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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0. 묵상글 들 ( 삼위일체 대축일-삼위일체의 교리가 아니라 삼위일체의 사랑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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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0.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삼위일체 대축일-삼위일체의 교리가 아니라 삼위일체의 사랑을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기 힘들고 그래서 믿기도 힘들다고 많이 얘기합니다.
저도 그랬던 적이 오래전에 그러니까 삼사십 년 전에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삼위일체 신비를 이해하고 믿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고,
삼위일체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느끼는 것이 어렵다면 어렵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이 어렵지 않고,
폭포수처럼 쏟아부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것과 느끼는 것이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은 알겠는데
너무 엄하고 무뚝뚝하셔서 좀처럼 사랑을 겉으로 표현하시지 않아서
그 사랑을 느낄 수 없었다고 아쉬움을 토로하는 것과 같은 것일까요?
다시 말해서 육신의 아버지처럼 하느님 아버지께서 표현을
잘 안 하시거나 못하셔서 우리가 사랑을 느끼는 것이 어려운 건가요?
비슷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물론 하느님은 사랑을 표현하지 않거나 못하시는 분이 아니지만
하느님의 사랑 표현은 육신 아버지의 사랑처럼,
아니, 육신 아버지의 사랑보다 훨씬 더 우리가 느끼기 어렵습니다.
우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은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시는 것으로
표현하셨는데 그 사랑이 이천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여기의
내게도 보내시는 사랑이라고 느끼는 것이 어렵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하셨지만
시간과 공간의 존재인 우리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이 사랑을 느끼는 것이 힘든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또는 "성령의 힘으로"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요.
성령만이 천상과 지상의 차이를 초월하게 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성령의 인도를 받는 우리어야 한다는 점이고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는 성령을 받는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이 말은 악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에서 이탈한다는
뜻도 되지만, 악령의 인도를 받지 않더라도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모르고 세상의 자녀로 산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예수가 우리의 그리스도라는 것도,
그리스도가 우리의 형제라는 것도,
우리 신분이 종이 아니라 주님처럼 자녀라는 것도 모르고 산다는 뜻이지요.
관건은 이 성령의 인도를 우리가 받느냐 받지 않느냐 그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삼위일체로 사랑하시는 하느님 사랑을 느낄 수 있고,
이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형님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데
성령은 우리의 영에게 증언한다고 오늘 바오로 사도는 얘기합니다.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성령의 상대자인 우리의 영이 성령을 잘 상대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이 성령을 외면하고 악령과 상대할 수도 있고,
우리의 영이 복음의 더러운 영처럼 세상에 더럽게 집착하는
육의 영이 될 수도 있는데 우리는 프란치스코의 말처럼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야겠습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교리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사랑을 받고 느끼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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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0. 삼위일체 대축일. 고도미니코 신부님.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터키 에페소 기도의집
교회는 성령강림 대축일 다음 주일에 삼위일체((三位一體) 대축일을 기념합니다. 삼위일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렁인 삼위가 일체이신 한 분 하느님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하느님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삼위일체는 세 위격(位格 persona) 이 완진히 서로 구별되면서도 동시에 한 신성(神聖)윷 이룬다는 뜻이며 인간이 에수 그리스도를 통히여 성령 덕분에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그리스도교의 구원에 대한 근본 진리를 요약한 개념입니다. 또한 삼위일체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삶의 중심이 되는 신비이며 하느님 자신의 내면 진리이므로 다른 모든 신앙 진리의 왼천이며 다른 신비틀을 밝혀 주는 기본 진리입니다.
이는 마치 태양과 태양에서 나오는 빛과 그 빛에서 발하는 열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바라보며 우리 또한 일상의 삶에서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치된 삼위일체적인 삶을 사는지 성찰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 처럼 생각이 곧 말이 되고 말이 행동과 완전히 일치된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는 주님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사랑에서 출발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일치하고자 하는 온 마음과 뜻을 다하는 자세가 삼위일체적인 삶의 출발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얘기하는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은 하느님의 자녀답게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삼위일체적인 삶은 하느님의 영, 특히 분별의 영으로 인도될 때 가능합니다.
분별의 영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특별히 다음과 같은 것들을 인도합니다.
분별의 영은 절도 있는 삶을 살게 합니다..
분별의 영은 모든 사람과 상황과 사정에 올바른 태도와 자세를 취하게 합니다.
분별의 영은 현명하고 지혜롭게 비밀을 간직하게 합니다.
분별의 영은 사람과 사정에 따라 잘 생각하여 배려하게 합니다.
분별력은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조심성 있게 대하게 합니다.
이렇게 분별의 영이 생각과 말과 행동에 깃들게 되면 영으로 충만하여 그다지 말을 많이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꼭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게 되고 자연 스럽게 절제 있는 말이
나옵니다.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게 됩니다.
하느님의 영에서 오는 이 분별의 영으로 인도되는 삼위일체적 삶은 다른 이들이 지켜 보지 않을 때에도 언제나 행동에 항구적 성실성을 지니며 어떠한 비판이나 아첨에도 동요되지 않는 평화를 간직하게 됩니다. 행동은 생각과 말씀의 결실이며 존재의 문이며 창입니다. 우리가 행동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행동하는 신앙이되어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명령하고 가르치는 것을 말과 표양으로 드러내는 복음의 증거자가 되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합시다.
고 도미니코 o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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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0. 삼위일체 대축일. 키엣대주교님.
모든 사랑의 시작, 삼위일체 하느님.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삼위일체 하느님은 인간의 사유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위대하고 심오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는 그 어떤 말로도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가톨릭 교부들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연구하였고 그 중 하나가 ‘십자 성호경’입니다. 거룩한 십자를 그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이라고 하는 간단하면서도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기도문입니다.
십자 성호경은 그리스도인이 표하는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표시이며 축복과 기도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수없이 많이 성호경을 바칩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잠들때, 성당에 들어설때, 성체성사를 할 때, 식사 전후, 십자가 앞을 지날 때, 어려움에 처했을 때 등. 이마에 손을 얹어 전능하신 하느님을 찬양하고 가슴에 손을 얹으며 아드님이신 주님의 사랑을 축복합니다. 그리고 왼쪽 오른쪽에 손을 대며 성령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처럼 성호경을 바치며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신을 봉헌합니다. 십자 성호경은 세례받은자 곧 나의 영육이 주님 안에 있음을 표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십자 성호를 그리며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 사랑을 마음에 새깁니다. 그리고 매일 수도없이 많이 성호경을 바치며 주님과 같이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게해달라고 기도드립니다.
모든 사랑의 시작은 삼위일체로부터 시작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과 같이 완벽한 하나됨의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 속에 있을 때 느끼는 행복만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세례로써 세상의 원한과 죄를 없애는 사랑을 전하고 전쟁과 분열의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출 수 있는 사랑의 불꽃을 전해야 합니다. 또한 용서와 사랑이 사라지는 메말라가는 사회에 사랑의 비를 전해야합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고귀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성호경을 바치며 우리 마음 깊은 곳에 하느님의 거룩한 사랑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주님의 무한하고 충만한 사랑 속에 살수 있게 도와주소서.
주님 사랑의 용광로 속의 불꽃이 되어 주님의 사람을 전하는 도구가 되게 하여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세례를 받으며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를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2.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 안에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3.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를 이해한다면 나에게 형제 자매는 어떤 존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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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0. 삼위일체 대축일.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작년 이맘때 저는 지독한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한 달이 넘었을 시점이었지요. 이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히 어머니 잃은 슬픔을 이겨내리라 생각했습니다. 사실 장례식장에서 또 장례미사 때도 웃으면서 손님들을 맞이하는 저의 모습을 보고서 동창 신부들은 저를 걱정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밤에 또 새벽에 혼자 있는 시간은 솔직히 힘들었습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듣고 싶고, 어머니가 보고 싶었습니다.
저와 50년 이상을 함께 해주셨으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일인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좋은 곳’에 가셨을 것이라고 믿지만, 어머니와 떨어져 있는 저 자신은 참 힘들었습니다.
