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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의 스님들과 재규의 부하들에게 묵사발이 되는 다른 부하들…….
그리고 어느 순간, 창근을 목표로 각자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재규와 청명스님.
창근에게 주먹을 내지르는 재규…….
반대편 동시에 창근에게 주먹을 날리는 청명스님.
두 사람의 공격이 교차하면.
재규의 주먹을 맞고 입이 돌아가는 창근의 얼굴.
그리고 또 청명스님의 주먹을 맞고 반대편으로 입이 돌아가는 창근의 얼굴.
양쪽 볼따구가 묵사발이 되는 창근, 완전히 뻗어 버린다.
재규 일당과 선승들의 완벽한 한판승.
청명과 시선 마주치는 재규, 미소 지으며 고마움을 전하고
재규: (호흡 가다듬으며) 이러는 거 큰스님이 아시면 화내실 거 같은데…….
물끄러미 재규를 바라보던 청명, 암자를 향해 천천히 합장을 하고.
나머지 스님들 모두 암자를 향해 합장을 올리면.
은은한 금강경 소리 깔리면서.
그제 서야 재규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예감하게 된다.
씬 111. 노스님의 숙소 앞/오전.
은은한 금강경 소리 깔리면서.
노스님의 숙소를 향해 합장하고 있는 스님들 뒤로.
합장하고 있는 재규의 부하들.
무릎을 꿇는 재규, 천천히 고개를 들어 노스님의 숙소를 바라본다.
씬 112. 다비식/오후.
울려 퍼지는 금강경 소리.
열반에 든 노스님을 추모하는 나뭇가지마다 걸려 있는 화사한 깃발들.
암자 뒤편에 마련된 다비장.
가득 쌓여 있는 장작 위에 화사한 국화꽃으로 둘러싸인 노스님의 관이 놓여있다.
목탁을 두드리며 의식을 진행하고 있는 본사 스님들 몇 분과 동자승을 끌어안고 있는 연화스님을 포함한 몇 명의 비구니 스님들…….
청명스님과 암자의 스님들. 그리고 불곰, 날치, 왕구라, 막내가 바라보는 곳.
다비장에 누워있는 노스님.
흰 장갑을 낀 어느 본사 스님, 다비장에 불을 붙이면 조금씩 하늘거리며 올라가는 불길.
그리고 마침내 활 활 솟구치는 화염들.
불기둥을 만들며 노스님의 육신을 가득 휩싸고 돌면…….
목탁소리…….
천수경 소리…….
커지며 흘러나온다.
엄숙한 표정으로 불경을 외우고 있는 청명스님과 암자의 스님들…….
불곰, 날치, 왕구라, 막내 모두 슬픔의 눈물을 흘린다.
눈을 꼬옥 감고 있는 동자승의 얼굴 화면 가득 들어오며.
씬 113. 노스님의 숙소.
금강경 소리 이어지며…….
노스님 자리 맞은편에 앉아있는 재규.
눈을 감고 앉아 있는 재규의 얼굴 위로 금강경 소리 커지면…….
천천히 재규 눈을 뜬다…….
슬픔과 아쉬움과 그 모든 감정을 함께 담아내는 굵은 눈물 한 방울이 재규의 눈에서 떨어진다.
다비장.
해지는 노을 끼고 꺼져 가는 다비장의 화염.
씬 114. 공양간/다음날 아침.
조용한 암자 내, 공양간 굴뚝에선 연기가 흘러나오고.
암자마당 한쪽에선 빗질하고 있는 대봉이 보인다.
공양간 안.
타오르는 아궁이 안의 장작.
밥이 되어 가는 듯 끓어오르는 가마솥.
아궁이에 장작을 넣는 누군가의 손.
청명스님의 모습이다.
물끄러미 타오르는 장작을 바라보는 청명스님.
씬 115. 재규 일당의 숙소.
툭, 툭, 하나씩 하나 씩 바닥에 떨어지는 행자복들.
행자복이 벗겨지면 온통 문신을 한 누군가의 등.
그 위에 처음에 입고 왔던 흰 셔츠와 상의가 걸쳐진다.
단추를 채우는 누군가의 손길.
빠지면 모두 처음에 들어올 때의 그 모습으로 서 있는 재규와 부하들.
뎅 뎅…….
아침 공양을 알리는 종소리 들려온다.
재규 일당의 숙소 앞.
공양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아쉬운 마음으로 숙소 앞을 나서는 재규 일당.
씬 116. 요사채 안/아침.
스님들과 재규 일당이 마지막으로 참여하는 아침공양이 이루어지고 있다.
예전과 다르다는 것은 재규와 부하들이 행자복이 아닌 처음에 입고 왔던 옷을 입고 있다는 것과 노스님이 항상 앉으시던 곳에 청명스님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노스님의 자리를 대신한 청명.
현각스님, 딱 딱 딱, 세 번 죽비를 치면 합장으로 절을 하는 암자의 스님들.
맞은 편, 능숙하게 따라하는 재규와 부하들.
각자의 보자기를 펴 그릇과 수저를 그 위에 올려놓는 재규와 부하들.
가장 큰 밥공기가 보자기 왼편에, 국그릇은 오른편에, 그 뒤쪽으로 두 개의 공기가 놓여진다.
막내는 혼자서 공양하기 힘든 동자승 옆에 앉아 도와준다.
조용한 가운데 진행되는 공양시간.
현각스님, 딱, 죽비를 한 번 치면, 자리에서 일어나는 명천스님, 밥, 국, 반찬 순으로 배식을 시작한다.
반찬을 들어 자신의 발우에 놓는 재규, 노스님이 손수 만드신 버섯 탕수육이다.
밥공기를 들어 자기 머리위로 잠시 치켜든 다음 정 위치에 놓고 밥을 기다리는 사람들.
달그락 달그락 조용한 요사채 안에 울려 퍼지는 수저소리들.
청명: (웃으며) 공양 중엔 말소리는 물론 수저소리도 내면 안 되는 게야…….
왕구라의 식기에 밥을 담아 주고 지나가는 명천스님.
넉넉하게 퍼주는 명천스님과 왕구라의 오가는 묵언의 미소.
현각스님의 딱 딱 딱, 세 번의 죽비 소리에 맞춰 서로 합장을 한 후 공양이 시작되면…….
재규 일당과 스님들의 마지막 공양이 시작된다.
씬 117. 암자 마당.
