원하는 마음에서 순종할 뿐 아니라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의 규범을 철저히 지키고자 하는 확고하고 진지한 목적과 함께 그 규범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8절의 중반에서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라는 말씀으로 더 확증합니다.
이 말씀은 첫째로 사람들의 행위가 아무리 아름답고 훌륭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이 마음속에 생동하는 근원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면 이는 순전히 겉치레에 불과합니다.
둘째로 마음으로부터 순종이 나오지 않는다면 손발과 눈이 율법을 지킨다 하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단정합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우리 마음에 새기는 것은 성령만이 하시는 직무라는 사실은 성경 말씀의 다른 구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시편 40 편
하나님은 마치 우리가 돌이나 나무처럼, 하나님을 향한 우리 마음의 내적인 감정이나 감동없이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끄셔서 우리 안에 자신의 일을 이루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속에는 우리 본성의 부패로 말미암아 잘못된 의지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의지는 언제나 우리를 범죄케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의지를 좋게 바꾸시고 우리 마음이 전에는 늘 역행하고 있던 그 의를 진심에서 구하도록 우리를 인도 하십니다. 그리하여 참된 자유를 갖습니다.
이 자유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다시 만들어 주실 때 우리가 얻습니다.
우리의 옛 마음은 자신만 위하고 죄에 매여 있었습니다.
2) 본문 7절 하반은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입니다.
율법에 나타난 글자 그대로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으로 적용되지만 가르침 그 자체는 죽은 것이며 허공을 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또 다른 방법으로 교훈하십니다.
성령에 의한 내적이고 효력있는 교훈은 특별히 그 백성에게만 속한 보화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리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비밀스런 책에만 기록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진실로 온 세상에 울리고 있기에 그 음성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핑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음성은 구원을 얻기로 정해진 경건한 자들의 마음에만 들어갑니다.
대장이 자기 군사의 정확한 수를 알려고 그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교사가 자기 학생들의 이름을 출석부에 기록한 것처럼 하나님은 자기 자녀의 이름을 생명책에 쓰십니다.
이는 그들을 자기가 내리시는 연단의 멍에 아래 두시기 위함입니다.
이 말씀에 연관된 또 하나의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5절에서 사도는 모든 택한 자들에 관해 말한 것을 그리스도에게만 국한시켰을 때 본문 말씀을 왜곡하고 있는 것같이 보입니다.
또 다윗이 말하는 율법에 의한 제사들은 마음에서의 순종과 비교할 때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며 폐지된 것으로 분명히 주장했을 때도 본문을 잘못 해석하는 것같이 보입니다
또 이 선지자가 한 말보다 칠십인 역에 나타난 말을 인용했을 때 히브리서의 기자는 다윗이 교훈하려 했던 것보다 더한 어떤 것을 그 말씀으로 부터 추측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 말씀을 그리스도께 국한시키고 있는데 대한 설명은 쉽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이름만으로 말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속한 것을 일반적으로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체 교회를 생각함에 있어서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를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관련시킨 것은 적절했습니다.
다윗이 잠시 후 자신이 견디는 불행이 자기 죄때문으로 말한 사실은 이의가 없습니다. 우리의 과오를 바르지 않은 표현 형식으로 그리스도께 전가하고 있는 것은 결코 비상한 일이 아니기 때문 입니다.
시편 40 편
율법에 의한 제사와 폐지에 우리는 선지자들의 말을 읽어 볼 때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위선자들이 드린 제사를 하나님께서 정죄하시고 배척하신 성경 말씀의 여러 곳에 기록된 사실들과는 같지 않습니다.
이러한 제사는 불결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이러한 제사에서 하나님은 그 의식이 남용되고 부패되었기에 그것을 정죄하십니다.
이러한 의식은 제사를 놀림감 밖에는 다른 아무 것도 되지 않게 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이 말씀 중에서 선지자가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자신에 관하여 말하면서도 이러한 제사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음을 말했을 때, 하나님께서 옛 사람들에게 잠정적으로 명령하셨던 그 기초적인 원리에는 고려할 만한 다른 목적이 있었으며, 그들이 더 높은 상태를 위해 준비하도록 하기 위하여 계획된 유치한 교훈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제사에 관한 진리와 본질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오심과 동시에 제사들이 폐지된 것은 분명합니다.
다윗의 시대에 이 제사들이 시행되고 있었던 것은 사실 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가 제물이 없이 드려지는 때에라도 그 모든 분야에 있어서나 그 전체에 있어서 온전하고 완전함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의식이란 본질적인 것이 아니며, 이른바 외래적인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잠시 동안 명령하셨던 그 상징들을 제거하신 뒤에도 하나님은 자신을 끊임없이 비유로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기 위하여, 위에서 말한 사실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가치있는 일입니다.
이 외적 의식에 의한 예배 중에서 하나님은 특별히 사람들을 고려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칠십인역에 따라서 ‘몸’이란 말을 스스로 사용함으로써 그 의미를 분명하게 합니다.
다윗은 본문 중에서 이 ‘몸’ 이란 말을 쓰지 않습니다.
그 말을 쓰고 있다고 해서 두 곳의 기록이 서로 모순을 일으키고 있지는 않습니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이 시인이 의미하는 모든 요점을 밝히고 설명하려고 뚜렷하게 계획 하고 있지 않기 때문 입니다.
히브리서는 단지 그리스도에 의한 단번에 드린 제사가 모든 다른 제사들을 폐지하게 했다는 사실을 말씀했습니다.
또 히브리서는 덧붙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한 몸이 준비되었는데, 이는 이 몸을 드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셨다는 사실을 말씀했습니다.
시편 40 편
시40:9-11 내가 대회 중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베푸신 은혜를 회고합니다(1-5). 다윗은 그 감사의 방법으로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행함과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였습니다(6-11).
1. 본문 9절은 “내가 대회 중에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아니할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입니다.
이 말씀 중에서 다윗은 다시 감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다윗이 감사하는 이유는 다만 하나님이 자기를 향하신 그 선하심을 계속 베푸시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관대하심을 우리에게 나타내실 때에는 언제나 우리가 자신에게 감사를 드리도록 격려 하십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이 우리를 위하여 해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그것을 기억하고 있음을 보실 때에는 우리를 향하여 전에 해주신 것과 비슷한 방법으로 계속하여 일하십니다.
첫째로, 다윗은 ‘의’ 라는 말을 단순하게 사용합니다.
이 의는 다윗이 잠시 후에 분명하게 말하는 하나님의 의임을 알아야 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던 것은 마음의 은밀한 감정이나 사적으로 드린 것이 아니라 거룩한 모임 중에서 공공연하게 그것을 선언했다고 말씀합니다.
당시에 신실한 자들이 어떤 큰 위험으로 부터 구원받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화목제를 드림으로써 자신의 헌신을 증명했던 것과 같습니다.
다윗이 말하는 ‘대회’는 법정이나 대중이 드나드는 시장에 모인 사람의 무리로 알면 안 됩니다.
이 말은 참되고 합당하게 조성된 하나님의 교회를 의미 합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하나님의 성소에 모인 하나님의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기가 마음에 하나님의 의를 숨기고 있지 않음을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서로의 유익을 위해 공중 앞에서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마음 속에 숨겨두는 자들은 자기들의 힘이 미치는 한, 하나님에 관한 기억이 망각 중에 묻혀 버리기를 구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시편 40 편
다윗은 하나님을 이에 대한 증인으로 부탁 드리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간혹 큰 소리로, 자기의 힘을 다하여 외치지만 지극히 작은 감정의 움직임조차도 없이 그렇게 하는 위선자들과 자신을 구별할 뿐 아니라 자기는 신실하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으며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찬양의 어떤 면도 제하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있음을 더욱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증언을 들을 때 여기서 논의되는 내용이 매우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을 받지 않으셔도 상관없는 상태에 계시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들 중에 찬양이 풍성해야 함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기 때문 입니다.
2. 본문 10절은 “내가 주의 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대회 중에서 은휘치 아니하였나이다” 입니다.
여기서 같은 것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된 말이 반복된 것을 눈여겨 봐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의에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자비를 덧붙입니다.
이렇게 하는 의도가 무엇인가?
찬양에 관한 많은 말과 표현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어떤 점에서 이 말들이 서로 다른지 눈여겨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는 어떤 점에 있어서 이 말들은 다윗이 여기서 말하는 구원에 적용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 입니다.
만일 이 네 가지가 바른 순서대로 나열된다면 ‘인자’ 가 그 첫째가 될 것입니다.
이 인자에 의해서만 하나님은 우리를 인정하시게 되기 때문 입니다.
둘째로 “주의 의”는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자기 백성을 지켜주는 보호가 됩니다.
우리가 다른 귀절에서 이미 말한 그 선하심에 의해 하나님은 그들을 보전하십니다.
세 번째로 다윗은 ‘진리’ 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항상 그리고 아무런 방해가 없는 과정을 따라 진행될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언제나 동일하셔서 우리를 도우시는 것을 지루하게 여기지 아니하시며, 어느 때나 도우시다가 그 손을 물리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에는 약속의 전시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누구라도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의를 바르게 붙잡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주어지고 제시되기 때문입니다.
시편 40 편
‘구원’은 의의 결과 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완전히 구원하실 때 까지 매일 그들을 도우시고 협력해 주시면서 자기 백성을 향하여 자기가 값없이 주시는 호의를 나타내고 계시기 때문 입니다.
3. 본문 11절은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 그치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입니다.
우리는 이것으로 앞에서 언급했던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 얻기 위해 자신이 드리는 감사에 관해 말씀합니다.
다윗이 입을 열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새로운 은총을 계속 얻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사악하고 배은망덕한 침묵은 자주 이 새 은총의 문을 닫아 버리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이 자기 입을 다물고 있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귀절이 연이어 기록된 구절, 곧 하나님께서 자기의 긍휼을 줄이시거나 멈추시지 않는다는 말씀과 맺고 있는 관계를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합니다.
이 사실에 의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인자하심으로 언제나 우리를 구원하시며 만일 우리의 배은 행위가 그 흐름을 막거나 중단시키지만 않으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이 우리 위에 흘러내릴 것이기 때문 입니다.
다윗이 ךימחר(라하메카)라는 말로써 표현하고 본문 중에서 다윗이 설명하는 하나님의 ‘긍휼’은 하나님의 ‘인자’ 와는 약간 다릅니다.