슬픔은 사람을 고립시킵니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주지 않을까 싶어 가족조차도 만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기도했고,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비로소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람과의 만남은 감정을 다치게 할 수도 있지만, 주님께서는 제가 어떤 감정 표현을 해도 다 받아주셨습니다. 저의 감정에 상대방도 흔들리는데, 주님께서는 전혀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큰 위안이 되었고 큰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침묵이 얼마나 큰 은총이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내 감정을 받아주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흔들리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각기 다른 위격을 가지고 있지만 한 몸을 이룬다’라는 뜻입니다. 사실 이해하기 힘든 교리입니다. 그런데 서로 다른 세 위격이 하나의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묵상을 할 수 있게 합니다.
일치의 모범을 보여주시면서 우리 역시 당신의 일치 안으로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향한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세례를 주고, 모든 것을 가르치라는 사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우리는 사람에게서 위로를 받고 사람에게서 길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더 큰 분이 있습니다. 바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십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위로를 받고 그 안에서 길을 찾아보십시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전혀 흔들리지 않으시면서 우리에게 힘과 위로는 물론이고 해결의 길까지 열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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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는 삶과 정신의 여백에 해당한다. 그 여백마저 없다면 이 각박한 세상에서 어떻게 숨을 돌리며 살 수 있겠는가(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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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도 사랑하세요.
신학교에 입학하고 첫 번째 여름 방학 때였습니다. 방학을 맞이해서 지방에 사는 선배님을 찾아갔습니다. 방학하면 꼭 놀러 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지요. 먼저 선배 신부님의 본당 신부님을 만나 인사했습니다. 그랬더니 잘 왔다면서 밥 먹으러 가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배님은 다른 차를 타고, 저는 신부님과 함께 신부님 자가용을 타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때까지 어른이 운전하는 차를 타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본당 신부님 운전하시는데 방해되지 않도록 뒷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때 신부님께서는 저를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내가 네 운전사니?”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뒷자리는 사장님 자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한 번도 어른이 운전하는 자가용을 타본 적이 없으니 이렇게 실수한 것입니다.
모르면 당연히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수 자체에 집착하고 두려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실수할 수도 있는 것을 하지 않아야 할 것처럼 부끄러워합니다.
의연하게 사는 것은 실수도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요? 훨씬 더 살기 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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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0. 삼위일체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신부님.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참으로 아름답고 가슴 떨리는 신비입니다.
알아듣기에는 어려워도 참으로 벅찬 사랑의 신비입니다.
너무 깊어 헤아려지지 않아도, 오히려 다 헤아려지지 않기에 더 깊이 매료당하는 신비입니다.
흔히들 “삼위일체”를 알아듣기 힘든 신비라고들 여깁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신비”의 내용을 알아듣는 데는 한계와 어려움이 있다손 치더라도, 중요한 것은 “삼위일체”를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듣는 일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삼위일체라는 이 사실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그 신학적 의미를 알아듣는 일입니다.
우선 하느님께서 “삼위로서 일체이신 분”이시라는 것은 단지 하느님의 신비를 말해주는 것을 넘어서,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말해주는 신비입니다.
곧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는지를 말해주는 축복의 신비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 가운데 나타났는지를 말해주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이 신비는 하느님께서 사랑이심을 드러냅니다.
이 신비는 세상을 사랑하시어 아드님을 보내시어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에 대한 축복을 말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참사랑의 신비입니다.
그러니, “삼위일체의 신비”는 곧 참사랑의 신비이다.
이 참사랑을 단적으로 표현해 본다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당신 생명의 진리가 나타나게 하시고, 당신의 숨결인 성령께서 그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그 깨달음과 실천으로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사랑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시라는 의미는 “하느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살아계시고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지금 바로 이 자리에 현존하신다.”는 사실, 지금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함께 한다”는 것은 복음적 의미로는 “사랑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곧 “사랑으로 속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함께 있음”이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항상 삼위로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그 이름마저도 ‘항상 함께 계시는 분’, ‘임마누엘’이시듯이,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기에,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삼위일체의 신비는 바로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 참사랑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함께 있음”, 그 자체가 이미 사랑입니다.
함께 있는 것, 그것은 유대와 연대의 관계 맺음이요, 관계 맺는 것, 그것은 함께 만나고 사귀고 친교를 나누는 일입니다.
곧 벗이 되는 일이요, 우정을 나누는 일이요, 사랑을 나누는 일입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인간의 동행자로 삼으시고, 벗이 되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으로 함께 있음, 사랑으로 서로 속해 있음, 사랑으로 서로의 것이 됨, 이는 참으로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오늘 이처럼, 우리가 “함께 있음”도 사랑입니다.
이 “함께 있음”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은총인지! 참으로 큰 행복인지! 함께 있지 못하게 될 때라야 이를 더 잘 알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함께 있음”에 참으로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함께” 여기에서 만나 한 분이신 주님을 찬미하는 일,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함께 서로 사랑하는 일,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토록, “삼위일체의 신비”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얼마나 밀접하게 얽혀계시는 지를 말해줍니다.
하느님과 우리는 결코 분리될 수가 없는, 깊이 관계 지어져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친교가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동행하심을 드러내줍니다. 곧 ‘동행’하시는 하느님임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생명을 나누는 일에 적극적으로 함께 해야 하고, 생명이 침탈당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함께 막아야 하는 소명이 있습니다.
이토록, “함께 있음”, 바로 이것이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은 이토록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토록 거룩한 일입니다. 참으로 축복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20)
주님!
가르치기에 앞서 먼저 가르침을 배워 익히고 지키는 자 되게 하소서!
당신께 뿌리박고 살아가게 하소서!
무엇을 하더라도 당신과 함께 하게 하소서!
어디에 있더라도 당신께 눈을 떼지 않고 당신께 속한 자 되게 하소서!
당신의 숨결이 되고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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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0. 삼위일체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사랑으로 우리를 빚어 만드셨고,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도 당신의 사랑으로 살기를 기대하며 또 살 수 있도록 일깨워 주십니다.
이 시간 성부, 성자, 성령의 위격으로 계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기쁨을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성그레고리오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어떻게 한 분이십니까? 하는 질문에 ‘세 개의 등불이 가까이 있다면, 그 사이에는 빛이 하나로 섞여 세 개의 빛이 뭉쳐졌다고 하지 않고 빛이 밝다고 하듯이 신성(神性)도 그렇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태양자체를 성부로, 지구까지 오는 빛을 성자로 그 빛이 따뜻하게 하고 자라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을 성령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 다 부족합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아버지는 우리 앞에 계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 곧 생명을 주신 모든 것의 근원이시고 목표이시며 시작이요 마침이십니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세상을 위해 아들을 넘겨주신 분입니다.
아들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십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을 바치신 분으로 존경과 순명을 가르치신 분입니다. 죄인의 대변자요, 억압받고 소외받는 이들의 변호자이십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 머물도록 이끌어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하며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해 주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며 우리를 대신해서 탄식해 주시고 새로움을 더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각기 역할이 구별되면서도 하나이신 하느님을 사랑 안에서 만나시길 기도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416). 그래서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요,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까롤로 까레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면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세상 끝날까지”함께 계신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더욱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신 분으로서 함께 계신다니 가슴 벅찬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약의 예언자들에게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레미야가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예레미야1,6)하며 예언자 직무를 거절할 때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예레미야1,8)고 하셨고, 모세도 “저는 입도 무디고 혀도 무딥니다”(탈출4,10)하고 직무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 “내가 너희를 도와 주겠다”(탈출4,15)고 하셨습니다. 에제키엘서 2-3장에 보면 에제키엘이 소명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도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며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워라” 하셨고 에제키엘은 “그것을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는 약속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복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도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일입니다. 사실 눈으로 보았다고 해서 저절로 믿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주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침을 지키게 하라는 할 일을 주시고 함께 있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약속을 믿고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한 사람은 믿음의 눈이 새롭게 열렸습니다. 사도행전이 바로 그것을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사도행전을 꼭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믿음은 주님의 말씀을 따름으로써 더욱 다져지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커지길 원하는 사람은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사십시오. 큰 믿음을 소유하고 싶은 사람은 사랑하십시오.
우리는 흔히 부부는 일심동체(一心同體)라고 합니다. 물론 동상이몽(同床異夢)인 분도 계시겠지만 일심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면 한마음(일심)이 되고 한마음이 되면 두 몸은 이미 한 몸(동체)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한마음, 한 몸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극복할 힘이 있습니다. 가난해도 풍요로울 수 있고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더욱, 의지하고 더욱 일치합니다. 힘들면 힘이 들수록 더 큰 사랑이 요구됨을 압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멋진 집에 살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높은 지위에 있어도 외롭고 쓸쓸하게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 어느 것으로도 일치할 수가 없습니다. 이 관계는 부부사이의 관계만이 아니라 인간 삶의 모든 관계가 그렇습니다. 부자관계도 사제관계도 우리 이웃과의 관계도 사랑으로 일치하지 않으면 혼란과 많은 상처가 남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 주님께서 명하신 가장 큰 계명이 사랑입니다.