청명, 현각, 명천, 대봉스님의 얼굴이 보이고…….
이제 사복으로 갈아입은 재규, 불곰, 왕구라, 막내가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있다.
재규: (합장하며) 그만 가보겠습니다.
공손히 합장으로 예를 갖추는 청명스님.
서로 물끄러미 바라보다 덜썩, 포옹을 하는 두 사람.
빠지면 그 옆에서 손을 꼬옥 잡으며 아쉬운 작별을 나누고 있는 대봉스님과 불곰.
불곰: 스님. 보고 싶을 겁니다.
대봉: 저도 보고 싶을 겁니다.
불곰: 박 병장님…….
잡은 손을 놓지 못하며 아쉬워하고.
그 옆…….
명천스님과 작별을 나누고 있는 왕구라.
명천: 할 얘기가 너무 많은데 아쉽습니다.
왕구라: 아닙니다. 스님……. 좋은 말씀 많이 들었어요.
명천: 불가의 헤어짐과 속세의 헤어짐……. 헤어짐이라는 것은 모두 아쉽게 마련이지요. 헤어짐이 있으면 언젠가 다시 만날 날도 있는 법. 저는 이별하면 생각나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다시 만나요…….
명천스님의 목소리 깔리며 천천히 옆으로 움직이면 딸꾹질까지 하며 서럽게 울고 있는 동자승…….
눈높이를 맞춰 바라보고 있는 눈시울 붉어진 막내…….
막내: 잘 있어…….
동자승: (딸꾹질 때문에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한다.) 또……. 올……. 거죠?
막내: 그럼. 올께……. 다시 올께…….
새끼손가락을 걸며 약속하는 두 사람…….
바라보다가 한 번 더 동자승을 안아 주는 막내의 눈, 눈물이 맺혀 있다.
재규, 주위를 둘러보면 날치가 보이지 않고.
재규: 날치는?
현각스님, 재규에게 작은 미소를 띄우며 암자마당에서 보이는 계단을 바라보면.
씬 118. 암자 내 계단 위.
예전 날치가 연화스님에게 마음을 열어 고백했던 곳.
졸졸졸 약수 소리와 함께 떠나가는 날치의 마음을 위로하듯 만개한 꽃들만이 주변에 가득한데.
물끄러미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날치의 얼굴 보인다.
예전 연화스님이 물을 건네주었던 그 자리.
연화스님 대신 바구니가 하나 놓여있다.
형형색색 갖가지 산과일로 정성껏 담겨있는 바구니 하나.
날치, 하염없이 바구니만 바라보고 있는데 툭, 뒤에서 날치의 뒤통수를 치는 누군가.
돌아보면 재규의 얼굴.
재규: 가자.
천천히 끄덕끄덕 날치.
고개 들어 주변 산사를 바라보는 날치의 귓전에 들려오는 쏴아아…….
산의 울음소리.
씬 119. 암자 마당.
마당 입구를 향해 걸어가는 재규와 부하들의 뒷모습.
날치의 손에 들려있는 과일 바구니.
씬 120. 산 속 어딘가.
하늘을 가득 메운 나뭇가지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고.
산길을 걷고 있는 재규와 부하들.
모두 밝은 얼굴들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산을 내려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올라가고 있는 재규 일당.
재규의 발걸음이 멈추는 곳.
빠지면 예전 재규와 부하들이 묻혔던 구덩이 안에 들어가 있는 창근 일당.
며칠 동안 묻혀 있었던지 모두 피골이 상접한 모습들이다.
옆에서 창근 일당을 지키고 있던 츄리닝맨.
츄리닝맨: (90도로 인사하며) 오셨습니까. 형님.
씬 121. 산 길.
처음에 들어올 때처럼 산과 산 사이를 연결한 긴 구름다리를 걸어오는 재규와 부하들.
창근과 그 부하들을 줄줄이 엮어 끌고 오고 있다.
달라진 게 있다면 피투성이 옷가지가 하얀 새 옷이 되었다는 것과 재규의 뒤를 츄리닝맨이 졸졸 따라 오고 있다는 것이다.
사로잡은 창근과 부하들을 앞세우고 초록빛으로 가득한 산길을 내려가고 있는 재규와 부하들.
재규, 슬며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면…….
멀리 산 중턱에 그림처럼 자리 잡은 아름다운 암자의 전경이 들어온다.
뎅…….
뎅…….
재규 일당의 안녕을 기원하듯…….
묵직한 종소리 들려오면서.
아쉬운 시선으로 잠시 바라보다 다시 걸음을 옮기는 재규와 부하들.
멀리 재규의 눈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봉고 차가 보이면서 FADE OUT.
씬 121. 에필로그/오후.
암전된 무지화면.
그 위로 재규의 목소리 깔리며…….
재규: (목소리) 청명스님……. 그립습니다. 그리고 다른 스님들 모두 안녕하신지요?
탈거리며 산길을 올라가는 트럭 하나.
DHL이라고 씌어있다.
멈추는 트럭,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산 길.
트럭에서 내리는 인부의 시선으로 멀리 산 중턱.
그림처럼 구름 속에 자리 잡은 암자의 절경 들어오고.
재규: (목소리) 잘 들 지내시고 계시는지. 수행은 열심히들 하고 계시는지.
참선 방.
죽비를 든 청명스님의 지휘아래 한참 용맹정진에 여념이 없는 현각, 명천, 대봉스님.
재규: (목소리) 살겠다고 올라가서 스님들 괴롭히며 지낸 그 시간들이 지금도 눈을 감으면 생각이 납니다.
와…….
즐거워하는 스님들의 목소리 깔리며.
함께 족구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스님들의 모습.
돌아보는 대봉스님의 눈에 절 입구로 인부들이 커다란 상자를 끌며 들어온다.
마치 마라톤 결승점에 도착하는 선수들처럼…….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인부들.
인부: (청명스님에게 인수증 건네며) 싸인 좀…….
인부들, 그대로 바닥에 뻗어 버리면…….
재규: (목소리) 저희들은 비록 건달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조금씩 변해가며 맘 편하게 살 수 있는 건 모두 스님들 덕분입니다. 건강하십시오. 그리고 약소하지만 부족한 마음을 모아 작은 선물을 보내 드립니다.
커다란 상자 하나.
둘러 서 있는 암자의 스님들.
상자를 열면 새 불상과 축구용품…….