다윗이 이 두 말을 구별하고 있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함에 만족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우리가 당하는 불행에 동정심을 갖고 우리를 도우시고 구원하실 때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가 나오는 근원을 보여주는 것은 꼭 필요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와 미쁘심을 의지해 구원 얻을 것으로 자신을 갖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관대하심을 얻기 위해 반드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좋으신 뜻을 얻음으로써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사랑에 대한 확신을 우리에게 주시기 전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우시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에 하나님의 불변하심이 약속을 지키심에 있어서 그의 진실하심과 연관되는 것은 아주 타당 합니다.
시편 40 편
시40:12-15 무수한 재앙이
다윗은 자기를 보호해 주시기를 다시 기도합니다(11-17).
다윗은 자기가 근자에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또 다시 앞으로도 구원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자기에게 죄가 많은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12).
다윗은 자기의 죄가 머리털보다 많다 고 합니다.
이런 죄감은 외부적(外部的), 혹은 의식적인 율법주의(律法主義)에서 온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다윗이 이런 참된 회개를 하였으니 원수들의 모해(謀害)에서 구원하여 주시기를 기도할 만합니다.
1. 본문 12절은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입니다.
다윗은 ילע(알라이 ; 내 위에) 라고 말함으로써 자기가 사방으로 둘러 싸였을 뿐만 아니라 재난이 쌓여 자기 머리를 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지금 자기가 형벌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정당하지 못하다거나 또는 받아야 할 형벌 이상의 것을 받는다고 하소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윗은 자기가 받는 것은 죄에 대한 바른 응보임을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죄악’ 이라고 번역한 ןוע(아본)이란 말은 ‘죄악에 대한 형벌’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말의 어원도 고려해야 됩니다.
다윗은 자신이 견뎌내는 고통이 자기 범죄의 열매나 그 결과라고 부릅니다.
여기에는 겸손한 고백이 암시됩니다.
다윗의 겸손한 고백에서 우리는 그가 어떤 공손과 온유로 하나님의 심판에 굴복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중복된 불행으로 압도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지나치게 엄하시다고 잘못 생각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죄악이 크고 심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 입니다.
다윗이 그처럼 엄중하게 취급되었음을 볼 때 우리가 심한 고통으로 짓눌림을 당하고 그 고통 아래서 신음할 경우에 우리 심판자의 은혜와 자비를 겸손하게 애원하는 것을 배우도록 해야 합니다.
시편 40 편
다윗이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라고 말했을 때 자기가 어리석거나 완악해졌음을 보여 주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의 말은 자기가 낙담했을 뿐 아니라,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마음이 실망을 주다’ 혹은 ‘낙심’ 이란 말은 그의 육적인 면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드린 기도에서의 참을성은 그의 믿음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람이었으므로 계획을 갖지 못하고 있었으며 육신의 힘을 전혀 갖지 못했기에 자기 마음이 자기에게 실망을 준다고 말한 데에도 이유가 있었습니다.
2. 본문 13절은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입니다.
다윗이 사용하는 동사는 순전한 친절과 호의로 부터 어떤 것을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 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자비에 의해 구원받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속히’ 도와주시기 원하는 다윗의 소원은 다른 구절에서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도우시기 지체할 때라도 지루하다는 감정과 싸우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대로 신속히 우리를 도우시도록 기도 드릴 수 있게 허락하심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의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자기가 늘 그렇게 하듯이 자기 원수들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 불러들이면서 다윗은 그들이 잔인하고 불공평 하고 악한 증오심을 갖고 있기에 자기가 구하고 있는 것을 얻게 되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원수들이 더 불공평하게 우리를 괴롭히고 더 잔인하게 해를 끼치면 끼칠수록 하나님은 더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사실을 확고한 원칙으로 주장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그의 자비로 그들의 악독에 대항하여 싸우신다는 사실은 큰 위로입니다.
우리의 원수들이 우리를 손상하려고 더 사납게 우리를 쫒아오면 올수록 하나님은 우리를 신속하게 도우십니다.
시편 40 편
3. 본문 14-15절은 “(14)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로 다 수치와 낭패를 당케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로 다 물러가 욕을 당케 하소서
(15) 나를 향하여 하하 하는 자로 자기 수치를 인하여 놀라게 하소서(나에게 하하 하는 자를 자기 수치의 보응으로 멸망케 하소서- 칼빈)” 입니다.
다윗이 이러한 저주(14절)를 발하게 된 감정에 관해서는 이미 여러 번 말하였습니다.
누구라도 감정을 억제하지 않고서 어떤 구실이나 변명으로 다윗의 이러한 예(例)를 내세우지 않도록 다윗이 그렇게 했던 원인을 다시 생각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성령에 의한 열심으로 인도되는 대신에 육신의 거센 충동을 따라 행동하는 자들의 악하고 허울 좋은 모방은 언제나 정죄를 받아야 합니다.
다윗이 자기 원수들을 ‘자기 수치의 보응으로 멸망케 하소서’(칼빈) 라고 기도했을 때(15절) 이 기도는 의미가 있습니다.
곧 ‘그들이 가진 꼭 하나의 욕망은 내가 그처럼 낙심하고 당황 중에 있을 때 나를 자기들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려고 나를 온통 수치스럽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수치가 그들의 머리 위에 임하기를 바란다’ 입니다.
15절의 하반절에는 이 수치의 성격을 그들이 얻는 악한 승리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이 악한 승리를 거둠으로써 그들은 다윗이 불행과 고통으로 억압당하고 있을 때 다윗을 심하게 경멸했습니다.
우리의 원수들이 극도로 우리를 핍박할 때 그들에게 임할 보응 또한 준비되어 있다는 교훈을 이 말씀에서 얻습니다.
또 하나님은 그들이 우리에게 내리려고 계획한 모든 재난을 돌이켜 그들의 머리 위에 내리신다는 교훈을 얻습니다.
우리는 우리 이웃을 향하여 동정하는 마음을 갖고, 또 친절하게 행동하기 위해 이 교훈이 우리를 주장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시편 40 편
시40:16-17 무릇 주를 찾는 자는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습니다.
다윗은 기도응답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또 다시 기도합니다.
본문은 본 시편의 결론입니다.
1. 본문 16절은 “무릇 주를 찾는자는 다 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입니다.
1)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다른 구절에서는 간혹 논리적인 이론을 내세웁니다.
그럴 때에도 다윗은 하나님을 설득하고자 하는 이유를 주장할 필요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와 같은 이론으로 우리의 믿음을 확고하게 하는 것이 유익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은혜로우신 성품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녀들 중 누구를 구원하실 때는, 언제나 자신의 은혜로운 성품으로 한두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만큼 모든 신자들이 한 사람의 인격을 통해서 결코 변덕을 부리지 않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에게 행하시는 것을 바라본다는 것은 자기들에게 적용해야만 하는 일반 혜택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기가 개인적으로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하나님의 온 회중에게 관계된 것을 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2) 다윗은 하나님이 모든 성도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시도록 기도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 성도들 모두 기뻐할 수 있는 공통된 근거를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자기들을, 곧 도와 주실 것을 확신하여 그들이 더 능동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 개인의 경우를 통해 우리 모두를 향하여 하나님이 친히 베푸시는 인자하심에 대한 증거를 보여주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3)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이란 말씀도 우리가 눈여겨 볼 가치가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 외에 어떤 것이 우리를 보존해 줄 것을 기대하거나 요망하지 않게 될 때 우리 믿음이 순전한 것으로 증명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40 편
이 세상에서 자신들이 살아가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과 수단을 궁리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만 기대하도록 가르치시는 구원을 한사코 멸시하고 배격합니다.
앞에 기록된 “주를 찾는 자”란 말씀 역시 이와 같은 목적으로 한 말씀입니다.
사람이 주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주의 은혜로 구원받기 원하면 그 사람은 헛된 희망을 버리고 주의 권능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기의 모든 생각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 중에 두 가지가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앞에서 다윗은 악한 자들이 자기 생명을 찾고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제 다윗은 신실한 자들이 이것과는 전혀 반대되는 감정, 즉 그들은 하나님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역시 다윗은 악인들이 ‘하하’ 라고 말함으로써 비난과 조롱을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4) 지금 다윗은 경건한 자들이 ‘주는 광대하시다’ 라고 악인들과는 대단히 다르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소개합니다.
이 구절 전체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택하심과 구원의 서정 전체가 포함되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여기에 교회의 공동 예배의 기반이 있고 우리의 일상의 기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입은 자마다 주를 찾는다는 사실입니다.
주를 찾는 자마다 주를 즐거워하고 기뻐한다는 사실입니다.
주와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마다 여호와와는 무한히 넓으시고 무한히 크신 사실을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자가 예배하는 것이고 극한 환난에서도 기도하게 된다는 사실을 교훈하시는 말씀입니다.
2. 본문 17절은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건지시는 자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입니다.
1) 이 마지막 절에서 다윗은 자기가 극한 위험 중에 있었을 때 했던 요청을 기록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으로서는 그와 같은 극한 상황에서도 감사의 기도를 섞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참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 절 전체와 본 절의 핵심도 그 사실을 가르칩니다.
2) 상반절은 ‘나는 비참하고 가련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돌아보셨다’ 입니다.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정도에 따라서 그 사람은 세상에서 멸시를 당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서도 무시를 당한다고 상상합니다.
시편 40 편
그러므로 우리가 불행을 당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싫증을 느끼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것을 귀찮게 여기지는 않으신다는 것을 확고하게 주장해야 됩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곧 내가 비참하고 가련했을 때, 주님은 나의 궁핍함을 돌아 보시고 이런 형편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자신의 인자하심으로 우리를 미리 부터 돌아보시고 역경이 우리를 억압하기까지 기다리시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호의는 그토록 분명하지 않게 됩니다.
3) 그러므로 이 상하반의 비교는 다윗을 환난에서 건지신 주의 영광을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배척을 당할 뿐 아니라 모든 도움과 희망을 빼앗긴 사람에게 손을 펴주시기 때문 입니다.
다윗이 이러한 극한 상황에까지 내려갈 필요가 있었다면 다윗에게 비교할 수 없는 하찮은 자들이 하나님에게 절망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을 참으로 진지하게 깨닫고 알기 위하여 간혹 이런 식으로 비천하게 된다는 사실은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4) 본 절 하반에서 다윗이 드린 단순한 기도의 본래의 의미는 ‘주여, 주님은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구원하는 분이시옵니다.
그러므로 오셔서 나를 도우시는 일을 지체하지 마시옵소서’ 입니다.
그러기에 신자들이 의심스럽고 흔들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늘 그렇게 했던 경험대로 용기를 내고 있습니다.
또 다윗은 지금까지 자신을 지켜 오는 데 도움이 되었던 하나님의 도우심은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합니다.
시41:1-3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다윗은 자기가 하나님에 의해 심한 고통을 당하는 동안에 사람들이 정당하지 않은 비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이 이미 정죄되고 영원히 멸망 받게 되어 있는 사람으로 간주했습니다.