서로간의 관계에 이해타산이 끼어들면 힘들어집니다. 나도 피곤하고 상대도 피곤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 성령이 사랑으로 하나이듯 우리도 서로 사랑하여 하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그곳에 주님이 함께하십니다.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운데 믿음이 생길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운데 더 많이 행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이 사랑하십시오. 많이 행하게 될 것이고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만약 내가 아직 주님이 함께하심을 느끼지 못한다면 더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분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커다란 맛을 느끼는데 있지 않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결단을 내리는데 있습니다”(소화 데레사).
아무리 좋은 가전제품도 전기 코드를 빼어 놓으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아무리 많은 은총을 주시고자 해도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코드를 빼놓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먼저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사랑할 수 있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힘들고 지쳤을 때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고 약속하신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연세 많은 할아버지께서 외출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손자, 손녀들이 집으로 오시는 길에 H.O.T 음반을 사다 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손바닥에 H.O.T 라고 쓰고 외출을 하셨습니다. 집으로 급히 돌아오다가 손주들하고 약속한 것이 생각나 손바닥을 봤습니다. H.O.T,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H=호떡, 0=오뎅, T=튀김을 사가지고 집으로 가셨습니다. 그날 할아버지께서 몹시 고독하셨답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서로 다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내면의 일치, 마음의 하나가 됨을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 일인지요? 더욱이 주님의 마음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고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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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0. 삼위일체 대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이다. 부활시기가 부활의 가장 큰 결실인 성령강림 대축일을 지내면서 끝났다. 이렇게 부활시기가 끝난 후 바로 삼위일체 축일을 지내는 것은 모든 구원질서의 원천은 삼위일체이며, 세상의 구원업적은 바로 삼위일체의 업적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창조와 역사를 통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의 강생과 파스카 신비, 그리고 성령강림의 신비가 발하는 빛들이 삼위일체에서 구원의 업적이 이루어졌음을 이해할 수 있다. 시인 단테는 “신곡” 천국 편 제33곡 85-87에서 내세에서의 상징적인 모험 여행의 결론으로 모든 것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에 귀결시키고 있다: “그 깊이 속에서 나는 보았노라. 조각조각 우주에 흩어져 있는 것들이 사랑으로 한 권에 엮어져 있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신학적인 삼위일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조화를 이루고 있는 신비를 전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오늘,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며,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너희 마음에 새겨 두어라.”(신명 4,39). 주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랑의 책임을 충만히 지고 계신 분으로 나타난다.
사도 바오로는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즉 우리가 ‘하느님의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아버지라 부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함께 하므로 하느님의 생명에 함께 참여한다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랑의 생명에 신비롭게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형제로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에 아들의 차원으로 우리가 들어갔고, 그 때문에 우리는 삼위일체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즉 아버지의 자녀가 되어 그리스도께서 영광중에서 부르고 계신 그 이름, “아빠!”를 우리도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 신비에 참여하고 있다면, 이제는 그 때문에도 “삼위일체”가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거처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은 우리가 “새로운 인간”(갈라 6,15; 2코린 5,17 참조)으로 “변화”하고 우리의 생활이 윤리적, 영적으로 변화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이것은 우리 삶 속에서 항구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노력에 성령의 이끄심을 우리는 체험할 수 있을 것이며,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기쁨을 언제나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아버지”로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있도록 그분께 우리 마음을 열어놓는 자세가 필요하다.
복음: 마태 28,16-20: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라”
복음에서는 명확하게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라.”(19절)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세례성사는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과 함께 그 신비를 기념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께 종속되는 그런 멍에와 같은 것이 아니라, 성 삼위께로 가는, 그 신비에 참여하는 움직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개인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가 이 신비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을 예수께서는 하시고 계시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을 가르쳐라!”(19-20절). 이렇게 이루어진 공동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봉헌된 믿음의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신비에 참여하여 그 생명을 누리는 이 교회 공동체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알리고 생활의 증거로써 온 세상에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우리의 삶이 그러해야 한다. 영광을 받으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20절)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임마누엘”로서 우리를 아버지께로 성령 안에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우리에게 베풀어진 구원의 은총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자기 확산적 사랑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완전한 사랑은 하나가 되어, 서로가 주고받는 사랑이 완전한 모습이며, 그 사랑은 당신 안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창조와 구원의 역사로, 그리고 아들의 강생과 파스카 신비로, 그리고 성령강림으로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셨다. 이 구원의 신비를 다시 한번 묵상하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날이다.
이제 우리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 진정한 친교를 나누려면, 우리의 삶이 삼위일체적인 삶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셋이면서 동시에 하나라는 것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가 여러 식구로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 있다. 분명하게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고, 아들은 아버지가 아닌데,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이시다. 즉, 사랑 안에서 하나라는 것이다.
우리의 가정에도 우리 가족 사이에도 진정한 사랑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는 여럿이라도 사랑 안에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사는 것이며, 그 신비를 체험할 수 있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다. 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우리의 삶 속에서 깨달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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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0. 삼위일체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5대양 6대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손주가 할아버지에게 질문했습니다. ‘할아버지 5대양 6대주가 머예요?’ 학교에서 숙제를 내 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손주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5대양은 이양, 김양, 박양, 최양, 조양이란다. 6대주는 소주, 맥주, 양주, 과일주, 청주, 막걸리란다.’ 손주는 학교에 다녀와서 할아버지에게 말하였습니다. ‘틀렸다는데요.’ 할아버지는 이렇게 다시 말하였습니다. ‘아! 소주, 맥주, 양주, 과일주, 청주, 탁주란다.’ 우리가 아는 5대양은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북극해, 남극해입니다. 우리가 아는 6대주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북아메리카입니다.’ 할아버지는 일상에서 만나는 5대양과 6대주를 말하였고, 선생님은 지리학에서 보는 5대양과 6대주를 말하였습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위격은 다르지만, 한분이신 하느님이라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이를 논리적으로, 신학적으로, 이성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교회의 위대한 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 성인도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닷가에서 작은 웅덩이에 바닷물을 담으려는 아이를 보았습니다.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무얼 하는 거니?’ 아이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바닷물을 이 웅덩이에 담으려고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아이도 대답하였습니다. ‘바닷물을 작은 웅덩이에 담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사람의 머리로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제야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성이 아닌 신앙으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말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걷는 법도 배우지 않았습니다. 먹는 법도 배우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부모님의 말을 따라하면서 말하게 됩니다. 수도 없이 많이 말을 하면서 엄마, 아빠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원하는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문법이 먼저 있지 않았습니다. 먼저 말을 하였습니다. 아이는 뒤집고, 기다가 어느 순간 바로 서게 됩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면서 한걸음 걷게 됩니다. 그리고 원하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 아이는 엄마의 젖을 먹으면서 이가 납니다. 분유도 먹고, 밥도 먹게 됩니다. 어느 순간 먹어야 하는 것과 먹지 말아야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먹게 됩니다. 아이가 말하고, 걷고, 먹을 수 있는 것은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부모님을 믿기에 말하고, 걷고, 먹을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 있었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분입니다. 성부이신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을 주셨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주신 십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면 우리가 머무는 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될 것입니다. 성부이신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입니다. 비록 우리가 잘못을 했어도 뉘우치면 언제나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릇된 길을 갈 때면 예언자를 보내 주시어 바른길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입니다.