그 외 스님들께 필요한 선물들이 가득하고…….
좋아하는 스님들을 뒤로 한 채 재규가 보낸 편지를 읽고 있는 청명스님.
재규: (목소리) 다른 스님들께는 미안하지만 청명스님께는 특별한 선물을 하나 더 보내드립니다. 좀 과하더라도 꼭 받아주십시오.
청명스님, 고개 돌리면 다시 암자 입구로 들어오는 또 다른 인부들.
마찬가지로 커다란 상자를 하나 끌고 오고 있다.
역시 100미터 결승점을 통과한 것처럼 인수증을 건네곤 그대로 뻗어버리는 인부들.
재규: (목소리) 스님들 맘에 꼭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화면 가득 세탁기 박스.
종이 박스 뜯어내고 스티로폴과 비닐을 모두 걷어 내면…….
그 안에 들어있는 츄리닝맨.
츄리닝맨…….
스님……. 보고 싶었습니다.
주제음악 흐르며 스텝, 캐스트 올라가면.
끝.
그의 얼굴에는 흥분기가 서려있다.
시계를 보고 자신의 모습을 유리창에 비춰 보기도 한다.
이윽고 버스가 도착했다.
첫차의 도착…….
사람들 몇몇이 내린다.
그리고……. 그녀가 내린다.
소희다.
승재 숨이 멎을 것 같다.
소희의 모습……. 언제나 상상하던 그 모습 그대로다.
소희, 차에서 내려 두리번대더니 승재 쪽으로 걸어온다.
승재……. 점점 긴장된다.
소희 승재를 몰라보곤……. 그냥 스쳐 지나간다.
승재 계속 아무 말도 못하고 소희를 바라본다.
지나간 소희 이상한 시선을 느끼고 뒤를 돈다.
그리고 승재를 발견한다.
한참 둘이는 서로를 본다.
소희 약간 고개를 갸우뚱하다간……. 작은 읊조림으로…….
소희: 승……. 재 오빠?
승재……. 씨익 웃는다. 기쁘다.
씬 58. 집으로 가는 길.
승재가 자전거를 끌고 소희와 걸어간다.
소희의 짐을 자전거 뒤에 싣고 간다.
소희, 고개를 돌려 승재를 몇 번 본다.
승재 그런 시선이 어색하기만 하다.
소희: 결혼 안했나봐?
승재: 결혼은 무슨……. 후후……. 참…….
소희: 계속 이 동네에서만 있었어?
승재: 군대 제대하고……. 서울에 잠깐 있었어. 작은 아버지 운영하시는 식당에서 일했는데……. 후후……. 잘 안 맞더라구…….
소희: 그래?
승재: 응……. 그때쯤 아버지가 아프셔가지고 겸사겸사 집으로 내려왔지.
소희: 여긴 그대로 같아. 그다지 달라진 것도 없이……. 답답하지 않아? 여기에 있는 거?
승재, 그냥 웃고 만다.
소희: (자기의 집을 보고) 저기다.
승재, 멈춰 서서 짐을 내려 준다.
승재: 이따가……. 득삼 아저씨 결혼식이 있어? 생각나니? 양천 참외밭 곰보……. 그 집 원두막 놀러 가면 우리한테 참외랑 수박이랑 죄다 따주고 그랬는데…….
소희: 아……. 알아. 내가 그 아저씨 보면 얼굴 무섭다고 울고 그랬지?
승재: 응……. 후후후…….
소희: 이제 결혼 한다고?
승재: 후후……. 할머니도 오실 거야. 모시고 같이 와. 거기 애들 다 올 꺼거든…….
승재 소희와 눈인사를 주고받고 돌아서 간다.
얼굴 가득 미소다.
소희 가는 승재를 보다간 집으로 길을 돌린다.
씬 59. 소희 집 앞.
소희 짐을 들고 문 앞에 선다.
집을 둘러보고 숨을 고른다.
방문 앞에 할머니의 신발…….
소희……. 가슴이 살짝 떨려온다.
씬 60. 동네 어귀.
가마를 든 사람들과 동네 아낙들이 왁자지껄 지나간다.
가마 안으로 보이는 신부 얼굴……. 연지 곤지를 찍은 우미 네다.
아이들, 재밌다고 가마를 따라가는.
아낙1: 새색시 나간다. 훠이.
아낙2: 새색시는 무슨 새색시야, 헌 색시지……. 호호호호…….
아낙1: 새신랑한테 가니까 새색시지, 호호호호…….
승재모: 빨리……. 아, 신랑 애 닳것네.
가마꾼들, 걸음이 빨라진다.
우미네, 덜컹거리는 가마를 꼭 잡는.
씬 61. 이발소.
긴장된 얼굴의 득삼.
정갈한 2:8 가르마 위로 포마드 기름을 바르는 이발소 박씨.
따발따발 입을 한시도 쉬지 않는데…….
박씨: (따발따발) 내 말대로만 하믄 30년이고 40년이고, 부부사이에 싸울 일이 없당께, 성님, 알겠서라?
득삼: (손이 바들바들, 입이 바짝바짝)
박씨: 어메, 시방 떨고 계수?
득삼: 나……. 첨이잖어…….
승재: (사모관대를 들고 서 있다.) 아저씨, 서둘러요. 신부 도착하겠어요.
박씨: 등치 안 맞게 사삭떨기는……. (득삼의 얼굴에 파우다 가루를 발라준다.)
득삼: (재채기를 하며) 이이구, 뭐여.
박씨: 가만있어 봐. 원래 다 하는 거랑께…….
승재: (밖을 내다보며) 온다……. 아저씨, 어서요…….
박씨: (대충 마무리하며) 성님, 잘 살아부쇼잉. 내 꼬락서니 나지 말고.
득삼: (정신이 없다.)
득삼에게 옷을 입히는 박 씨와 승재.
박씨: 아이고, 득삼이 성님 장가가믄, 허전해서 어쩔끄나…….
밖에서 시끌시끌 소리가 들린다.
박씨: 떨지 말고 잘 하쇼.
득삼: 에취. (재채기를 한다.)
씬 62. 전통 혼례식.
캠코더에 비친 혼례식 풍경……. 왁자지껄한 사람들 소리.
혼례상에 차려진 음식, 비단으로 싼 기러기 목각……. 카메라를 다루는데 익숙지 않은지, 화면이 우왕-자왕-
도포를 입고 주례를 서는 우체국 김 씨는 오늘따라 근엄해 보인다.