이 시련 가운데서 다윗은 희망이 주는 위안으로 스스로를 강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다윗은 한편 자기 원수들의 잔인함을, 또 한편 그들의 반역함을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이 자기 죄에 대한 정당한 형벌이라고 인정하지만 자기 원수들이 잔인하고 악의에 가득 차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언제나 선을 행하려고 애쓰는 사람을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다윗은 자기의 감사와 기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보호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1. 본문 1절은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빈약한 자를 슬기롭게 재판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악한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칼빈)” 입니다.
1) 본문 1절 상반은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입니다.
주석가들은 다윗이 불행 가운데 있는 자들을 돌아보면서 친절과 긍휼을 베풀고 그들을 도와주어야 할 것을 이 말씀 가운데서 명한다는 견해를 갖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이 말씀 중에서 역경 중에 있는 사람들을 지혜롭고 동정하는 마음으로 재판하는 자들의 사려깊은 공정성을 명령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다윗이 의미하는 것을 더 잘 판단하고 있습니다.
분사 ליכשמ(마스킬)을 어떤 다른 방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주목 할 사실은 다윗이 하나님이 자기 종들을 징계하시는 그 고통에 관해 지혜롭고 신중한 판단을 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선언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마음 속으로 어리석고 악한 사람들의 그릇된 판단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고통이 심하게 그를 누를 때, 많은 사람들은 다윗이 절망적인 상태에 빠졌으며 회복될 가망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족장 욥에게 임했던 것과 같은 일이 다윗에게 임했음이 틀림없습니다.
시편 41 편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께서 욥을 심히 엄격하게 다스리시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은 욥을 가장 악한사람들 중 한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이와 같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정죄받고 버림당한 자들로 보는 것은 사람들의 너무도 그릇된 잘못임이 분명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불안정하고 일시적인 번영의 상태를 보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로우시다고 판단하여 부자와 이른바 행운이 미소하는 자들에게 갈채를 보냅니다.
이와는 반면에 사람들은 비참하고 불행한 자들에게 경멸적인 태도로 행동합니다.
또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버림당한 자들에게 하시는 것같이 그들을 오래 참아주시지 않기에 하나님은 그들을 미워하신다고 어리석은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논하는 과오, 즉 그릇되고 악한 판단은 각 시대마다 많이 행했던 과오입니다.
성경 말씀은 여러 구절에서 하나님이 신실한 자들을 여러 가지 이유로 갖가지 방법으로 단련시키심을 분명하고 뚜렷하게 선언합니다. 어떤 때에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견본이 되게 하시고 때로는 그들을 자극하여 신성한 생활을 계획하는 데까지 이르게 하십니다. 대체적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관하여 경솔하고 분별없이 말하여 고통을 당하면서 애쓰는 자들을 가장 깊은 구덩이 속으로 던져 넣습니다.
그와 같이 경솔하고 방자한 정신을 억제하기 위해 다윗은 함부로 자기 이웃을 사납게 판단하지 않고 그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바르게 분간하여 우리가 흔히 하기 쉬운 가혹하고 부정한 재판을 성령의 지혜로 가볍게 하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욥의 경우를 하나의 실례로 말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큰 불행을 당하는 것을 보았을 때, 욥이 버림받은 사람이며 욥에게는 전혀 소망이 없다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공정한 마음을 가진 인정이 있는 사람이 그러한 경우를 보았다면 그 사람은 다윗이 여기서 명하고 있는 것과 같은 분별력을 가지고 그 경우를 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성령에 의한 증거로 권면을 받아 경솔한 판단을 경계하도록 익혀야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당하고 있는 우리 형제들을 신중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구원받게 될 것을 바라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 만일 우리가 너무 조급하게 그들을 인정없이 정죄한다면 이 바르지 못한 가혹함이 마침내 우리 자신의 머리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사람들의 악하고 잔인한 판단 때문에 압도당하는 것을 알았을 때, 그가 의도하고 있었던 것은 그 시험 때문에 의지가 약해지지 않기 위하여 이 상황을 위로받는 근거로 여겨 자신을 강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특히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단이 사람들의 경솔하고 당돌한 판단으로 우리 믿음의 기초를 허물고자 애를 쓸 때에는 이 지혜에 의존해야 됩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절망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본문 말씀에 포함된 교훈의 바른 활용입니다.
시편 41 편
2) 본문 1절 하반은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재앙의 날에”라는 말을 앞 절과 연결시킵니다.
그러나 앞 절과 이 말이 떨어져 있다고 보는 견해가 그 의미에 있어서 더 적합합니다.
이 견해가 히브리어의 악센트 법칙에 의해서도 옳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최소한 우리는 이 말씀으로부터 주께서 가난한 자를 그의 역경의 날에 건지실 것이라는 교훈의 충분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정직하고 긍휼한 자들이 혹시라도 심한 고통을 받게 된다면 주님은 친히 그들이 베푼 친절에 따라 갚아주실 것을 다윗이 기도한 것처럼, 이 말씀 가운데서 다윗이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지혜와 정직을 알 수 있도록 하는 사람들의 말을 다윗이 여기에 기록하고 있다고 상상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소원이나 기도 형태로 읽는 이 두 가지 견해가 모두 잘못입니다.
다윗이 자기의 이름으로 말하든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말하든지 우리가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실행해야 하는 친절을 그는 간략하게 명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잠시 자신의 노하심을 나타내시지만 장차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 문제는 마침내 우리가 현재의 상황을 보고 판단한 것보다 더욱 다행스럽고 기쁘게 됩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 관해 설명한 의미가 더 풍부하고 충분한 의미를 지닌 사실을 봅니다 우리는 역경의 날에도 주님의 손이 우리를 구원시키고 건져주신다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슬픔과 고통에 빠진 자들은 다시 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설명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본문 가운데 성령이 계획하시는 것은 신실한 자들에게 형제가 고통 가운데에 있는 것을 볼 때에 친절을 베풀도록 권할 뿐 아니라 우리가 역경을 만나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때 우리의 슬픔을 가볍게 하기 위해 마련된 구제의 방법을 가리키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본문 2-3절은 “(2) 여호와께서 저를 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 저가 세상에서 복을 받 을 것이라 주여 저를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3)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 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입니다.
이 말씀 가운데 다윗은 잔인하고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은 반드시 멸망을 받을 것이며 고통 가운데에 있는 자들은 주께서 보호하실 것이라고 말함으로서 앞 절에서 말한 생각을 철저히 밝힙니다.
또 ‘재앙의 날’과 ‘구원의 복’의 대조를 항상 염두에 두는 것도 필요합니다.
“살게 하시리니”라는 말과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은 비슷한 의미입니다.
시편 41 편
이 두 가지 표현으로 다윗은 자신이 겉으로 보기에는 죽은 사람 같지만 자신과 모든 신실한 자들을 위한 희망은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의도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다가오는 세상에서 얻게 될 더 나은 상태에 대한 기대를 갖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서 당하는 우리의 형편은 실로 불행한 것으로 알고 있기에 다윗이 이 세상에서 행복한 생을 얻을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하는 사실에는 어떤 모순이 있는 것같이 보여 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에 대한 답변은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회복되지 못할 것이라고 낙심했기에 다윗은 자기가 전에 처하고 있었던 상태로 회복될 것이며 계속 목숨을 유지할 것이며 더우기 자기에게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증거가 나타나게 될 것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말을 통해 죽음 이후에 얻게 될 더 나은 생에 대한 희망을 조금이라도 배제하지 않습니다.
이어 나오는 “쇠약한 병상”(슬픔의 침상-칼빈)이란 말에 관해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보기에 전혀 합당치 않은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어떤 고통이라 지적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고통이라 한 말을 그들은 유독 병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 슬프고 비탄에 잠긴 사람들이 침상에 누워 쉬고자 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병보다 슬픔 때문에 더욱 고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다윗이 어떤 심한 재난 때문에 고통당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그럴듯한 추측임이 틀림없습니다.
이 재난은 하나님께서 그를 크게 기뻐하시지 않고 계셨다는 표가 됩니다.
3절의 하반절은 이해하기 약간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라는 말을 어떤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 종들이 고통당할 때 그들의 고통을 약간 가볍게 하시려고 우리가 벙든 자들이 좀 더 편안하게 눕도록 그들에게 해주는 것같이 그 자리를 펴시고 그것을 정돈하시는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다른 사람들은 다윗이 건강을 되찾았을 때 전에는 병상으로 사용되었던 그의 침상이 다르게 ‘펴지다’ 즉 변하게 되었다는 의미로 더욱 정확한 주장을 합니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주께서 고통을 주심으로 그를 징계하시고 연단시키시는 동안 그가 지금은 슬픔 가운데에 쇠약해지고 있지만 잠시 후면 동일하신 하나님의 손에 의해 위안을 경험할 것이며 기력을 회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편 41 편
시41:4-6 내가 말하기를
다윗은 빈약한 자, 곧 자기와 같이 하나님의 징계 아래서 비참스러워진 자를 돌보아 주는 자가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1, 2).
누구든지 다른 사람에게 선하게 행하면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선으로 갚음 받는다는 것이 성경 말씀이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마5:7),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사람의 죄를 용서하십니다(마6:12, 시18:26).
이것은 마치 산을 두룬 안개가 산의 커브(curve) 를 따라 그 모양을 이룬 것과 같습니다(잠19:17).
또 다윗은 자기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병상에 있으나 하나님이 그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사랑으로 붙들어 주실 것을 확신하고 또 기도합니다(3, 4).
욥5:17, 18절에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미7:9, 10).
1. 본문 4절은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입니다.
이 말을 하기까지 다윗은 역경 가운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떤 헛된 위안으로 자기들의 슬픔을 진정시키려고 하는 것같이 공연한 말로 자기 마음을 달래려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은 자기가 당하는 고통으로서 하나님의 경고를 받을 때 자기의 죄를 솔직히 인정하고 형제들이 하는 권고를 말없이 듣습니다.
그 뿐 아니라 자진해 자기 죄를 고백함으로 형제들이 권면할 필요조차 없게 합니다.
여기서 다윗은 자기의 죄를 자기에게 돌리지 말아 달라고 간절히 간구하고 자기가 하나님의 자비 안으로 피하고자 했음을 말했을 때, 다윗은 버림받은 악한 자들과 자신을 구별하는 표적을 세우고 있습니다.
다윗은 진실로 자기가 견뎌냈던 그 고통에 대해 어떤 위안을 주시도록 구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죄를 용서받음으로서 하나님께 화해하고자 했을 때, 위안의 더 높은 근원에 이르고 있습니다.