성자이신 하느님은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와 기쁜 소식을 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한 사람들이 머무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아무나 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기쁜 소식을 온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온 마음을 다하고, 온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 또한 주님께서 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이신 하느님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고 그것에 맛 들일 수 있는 슬기로움을 주는 은사, 교리의 어려운 점을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은사, 어떤 일이 옳고 그른 일인지 더욱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게 해 주는 은사, 하느님을 열렬히 섬기게 하며, 죄악과 악마를 거슬러 용감히 싸울 수 있는 능력이며 순교까지 하면서 신앙을 증거 할 수 있는 은사,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믿어야 할 것과 믿어서는 안 될 것을 분별케 하는 은사,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자녀다운 사랑과 하느님의 자녀인 모든 사람을 예수님 안에서 형제자매로 사랑하게 해 주는 은사.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섬기게 하며 하느님 앞에 겸손한 자세를 취하게 하며, 죄를 피하게 하며 영생에 대한 희망을 주는 은사입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의 하느님께서는 어떤 관계일까요? 끊임없이 서로에게 내어주는 관계입니다. 성부는 성자에게 모든 권한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성자는 성부에게 모든 영광과 기쁨을 드렸습니다. 성자는 성령에게 십자가와 죽음으로 세운 교회를 맡겨 드렸습니다. 성령은 모든 은사를 교회에 주셨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삼위일체의 신비는 내어줌의 눈으로, 겸손의 눈으로 보면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삼위이신 하느님께서 한 몸을 이룬다고 생각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만위일체, 억위일체이신 분이십니다. 사랑의 하느님, 위로의 하느님, 용서의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서로 위로하십시오, 서로 용서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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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0. 삼위일체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 삼위일체 하닮의 여정 -
요즘 주일마다 계속되는 대축일입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 성령 강림 대축일, 그리고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역시 하느님의 참 좋은 사랑의 선물인 대축일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많고도 많은 축일은 결국 하나의 축일로 귀결됩니다. 그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축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사랑의 하느님으로 자신을 활짝 개방하신 참 깊고 아름다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초기 교회 때부터 이어져 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과 더불어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교회에 주시는 성자 예수님의 장엄한 명령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예외없이 모든 민족들이 복음 선포의 대상임을 깨닫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신 성자 예수님은 얼마나 성부 하느님과 깊은 일치 관계에 있는지 깨닫게 하는 말씀입니다. 또 오늘 5월 성모성월 마지막 주일은 ‘청소년 주일’이기도 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아 건강하고 아름다운 청소년들로 자라기를 바라는 교회의 염원이 담겨져 있음을 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받은 고귀한 품위의 인간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정의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무지도 허무도 탐욕도 아닌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아갈수록 온전한 사랑의 참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말의 사랑과 사람이 참 신기하고 고맙습니다. 사랑해서 사람임을 일깨워줍니다.
제 좋아하는 예수님 닮기의 여정을 줄인 ‘예닮의 여정’은 바꿔말하면 삼위일체 하느님 닮기의 ‘삼위일체 하닮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하느님을 닮아갈 때 비로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귀한 신원이 바로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니 삼위일체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삼위일체 신학의 대가가 성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아마 번역된 교부문헌 총서에서 가장 길고 무거운 책이 장장 1391쪽이 되는 성인의 삼위일체론 책일 것입니다. 독파할 계획이었으나 229쪽까지 보고 중단된 상태입니다. 삼위일체론의 해제 끝부분이 책의 핵심을 요약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신비의 이해에 도움이 될 해제(성염 역주 31쪽) 일부분을 나눕니다.
-‘인류를 위하여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그대로 본뜬 것이 그리스도의 생애였고,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 교부의 생각에는 그리스도의 언행을 따라가는 걸음이야말로 인간이 삼위일체의 신비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교부의 탐구 자세는 다음 기도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신이 당신을 찾아내게 만드셨으니, 당신을 갈수록 더욱더 찾아내리라는 희망을 주셨으니, 탐구할 힘 또한 당신이 주소서. 당신을 기억하게 하소서. 당신을 이해하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인간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받았기 때문에 인생의 충만한 기쁨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향유享有하는 데에 있다. “삼위일체를 상기하고 관조하고 사랑하려면 살아있는 존재가 삼위일체를 상기해내고 삼위일체를 관상하고 삼위일체를 사랑하는 데 전 존재를 연관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비단 신학자뿐 아니라 참으로 믿는 이라면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알기위해 ‘기도’해야 함을 배웁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신비는 어려운 듯 하지만 아주 쉬울 수 있습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의 신비가가 될수록 삼위일체 하느님 이해도 깊어질 것입니다.
하느님으로 충만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멀리 밖에 계신 삼위일체 하느님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움직이며 숨쉬며 살아가도 있다는 자체가 삼위일체 하느님 충만한 사랑의 체험입니다. 참으로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체험적 사랑이 삼위일체 하느님 신비의 이해에 이르는 지름길입니다. 성령 안에서 성부 하느님을 향해 성자 예수님과 함께, 삼위일체 하닮의 여정중에 있는 영예로운 신원의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들입니다.
오늘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말씀 배치가 참 적절합니다. 제1독서는 성부 하느님, 제2독서는 성령 하느님, 복음은 성자 하느님 측면을 잘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바로 모세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오늘,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며,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너희 마음에 새겨 두어라.”
모세에 이어 바오로 사도가 고맙게도 성령 하느님의 은혜에 대해 분명한 답을 주십니다. 역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입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아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하고 외칩니다.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얼마나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삼위일체가 분리할 수 없이 깊이 하나로 결속되어 있는지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성자 예수님께서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 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성자 예수님의 말씀이지만 동시에 성부의 말씀이자 성령의 말씀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할 것도 불안해 할 것도, 걱정할 것도 없습니다.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이자 삼위일체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문득 세기시 원장과 스테파노 수사가 주고 받은 말이 생각납니다.
“금경축 상본 성구 무엇으로 할까요?”
“’나다. 두려워 하지 마라.’로 해주세요.”
원장의 물음에 지체없이 답한 스테파노 수사였습니다. 그리하여 상본에는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14,27) 성구가 적혀 있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예수님 말씀은 수도원 십자로에서 자나깨나 찾아오는 손님들을 환대하는 예수성심상에 바위판에 새겨져 있습니다.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with us), 우리를 위해 계신(for us) 성자 예수님이기에 두려워하거나 불안해 할 것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명심해야 할 바 예수님과 모세의 다음 말씀입니다. 두 분이 이 지점에서 일치합니다.
예수님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라는 명령에 이어 모세의 명령입니다. “너희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규정과 계명들을 지켜라.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잘되고,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영원토록 주시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결국 한결같이 사랑의 규정과 계명들의 실천에 항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모세는 한결같이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십니다. 마침 어제 삼위일체 하느님을 쉽게 설명한 글이 있어 나눕니다.
“성부 아버지는 주시는 분이고 성자 아드님은 받으시는 분입니다. 아버지가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은 당신의 생명이요 아들이 이어 받을 가장 값진 유산은 아버지의 생명이신 성령입니다. 아들이 숨쉬도록 해주는 아버지의 들숨날숨이 성령입니다. 성령은 아들이 아들되게 하며, 아들을 빛내주고, 아들에게 힘을 주는 아버지의 ‘혼불’입니다.”
어찌 예수님뿐입니까? 세례받아 예수님과 하나되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사랑의 삼위일체 하느님은 우리가 닮아야 할 인간의 원형입니다. 성부 아버지와 성자 예수님과 성령과 하나되어 살아가야 하는 삼위일체적 존재인 우리들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일치를 깊이하시며 참으로 충만한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짧고 깊고 아름다운, 날로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아가게 하는 참 좋은 기도인 성호경과 영광송으로 삼위일체 하느님을 고백합시다. 온마음과 온몸이 하나되어 바치는 기도입니다. 우리 마음 깊이 각인되는 삼위일체 하느님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의 선물입니다.
“성부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고개를 숙이며),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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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0. 삼위일체 대축일.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는 구원의 역사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줍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사랑은 바로 하느님 당신께서 누구이신지를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오늘 제2독서가 언급하듯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례로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기도하거나 식사를 할 때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시작하며 십자 성호를 긋습니다. 십자 성호를 긋는 것은 사랑으로 하나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 고백입니다. 삼위일체 신앙은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이며 신비입니다.