잔뜩 긴장한 거구의 신랑, 재채기를 참느라 코가 실룩거린다.
입을 귀에다 걸친 신부……. 신부의 양팔을 잡고 큭큭거리는 동네 아낙들.
동네사람(off): 아이구, 헌 신부 봐라……. 좋아 죽네…….
구경꾼들 모습……. 승재모의 부축을 받으며 구경하는 승재부…….
이발소 박씨, 경수, 약국집 선미……. 카메라가 들이대면 수줍어서 고개를 돌리고 이리저리 피하는 동네 사람들.
한편, 구석에서 입을 막고 울음을 삭이는 미리네……. 신랑, 신부 합주를 하자 끝내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이발소 박씨: (화면 안으로 쏙 들어오며) 비싼 건께로 조-심히……. 조심히…….
혼례식 풍경을 어지럽게 담아내는 캠코더 화면.
수줍게 웃는 신부……. 신부의 얼굴을 담는 캠코더…….
신부, 절을 올리려 천천히 몸을 숙인다……. 그 뒤에 소희 얼굴이 살짝 보였다간…….
소희의 얼굴로 줌 되는 카메라…….
신부가 일어나자 여자의 얼굴이 다시 가려진다.
이발소 박씨: 승재야!
카메라를 얼른 내린다.
승재: 네.
박씨: 손바닥으로 딱 받치랑께. 요렇게.
다시 캠코더를 드는 승재……. 그러나 다시 카메라를 돌려 소희를 찾는다.
소희, 할머니를 모시고……. 인파들 가장자리에서 거니나다.
승재: (캠코더를 내리고 소희를 본다.)
경수: 야, 뭐해?
승재: (경수에게 캠코더를 넘긴다.) 잠깐만…….
승재 소희 쪽으로 걸어간다.
소희 승재를 발견하고 손을 흔든다.
옆에 있던 경수와 호걸이가 그런 승재를 본다.
그리고 그들도 소희를 본다.
누구지? 하다간……. 옆에 할머니를 보곤……. 소희를 알아본다.
씬 63. 저녁, 승재 집.
쩍, 갈라지는 수박. 빨간 속이 알차다.
호걸, 덥썩 하나 집으려는데 승재모 손이 와 탁 쳐낸다.
호걸: 아야.
승재모, 수박을 잘게 잘라 승재부의 입에 넣어준다.
호걸: (수박을 아구아구 먹으며) 형, 근데 소희는 왜 왔대?
승재모: 할매 죽기 전에 손녀 노릇 한 번 하려나보지.
호걸: 일 치고 내려온 거 아냐? 애 뱄던지, 뭐…….
승재모: 쓸데없는 소릴.
호걸: 은자도 서울 갔다가 배불러서 왔잖아.
승재모: 은자는 중핵교 간신히 나왔고, 소희는 대학생이라잖어.
호걸: 엄만, 애 배는데 그게 무슨 상관야…….
승재,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다.
승재: (일어나며) 나 좀 나갔다 올게.
승재모: 어디가. 밥 먹고 나가…….
하는데, 승재부, 승재모의 치맛자락을 꽉 밟는다.
씬 64. 밤, 소희 할머니 집 앞.
수박 한 덩이를 들고 서 있는 승재.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다. 담장 너머로 살짝 내다보는.
텅 빈 마당……. 여자 구두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승재, 한참을 망설이고 서 있다가 용기가 없어 그냥 뒤돌아 나오는데……. 저쪽 모퉁이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나는 것이 보인다.
승재, 연기 나는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담벼락 아래 쭈그려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소희.
꽁초를 두 손가락으로 쥐고, 쭉 빨아 후 하고 연기를 내뿜는다.
꿈뻑꿈뻑 쳐다보고만 있는 승재……. 소희, 승재를 보곤 꽁초를 발로 비벼 끈다.
할머니 고무신을 반쯤 구겨 신은 소희의 발.
소희: (옷을 탁탁 털며) 오빠 왔어?
소희, 손으로 담배 연기를 날린다.
소희, 기지개를 쭉- 펴며 집으로 들어간다.
멀뚱멀뚱 서 있는 승재…….
소희, 뒤를 돈다.
소희: 그거…….
승재: (수박을 내려다본다.)
소희: 나 줄 거 아냐?
씬 65. 밤, 소희 할머니네, 마루.
마루에 앉아서 수박을 먹는 세 사람.
소희, 승재, 소희 할머니……. 세 사람 다 말이 없다.
소희 할머니와 소희를 번갈아 보며 눈치 보는 승재……. 할머니, 잇몸으로 우물우물하며 힘들게 수박 물을 빨고 있다.
소희: 오빠.
승재: (화들짝 놀라며) 응?
소희: 나, 내일 시내 좀 데려다 줄래?
승재: 그래.
소희: 몇 시면 좋아?
승재: 아무 때나……. 뭐…….
소희: 5시 어때?
승재: 그래…….
그리고 다시 어색한.
씬 66. 소희 할머니 방.
방문을 닫고 들어오는 소희.
할머니: 어서 자라.
소희: 할머니 누워.
할머니: 그래……. 회사는 잘 다니는 거야?
소희: 네?
할머니: 먼저 번에 편지에 썼잖아.
할머니 편지 꾸러미를 꺼낸다.
소희, 편지들을 본다.
갈겨쓴 남자 필체의 편지들…….
소희: (얼버무리며) 응……. 잘 다녀요…….
(시간경과)
소희 작은 등 아래에서 그 편지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면서 작은 미소가 퍼진다.
씬 67. 마을, 거리.
마을의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가볍게 걸어가는 소희.
승재,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 듯 소희의 옆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본다.
소희: 마을이 작아졌네. 길도 좁아진 거 같구…….
승재, 소희의 모습이 눈부시다.
소희: 오빤 뭐해? (제복의 우체국 마크를 보고) 어- 우체국에서 일하는 구나.
승재: 응…….
소희: 이 근처에 은행은 어딨어?
승재: 요기 모퉁이 돌면 농협 있고, 저쪽으로 가면 축협……. 좀 만 나가면……. 수협도 있어.
소희: 외환은행은?
승재: …….
소희: 대중목욕탕은 있어?
승재: 있어. 읍내에.
소희: 사우나 돼?
승재: …….