시편 41 편
우리가 성경 말씀의 다른 구절에서 말한 것같이 자기들이 고생하는 그 불행의 껍데기만을 위해 구제책을 찾으며 그 불행의 근원을 무시하고 있는 자들, 즉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자들은 자기의 갈증만을 해갈시키려 하고 자기가 고생하는 그 고통의 큰 원인이 되는 열병에 대해서는 마음을 쓰지 않는 병자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자기 영혼, 즉 자기 생명이 낫게 되는 것에 관해 간절히 말하기 전에 다윗은 먼저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과 이 말씀의 이유가 되는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라는 말씀을 연결해야 됩니다.
이렇게 말함으로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를 기뻐하지 아니하신 것이 공정한 일이며 자기가 자기의 죄를 없앰으로서만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받을수 있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불변화사 יכ(키)를 어떤 사람들이 그렇게 이해하는 것처럼 반대적인 의미로 보지 않고 본연의 의미대로 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가 범죄 했기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긍휼을 베푸시도록 구합니다.
다윗은 자기가 용서를 받는 순간에 자기가 당하고 있는 고통으로부터도 구제될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2. 본문 5절은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저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 이름이 언제나 멸망할꼬 하며” 입니다.
이 말씀 중에서는 ‘말하다’가 ‘저주하다’의 의미로 쓰였습니다.
자기 원수들의 합당치 않은 행위를 이렇게 설명하면서 다윗은 다른 구절에서도 말했던 것같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자비를 베푸시도록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 잔인하게 취급받는 것을 보시면 보실수록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만큼 더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이 모범을 보이면서 우리가 더 하나님께 신뢰하도록 우리를 자극하고 격려합니다.
우리의 원수가 우리를 향해 그 잔인성을 더 많이 폭발시킬수록 그러한 행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더 얻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원수들이 말한 그 저주는 다윗을 향한 그들의 증오가 얼마나 잔혹했던가를 보여줍니다. 다윗이 멸망을 받되 치욕과 불명예를 당하면서 멸망 받아야 그들의 증오가 가라앉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원수들은 그의 생명과 함께 그의 이름에 대한 기억까지도 없어지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시편 41 편
3. 본문 6절은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 중심에 간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광포하오며” 입니다.
본 절이 담고 있는 내용은 다윗의 거짓되고 믿을 수 없는 친구들에 관한 것입니다.
다윗의 공공연한 원수들은 그를 은밀한 적의로가 아니라 공공연히 그를 핍박했습니다. 이 사실을 다윗은 앞 절에서 이미 말했습니다.
이 사실에 부가해 다윗은 지금 마치 그들이 그의 친구들이었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애착심을 갖고 있다고 고백하면서 찾아왔다는 사실을 불만스럽게 말합니다.
이들은 나중에 은밀하게 다윗을 향해 악의에 찬 나쁜 감정을 쏟아 부었습니다.
이와 같은 원수들, 우리를 몰래 해하려는 유일한 목적을 위해 아름다운 외모의 탈을 쓰고 자기들의 악의를 감추는 자들은 자기들의 악의를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자들보다 훨씬 두려워해야 할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공공연한 원수들에 관해 하소연을 한 다음 계속 다윗은 자기의 거짓 친구들에 관하여 말합니다.
이 거짓 친구들에 관해 다윗은 그들이 나를 만나러 온 것은 ‘거짓을 말하기’ 위한 것 외에 다른 계획은 없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렇게 하는 중에도 그들은 나를 향해 어떤 기만적이고 악의에 찬 목적을 이루기 위해 궁리하고 있으며 아무도 모르게 ‘간악을 쌓았다’, 곧 그 간악을 그들의 마음속에 쌓아올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내 앞에서 ‘나가서’ 그들은 자기들의 위선과 기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시편 41 편
시41:7-9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윗은 자기 원수들의 행동 성격 몇 가지를 진술합니다(5-9).
(1) 그 원수들이 다윗의 사망을 원합니다(5, 8).
(2) 또 그 원수들이 다윗에게 대하여 악선전합니다(9).
(3) 그 원수들이 다윗에게 대하여 배신합니다(9).
그 원수들의 이와 같은 행동 성격은 특별히 악랄한 것입니다.
성도의 성격은 이와 반대입니다.
(1) 성도는 자기 개인의 원수가 넘어지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합니다(잠24:17).
(2) 또 성도는 원수에게 대하여 악선전하지 아니합니다(눅6:27).
(3) 또 성도는 신의(信義)를 지킵니다(잠17:17).
1. 본문 7절은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입니다.
이 말씀 중에서 다윗은 두 가지 원수들에 관하여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공공연한 방법과 철천지 원수로서 그를 억압하려고 했던 자들이 있습니다.
둘째는 친구인 척하면서 기만과 술책으로 악인이 하고자 하는 것과 동일한 짓을 하려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들 모두가 자기를 멸망시키려는 일에 함께 모의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악한 자들이 자기들이 계획하는 반역적 행위에 관하여 은밀한 의논을 많이 하며 그것에 관하여 서로 속삭이는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묵상’ 혹은 ‘꾀하다’ 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다윗이 이런 말을 쓰는 것은 그들의 비열한 음모와 죄악된 논의를 가리킵니다.
2. 본문 8절은 “이르기를 악한 병이 저에게 들었으니 이제 저가 눕고 다시 일지 못하리라 하오며(벨리알의 악한 행위가 저에게 붙었으니 그러므로 저가 눕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 -칼빈)” 입니다.
이 절을 읽어볼 때 그들이 다윗을 악하고 수천 번 죽어 마땅한 사람으로 보았기에 그들이 그를 멸망시키기 위하여 그처럼 함께 모의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이 다윗을 향하여 보여주었던 그 무례함과 오만함은 그들이 다윗에 관하여 스스로 했던 거짓되고 악한 판단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이에 관하여 다윗은 시편의 초두에서 언급했었습니다.
시편 41 편
그러므로 그들은 ‘벨리알(Belial) 의 어떤 악한 행위’에 의해 그가 붙들려 강금당하여 든든하게 묶인 바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동사 קוצי(야추크)를 바르게 의미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동사를 번역함에서 우리는 가장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그에 든든하게 붙다’라는 역문을 따릅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말을 ‘그의 위에 펼치다’라고 번역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이는 지나치게 무리한 것 같습니다.
‘벨리알’이란 말에 대해서는 시편 18편에서 이미 말했습니다.
그러나 문법 학자들은 이 말이 ילב(벨리)와 ‘일어나지 말라’를 의미하는 לעי(얄)과의 합성어라고 주장하기에 ‘벨리알의 물건’(이 말의 히브리어 축어적 번역) 이란 표현을 우리는 본문 중에서 ‘특이하고 증오할 만한 범죄’를 의미하는 말로 이해합니다.
마치 다윗의 원수들이 그가 어떤 불치의 병에 걸렸다고 말한 것처럼 어떤 사람들이 이 말은 그가 고생을 겪고 있었던 고통 그 자체를 가리킨다고 말하지 않는 한 이 범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할 때 속죄될 수 없는 죄이며 도피할 수 없는 죄입니다.
그러나 사실이야 어떻든 다윗의 원수들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절대적으로 냉담하시며 그와는 결코 화해하시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고 인정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대단히 엄하게 그를 징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반절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칼빈)라고 말했을 때, 이 말은 다윗의 회복에 관한 그의 모든 희망을 완전히 빼앗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자기 마음 속에 선한 양심의 증거를 가지고 있었던 다윗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보응을 내리려고 하신다고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자기를 마구 지옥으로 던져 넣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는 혹심한 시련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이 자기 양심의 증거를 신뢰하면서 악인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그것에 마음을 쓰지 않고 악인이 자기에게 하는 비난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 시련을 자기 종 다윗에게 시키려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실례를 통하여 우리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곳에서 우리의 의에 대한 보상을 기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미덕과 악덕을 얼마나 그릇되게 평가하는지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3. 본문 9절은 “나의 신뢰하는 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당한 가장 심한 불행으로 자기는 어떤 사람, 또는 진실로 가장 가까운 친구들에게 배반당했다는 사실을 여기서 선언합니다.
시편 41 편
히브리어에는 수의 변화가 자주 있으므로 몇 사람을 말하는 것이 마치 그들이 한 사람을 말하는 것처럼 추측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보통 사람들이나 내가 알거나 가까이 하지 않았던 낯선 사람들 뿐 아니라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 내가 가장 친하게 지냈던 자들과 식탁에서 나와 함께 먹고 마시도록 내가 허락했던 내 식구들까지도 나를 향하여 욕되고 오만한 태도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 사이에는 “가까운 친구들”이란 말은 친척과 혈연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더욱 가까운 관계를 의미하고 있었으며 우정의 법을 더욱 엄격하게 지켜야 되는 그러한 관계입니다. 또 다윗과 함께 그의 ‘떡을 먹던’자였습니다.
이 표현은 마치 다윗이 ‘나의 친구’ 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여러 사람보다는 어떤 정해진 배반자 한사람이라고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견해를 반대하지는 않겠습니다.
우리 의견으로는 “발꿈치를 들었다”라는 말은 은유적이고 고통을 당하여 기력이 약해진 사람을 향하여 ‘경멸적으로 대항하여 일어서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그 말을 ‘은밀하게 숨어 기다린다’로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악한 자들은 다윗이 곤경에 처해 있거나 티끌 속에 이미 엎어진 것을 보고 이 기회를 이용해 그를 간접적으로 언제나 무례하게 공격했다는 설명이 더 적합합니다.
이와 같은 일은 악하고 비굴한 성질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 흔히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을 인용하여 유다의 성품에 적용하셨습니다(요13:18).
다윗은 이 시 안에서 자신에 관해 말하지만 다윗은 평범하고 사적인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을 나타내는 사람으로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다윗은 전체 교회가 본받아야 할 모범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 각자가 같은 조건에 대처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일 만한 사실입니다.
다윗 안에서 시작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히 성취되어야 했습니다.
동일한 사실이 그의 각 지체들 안에서 이행돼야 하는 일은 반드시 실현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들은 자기들을 배반하려는 밖으로부터의 폭력과 세력에 의해서 뿐 아니라 안으로부터 원수들에 의해서도 괴로움을 받아야 합니다.
이 사실은 교회가 ‘밖으로부터의 다툼’ 뿐 아니라 ‘안으로부터의 두려움’ 에 의해서도 공격을 받을 것이라고 바울이 선언한 것과 같습니다(고후7:5).
시편 41 편
시41:10-13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첫째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을 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의 의(義)를 하나님 앞에 내세울 수 없고 죄를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둘째로 다윗은 자신의 원수, 곧 하나님의 원수가 자기를 이기지 못하기를 원합니다.