사실 그 어떤 비유와 설명으로도 삼위일체 신비를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의 믿음과 하느님의 계시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심오하고 놀라운 신비인 삼위일체 하느님의 교리를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라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소통이 되지 않을 때 ‘먹통이다’ 또는 ‘불통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때,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내적으로 소통하시듯 우리와 소통하시고, 우리는 세상에 그분의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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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0. 삼위일체 대축일.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신명 4,32-34.39-40)는 하느님을 마음에 모시고 율법을 잘 지키라고 권고합니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루신 역사를 요약하면서(신명 1,1-4,43) 감사의 뜻으로 하느님께서 주신 규정과 계명들을 잘 지키라고 당부합니다. 이집트 탈출에서부터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까지 이스라엘과 항상 함께 해주신 독특한 구원의 역사를 상기키시면서 모든 권능으로 오직 이스라엘만을 지켜주시고 사랑해주시는 한 분이신 하느님 말고 누구를 찾겠느냐고 모세는 묻습니다. 신비롭게 불 속에 나타나신 하느님의 권능(탈출 3,2-6) 앞에 살아남은 백성은 이스라엘밖에 없지 않느냐면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믿는 하느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재하시는 유일신이시므로 그분께서 주신 계명들을 잘 지킨다면 후손들이 대대로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모세는 당시 근동지방의 신화에 나타나는 다른 신들의 모습과는 달리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더 없이 위대하시면서 자비하신 분이시므로 주님께서 주신 규정과 계명들을 잘 지킬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늘 안전과 평화가 함께 할 것이라고 합니다.
복음(마태 28,16-20)은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마태오의 생각을 모두 담아놓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묻히신 무덤을 찾아온 여자들에게 열한 제자들(교회를 상징)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라고 하셨습니다(28,7.10). 열한 제자는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갈릴래아의 산으로 갔습니다. 악마가 예수님을 세 번째로 유혹한 곳(4,8), 홀로 죽음을 겪으신 예루살렘, 승천하신 곳,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곳(5,1), 두 번째 빵의 기적을 이루신 곳(15,29), 그리고 거룩하게 변화되신 곳(17,1-9)이 모두 산이었습니다. 결국 마태오에게 산이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능으로 당신을 구세주로 드러내신 곳입니다. 또한 갈릴래아는 유다인들의 지배세력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곳이며, 예수님께서 되살아나셔서 제자들보다 먼저 도착하실 곳입니다(26,32).
제자들이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에게 입을 맞추다)는데, 단지 무덤에 달려간 여인들뿐만(28,9) 아니라 동방 박사들이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그랬고(2,11), 물 위를 걷다 의심하면서 물에 빠진 베드로를 구하시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랬습니다(14,31-33). 입을 맞추는 것은 최고의 예를 갖춘 인사였기에 사제가 미사 집전하러 제대(그리스도)에 오르자마자 하는(입을 맞추는) 인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머지않아 제자들의 의심도 사라질 것을 아시고, 먼저 제자들에게 다가가시어(17,7)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ἐξουσία)을 받았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 때에도 아버지의 권위를 가지고(ἐξουσίαν) 가르치셨고(7,20),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넘겨주셨다고 하십니다(11,25-27).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통치자들처럼 백성 위에 군림하지 말고, 고관들처럼 세도를 부리지도 말고, 당신처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20,25-28) 드러나는 권한과 권위를 가지고 모든 민족들을 당신의 제자로 삼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권한을 주시기 전에는 제자들에게 다른 민족이나 사마리아가 아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10,5-6)고 하셨지만, 이제는 모든 민족들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공동체에서 세상 사람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삼는 방법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례는 예수님은 물론 교회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세례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뿐만 아니라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조건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아버지께로부터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느님의 영이 내려오셨듯이(3,13-17)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야 합니다. 시리아 공동체는 일찍부터 “삼위일체”라는 공식 이름을 쓰지는 않았을지라도 전례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을 즐겨 사용했습니다(2코린 13,13; 1코린 12,4-5; 갈라 4,6). 마태오 공동체에서 세례를 받은 이들에게 율법에 비추어 예수님의 계명을 가르치는 것(5-7장; 10장)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언제나 함께 하신다(임마누엘)는 것은 마태오 복음 전체를 꿰뚫고 있는 중요한 믿음입니다(1,23; 9,15; 17,17; 18,20; 26장).
제2독서(로마 8,14-17)는 성령의 인도로 우리가 하느님의 상속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바오로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시면서 외치셨던(마르 14,36) 이름이며, 모든 이에게 친숙한 이름인 “아빠, 아버지”로 하느님을 부릅니다. 예수님의 하느님이 곧 우리의 하느님이시며, 예수님의 아버지께서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요한 20,17)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드님(예수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로마 8,29)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 보내주신 아드님의 영의 인도를 받은 사람이어야만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갈라 4,6)로 부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시고(요한 1,12),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어 죽음의 불안과 노예의 두려움을 이겨내게 하셨기(2코린 3,17; 로마 8,21) 때문입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우리 몸의 나쁜 행실을 죽이게 하시고(로마 8,13),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로마 8,2),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느님의 자녀이며 상속자가 되게 하십니다. 이렇게 성령의 이끄심으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과 더불어 공동 상속자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기고 살아갑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은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기고”,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로마 5,2-3)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영광을 상속받기 위해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방법이 무엇인지(필리 3,10-11), 또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어떻게 채울 수 있는지(콜로 1,24) 깊이 생각합니다.
하느님 아버지(1독서)와 그분의 아들(복음)과 하느님의 영(2독서)에 관한 말씀은 한결같이 성부의 백성으로서, 성자의 제자이며 형제로서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마태오의 공동체(시리아의 안티오키아)는 아주 일찍부터(80년 전후로)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에는 “삼위일체”라는 말은 없지만 초대교회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면서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름이 셋이지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하나의 실체, 하나의 본성을 지니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오로처럼 이 거룩한 미사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빈다.”(2코린 13,13)고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부로서 “만물 위에” 계시고, 말씀이신 성자를 통하여 계시며, 성령 안에서 “만물 안에 계십니다.”(에페 4,6)
삼위일체의 신비는 인간의 머리로는 제대로 알아듣기 힘든 교리라서 단지 유비적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안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된 적이 있습니까?”(로마 11,33-34)라고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삼위일체께서 나누시는 사랑에 참여하기 원한다면(2베드 1,4) 먼저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 이외에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이심을 고백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게 보입니다. 성령의 도움과 올바른 신앙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을 때,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으며, 성령께서 우리의 희망이시라고 거침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느님의 영광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과 시련을 희망으로 바꿀 줄 알기 때문에 세상이 다르게 보입니다. 이렇게 해주시는 분은 사랑의 원천이신 삼위일체 하느님이십니다. 단지 세례를 받았다고 은총의 지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증언해주시는 성령께 의탁하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해주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따라야만, 현세에 동화되지 않고, 무엇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로마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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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0. 삼위일체 대축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⒈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교회가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주일에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내는 것은 성령께서 내려오셨기 때문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는 당부를 하셨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세운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인사를 하였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2코린 13,13).
그래서 우리는 이 세 분 하느님의 이름을 모두 담은 성호경으로 모든 일을 시작하고
마치고 있습니다.
⒉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삼위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성호경은 가장 쉽고
제일 짧은 기도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를 모르는 신자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면서 마음껏 숨쉬는 공기가 무한정 그리고 공짜로 주어지기 때문에 거의 의식을
하지 못하면서 지내는가 하면 꼭 마셔야 하는 물도 공기만큼은 아니어도 비교적
값싸고 손쉽게 마실 수 있지만 평소에는 거의 그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고 지내고
있는 것처럼, 성호경에서 날마다 하루에도 수 없이 부르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도 평소에는 거의 그 의미와 역할을 의식하지 않은 채로 지냅니다.
⒊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공식 설명은 이렇습니다.
“삼위는 곧 하느님이시다. 세 분의 신들이 아니라, 세 위격이신 한 분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삼위는 신성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각 위격이 저마다 완전한
하느님이시다(가톨릭교회교리서, 253항). 표현이 철학적이어서 이 어려운 설명은
본시 성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삼위 하느님은 존재가 아니라 역할로
구분합니다. 성부 하느님께서는 세상 만물을 조성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성자 하느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십니다.
성령 하느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성자를 본받아
성부께로 나아가도록 이끄시는 인도자이십니다. 훨씬 더 쉽습니다.
⒋ 성령께서는 우리의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이해하면 더 쉬워집니다.
성부만을 하느님으로 알던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신적인 권능으로
인정하지 못했고 거짓 예언자의 소행으로 치부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말씀도 하느님 나라의 복음으로 인정하기 어려웠습니다. 아마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무척이나 답답하셨는지,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한 14,11).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2,32).
⒌ 제자들도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3년 동안
동고동락하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을 믿기는 어려웠습니다.
