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요약> 거듭나지 않으면/ 요한복음 3:3-8
니고데모와 만나 거듭남에 관한 지혜를 주신 예수의 가르침은 종교개혁자 루터에게 그리고 라디칼 종교개혁자 칼슈타트에게 그리고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웨슬리는 18세기 영국성공회 사제였는데, 모라비아 형제단 신자들의 신앙에 감명을 받고, 또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듣다가 회심을 경험하였습니다. 비록 자신은 성공회 사제였지만, 모라비아 형제단 평신도보다도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지 못하고 살았다는 회개의 마음이 생겼고, 믿음이야말로 살아서 우리를 구원하는 원동력이라는 것을 머리로만 믿다가 귀로 다시 듣는 순간 자신을 돌이켜 거듭남의 체험을 한 것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바리새파 교사인 니고데모에게 예수께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는 육적인 것에만 갇혀 사는 사람은 영적인 것을 알 수도 볼 수도 없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 나라는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인데 그 나라는 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육적인 것에만 정신을 팔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거듭난다는 말의 어원은 “위로부터 난다”는 말입니다. 육신을 가지고 세상에 때어 난 것과는 다른 방식의 출생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거듭남”의 영적인 차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영적인 차원을 우리의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문제로 고민하였던 라디칼 종교개혁자가 바로 칼슈타트입니다. 루터의 동료였고, 루터의 개혁사상에 감동을 받아 개혁에 동참하게 된 교수, 성직자입니다. 그런데 그는 루터의 만인 사제론에 감동을 받고 즉시 실천했습니다. 성직자 교수의 복장을 벗어던지고 자신을 “새로운 평신도”라고 선언했습니다. 이름을 부를 때도 “안드레아스 형제”라고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신실한 평신도가 교황보다도 더 신앙이 깊을 수 있다는 말을 할 정도였고, 자기 자신이 가진 것들을 내려놓아야 하나님의 뜻을 진정으로 따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결국 자기의 의지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삶을 살기로 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에게 거듭남이고 이것을 유지하는 것이 성찬식이라고 보았습니다.
성찬을 받을 때에 거기에 그리스도께서 어떤 방식으로 함께 하는가에 관한 논쟁은 종교개혁부터 지금까지 있는 논쟁입니다. 그런데 칼슈타트에게 이런 논쟁은 무의미합니다. 성찬을 평생 받아먹어도 그 사람이 성장하지 않고 그 자리에만 머물면 무의미한 성찬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찬식은 그래서 “성화”의 과정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찬은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 사람임을 늘 기억하는 시간이고,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는 주님의 말씀은 성찬을 받을 때마다 상기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 우리의 계획에 따라 세상을 살고 있지만, 우리의 정신을 이끄시는 분은 반드시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서를 읽으며 배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속에서 느껴지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우리 삶의 목표가 될 때, 우리는 성화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2024년 6월 16일
홍지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