소희: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도서관도 없을 테고……. pc방은?
승재: (민망한) …….
소희: 휴……. 약국은?
승재: (자신 있게) 있어!
씬 68. 약국.
경계의 눈초리로 소희를 훑어보는 선미.
냉랭한 기운이 흐른다.
소희: 이거 말고 타이레놀은 없어요?
선미: 없어요.
소희: 후.
승재: 차타고 나가면 큰 약국 있을 거야.
소희: 안녕히 계세요. (먼저 나간다.)
승재: 그냥 박카스 두 병 주세요.
선미: (두 병을 꺼내어 딱 소리 나게 내려놓는다.) 6백 원.
씬 69. 간이 정류장.
박카스를 마시면서 버스를 기다리는 소희와 승재.
승재: 올 시간이 됐는데…….
멀리, 시끄러운 북소리와 사람들 함성 소리가 들린다.
소리 나는 쪽을 보는 소희와 승재.
길 가던 마을 사람들도 멈춰 선다.
녹색 휘장을 찬 수몰지구 반대 시위단.
'환경 파괴 사업에 면죄부는 없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북을 치며 구호를 외치는 환경단체 점점 가까워진다.
소희: 뭐하는 사람들이야?
승재: 녹색 뭐라던가……. 정부 발표 났거든……. 밖 세우게 위쪽으로 댐이 만들어진데……. 그러면……. 이 동리에서 샘말까지……. 다 잠기나봐…….
소희: 여기……. 없어지는 거야?
승재: 아니……. 아직 결정 난건 아니고……. 계획안만……. 동네 사람들이 반대가 심해서 힘들 거란 얘기도 있구…….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지나가는 사람들.
승재와 소희, 구경하던 마을 사람들, 그들이 지나가도록 몸을 비켜준다.
단원1: 무책임한 수몰정책, 환경파괴 주범이다!
환경단체: 주범이다! 주범이다!
환경단체의 행렬 끄트머리에는 동네 순경 두 명이 따라간다.
전단지로 부채질을 하며 짜증난다는 듯 걸어가는 순경들.
승재: 어, 안녕하세요?
순경1: (인사를 받으며) 호걸이 녀석, 사고 안 치고 잘 있죠?
승재: 예.
그리고 계속되는 행렬.
그 뒤로 천천히 따라오는 버스. 운전기사 짜증난다는 듯이 빵빵거린다.
씬 70. 시내, 외환은행.
돈을 찾는 소희.
현금다발을 가방에 차곡차곡 넣는다.
씬 71. 롯데리아.
햄버거를 먹는 소희와 승재.
소희: 한 번 나오기 너무 힘들겠다……. 오빠, 여기 자주 나와?
승재: 나……. 나야. 맨날 오지.
소희: 왜?
승재: 일 땜에.
소희: 요 앞에도 우체국 있던데?
승재: 거기는 본점이고, 우리는 분점이고……. 그래…….
소희, 피식 웃는다.
소희: 중2땐가?
승재: ?
소희: 오빠 마지막 편지 받았던 때가…….
승재: 아……. 그런가?
소희: 오빠 편지는 아니였지……. 아빠 편지였지……. 화성에서 보내온……. 후후후…….
승재: 어…….
소희: 어떻게 중학교까지 들어 간 애한테 그런 거짓 편지를 보내?
승재: 후후……. 그냥…….
소희: 오빤……. 거짓 편지 쓰는 게 취미인가 봐…….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도…….
승재, 얼굴이 빨개진다.
소희 귀엽게 보이는 승재를 보며 웃는다.
씬 72. 이발소.
중학생 머리를 깎고 있는 이발소 박씨.
득삼은 소파에 앉아 여성중앙 과월 호를 뒤적거리고 있다.
승재, 멍하게 천장을 바라본다.
득삼: (책을 보다가 놀라서) 어……. 여기 우리 동네 아닌가……. 시정리 골짝서 샘말까지……. 다 나왔네. 이게 무슨 내용이야?
박씨: 댐공사로 사라지는 내륙지방 절경을 소개한다고 안써있소?
득삼: 야~ 그 놈의 댐인가 뭔가로 유명해 지네……. 허허…….
박씨: 허이구……. 좋기도 하겠수? 성님은 뉴스도 안 보요? 거시기, 댐 만드니라고 마을 전체를 기냥 물로 채워버린다는 거랑께.
득삼: (무신경하게) 에이, 그만한 물이 어서 나겄냐……. 그냥 겁주니라고 하는 소리겄지…….
박씨: 아따, 성님도 참말로, 납량 특선이요? 뭐땜시 겁을 줘……. 그라고 뉴스가 거짓깔하는 거 봤소?
득삼: 날 맑겄소- 하면 비 오고, 비 오겄소- 하면 해 뜨고……. 난 뉴스 안 믿은 지 꽤 되았어야…….
박씨: 으메, 답답한그……. 뭘 알아들어야 말을 허지. 성님이랑 나랑 똑같은 중졸인디 어째 대화가 안 통할끄나……. 승재야, 너는 이 사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냐?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는 승재. 대답이 없다.
승재: (나즉히) 아저씨……. 여자들은 뭐 좋아해요?
박씨: (뒤돌며) 누구냐? 약국집 딸?
승재: 아아뇨- 그냥 궁금해서요.
득삼: 여자들이 좋아하는 거 말여?
승재: 네.
박씨: 당연히 (가위를 묵직하게 흔들며) 이거, 이거지……. (중학생, 호기심 가득한 눈을 위로 치켜뜨자) 요놈의 자슥, 어른들 말씀하신디…….
득삼: 여자들은 말여…….
승재: 네.
박씨: 아, 그거 잘 하면 땡이랑께. (가위를 휘두르며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몰라요- 싫어요- 다음에요- 첨엔 다 그라는디, 그런 건 다 한 귀로 냄겨부러. 기냥 콱 자빠뜨리면, 못 이기는 척 댕강 넘어가는 것이 여자의 생리여. 눈치보고 미루뿔면 딴 놈한티 가는 것이 인지상정이랑께.
득삼: (허허거리며) 어이구, 잘도 아네.
박씨: 다 쓰라린 경험에서 터득한 진리 아니겄소.
승재: 그런 거 말구요…….
박씨: 데이트?
승재: 뭐……. 그런…….