아무리 그분이 하느님만 일으키실 수 있는 기적들을 눈앞에서 수없이
일으키셔도 그러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이실 수 있는가 하는 일반적인
선입견도 있었고, 뛰어난 예언자이신가 보다 하는 기대감도 없지 않았으며,
게다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신적인 권능을 발휘하시지도 않고 너무도 힘없이
최후를 맞이하셨기에 실망감도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수시로 그리고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어
발현하시는 예수님을 만나 뵈옵고서는 도저히 안 믿을래야 안 믿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래서 비로소 예수님을 성자 하느님으로 받드는 신앙이 생겨났습니다.
일단 그분을 하느님으로 믿게 되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보여주신 언행이
가장 먼저 떠올라서 성체성사를 거행하며 제자들끼리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였습니다.
⒍ 그러다가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백스무 명 가량이 성모 마리아 주변에
모여서 기도할 때에 성령을 보내주시자 예수님을 성자 하느님으로 믿는 것을 넘어서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살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는 기운을 받게 되었고 또 그 기운을
실제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증거가 사도 베드로가 보여준 담대한 믿음과
굳센 용기입니다. 그는 그 전에 비겁했고 소심했었으나,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도 행할 수 있을 정도로 믿음이 담대해졌을 뿐만 아니라
대사제와 수석 사제들이 서슬퍼런 어조로 “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협박을 할 때에도,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사도 5,29) 하며 대꾸할 정도로 용기가 우러났습니다.
이러한 믿음과 용기에다가, 평소에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새록새록 상기되어
그 말씀의 진리성을 깨닫게 된 것도 성령의 이끄심이었습니다.
⒎ 그런데 어려워진 것은 고대교회 시절이었습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그리스 문화권에로 널리 전하여 성부 하느님을 알지 못하던
새로운 신자들이 들어오게 되면서, 성자는 물론 성령의 역할을 자꾸 성부 하느님께
종속시키려는 이단 시도가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단들에 대항하다보니,
예수님께서 지니신 인성과 신성을 공식화시키고, 성령도 하느님이심을 신앙고백문에
포함시키느라 설명도 어려워졌고, 그 바람에 신자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기는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⒏ 하지만 성령께서는 신자들을 이끌어 예수님처럼 살 수 있도록 보호해 주시고
깨우쳐주시며 이끌어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성부나 성자의 업적에 비하면 사소해
보일 수도 있지만, 신자 개개인들에게는 소중한 일상적인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에서
하느님을 드러내고 하느님 안에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우리의 모든 아픔과 갈등과
소망과 꿈까지도 하느님께로 향하도록 이끌어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작지만 끈질긴 마귀의 유혹에 대해서도 간단히 성호를 그으면서 퇴치할 수도
있고, 끊임없이 생겨나는 기도의 필요에 있어서도 역시 간단히 성호를 긋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화살기도가 될 수 있으며,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좋고 나쁜
기회를 선용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게 해 주시는 하느님이 성령이십니다.
⒐ 교우 여러분,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이하여 성호경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셨기를 바랍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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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0. 삼위일체 대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구원 역사는 성부로부터 유래하고, 성자에 의해서 실현되며, 성령에 의해서 충만히 성취됩니다!
또 다시 저희 사제들에게 늘 부담스럽고 껄끄러운 삼위일체대축일이 돌아왔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삼위일체대축일만 돌아오면 마음 속으로 간절히 기도하곤 했습니다.
‘제발 이번 주일 미사가 내 차례가 아니었으면...
다른 형제가 주례하면 편안히 앉아서, 어떻게 강론을 풀어가나 흥미진진하게 들으면 좋을텐데...’
지난 시절 돌아보니 삼위일체 교리와 관련해서 얼토당토않은 ‘이단’으로 빠진 적도 참 많았습니다.
그냥 솔직히 잘 모르겠다며, 삼위일체와 관련된 교부들의 가르침이라도 소개해드렸으면 좋을텐데,
나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한다며 별의별 논리들을 다 동원해서 신자들을 햇갈리게 만든 죄, 어찌 보속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삼위일체와 관련된 이레네우스 교부의 가르침이 참으로 설득력 있습니다.
“모든 구원 역사는 성부로부터 유래하고, 성자에 의해서 실현되며, 성령에 의해서 충만히 성취됩니다.
성자와 성령은 성부이신 ‘하느님의 두 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교부의 해석도 신선합니다.
“성부께서는 ‘낳으시는 분’이시고,
성자께서는 ‘나시는 분’이시며,
성령께서는 ‘발(發)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버지는 그 자체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아들과의 관계를 전제로 하며,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전제로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사랑의 관계로 부터 사랑의 성령께서 발출하셨습니다.”
성삼위에 관한 윤주현 신부님의 설명 역시 은혜롭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성삼위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세 위격께서 우리 영혼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성부께서는 우리가 당신 자녀로 합당하게 살아가도록 인도해주시며, 성자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성부께서 어떤 분인지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를 더 깊이 사랑하고 그분들의 뜻에 따라 살아가도록 사랑을 부어주시며
우리를 내적으로 이끄십니다.
이렇게 세분과 더불어 사랑의 삶을 완성해 가는 것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이렇게 성삼위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성부와,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구체화된 자비와 연민의 성자와, 감미로움과 은은함과 섬세함의 근원이신 성령께서, 온전히 한 몸이 돼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삼위로 존재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성삼위께서는 상호 온전히 하나로 결속되어 완벽한 일치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성삼위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항상 소통하시고 상호 증여하시며 한 마음 한 몸이 어떤 것인지를 모델로 제시하고 계십니다.
언제나 자기 본위의 자세를 탈피해서 서로 낮추시고 서로 순명하시며 사랑하십니다.
성삼위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통합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의 발밑을 한번 내려다봅니다. 이리 갈라지고 저리 찢겨지고 사분오열되어 있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더 자주 바라볼 순간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오늘 우리 사이, 우리 공동체 사이, 국가와 민족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높은 장벽을 당장 허물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나와 너무 다른’ 너를 너그럽고 관대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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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0.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삼위일체 대축일]
삼위일체와 영원한 생명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오늘은 삼위일체와 영생(영원한 생명)의 관계에 대해서 묵상해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당신께서 교회와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시며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세례받은 사람 안에서 삼위일체의 신비가 실현되게 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실현하는 사람이고 그래야만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플라나리아’란 동물이 있습니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계속에서 서식하는 평형 동물입니다.
플라나리아는 뇌, 눈, 신경관, 수정란, 난소, 창자, 입, 정소, 생식소 등을 갖춘 하나의 완전한 생명체입니다.
그런데 플라나리아는 어느 부위를 잘라도 다시 온전한 플라나리아가 됩니다.
몸통을 다섯 부분으로 자르면 다섯 마리의 플라나리아가 되는 것입니다.
영국 한 대학교에서는 한 마리의 플라나리아를 잘라서 2만 마리까지 늘리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플라나리아는 영원히 사는 동물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플라나리아는 자신의 몸을 자손에게 이어주며 개체 수도 늘어날 뿐 아니라 누군가 일부러 멸종시키지 않으면 영원히 삽니다.
몸을 자른 것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 어떤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고 그저 하나의 개체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서도 영원히 사는 법칙을 찾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일단 플라나리아는 세포마다 눈과 머리, 창자 등을 생성할 수 있는 설계도가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어디를 자르더라도 다시 온전한 모습으로 재생할 수 있습니다.
만약 플라나리아를 믹서기에 갈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잘게 잘리면 재생을 할 수 없습니다.
다시 ‘원형’을 회복할 능력을 잃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길이로 자르면 플라나리아는 이전의 자신의 모습을 회복합니다.
이 말은 플라나리아를 자르면 그와 비슷한 거머리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플라나리아가 된다는 뜻입니다.
당연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플라나리아만 이런 능력을 지니는 것입니다.
플라나리아처럼 영원히 살려면 끊임없이 플라나리아로 재생하여야 합니다.
두 번째는 잘리지 않거나 혹은 생식하지 않으면 그 플라나리아의 생명은 거기서 끝난다는 것입니다.
잘리거나 자신의 몸을 떼어 나누어주는 생식을 멈추면 그것은 영생할 수 없습니다.
나의 살과 피를 떼어 나누어주는 것, 이것을 통해 영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살과 피를 나누어주는 것, 이것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릅니다.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 사랑도 없고 사랑으로 태어나지 않는 생명체도 없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부모의 피 흘림으로 탄생합니다.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한 피 흘림이 사랑입니다.