다윗이 그렇게 기도한 이유는 그 원수가 패배(보복)를 당해야 하나님께는 영광이 돌아가고 자기가 하나님 편에 있는 사실이 확증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또 다윗은 기도 끝에 하나님이 자기를 붙들어 주실 것으로 확신합니다.
이렇게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성도의 참된 기도는 확신과 소망을 가져옵니다.
1. 본문 10절은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일으키사 나로 저희에게 보복하게 하소서” 입니다.
자기 원수들의 그릇된 잔인함을 고려함으로서 다윗은 다시 기도할 용기를 갖습니다.
또 다윗이 한 말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암시적인 대조가 포함됩니다.
마치 다윗은 이 세상에서는 도움이나 협력을 찾아볼 수 없고 이상할 정도의 잔인과 숨은 악의가 어디에나 많기 때문에 ‘오 여호와여! 최소한 자비로 나를 건지시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소서’ 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이는 세상이 옳지 않게 핍박하여 고통당하는 모든 사람들이 추구해야 하는 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가해지는 그릇된 행위들을 슬퍼해야 할 뿐 아니라 자기들의 원한을 하나님께 맡겨야 할 것입니다.
또 사단이 자기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려 하고 자기들의 생각을 산란시키려고 하면 할수록 그들은 하나님께만 자기들의 마음을 주의 깊게 고착시켜야 됩니다.
다윗은 다시 자신이 회복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에 달렸다고 말합니다.
끝에서 다윗이 말한 ‘보복’은 귀에 거슬리고 그 까닭을 알 수 없는 것같이 보입니다.
만일 다윗이 이 시의 전반 부분에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그처럼 고통을 주심에서 공평하심을 진심으로 고백했다면 자기가 용서를 받고자 원하는 것같이 다른 사람들도 용서받도록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입니다.
시편 41 편
만일 우리가 하나님으로 옛 상태를 되찾고 용서 받은 다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해주신 것같이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지 아니하고 거절한다면 이는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를 수치스럽게 잘못 쓰는 행위가 됩니다.
이뿐 아니라 이런 용서 없는 보복은 겸손이나 친절과는 먼 감정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거의 죽어가는 상태에서조차 다른 사람을 보복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고려해야 됩니다.
첫째로 다윗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고 권세를 받은 사람입니다.
둘째로 다윗의 원수들이 받아 마땅한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다윗이 그 원수들에게 선언하게 된 것은 육신이 받은 충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직무에 의해서였습니다.
만일 사람이 제각기 분별없이 자기 원수들에게 보복 하면서 그 변명으로 다윗이 보여준 모범을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첫째로 하나님이 다윗을 세워 두셨던 그 처지와 위치를 근거해서 다윗과 우리가 다른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둘째로 다윗의 마음에 있었던 열정과 같은 것이 우리 마음을 다스리는지 다윗 속에 계셨던 동일한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인도하고 지배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먼저 다윗은 왕이었기에 왕으로서의 권세로 악한 자들에게 하나님이 내리시는 보응을 내릴 자격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에 관한 한 우리의 손은 그렇게 할 수 없도록 매여 있습니다.
다음으로 다윗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마음 속에 순결하고 거룩한 감정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그의 성난 마음에 끌려가지 않습니다.
또 다윗은 하나님이 불러 세우신 그 위치에 관한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다윗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실행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칼의 권세로 무장되지 않기에 하늘의 심판자께 의존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므로 주께서 친히 경건치 못한 자들에게 보응을 내리시도록 기도하는 것이 합당한 것과 같습니다.
이와 동시에 주께서 우리 원수들에게 보응을 내리심으로서 자신이 우리의 보호자요, 변호자이심을 보여 주시도록 구할 때에 우리는 조용하고 안정된 마음으로 구해야 하고 주의 깊게 조심성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성령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범을 버리고 우리의 정욕이 발동하도록 방임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다윗은 자기 직위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거역하는 자들을 진압하는 수단을 썼습니다 또 다윗은 모든 악한 자들에게 형벌을 내림에서 하나님의 참된 일꾼이 돼야 했습니다.
시편 41 편
2. 본문 11절은 “나의 원수가 승리치 못하므로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입니다.
다윗은 지금 하나님께 감사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어떤 구원 때문에 다윗은 기쁨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기도를 드린 다음 자기가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에 의한 것으로 말합니다.
다윗은 자기가 구원 받은 것은 하나님께 받은 분명하고 특수한 은혜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원수들이 우리를 이기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알게 하는 방법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기쁨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위험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일이 간혹 있기 때문입니다.
그 뿐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주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으며 오직 경험으로만 아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은 쉽습니다. 다윗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다만 다윗은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후에 더해 주신 그 도움을 믿음의 확증을 위해 이용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모든 신실한 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누어 주시는 은혜와 선한 뜻 뿐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선택하여 왕이 되게 해주신 특별한 은총도 넌지시 말합니다.
다윗은 마치 ‘주여, 주님은 황공하게도 이 땅위에 있는 모든 임금들 중에 내가 장자가 되게 하셨다는 사실을 더 확신하게 되나이다’ 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전에 자기가 어떤 특별한 재난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던 하나님의 도우심을 모든 영역에까지 연장시킵니다.
3. 본문 12절은 “주께서 나를 나의 완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영히 주의 앞에 세우시나이다” 입니다.
사람들은 이 절을 다윗이 정직히 행동했기에 하나님이 손을 펴주셨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를 공정히 벌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앞 절과 불일치합니다.
다윗에게 재난이 임함으로 다윗은 자기 원수들의 모욕과 비웃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원수들이 그 재난을 만들어낸 장본인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의 원수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고 사람들의 분노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실 때, 우리의 온전함을 귀중하게 여기신다는 이유에서 다윗이 온전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셨다고 추측한다면 이는 본문 내용과는 어긋납니다.
시편 41 편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의미를 찾습니다.
우리가 ‘온전함’ 으로 번역한 히브리어는 마음 뿐 아니라 몸에도 연관된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나를 보전하시고 든든하게 세우실 것이기에 나는 계속 안전하겠나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어떻든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가 더 넓게 미치고 있는 사실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손으로 꼭 한번만 나를 도우신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번영을 즐기고 있던 기간 내내 그의 능력으로 나를 안전하게 붙잡아 주셨다’ 입니다.
다윗이 유명하게 된 경건하고 신실한 성질을 이해한다면 이 말씀은 다윗이 자기의 이전 생애 자랑을 의미하지 않고 단지 자기가 시험을 당했을 때, 또 마음의 갈등을 가졌을 때, 사단과 악한 자들이 자기 믿음을 떨쳐 버리려 했을지라도 자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리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선언할 뿐 입니다.
이 말로 다윗은 자기의 인내력을 증거합니다.
매우 괴로움과 고통을 당했을 때도 다윗은 바른 길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패함이 없기를 계속 기도해 왔고 시험에 의한 공격을 담대하게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었다고 다윗이 그 일 직후에 말했습니다.
또 다윗은 장래를 위해 다른 어떤 방법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버틸 수 있는 힘에 의해 보전되기를 기대했습니다.
만일 이 말을 다윗의 외적 상태와 연관시켜서 이해한다면 이 말씀의 의도와 잘 어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자기 종을 끝까지 안전한 가운데에 보전하시기까지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은혜를 중단없이 나타내시리라’ 입니다.
“영영히 주의 앞에 세우시나이다”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친히 보전하시고 보호하시어 아버지로서의 돌보심을 분명한 증거로 보여주시는 자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와 반면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잊으신 것같이 보였을 때는 하나님이 그들을 향한 얼굴을 숨기셨다고 말하게 됩니다.
4. 본문 13절은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지로다 아멘 아멘” 입니다.
1) 히브리어로 된 시편은 다섯 권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이 41편은 제 1권의 마지막입니다.
제2권은 72편에서, 제3권은 89편, 제4권은 106편, 제5권은 150편에서 끝납니다.
시편 41 편
그런데 이 다섯 권이 각각 엄숙하게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의 뚜렷한 송영으로 끝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가치입니다.
그러나 제5권의 끝에만 뚜렷한 송영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그 이유는 이 마지막 시가 시종 찬양으로 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유대인 저작자들은 이 송영의 형태가 시편을 수집하고 오늘날의 그것과 같은 형태로 나눈 사람에 의하여 첨가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시편이 이렇게 나누어진 것이 얼마 전의 일인가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없습니다.
Jerome 은 Marcella 와 Epiphanius 에게 보낸 그의 서한 중에서 히브리인들에 의해 다섯 권으로 나누어진 시편에 관하여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언제 그렇게 분할했는지에 관해서는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습니다.
다섯 권의 끝에 붙은 송영의 형태는 칠십인 역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이 사실로 칠십인 역이 만들어지기 전에 시편이 분할되었다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이는 아마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부터 그들의 고국에 돌아와 새 성전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의식을 정한 다음에 에스라에 의해 되었을 것입니다.
또 이는 아마 모세의 책을 나눈 것을 모방하여 그렇게 나누었을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된 시편은 이렇게 나눔에서 주요 내용에 주의를 기울인 것같이 보입니다.
2) 이 말씀에서 다윗은 앞에 나온 감사의 표현을 반복합니다.
하나님을 명백하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부름으로 다윗은 하나님이 조상들과 맺으신 언약에 대한 깊은 감명을 자기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으로 된 예정의 시행인 언약은 하나님이 하시는 구원의 근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멘’이 두 번 반복되는 것은 더 큰 열성을 보여주고 모든 경건한 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보다 효과적으로 자극하기 위해서입니다.
시42:1-3 하나님이여 사슴이
첫째로 다윗이 사울의 잔인함 때문에 도망을 다녀야 했고, 방랑 생활을 할 때, 무엇보다 자기를 가장 슬프게 했던 것은 성소에 가까이 갈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세상의 어떤 이익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둘째로 다윗은 실망하려 할 때, 자신을 지탱키 위해 어려운 싸움을 치뤘습니다.
소망을 확고히 하기 위해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한 기도와 명상을 말합니다.
끝으로 다윗은 자기가 경험한 슬픔 때문에 갖은 마음의 투쟁을 다시 언급합니다.
1. 본 시편의 주제는 “고라 자손의 마스길, 영장으로 한 노래(고라 자손에게 준 교훈, 지휘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칼빈)” 입니다.
이 시의 제명(題銘)에 다윗의 이름이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라의 자손들이 이 시를 지었다고 추측합니다.
우리는 전혀 이 추측이 맞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잘 알고 있는 것같이 다른 누구보다도 뛰어나게 예언의 영을 받았던 다윗이 친히 이 시를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그를 위하여 그것을 지어 기록했다고 누가 믿겠는가?