득삼: 딴 댄 몰라도, 읍내 태평 다방은 아니다. 거기 마담이 팔자가 씨서 그런지, 청춘 남녀만 오면은- 일 년을 못 가요. 장의사 양씨, 태평 레지랑 살림 차렸다가……. 지금 그 꼬락서니 봐라, 그라고 봉춘이랑 용미도 날 잡아놓고 헤어진 거 아녀. 아마 뒤져보면 수어쌍 될 것이다……. 긍께 말여, 나가 예즉부터 마담보고 굿하라고, 굿하라고…….
승재: (별 도움이 안 되는 듯)
박씨: (못 박듯) 여자는, 새끈한 남자를 좋아한다!
승재와 득삼, 머리 깎던 중학생까지……. 갑작스런 박 씨의 발언에 깜짝 놀라 보는.
득삼: 네가 확신 하냐?
박씨: (여성중앙을 가리키며) 한 장 더 넘겨보소. 거 나왔소…….
득삼 한 장 넘긴다.
승재……. 잡지로 붙는다.
씬 73. 저녁, 소희네 집 앞.
자전거를 세우는 승재. 주머니에서 영화표 두 장을 꺼낸다.
머리를 매만지고 소희네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후다닥, 뛰어나오는 소희, 승재와 부딪힌다.
넘어진 소희, 벌떡 일어나 승재를 한 번 보더니, 뛰어가기 시작한다.
고모(off): 소희야. 소희…….
쫓아 나오는 고모와 고모부.
소희, 멀찌감치 뛰어가다가 신고 있던 신발이 벗겨진다……. 승재,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신발을 주워 자전거를 타고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씬 74. 거리.
헉헉거리며 뛰어가는 소희.
그 뒤를 바짝 따라붙은 승재의 자전거.
승재: 소희야, 타.
소희, 승재의 뒤에 훌쩍 올라탄다.
승재, 힘을 다해 열심히 페달을 굴린다. 뒤쫓아 오는 고모 네와 점점 멀어지는 소희와 승재.
씬 75. 산 아래.
체인이 풀린 자전거가 나무 옆에 세워져 있다.
소희의 발을 잡고 상처를 보는 승재.
소희: (따끔한 지 인상을 찌푸린다.)
승재: 약 발라야 되는데…….
소희: 됐어. 낫겠지, 뭐.
승재: 아니야. 곪을 거 같아……. 심하게 긁혔어.
소희: (발을 빼며) 안 죽어. 그나저나 자전거 고장 나서 어떡해?
승재: 어, 저거……. 괜찮아. 바꿀 때 됐어.
소희: 그럼 다행이구……. 오빠, 이제 가봐.
승재: 어……. 저…….
소희: 가보라니까.
승재: (머뭇머뭇)
소희: 뭘 그렇게 봐? 왜? 내가 왜 도망쳤는지 궁금해?
승재: 아……. 니……. 너……. 발 아파…….
소희 발……. 많이 까졌다.
(시간경과)
후둑, 후둑 비가 떨어진다.
나무에 기대어 잠이 든 소희, 빗방울에 번쩍 눈을 뜨는.
하늘도 무심하시지……. 원망스런 얼굴로 하늘을 보는데.
승재, 옷을 벗어 소희의 머리 위로 덮어준다.
큰 나무 위에 승재의 옷과 소희의 가방 등을 엮어서 엉성하나마 우산을 만든 승재.
구멍 난 러닝바람의 승재.
소희: 오빠, 이리 들어 와.
승재: 나 비 맞는 거 좋아해.
소희, 바닥에 늘어진 소지품 안에서 담배를 꺼낸다.
그런데……. 불이 없다.
승재, 얼른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는.
그런데……. 안 켜진다.
소희: 후유. (담배를 버린다.)
처량하게 비를 맞고 있는 승재, 점점 몸이 떨려온다.
소희: (자리를 비켜주며) 들어오라니까.
소희와 멀찌감치 떨어져 앉은 승재, 나무 우산 밑으로 고개만 비쭉 들이민다.
한참 말이 없던 두 사람…….
소희: 이이는 사…….
승재: (소희를 본다.)
소희: 이삼은 육, 이사 팔……. 이오 십, 이륙 십이…….
읊조리듯 구구단을 외는 소희.
승재, 그 소리가 마치 자장가라도 되는 양 지그시 눈을 감고 고개를 쑥- 내민다.
(시간경과)
저녁 무렵의 하늘……. 빗방울이 많이 걷혔다.
소희의 발에 소독약을 발라주는 승재.
소희: 오빠, 집에 왜 안가?
승재: 응? 으응…….
대답 대신 소희의 발을 한 번 더 살피는 승재.
소희: 그러고 보니까 옛날 생각난다. 그치?
승재: 응.
소희: 오빠……. 그 동안 할머니한테, 나대신 편지 읽어 드렸어?
승재: 으응…….
소희: 아빠 묘에 벌초도 오빠가 한 거지?
승재: 으응…….
소희: 오빠……. 나 보고 싶었어?
승재: 으……. 응…….
소희: (그런 승재가 귀여워서 웃음이 난다.)
승재: (쑥스러워 웃음이 난다.)
씬 76. 산 아래.
노을을 등지고 내려오는 두 사람.
승재의 등에 업힌 소희의 손에, 짝 잃은 신발 한 짝이 달랑달랑.
소희: (승재의 등에 기대어) 그 돈, 훔친 거 아냐. 엄밀히 말하면 반은 우리 아빠 꺼야. 나 키워주는 대가로 고모가 가진 거란 말이야. 근데 갑자기 등록금을 못 대주겠대. 돈이 없다는 거야. 쳇, 자기 딸 100만원 짜리 과외 시킬 돈을 있어도, 조카한테 줄 등록금은 없다 이거지……. 그게 말이 돼?
소희를 업은 승재, 발걸음이 마냥 가볍다.
비 개인 저녁 하늘이 아름답다.
씬 77. 밤, 우체국.
캄캄하고 텅 빈 우체국.
어둠 속에서 보이는 누군가의 실루엣…….
앞서는 승재, 소희는 조심히 승재의 뒤를 따른다.
씬 78. 국장실.
창문 한 가득 달빛이 들어온다.
피곤한 몸을 쇼파에 누이는 소희.
재, 선풍기를 틀어 소희 앞에 가져다 놓는다.
소희: (가만히 누워서) 나……. 오늘 잊지 않을 거야.
승재: (가슴이 뛴다.)