사랑 없이는 영생이 불가능합니다.
사랑만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다 사라져도 남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사는 생명체를 보며 적어도 두 개는 자신 안에 품고 있어야 함을 봅니다.
그 첫 번째는 정체성과 원형, 혹은 설계도, 그다음은 자기 자신을 복제하거나 자신과 같은 개체를 만들기 위해 해야 하는 생식능력, 혹은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 플라나리아는 원형과 생식능력을 담는 하나의 그릇인 것입니다.
플라나리아가 영원할 수 있는 것은 원형과 생식능력, 이 둘과 하나가 된 삼위일체의 모습을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본성적으로 영원한 분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영원하실 수 있는 원리는 삼위일체의 신비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삼위일체 신비를 품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삼위일체의 ‘계시’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을까요?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예수님은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십니다.
만약 위 플라나리아의 예와 비교하자면(물론 하느님을 저런 동물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죄송하기는 하지만)
은총과 진리는 무엇일까요? 바로 ‘원형’과 ‘생식력’입니다.
아버지와 성령을 담으시는 그릇과 같으신 분이신 것입니다.
자동차를 만들 때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분명 ‘설계도’와 ‘피땀’이 필요합니다.
자동차가 고장 나면 설계도대로 다시 재생시킬 수 있습니다.
설계도대로 누군가가 땀을 쏟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은총은 ‘피땀’, 즉 ‘사랑’의 에너지를 의미하고, 진리는 ‘설계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이 아니면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하느님의 외아드님으로서 아버지에게서 나오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원형’인 ‘진리’를 품고 계신 것이고 성령께서 주시는 ‘사랑’의 에너지를 지니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만 행동하고 말하고 듣고 사십니다.
아버지의 모습대로 되려는 의지가 있으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께는 진리이시고 원형이십니다.
또 성령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자녀의 탄생을 위해 피를 흘리라고 종용하십니다.
세례 때 성령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더는 당신 자신을 위해 사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탄생시키시기 위해 피를 흘리어야 하셨습니다.
플라나리아가 플라나리아로서의 ‘원형’, 즉 ‘설계도’나 ‘진리’를 자신 안에 품고 끊임없이 그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또 자기의 살과 피를 떼어 나누어주며 자손을 낳으려고 하는 ‘사랑’을 지녔기에 영원할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비록 인간이 되셨지만, 하느님처럼 영원히 살려면 하느님의 모습으로 끊임없이 회귀하려 해야 하고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어 자신과 같은 자녀를 탄생시켜야 함을 보여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자녀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부모들이나 믿음을 위해 피를 흘리신 순교자들을 볼 때
그런 희생이 생명의 끝이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세상에서 삼위일체의 모습을 살기 위해 죽는 자만이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플라나리아라는 한 작은 생명체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위일체란 바로 자신 안에 은총과 진리를 담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삼위일체의 신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은총과 진리를 품고 있다면 말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끊임없이 회귀하려 하고 살과 피를 내어주어 새로운 그리스도인을 탄생시키려 할 때 우리 안에 삼위일체를 실현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도 당신 삼위일체의 신비를 받아들여 영원히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도 영원히 살기 위해 그리스도의 원형을 우리 안에 간직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아갑시다.
그리스도를 닮아 하느님의 자녀를 탄생시키기 위해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 삶을 살고 있다면 이 세상에서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살려고 하면 죽겠지만, 이렇게 죽으려고 하면 영원한 삶을 살 것입니다.
영생의 비밀은 삼위일체 사랑에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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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0. 삼위일체 대축일.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말씀은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느님을 드러내 주십니다.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며,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너희 마음에 새겨 두어라."(신명 4,39)
모세는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에 새겨진 두 사건을 들어 하느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명확히 제시합니다. 하느님은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신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시러 직접 시나이산에서 당신을 드러내신 분이시고(신명 4,33 참조), 종살이하는 당신 백성을 이집트에서 손수 이끌고 나오신 해방자"(신명 4,34)시라는 것이지요. 당신 백성에게 행하신 하느님의 이 두 업적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 정립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 이방신들을 섬기는 이민족들의 풍요와 쾌락을 접하기 전에 반드시 이 관계성을 새기고 또 새겨야 합니다. 그저 염두에 두고 참고하는 차원을 넘어서 골수까지 새겨넣어야 하는 뿌리의식일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이 지상에 남아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할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시는 대목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태 28,20)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느님의 사랑의 현현이십니다. 육화한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당신 의지를 합쳐 이 지상에서 오로지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고, 아버지의 일을 행하셨지요. 그리고 이제 세상을 떠나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시면서 성령을 보내시어 세상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준비시키십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제자들이 만나게 될 모든 민족들이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제자들은 모든 이에게 이스라엘 역사 안에 개입하심으로써 온 세상 구원의 문을 여신 성부 하느님과,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인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성자 예수님, 그리고 영원히 남아 진리를 일깨워주실 사랑의 성령을 알려 주고, 삼위 하느님과 관계를 맺도록 도울 것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 들려 줍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로마 8,14)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 8,15)
"우리는 ...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로마 8,17)
세례로 축성된 이는 자기가 받은 성령께 인도되어 하느님과 맺어집니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님을 주님이라 할 수 없고(1코린 12,3) 참조) 또 성령에 힘입어야만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 예수님의 형제로 모든 은총의 공동 상속자가 됩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지닌 한계와 죄악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이토록 친밀히, 밀접히 엮이기를 꺼리지 않으시지요. 아니, 오히려 우리보다 더 간절히 바라시고 갈망하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느님 안에 숨 쉬고 존재하며 살아갑니다. 그분 안에 깊고 친밀히 머무르기 위해 필요한 건 지식이나 타이틀, 소유가 아니라 사랑이지요. 사랑만이 하느님과 우리를 강하게 결속시켜 줍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이미 우리는 삼위이신 하느님 안에 있으며 그분과 하나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죄인이어도, 이 미소하기 짝이 없는 사랑에 목마르신 주님께서 두 팔을 활짝 펼쳐 당신 품을 열어 놓으시니, 그 안으로 달아들어 사랑에 잠기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그렇게 사랑을 닮아 사랑이 되어가는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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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0. 삼위일체대축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마태28,19)
'사랑의 신비!'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이자, '청소년 주일'입니다.
삼위일체 신앙은 하느님께서 세 분이 아니라,
세 위격이신 한 분 하느님이시고,
세 위격은 서로 실제적으로 구분되지만,
오직 하나의 본성, 하나의 실체라는 신앙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서 드러난 일치는 어떤 일치일까?
먼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사랑 안에서',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서로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는 사랑 안에서' 일치를 이루고 계십니다.
이것을 '내재적 삼위일체'라고 말합니다.
또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인간을 향한 사랑의 마음 안에서, 곧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 안에서 일치를 이루고 계십니다. 인간의 구원 역사는 '삼위의 공동 작업'입니다.
이것을 '구원경륜적 삼위일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고별 담화(요한17장)에 드러나 있듯이,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됨'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습'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계명'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드러내 보여주신 것처럼 서로가 온전한 내어줌의 사랑을 할 때 우리도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하느님의 자녀들'이라는 '신원 안에서', 지금 여기에서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하나의 목적 안에서' '우리는 하나'입니다.
'삼위일체 신앙'은 '사랑의 신비'입니다.
온전한 내어줌의 사랑인 '아가페 사랑' 안에서 설명되어지고, 이해되어지는 신앙입니다.
"너희는 오늘 내가 명령하는 그분의 규정과 계명들을 지켜라.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잘되고,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영원토록 주시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신명4,40)
오늘은 세상과 교회의 미래요 자산인 청소년들을 기억하는 '청소년 주일'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인 청소년들에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어 줍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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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0. 삼위일체 대축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마태 28, 19)
세례성사는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비로운
결합이다.
고유한
관계안에서
자라나는
우리들
신앙이다.
세례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드러내는
영원한
삶의 시작이다.
삼위일체는
하느님의
분명한
자기계시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건네신다.
삼위일체는
구원의
역사이다.
내적인 관계를
통하여
동참하시고
참여하신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서로
협력하시며
구원을
완성하신다.
성부의 창조와
성자의 구속과
성령의 성화는
우리를 향해 있다.
삼위일체 관계는
상호적인
공동체의
관계이다.