다윗은 일반적으로 온 교회의 선생이었고, 성령이 쓰시는 뛰어난 도구였습니다.
다윗은 전에도 고라 자손들이 있었던 레위인들에게 다른 시들을 노래하도록 주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시를 짓는 것보다 자신의 훨씬 더 잘 할 수 있는데 그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그들의 협력에 의존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이 시는 귀한 보물같이 보전되도록 그들에게 맡겨졌기에 본문 중에 고라의 자손들이 언급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수명의 노래하는 자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그 시를 보전하도록 선택되고 임명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이름이 쓰여져 있지 않다고 그것이 어떤 어려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이 지은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근거를 지닌 다른 시편들에서도 다윗의 이름이 생략된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ליכשמ(마스길)이란 말은 다윗이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매질 앞에 굴복했었다고 선언하는 시편 이외의 제명에서 간혹 보입니다.
시편 42 편
그러나 이 말이 징계에 적용되는 것이 옳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징계의 의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교훈으로부터 충분한 유익을 얻고 있지 못할 때, 그들을 훈계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편을 지은 때에 관해서는 주석가들이 전혀 일치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에 의하여 보좌에서 쫓겨났을 때 자기가 당한 재난을 이 시편 가운데서 불만스럽게 읊고 있다고 상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만일 우리가 틀리지만 않았다면, 그럴듯한 여러 이유에 근거를 둔 다른 견해를 옳다고 여기고 싶습니다.
압살롬에 의한 반역은 극히 짧은 시간 안에 진압되었습니다.
다윗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성전에 올라가지 못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이 시편 가운데 하는 애곡은 긴 기간의 방랑을 가리킵니다.
이 방랑 중에 다윗은 슬픔으로 수척해졌고 쇠약해졌습니다.
제 3절에서 다윗이 묘사하는 슬픔은 단순히 이 삼일간이 아닙니다.
이 시편의 전반적인 의도를 고려해 보면 다윗은 자기가 말하는 불행한 상태에서 오랫동안 쇠약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사울이 다스리던 시대에는 언약궤가 무시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에 다윗이 본문에 나타난 것과 같은 음악 예배를 성전에서 인도한 것 같지 않다는 사실은 이 시편이 사울의 다스림과 관련됨을 반대하는 근거로 주장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 논증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사울이 하나님께 예배하긴 했습니다.
그렇지만 사울의 예배는 단지 형식적인 것입니다.
사울로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되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에 관한 다른 기록을 읽어보면 다윗이 어떠한 성실성을 갖고 성회에 참석했으며 특히 명절 때에는 얼마나 더 그러했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시편 55편 14절에서 읽는 “우리가 같이 재미롭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안에서 다녔도다” 라는 말은 사울 시대에 관한 말씀입니다.
2. 본문 1-2절은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우는 것 - 칼빈)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내 영혼이 하나님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언제나 하나님의 면전에 나타나게 될꼬-칼빈)” 입니다.
시편 42 편
1) 1절과 2절의 의미는 다윗이 이 세상의 온갖 향락, 재물, 쾌락, 존영보다 성전에 올라가는 때를 더 귀하게 여긴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율법이 정한 것을 실행해 믿음과 경건을 소중히 기르고 강하게 하였습니다.
다윗이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이 말이 단순히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사랑과 의욕을 의미한다고 이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으로 우리를 자기에게로 끌어들이시며, 어떤 수단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위로 올리시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늘로 올라갈 것을 명하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약함을 고려하셔서 우리에게로 내려와 주십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신성한 방법이었던 성전의 외적 제사로부터 쫓겨났기에 자기가 하나님께로 나아갈 길이 막힌 것을 알고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습니다.
우리는 외적의식을 지키는 행위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방법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의식은 우리의 연약성 때문에 버릴 수 없는 종교적인 행사임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성전에 가까이 못하게 된 다윗은 마치 하나님을 떠난 것만큼 슬퍼했습니다.
다윗은 그런 중에서도 하늘과 성전을 향한 기도를 그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나약함을 인식한 후에, 다윗은 신실한 자들이 획득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자기에게는 막힌 것을 유난히 슬퍼했습니다.
이 사실은 자기들이 삽시간에 하늘로 날아오르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열심과 활발한 마음에 있어서 다윗을 능가하고 있는 것처럼 무관심한 채 그러한 수단이 없어도 되는 것으로 아는 자들, 아니 오히려 그 수단을 거만하게 멸시하는 자들의 오만을 부끄럽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선지자가 세상의 것들, 곧 율법이 명하는 외형적 의식들에 의존하려 했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단지 다윗은 하나님께로 날아갈 날개를 갖지 않음을 스스로 알고 땅에 있는 것들을 사다리로 하여 그것을 밟고 올라가려고 했습니다.
다윗이 ‘사슴’이란 말로 나타내는 비유는 자기 소원의 극한 열심을 표명합니다.
이 비유를 어떤 이들은 사슴이 피로를 회복키 위해 물을 간절하게 찾는다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설명은 너무도 한정적입니다.
우리는 사냥꾼이 사슴을 쫓고 개들 역시 그것을 바싹 쫓는다면 사슴은 강에 가까이 올 경우 거기에 뛰어들므로써 새 힘을 얻는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기로는 어떤 계절에는 사슴들이 단순한 갈증에서 나온 것보다 거의 믿을 수조차도 없는 강렬한 욕망으로 물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시편 42 편
우리는 이 설명으로 만족하지는 않으나 본문 중에서 이 선지자가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 제 2절은 우리가 이미 말한 것을 더욱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다윗이 단순히 하나님의 임재만을 말하지 않고 어떤 상징물들과 연관된 하나님의 임재를 말하고 있다고 말했었습니다.
다윗이 성막, 제단, 제물,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것들에 의하여 자기 백성에게 가까이 계시겠다고 증거하셨던 것들을 나열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실한 자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고 할 때, 그러한 것들로서 시작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하기도 했었습니다.
이는 그들을 그것들에 계속 집착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런 표적들과 외적 수단의 도움으로 사람이 보기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이나 외적 상징물들에 새겨져 있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표적들을 볼 때 만일 우리가 영적인 방법으로 깨끗한 마음을 갖고 구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다윗과 같이 바로 ‘하나님의 면전에 있다’(칼빈)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서 자기 말씀과 자기에게 드리는 예배의 신성한 제도 안에서 자기를 계시하신 것 외에 다른 어떤 것에서 나타나신다고 상상하거나 또는 우리가 그의 하늘의 위엄을 천하고 속된 생각으로 바꾼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고 또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는 환상적인 조상(彫像)을 만들 뿐입니다.
3. 본문 3절은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입니다.
다윗은 악하고 심술궂은 사람들이 심하게 자기 마음을 찌르는 예리한 창에 대해 언급합니다.
사단이 다윗을 슬픔으로 불사를 그 불길을 부채질하기 위해 수단을 사용한 사실을 우리는 믿습니다.
원수 사단은 ‘너는 무엇을 얻고자 하느냐? 하나님이 너를 쫓아내셨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느냐? 분명히 하나님은 성막에서 섬김을 받으려 하시는데 너는 지금 그곳으로 가지 못하며 성막으로부터 너는 추방당한 것이다’ 라고 말했으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다윗이 성령의 능력으로 부축을 받아 강력하고 활력에 찬 저항을 하지 않았다면 이 말은 거센 공격이 되어 이 거룩한 사람의 믿음을 전복시키고 남았을 것입니다.
다윗의 감정이 참으로 강한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우리도 간혹 마음의 충격을 받지만 먹고 마시는 것을 그만둘 정도는 이르지 않습니다.
시편 42 편
그런데 사람이 스스로 음식을 삼가고 심하게 슬픔에만 빠져 매일 먹어야 하는 음식을 등한히 하면서 계속하여 그 슬픔에 못이겨 한다면 그 사람은 가벼운 고통을 당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정녕 그 사람은 극심하게 상심했고 그 상처는 그의 심령에까지 미친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자기가 울어서 얻는 위안보다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더 큰 위안을 얻은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먹는데서 쾌감과 즐거움을 얻는 것같이 다윗은 우는데 몰두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어떤 짧은 기간 동안이 아니라 매일 이렇게 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불행 중에 있을 때, 악인들이 우리를 향해 개가를 부르고 하나님이 우리를 대항하고 계신다고 심술궂게 조롱하면 그때마다 그들로 우리의 믿음을 넘어뜨리기 위한 말을 하도록 하는 자는 사단이다 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 이때는 우리가 안심하거나 무관심할 때가 아니며 극히 위험한 전쟁이 우리를 대항하고 있는 때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또 우리 마음 속에 그와 같은 감정을 일으키는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이 악인에 의해 조롱받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심히 비난하지 않고는 우리의 믿음을 웃음거리로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혀 감각없는 자들이 아니라면 그와 같은 형편에서 우리는 가장 심한 슬픔을 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육의 형편이 이러하다면 다윗의 후예들인 우리는 즉시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나 거기 가야 합니다. 나 거기 있어야 합니다. 나 거기서 먹고 마셔야 합니다’ 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시편 42 편
시42:4-6 내가 전에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에서 쫓겨나 멀리 오랫동안 유리하면서 성전에서 하나님 공경함을 사모합니다. 다윗은 “생존하시는 하나님”(י ל =엘카이)을 갈망하였습니다
이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 모든 우상들과 반대되는 참 하나님을 말합니다.
다윗이 그렇게 하나님을 사모한 이유는 원수들이 다윗의 비참한 정지(情地)를 인하여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가장 슬픈 일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사실이었습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신 신앙생활의 성황(盛況)처럼 좋은 일이 없었습니다.
이제 그 때를 잃은 것이 무척 슬픈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신앙을 파수하고 낙심하지 않습니다(1-5).
1. 본문 4절은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내가 무리들과 함께 다녀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고 심지어 기쁨의 춤을 수없이 추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안에 있는 내 영혼을 쏟아내는도다 - 칼빈)” 입니다.
이 절은 히브리어에 나타난 시제의 변화 때문에 약간 분명하지 않은 곳이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본래의 의미는 다윗이 자기의 이전 상황을 회상하고 이를 현재 상황과 비교하면서 그만큼 큰 슬픔을 경험했다는 것임을 믿습니다.
과거에 대한 회상은 다윗의 불행을 더욱 악화하는데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전에 다른 사람들을 성회로 인도함에 있어서 인도자와 지도자의 역할을 했던 자기가 지금 성전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저지당한 것을 생각하여 그랬던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고통을 당해 온 사람들은 그 고통에 대하여 무감각하게 됩니다.