소희: (이를 악 물고) 나 혼자 힘으로 성공해서, 보란 듯 사람들 앞에 나설 거야. 그럼 오늘 일 같은 거, 그냥 웃으면서 말할 수 있겠지? 오빠……. 자는 거야?
승재: 아니…….
소희: 이쪽으로 와서 선풍기 쐐.
승재, 주섬주섬 소희 곁으로 간다. 이런 분위기가 영 어색한 승재…….
소희, 자신의 얼굴을 승재의 어깨에 기댄다.
소희: 사람이 왜 이렇게 순수해?
승재: (숨까지 꾹 참는다.)
소희: 오빠랑 같이 있으면 나까지 맑아지는 거 같아……. 오빤 정말 고마운 사람이야…….
끝까지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승재와 소희의 눈이 마주친다.
소희의 젖은 머리카락이 승재의 어깨를 타고 흘러내린다.
승재, 소희의 얼굴에 손등을 갖다 댄다. 작은 떨림이 느껴진다.
그윽한 눈으로 승재를 바라보는 소희.
소희: (승재의 손을 잡는다.)
승재: 나는……. 네가…….
소희: (승재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댄다.)
승재: (가슴이 덜컹한다.)
소희: 괜찮아……. 괜찮아…….
승재의 떨리는 손이 소희의 가슴에 살포시 얹어진다.
눈을 감는 승재……. 마치 꿈꾸듯이……. 느낀다……. 그리고 깊게 키스하는 두 사람.
씬 79. 소희 할머니네.
소희를 차에 태우는 고모. 쾅! 하고 문을 닫는다.
고모: 엄마- 우리 간다구.
소희, 자포자기 한 얼굴로 창밖을 멍하니 바라본다.
운전석의 고모부……. 백미러로 흘끔 소희를 본다.
소희: (뚱하게) 뭘 봐요.
고모부: (한심한 듯 푹- 한숨을 내쉬는)
굳게 닫힌 할머니의 방문.
고모: 엄마. 진짜 안 나와봐? 우리 그냥 가요.
앞좌석에 올라타는 고모.
천천히 차가 출발한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소희……. 모퉁이에 숨어있던 승재의 모습이 보인다.
우체부 제복을 입은 승재……. 벽에 바짝 기대어 소희를 보고 있다.
차창을 내리는 소희……. 고모와 고모부가 눈치 채지 못하게 손을 흔든다.
승재 역시 소희를 향해 눈에 띄지 않게 손을 흔든다.
멀어지는 차……. 소희, 차창을 열고 고개를 내민다. 그리고 아주 밝게 답한다.
소희: (입모양으로만) 안녕.
승재, 멀어지는 차를 향해서 계속 손을 흔든다.
그렇게 우두커니 한참동안 서 있다.
씬 80. 국장실.
국장: 으휴, 더워…….
창문을 여는데……. 낡은 소파 밑으로 신발 한 짝이 보인다.
소희의 구두……. 국장, 갸우뚱하더니 그냥 책상 서랍에 넣어 둔다.
씬 81. insert 쇼핑몰 외경.
씬 82. 서울, 구두 가게.
다양하고 모양의 구두들이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다.
구두를 고르는 소희, 프렌치 코트를 입었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구두 신는 소희. 꼭 맞는 구두…….
소희, 거울에 이리저리 비춰본다. 신어만 보고 쌓아놓은 구두가 벌써 여러 켤레…….
여점원, 짜증난다는 듯이 한숨을 푹푹 내쉰다.
소희의 그런 모습을 귀엽게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
남점원: 일 년에 10켤레씩만 직수입하고 있는 물건입니다. 이걸로 하시겠습니까?
성호: 그러죠.
구두를 벗으면서도 눈은 소희에게로 가 있는 성호…….
소희, 구두를 벗는다.
소희: 이 디자인으로 굽 낮은 거 없어요?
여점원: (고개를 내젓는다.)
소희: (고민하는) 굽이 너무 높은데……. 앞코가 뾰족한 거 같기도 하고…….
여점원: (짜증나 죽겠는)
(시간경과)
카운터의 점원……. 거의 폭발직전이다.
보면, 카운터 위에 동전과 천 원짜리가 잔뜩 쌓여있는…….
소희, 전혀 미안한 기색도 없다.
뒤에서 계산할 차례를 기다리는 성호.
점원: (한숨을 푹 내쉬며) 카드 없으세요?
소희: 참참……. 있어요. 여기 (카드를 꺼낸다) 포인트 적립카드요.
점원, 기가 막힌…….
점원: (성호에게) 뒷손님 먼저 주세요.
소희: 이봐요. 저도 바빠요.
점원: 뒷 분은 금방 끝나니까 기다리세요.
성호: (카드를 내민다.)
소희, 성호가 내미는 카드를 가로채며.
소희: 오래 걸리면 얼마나 걸린다고 그래요? 먼저 해주세요.
점원: 참나…….
성호: 제가 좀 바빠서 그럽니다.
소희: 그럼 같이 세요. 셋이 같이 하면 금방 끝나잖아요.
(디졸브)
머리를 모으고 동전과 천 원짜리를 분류하는 세 사람.
소희: 19만 9천 4백 원. 맞죠?
점원: 맞네요.
소희, 쇼핑백을 들고 나간다.
성호, 소희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본다.
새 구두를 신고 가는 발걸음이 무척 가볍다.
성호, 입가에 싸악- 미소가 번진다.
씬 83. 서울, 대기업 면접장.
그 구두를 신고 바르게 앉아있는 소희.
다부진 표정으로 면접관이 묻는 말에 또박또박 대답하는 모습이 스케치된다.
일렬로 앉아있는 면접관들……. 한 면접관, 얼굴의 반을 서류철로 가리고 있다.
구둣가게에서 마주쳤던 성호……. 성호, 서류철로 얼굴을 가리고 소희를 본다. 그리고 소희의 구두를 본다……. 그 안에서 꿈틀대고 있는 무엇을 본다.
씬 84. 회사복도.
면접이 끝나고, 긴장이 풀려서 돌아가는 응시자들…….
소희, 다리를 두드리며 걸어가는데……. 쫓아 나오는 성호.
성호: 저기…….
소희, 뒤돌아본다. 전혀 못 알아보는…….
성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저번에……. 구두 저기, 그러니까, 동전 세고…….