공동체는
사랑을
주고받는
실천의
자리이다.
하느님께서는
또한 자유로운
분이시다.
그 어디에도
종속시킬 수
없는 분이시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는
일체(一體)의
신비이다.
정의롭고
공평하고
평등한 협력을
삼위일체는
우리들에게
일깨워준다.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은
우리들이다.
가장 좋으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들이다.
참된 사랑을
회복하고
실천해야 할
우리들임을
삼위일체의
신비는
가르쳐주고 있다.
서로를
섬기는
참된 사랑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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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0. 삼위일체 대축일. 김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8주간 토요일 제1독서(집회51,12ㄷ~20ㄴ)
"내가 아직 젊고 떠돌이 생활을 하기 전에, 나는 기도 가운데 드러내 놓고 지혜를 구하였다. 나는 성전 앞에서 지혜를 달라고 청하였는데, 마지막까지도 지혜를 구할 것이다. 꽃이 피고 포도가 익어가는 것처럼, 내 마음은 지혜안에서 기뻐하였다." (13~15)
집회서 51장 '부록'의 말씀은 1~12절의 '감사기도'와 13~30절의 '지혜 찬미'가 서로 교차되는 배열 구조를 가지고 있다.
행복과 번영을 위해 집회서 저자는 일차적으로 '지혜로운 행동'을 제시했는데, 이것은 '주님께 대한 경외'이고, 하느님께 대한 경외야말로 지혜의 시작이요 완성이며, 하느님을 중심에 두는 삶이 가장 지혜로운 삶임을 줄곧 밝혔다.
이제 집회서의 마지막 부록에서도 '지혜 찬미'를 통해 지혜는 인생의 처음과 마지막까지 에서도 줄곧 구해야 할 기도의 지향이며 내용임을 밝힌다.
말하자면, 지혜는 위로부터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이요 은사이며, 성령의 열매인 것이다.
우리 자신이 인생의 실패와 과오를 통해 배우게 되는 것은 삶에도 요령과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저것 모두 잘해보려고 욕심을 낼 때 삶은 산만해지고 핑계와 수다가 거품처럼 늘어난다.
우리 자신의 삶이 차분하지 않고 구름처럼 둥둥 떠 있는 듯, 물 위에 떠 있는 듯 출렁인다면, 우선 내 자신이 하느님의 계명과 질서를 잘 지키고 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자신에게 배당된 삶의 몫을 조용히 받아들이고 그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고 요긴한 삶의 지혜이며, 이러한 근본 질서를 거부할 때 삶은 언제나 피곤하고 꼬이는 것처럼 여겨진다.
세상과 이웃이 나를 특별히 대해 주기를 바라기 전에, 내 스스로가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성소와 운명을 특별히 받아 들이고 사랑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우리는 집회서가 제시하는 지혜의 기술로 마음을 돌려야 한다.
연중 제8주간 토요일 복음(마르11,27~33)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 (30)
여기서 '아니면', '혹은'이라는 뜻을 가진 접속사 '에'(e; or)는 상호간에 서로 배타적인 사물이나 사상을 구별할 때 사용되는 접속사이므로, 마르코 복음 11장 30절의 '하늘에서'와 '사람에게서'는 단순히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배타적인 관계로서 세례자 요한의 진정성을 몯는 말씀이다.
따라서 '하늘에서'라면 세례자 요한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참예언자로 취급한다는 의미가 될 것이요, '사람에게서'라면 그를 거짓 예언자로 취급한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리고 원문의 구조를 보면, '하늘에서'에 해당하는 '엑스 우라누'(eks ouranou; from heaven)라는 부사구가 본동사인 '온 것이냐'의 의미로 번역된 '엔'(en; was it)보다 먼저 나오고 있으며, 맨 나중에 '사람에게서'에 해당하는 '엑스 안트로폰'(eks anthropon; from men)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문장 구조는 예수님께서 '하늘에서'를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음을 간접적으로 증거함으로써, 세례자 요한이 증거한 당신의 권세 역시 '하늘에서' 왔음을 시사하시는 것이다.
2021년 5월 29일[연중 제8주간 토요일]
우리의 영원한 보호자 성령님! 신앙의 버팀목이 되어 주셨네.
(마르11,27-33)
27 예수님과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성전 뜰을 거닐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28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 앞 15절에서 사람이 자신들의 소원성취를 위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 깨끗하고 흠 없는 제물을 사고파는, 그 열심히 강도짓이라 하시며 둘러엎으신 권한이다.
병행 요한복음에서 “그 성전을 허물어라 사흘(3-세번째 것)안에 다시 세우겠다” 하셨고 허물어진 성전이 당신임을 말씀하셨다.(요한2,19-21) 그것은 예수님 당신의 허물어짐, 곧 죄(강도)의 대속인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신 것이며 사흗날에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신 후, 그리스도의 영으로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 모든 것에 대한 권한(權限)은 아버지께 받은 것이다.
(요한10,18) 18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
= 오는 성경은 그 하느님의 권한의 예수님을 알고, 믿는 신앙을 사는지 살피라는 것이다.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에게 한 가지 물을 터이니 대답해 보아라. 그러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30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
= 왜 세례로 물으실까? 세례(洗禮)는 육적 자아를 끊어 버리고(부수고) 영의 사람, 곧 하늘의 존재로 다시 태어남, 다시 세워지기 위한 하느님의 뜻이었다. 그러니까 성전이신 예수께서 부서지시고 사흗날에 부활하시어 그리스도의 영으로 다시 오시는 분을, 우리의 부서짐(세례)으로 받아드려 우리가 세 번째 성전이 되어야 하는 그 뜻, 그 의미를 알고 있는지 묻고 계신 것이다.
(1코린6,19-20) 19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 20 하느님께서 *값(대속)을 치르고 여러분을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 오늘 이 말씀을 받아 들이고자 하는 마음이 들면 성령께서 함께하심이다.
31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말할 터이니, 32 ‘사람에게서 왔다.’ 할까?” 그러나 군중이 모두 요한을 참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군중을 두려워하여, 33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 정말 알고 싶은데, 믿고 싶은데, 정말 몰라서 그런다면 예수님께서 기쁜 마음으로 가르쳐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뜻을 고집하기 위해, 사람들을 의식해서 모른다고 하는 그 위선을 부리는 이들에게는 “나도 말하지 않겠다.” 하신다. *우리는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이 오른 길이라 착각한다.
(이사55,8) 8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 뱀의 유혹, 곧 하느님의 말씀을 그분의 뜻(길), 선악의 말로 받는 거짓 가르침 때문이다.
(마태7,13-15) 13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14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 드는 이들이 적다.” 15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 많은 사람들이 가는 넓은 길, 사람의 뜻을 위한 제사와 도덕과 윤리의 신앙이다. 그 넓은 길은 나의 이름, 영광을 위한 신앙이다. 세상의 것을 위한 신앙으로 사람들에게 높은 평가, 칭찬받는 인본주의 길이다. 그래서 그 세상 적 나의 부서짐 (버림, 부인)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의지하며 가는 그 좁은 길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음으로 보인다.
(1코린1,23) 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1코린2,14) 14 그러나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만 판단할 수 있기에 그러한 사람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 적은 사람이 가는, 신본주의의 좁은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의 힘의 원리가 사람을 죽이는 힘’임을, 그 세상의 지혜가 오히려 구원을 줄 수 없는 어리석음임을, 세상의 문화가 죽음의 문화임을, 세상의 의로움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아는 이, 그래서 하느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의 영, ‘성령께 의탁하는 이’만이 갈 수 있는 길이다.
(1코린1,30) 3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
(1코린2,4-5) 4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5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독서의 말씀처럼 평생, 늘 하느님의 지혜이신 성령을 청해야 한다(청함은 이미 와계신 지혜, 성령을 깨닫는 것)~
독서 (집회51.13-14.20) 13 내가 아직 젊고 떠돌이 생활을 하기 전에 나는 기도 가운데 드러내 놓고 지혜를 구하였다. 14 나는 성전 앞에서 지혜를 달라고 청하였는데 마지막까지도 지혜를 구할 것이다. 20 나는 내 영혼을 지혜 쪽으로 기울였고 순결함(자기부인) 속에서 지혜를 발견하였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저희 신앙의 삶, 그 길에 늘 함께하시니 감사하며 저희 모두를 의탁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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