또 우리가 불행을 연속적으로 당하게 되면 우리 손에 어느 정도의 감각이 무디어져 그 불행을 생각하지 않게 되고 그것이 어떤 새로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고 얼마 전까지도 존귀한 자들 가운데 주요 위치를 차지하고 신실한 자들 중에서도 상류급의 지도자였는데 지금을 추방된 자요, 가장 낮은 자들의 위치에서조차도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볼 때, 더욱 비탄에 잠겨 마음이 동요되고 있습니다.
시편 42 편
그러므로 우리는 ‘이’라는 대명사를 자기가 경건한 자들의 무리 중에 섞여 있었고,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했다는 곧이어 기록된 다윗의 말과 연결합니다.
‘영혼을 쏟아내는도다’(칼빈)는 말은 ‘자기의 슬픔을 말하다’는 말을 은유적으로 쓴것으로 말한 사람이 있고 ‘크게 즐거워하다’를 의미한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기뻐서 녹초가 되다, 영혼이 나가다’를 의미한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다윗은 오히려 자기의 감정이 자기 속에서 녹아버린 것을 의미한 것 같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그 힘을 분산시키지 않고 있을 때 그를 지탱하는 것같이 어떤 감정이 지나쳐서 겉잡을 수 없게 될 때, 영혼은 그 사람 안에서 가라앉고 사라져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기 영혼을 쏟아내었다고 말했는데 이는 극히 흥분하여 다윗의 감정은 낙망하여 흘러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말은 자기가 낙담하게 된 그 상황을 생각했을 때 슬픔이 커서 자기의 영혼이 자기 속에서 녹아버리고 기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만일 그 말을 ‘기쁨’으로 이해한다면, 곧 전에는 우리가 사람들의 가장 첫째가 되어 행동하고 그들을 성소로 이끌어가는 중에 매우 기쁨을 얻어 우리 마음은 기쁨으로 녹초가 되었으며 그 기쁨에 도취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와 같은 행복한 상태를 회복하면 우리 모든 감정은 그때의 그것과 같은 기쁨으로 황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훌륭한 설명으로 보이는 견해가 어떤 것인지 이미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윗이 이 세상의 슬픔 때문에 압도당하고 있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당면한 불행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어떠함을 분간하여 경건한 슬픔으로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자신의 잘못으로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했기 때문입니다.
또 다윗이 당하고 있었던 슬픔에 대한 이러한 이유를 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슬픔이 나온 근원을 알 수 있습니다. 극히 많은 사적 고난으로 고통당했을 때에도 다윗은 오직 성소를 그리워하면서 슬퍼했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계속 떨어져서 방랑의 상태에 있는 것보다는 자기의 생명을 잃는 것이 그에게는 덜 고통스러움을 보여줍니다.
또 우리가 우리의 모든 감정을 다스려야 하는 방법은 한편으로는 우리는 기쁨 중에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 아버지로서의 사랑과 은혜를 고려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노하심을 느낄 때에만 우리가 슬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린도후서 7장 10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무리’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ךס(싸크)인데 이 말로 다윗은 ‘대열’ 혹은 ‘진행하는 무리’를 의미하려 하였습니다.
시편 42 편
그들이 성일에 성막으로 갔을 때, 혼란스럽거나 떼지어가지 않았고 일정한 대열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눅2:44).
2. 5절은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 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입니다.
다윗은 시험에지지 않으려고 자기 슬픔에 대항해 강하게 투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주목 할 사실은 다윗이 그 시험과 싸워서 승리를 얻기 전에 완강하고 쓰라린 싸움을 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은 한 차례의 위급한 공격을 받은 후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투쟁의 새 국면을 자주 당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대단히 마음의 동요를 느끼고 낙심했던 사실을 이상히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다윗은 자기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어떤 표적도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서 다윗은 마치 자기가 두 개의 상대적 당파를 형성한 것처럼 자신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믿음을 연단시킴에 있어서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굽히심이 없는 용기를 가지신 성령으로 무장하여 다윗은 육신의 감정을 제지하고 굴복시키기 위해 그 감정에 맞섰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다윗은 자기 마음의 겁과 유약함을 나무랐습니다.
그 뿐 아니라 다윗은 마귀와 세상을 대항해 싸움을 끌어왔으면서도 그런 것들과 공적이고 직접적인 투쟁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주로 싸우고자 했던 자에게 맞선 원수로서 자신을 인정했을 뿐 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사단을 이기는 최상의 방법은 우리 자신이 밖으로 나갈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욕망과 대항하여 내적인 싸움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 영혼이 자기 속에서 낙심했다고 고백한 사실을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의 약점이 크게 나타나 바다의 파도처럼 우리를 압도하려 할 때에는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지탱하지 못하는 것같이 여겨지고 그로인해 우리는 심하게 두려움을 느껴 용기를 잃고 싸우기를 무서워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무관심과 겁에 질린 상태가 우리를 덮쳐올 때면 마음의 정욕을 다스리고 굴복시키는 것, 특히 누구에게나 있는 불신의 감정과 싸우는 것은 경건한 자들이 자주 치러야 하는 싸움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악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하나는 ‘낙망’이며 다른 하나는 ‘불안’ 입니다. 이 두 가지는 분명히 서로 다릅니다.
시편 42 편
그러나 이 두 가지 악은 동시에 우리 마음을 공격합니다.
우리가 매우 실망하게 되면 우리는 불안한 감정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이 불안한 감정은 불만과 불평을 하도록 합니다.
이 두 악을 제거하는 방법 이 말씀에 부가되었는데 이는 “하나님을 바라라” 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마음을 격려합니다.
이어 기록된 말씀에서 다윗은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라는 말로 그 ‘바람’에 대한 힘과 성격을 극히 잘 표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할 때, 찬송은 그 은혜를 깊이 생각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끌어올리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라는 말로 다윗은 현재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에 관한 한 자기의 입이 닫혀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으로서는 사방으로부터 압력과 포위를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 상황 때문에 다윗이 먼 장래의 소망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또 현재 당하는 슬픔을 회피하고, 그 슬픔이 미치지 못하는 지경으로 나아가기 위해 다윗은 아직은 얻을 수 없는 것을 스스로 다짐하고 있습니다.
이 ‘바람’은 허망한 것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생겨난 상상적인 기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존하여 좋은 소망을 갖기 위해 스스로를 격려하고 있을 뿐 아니라 어떤 구원을 스스로 약속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 스스로의 마음을 향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증거를 했을 때, 우리 형제들에게 그 은혜에 대한 유능한 증거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얼굴의 도우심”이란 말은 여러 가지로 설명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인하여’라는 말을 이 말에 덧붙여서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그는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하고 싶어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감사에 대한 조건 혹은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해설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그 말들을 약간 분리하여 ‘도우심과 구원은 하나님의 얼굴로부터 나온다’ 라고 읽는다 하더라도 그 의미는 옳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보시고 기뻐하시는 순간 그들을 안전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의 은혜를 표현하기 위해 쓰였습니다.
우리에게 은총을 나타내실 때 하나님의 안색은 평온하고 인자하십니다.
이와 반대로 우리를 대하여 불행을 보이실 때에는 해를 갈기는 구름처럼 하나님의 자비로운 모습이 어둡고 침침하게 됩니다.
시편 42 편
3. 본문 6절은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말씀에 보충되는 말이 필요없다고 생각한다면 이 말씀은 두 개로 구분된 별개의 문장이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나는 당신을 기억하나이다’가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 주석가들은 ןכ לע(알켄)을 ‘그 이유는’ ‘왜냐하면’으로 번역합니다.
그리하여 이 말은 앞 구절에 함축된 내용의 이유를 설명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또 다윗이 지금 방랑자로 숨어있는 요단 땅에서 성전을 생각할 때마다 다윗의 슬픔은 그만큼 더 많았다는 의미로 이 말씀을 이해하면 매우 합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말한 대로 이 말씀을 두 개의 구절로 나눈다면 이 말씀의 의미는 다윗이 자기의 슬픔을 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진정시키기 위해 하나님을 생각 했다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위안을 얻지 못하는 자들의 행위를 본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자기에게 상처를 내시기는 했지만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치료하시는 분이심을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전체 구절의 의미는 ‘나는 지금 방랑자로서 살아가고 있으며 성전에서 쫓겨났고 하나님의 권속과는 관계없는 사람으로 보여질 것이다. 이러한 처지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을 귀중히 모시지 못하거나 그를 의지하지 못하게 되지는 않는다. 내가 간절히 원하고 있는 전에 항상 드렸던 그 제사를 지금 드리지 못하나 하나님은 자기의 말씀까지 나에게서 빼앗아 가시지는 않았다’ 입니다.
처음에 소개한 해설이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고 이 해설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부가되었으므로 이 해설을 옳은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당시에 다윗은 자기가 하나님의 교회로부터 쫓겨났기에 자기 영혼이 슬픔에 억눌렸음을 불만스럽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또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암시적인 대조가 있습니다.
다윗으로서는 ‘내가 아내나 집이나 소유한 것들 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은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 사실을 생각하는 만큼 나를 슬프게 하지 않는다’ 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시편 42 편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과 경건의 유익을 위해 정하신 도우심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잊지 않기 위해 우리 스스로 마음을 격려하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실 하나를 더 주목해야 하는데 곧 앞 절에서 우리가 다윗이 자신의 감정과 용감하게 싸우고 있었던 것을 본 것같이 지금 이 절에서 다윗이 어떤 수단으로 자기의 입장을 확고하게 유지하고 있는가를 본다는 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지하고 자기가 거룩한 성전 안에 있는 것같이 하나님의 도우심 안으로 피함으로서 자기의 입장을 확고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묵상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지 않는다면 약속에 대한 생각만으로는 우리를 붙들어 주고 확고하게 할 만한 충분한 힘을 갖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 마음 속에 계속 적으로 일어나는 수많은 악한 생각들을 우리는 어떻게 누를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영혼은 무수히 많은 방법으로 실망을 일으키는 장소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자신과의 격심한 투쟁을 하고 나서 기도에 의존하여 자기의 슬픔을 보아오신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데도 이유가 있습니다.
‘요단 땅’은 유대에서 바라보아 강 건너편 땅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사실은 헤르모님(Hermonim), 또 헤르몬(Hermons)이란 말로도 더 분명해집니다.
헤르몬은 산악지대였으며 상당히 길게 뻗쳐 있었습니다.
헤르몬은 여러 봉우리들을 갖었기에 복수 헤르모님(Hermonim)으로 불려졌습니다.
아마 다윗은 자기가 머무는 장소를 자주 옮겨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녀야 하는 두려움을 가졌기에 일부러 복수를 사용했는지도 모릅니다.