소희, 이상한 사람 보듯이 성호를 쳐다보는데,
비서: 다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어가시죠.
비서에서 끌려가다시피 들어가는 성호.
그때까지 성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소희.
다른 응시자들이 부러운 눈으로 쳐다본다.
응시자1: 한 이사님이랑 잘 아시나 봐요.
소희: 네? 이사라구요? 저 사람이요?
응시자1: 우리 시험 볼 때 면접관이었잖아요. 서로 아는 사이 아니었어요?
씬 85. 회사 로비.
경비의 인사를 받으며 들어오는 성호. 직원들이 꾸벅꾸벅 인사를 한다.
멀리서 성호가 들어오는 것을 본 소희, 바삐 계단으로 올라간다.
씬 86. 엘리베이터.
성호와 직원 몇 명이 탄 엘리베이터…….
땡, 하고 3층에서 문이 열리면, 서류를 든 소희가 살짝 올라탄다.
성호를 보고 깍듯하게 목례를 올리는 소희.
이윽고, 다른 층에서 사람들이 모두 내린다. 소희와 성호……. 둘만 남은 엘리베이터.
소희, 성호가 언제 말을 걸어줄까-하는 기대감으로 서 있다.
성호: 몇 층 가세요?
소희: (뜨끔하여) 네?
성호: 15층 위론 다 임원들 방인데…….
소희: (그제서야 가장 꼭대기 층을 누르며) 오……. 옥상이요.
성호, 빙긋이 웃는다.
20층에서 멈추는 엘리베이터.
성호, 내리자 서서히 닫히는 문……. 소희, 아쉽고 창피한 얼굴인데…….
다시 열리는 문.
성호: 저……. 시간 괜찮으면, 들어가서 차 한 잔……. 할래요?
소희: (서서히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엘리베이터 밖으로 천천히 내딛는 소희의 구두.
씬 87. 마을 외경.
발목까지 쌓인 낙엽들……. 늦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낙엽 위를 가르는 자전거 바퀴.
우체가방을 맨 승재가 열심히 페달을 굴린다.
승재(off): 잘 지내니? 소식이 끊긴지 벌써 세 달이 지났구나.
소희 씬
소희, 성호와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
둘의 모습 다정스러워 보인다.
씬
씬 151. 국도.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있는 소희.
소희부(E): 그나마 내가 눈을 다시 뜨는 시간이 너의 생일 즈음이란 것이 다행 같다. 그러고 보니……. 화성에서도 여전히 나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구나. 눈을 뜨면 어디서든 너를 볼 수 있고, 손을 뻗으면 언제든 널 느낄 수 있거든……. 별 하나하나가 모두 네 눈동자고, 바람 하나하나가 모두 네 노랫소리인 걸 보니……. 아무래도 이곳은 천국인가 보다…….
소희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씬 152. 간이 정류장.
버스에서 내리는 소희.
소희부(E): 아, 그리고 얼마 전에……. 널 잘 아는 사람이 이곳에 왔단다.……. 그 사람과 함께……. 너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사랑하는 딸에게……. -화성에서 아빠가…….
씬 153. 수몰이 된 고향.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저수지.
댐 위에서 저수지를 내려다보는 소희.
씬 154. 댐 근처의 작은 식당.
레프 팅을 온 듯 한 대학생 무리들……. 시끌시끌하다.
구석에서 앉은 소희.
주인아주머니가 주문을 받으러 온다.
주인: 메뉴가 두 개 뿐인데. 김치찌개하고 된장찌개.
소희: (웃으며) 된장찌개로 주세요. 저……. 여기 민박도 되나요?
주인: 방이 하나 있기는 한데, 좀 눅눅해서……. 오늘 묵으실 라우?
소희: 네. 괜찮으니까 그 방으로 주세요.
주인: 그래요, 대신 내 싸게 줄게.
소희: 고맙습니다. 참, 아줌마……. 저……. 혹시 여기 있던 우체국 직원들, 다 어디로 갔는지 아세요?
주인: 우체국이라면…….
하는데, 김 씨가 자전거에 반찬거리를 싣고 들어온다.
김씨: 배춧값이 너무 올랐어.
소희: 아저씨…….
김씨: (누군가 한다.)
소희: 저예요. 소희요.
김씨, 그제서야 알아보는.
씬 156. 강이 한 눈에 보이는 곳.
소희: 여기가 다 마을이었다니……. 우리 마을이 이렇게 큰 줄은 몰랐어요.
김씨: 마을 뿐 아니라 산이고 들이고 다 잠겼으니까…….
소희: 아저씨는 계속 남아 계셨던 거예요?
김씨: 젤 먼저 떠났드랬지……. 그런데 흘러흘러 다시 돌아오게 되더라구.
소희: 저……. 승재 오빠는 어디로 갔는지 아세요? 오빠가 저한테 소포를 보냈는데, 소인을 알아볼 수가 없어서요.
김씨: (흠칫한다.)
소희, 소포 포장지를 보여준다.
포장지를 유심히 보던 김씨…….
김씨: 이거……. 대한민국 소인이 아닌데……. 처음 보는 소인이야.
소희: 오빠가 그럼, 외국에 나갔나? 제 생일에 맞춰서……. 오랜만에 보낸 편지에요……. 이젠 이런 거 안 보낼 줄 알았는데……. 어릴 적 생각나서……. 보낸나봐요……. 후후…….
김씨: 아마 승재가 보낸 게 아닐 게다…….
소희: ?
김씨: 정말 몰랐구나, 너…….
소희: 뭐를요…….
김씨: (쓴웃음을 머금고) 승재, 진짜로 갔다.
소희: 네?
김씨: 그 녀석……. 아주 가버렸어.
소희, 불안한 느낌이 엄습해 온다. 하지만 도무지 믿어지질 않는다.
소희: 어딜요, 아저씨…….
김씨: …….
소희: 아저씨. 오빠, 어디 갔어요.
김씨: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소희: 하, 말도 안 돼……. 오빠가 어딜 가요……. 갈 데가 없잖아요. (점점 울음이 섞인다.) 아저씨, 속 시원히 말씀 좀 해주세요. 오빠, 어디 갔냐구요……. 승재오빠, 어디 갔냐구요……. 도대체 어디를 가요.
소희, 무너져 흐느낀다.
김씨, 소희를 다독인다.
한참을 흐느껴 우는 소희…….
그 동안의 설움을 모두 토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