‘미살’을 어떤 사람들은 산에 대한 고유명사가 아니라고 생각해 ‘작은’으로 번역합니다.
또 다윗이 비교적 작은 산이었던 시온(Sion)산이 자기 생각에 높이 솟아 헤르몬산 보다 더 큰 산이란 것을 의미하려 했던 것처럼 이 말씀 가운데 헤르몬산과 시온산의 간접적인 비교가 있다고 상상합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우리가 보기에 무리한 것입니다.
시편 42 편
시42:7-8 주의 폭포 소리에
다윗은 낙심될 만한 역경을 당해도 낙심치 않고 유리하는 객지에서 주를 기억합니다.
또 다윗은 현재 하나님의 진노 속에 시달리면서도 장차 자기에게 임할 주의 인자를 내다봅니다(6-8). 그 사실이야말로 우중에서 반가운 무지개를 본 셈입니다.
1. 본문 7절은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주의 물기둥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모든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나이다 - 칼빈)” 입니다.
이 말은 다윗이 당했던 불행이 많았고 오래 계속되었으며 심했다는 사실을 표명합니다
마치 다윗은 ‘나는 한 가지 불행뿐 아니라 연속 부딪쳐오는 여러 고통으로 억눌림을 받아 이 고통은 끝이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첫째 ‘깊은’이란 말로 다윗은 자기가 당한 시험이 깊은 바다에 비교될 만함을 말합니다 둘째 다윗은 자기가 당한 시험이 먼 곳에서 소리 지르고 서로 부른다는 극히 적합한 비유로 설명하여 그것이 오래 계속되었음을 말합니다.
하반절에도 다윗은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로 은유를 사용합니다.
이 은유로 다윗이 수없이 쌓인 고통에 압도되고 삼킴 당한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다윗이 사울과 다른 원수들의 잔인성을 ‘주의 물결’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역경을 당할 때 우리를 괴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 아래서 우리들 스스로를 낮추어야 할 것을 언제나 명심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으로 만족하지 않고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위에 사나움을 비같이 내리시고자 한다면 하나님이 자기의 수문 혹은 ‘물기둥’(칼빈)을 여시는 순간부터 하나님이 진정하시기까지 우리가 당하는 불행에 끝은 없는데 이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리시는 보응에 있어서 두렵고 헤아릴 수 없는 수단을 자기 권세 안에 갖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일단 우리에게 진노하신다면 우리를 삼키기 위한 깊은 바다는 하나 뿐 아니라 그 바다가 다른 바다를 불러오게 됩니다.
사람들은 감각이 둔하여 하나님의 보응에 대한 말씀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보이시는 위협 앞에서 마땅히 가져야 할 두려움을 갖지 않지만 우리는 이 말씀을 명심하기도 해야 합니다.
시편 42 편
2. 본문 8절은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입니다.
이 말씀에서 사용된 동사는 미래 시제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의 특성에 따라 이 동사는 과거 시제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이는 다윗이 대조법으로 진술하고 있는 현재의 슬프고 비참한 상태에 더 큰 힘을 보태기 위해 다윗이 이전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들을 이 말씀 중에 나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해석에서와 같습니다.
이런 해석을 할 경우 다윗이 한 말은 마치 “전에는 나를 향하여 그토록 많은 친절을 베푸셨던 하나님이 그 마음을 바꾸셔서 지금 나를 혹심하게 취급하시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 동사의 시제를 바꿈에 있어서 위에서 말한 것은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없고 위에서 내린 해석과는 다른 해석이 본문의 의도에 더 일치하는 것같이 보여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해석을 지지하기로 합니다.
다윗이 자기 믿음을 강하게 하기 위해 자기가 이미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들을 회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에서 다윗이 아직 구원이 자기 눈앞에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장차 얻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윗의 말이 다음과 같은 취지를 가졌다고 인정되기만 한다면 그 동사가 미래 시제를 나타내든지, 과거 시제를 나타내든지 어떤 논쟁도 일으키고 싶지 않습니다.
곧 ‘낮에는 그의 인자하심이 나를 향하여 나타나고 밤에는 내 침상 위에서 기쁨의 노래가 나와 함께 하기 위해 하나님이 나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을 내 어찌 기대하지 않겠는가’ 라는 말입니다.
다윗은 앞 절에서 상세하게 말했던 하나님께서 상심하신 데 대한 그 두려운 증거로부터 자기가 잘 알 수 있었던 그 슬픔에 이 위안의 근거를 맞세우고 있습니다.
이 절의 끝에서 다윗이 말하는 ‘기도’를 고통과 슬픔을 당한 자의 기도로 이해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하신 뜻을 보이심으로서 우리가 자신의 임재 안으로 가까이 갈 수 있게 해주실 때 경험할 수 있는 즐거움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을 자기 “생명의 하나님” 이라고 부릅니다.
다윗으로서는 마음 속에서 생겨나는 이 즐거움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42 편
시42:9-11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다윗은 하나님을 “내 반석”(י = 살이-) 이라 불러 기도하며 낙심을 물리칩니다.
1. 본문 9절은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입니다.
만일 우리가 앞 절의 동사를 과거 시제로 읽는다면, 9절은 ‘하나님이 지금까지 이런 방법으로 나에게 친절하심을 보여주셨으니 지금 나는 그만큼 더 큰 확신을 가지고 그 분을 향해 기도하리라. 이는 내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했으므로 그 경험이 나에게 용기를 갖도록 격려해 주기 때문이다’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앞 절이 미래 시제로 해석된다면 다윗은 이 9절 가운데서 자기가 앞 절에서 말한 기도와 자기가 믿음으로 하게 되었던 회상과를 연결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 베푸시는 사랑에 설득되어 다윗이 방금 말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자기가 얻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다윗의 본으로부터 큰 확신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얻기 위해 기도하도록 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나는 낮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의 은혜를 나타내시고 이렇게 하시기를 계속하셔서 밤에라도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므로 앞으로도 하나님은 나에게 은혜로우실 것을 기대하기에 나는 ‘내 반석이신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라고 주 앞에 나의 불행을 더 솔직하게 애통하나이다”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신실한 자들이 이 같이 애통한다고 하나님이 모두 배척하셨다고 여기면 안됩니다.
만일 그 신실한 자들이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아래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 그 신실한 자들이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것은 헛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실한 자들은 육신의 감정을 좇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신실한 자들이 한동안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중시하시고 자기들의 요청에 귀를 막지 아니하실 것이라는 믿음의 확신에 안심합니다.
그렇지만 이 ‘잊으심’은 그들의 외형적 모습과 육신에 의해 괴로움을 겪게 되는 마음 속의 모든 불안과 관련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42 편
2. 본문 10절은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날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할 때에 내 뼈에 상처를 입는 것과 같도다 - 칼빈)” 입니다.
이 구절은 그 표현에서 약간 갈피 잡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에는 모호한 점이 없습니다.
이 말씀 중에 다윗은 자기 원수들의 비난으로 경험한 그 슬픔이 그 원수들이 다윗의 뼈를 지르는 것 못지않게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을 주장합니다.
חצדב(베레차흐)란 말은 ‘죽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을 번역할 때 그 의미를 살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을 ‘죽이는 칼’이라고 번역한 사람들의 견해를 탓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에는 그 표기가 비슷한 두 글자 ב(베트) 와 כ(카프) 사이에 있는 대단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의미상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 베트라는 글자는 종종 의미없이 쓰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장에서처럼 의문스러울 경우에 우리는 이 글자를 완전히 빼버리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성경 주석가들이 ‘내 뼈’라는 말은 쓰라린 슬픔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하게 고려하지 않는 것같이 보여지는 사실을 제외하면 우리가 이미 말한 것같이 이 말씀의 의미는 더할 나위없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칼이 창자나 우리 몸 가운데 부드럽고 신축성이 있는 다른 부분을 찌르는 것보다 뼈에 가해진 상처는 더욱 날카로운 아픔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비유를 과장된 것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만일 누가 다윗이 원수들의 조롱을 자기 마음에 그토록 혹심한 것으로 여긴 이유를 이상하게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무감각을 드러낼 뿐입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비참한 악 가운데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위엄을 산산조각내고 우리의 믿음을 파괴하고 전복시키려는 것을 보는 일보다 우리에게 더 심한 상처를 입히는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가르쳤던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했던 일에 관한 교훈(갈4:24-31)은 유명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스마엘의 유치한 희롱을 하찮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희롱은 하나님의 언약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여지게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령께서 하시는 판단에 의하면 가장 잔인한 핍박이 됩니다.
가인과 아벨의 경우도 같습니다(창4:1-16).
그러므로 다윗은 매우 바르게 자기 원수들의 비방을 뼈와 골수에까지 미치는 죽이는 칼에 비교합니다. 다윗은 자기 원수들의 비방으로 자기의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이 원수들의 발밑에 밟히고 있는 현실을 보았습니다.
시편 42 편
또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랑하는 자들이 자기들의 믿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는 데까지 공격을 당하고 자기들에게 생명을 주는 말씀이 그와 같은 공격을 당할 때는 자신에게 사적으로 가해지는 다른 사람의 잘못은 참을성 있게 견디고 여기서 다윗이 특출하게 하고 있는 그 강렬한 열정과 같은 열심을 나타나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3. 본문 11절은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입니다.
반복되는 이 말씀을 보면 다윗은 같은 싸움을 다시 치를 필요가 없을 만큼 한 번의 싸움이나 한 가지 비상한 노력의 결과로 자기가 당한 시험들을 완전히 이기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실례를 통하여 우리는 권면을 받습니다.
사단이 우리를 공격하여 우리가 동일한 괴로움을 다시 받게 되더라도 우리는 용기를 잃거나 스스로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절은 5절과 모든 점에 있어서 같으나 뒷부분은 한마디만 5절과 다릅니다. 5절에서는 “그 얼굴의 도우심”이라고 말했으나 여기서는 제 1인칭의 소유격 대명사가 쓰여 “내 얼굴을 도우시는”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여기에는 히브리어에서 제3인칭을 가리키고 있는 ו(와우)가 빠져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모든 번역들이 우리가 택한 번역과 일치하고 있듯이 다윗은 하나님을 “내 얼굴을 도우시는 하나님, 혹은 구원 하시는 하나님”이란 말로 불렀을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자기를 방어해 주시는 분으로, 또 자기가 하는 싸움에서 보호자로서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나타나시는 것처럼 확신을 가지고 분명하고 확실한 구원을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 중에 ‘도우심’ 혹 ‘구원’은 하나님께 적용되는 별칭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 말 다음에는 내 하나님이란 말이 곧장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11절을 함께 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