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불법을 공부하며 세상을 보는 눈이 많이 부드러워져서 웬만한 일에는 화도 내지 않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간혹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최근에 검사 출신 정치인의 아들이 퇴직금 명목으로 50억 원을 받은 게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예전에는 800원짜리 음료수를 훔쳐 마신 버스 기사가 유죄 판결을 받아 해고되는 일이 있었는데, 그 판결을 내린 판사가 지금 대법관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일을 보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수행한 게 도루묵이 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일도 좀 멀리서 보듯 자연스럽게 바라볼 수 있을까요?”
“법이라는 것은 여러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가운데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각자 자기 책임을 다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어겼을 때는 자기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게 법이에요. 그런데 이 법을 만들 때 개인의 사적인 영향을 완전히 배제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옛날에 왕이 법을 만들 때를 생각해 보세요. 처음에는 따로 법이랄 게 없이 왕이 그냥 본인 기분대로 다스렸어요. 그러다가 ‘왕이라도 법을 만들면 따라야 한다고 해서 중국에서 법가(法家)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법을 만들 때도 그 법을 만드는 사람에게 유리하도록 만들게 마련이에요. 그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어떤 규칙을 만들 때는 항상 그 규칙을 만드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만들게 되니까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법을 만든 사람들한테 유리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국회의원들인데, 국회의원들이 주로 어떤 사람들이에요? 우리 사회에서 아주 가난하고 못 사는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잘 사는 사람들이다 보니 자신들의 살아온 습관을 기준으로 해서 법을 만드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서민들이 볼 때는 너무 기득권의 입장에서 법을 만드는 거 아니냐는 비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하나 생각해 봐야 할 점은 법이 로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누군가가 뒷돈을 대주거나 표를 몰아주면서 이러저러한 걸 해달라고 하면 정치인의 입장에서는 거절하기가 매우 어려워요. 정치인이 제일 필요로 하는 건 두 가지거든요. 하나가 돈이고, 하나가 표입니다. 이건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라 세계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미국 의회를 방문해서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의 필요성을 이야기해 보면 대부분이 건성으로 듣고 넘어갑니다. 왜 그럴까요? 북한 주민들이 굶어 죽는 문제를 해결한다고 표가 되는 것도 아니고 돈이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를 인정에 기대어 호소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간혹 도움을 주는 정치인이 있다 해도 그 개인이 감동을 받아 참여하는 것이지, 보편적으로는 이런 방식으로 정치인들이 설득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실질적인 움직임을 끌어내려면 반드시 우리 교민 출신이든 누구든 미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 설득에 나서서 편지를 쓰든지 뭔가 행동을 보여야 해요. 그래서 이게 표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야 합니다. 아니면 교민들을 통해 후원금을 모아서 전달해야 합니다. 돈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정치인들이 조금 움직이지, 그 외에는 거의 안 움직입니다. 우리가 찾아가서 호소해도 뭔가 될 것 같다는 우리의 기분에 그칠 때가 많아요. 지난 30년 동안 제가 미국을 방문해서 했던 활동을 돌아보면, 결과적으로 그 말에 크게 감동해서 동조해 준 사람은 극히 드물고 대다수는 별로 도움이 안 됐어요. 우리가 표와 돈을 지원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제가 시민권 가진 교민들에게 ‘제가 한국에서 100만 명을 모아서 집회를 하는 것보다도 교민 여러분이 1000명 모여 편지를 쓰고 후원금을 보내는 게 더 도움이 됩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미국을 움직이려면 이런 방법이 필요합니다.
또 법이나 규칙을 집행할 때도 누군가의 부탁에 따라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든 미국이든 마찬가지예요. 판사의 해석이 다를 수 있습니다. 명백하게 법을 어긴 사례를 두고 안 어겼다고 하면 물론 문제이지만, 어느 쪽인지 약간 애매한 경우에는 판사의 주관에 따르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럴 때는 아무래도 판사나 검사와 잘 아는 사람이 유리할 수밖에 없어요. 경찰 조서도 그렇고, 검사의 기소문도 그렇고, 처음에 어떻게 기록을 해버리느냐가 재판 결과를 크게 좌우하게 됩니다. 그 기록이 모두 판사의 해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서민이 검사를 어떻게 알고 판사를 어떻게 알겠어요? 다들 학교 동기나 돈 있는 사람 같은 인맥을 통해서 부탁하는 거예요. 꼭 나쁜 걸 덮어 가리는 사례만이 아니라, 본인이나 본인이 아는 사람이 관계된 일이 있으면 담당자에게 전화를 하든지 해서 좀 봐달라고 부탁하는 게 인간 세상이잖아요. 그러다 보니 법의 해석과 판단도 항상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100% 정의롭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해요. 그러나 정의로움이 구현되는 정도를 비교하면 조선시대보다는 확실히 낫습니다. 한국전쟁 전후보다는 낫습니다. 군사정권 시대보다는 그래도 낫습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그런 때보다는 그래도 낫다는 거예요. 이 말은 지금 이대로 그냥 내버려 두자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노력을 해야 이걸 조금 더 개선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그러나 100% 개선은 불가능합니다. 조선시대에 정의가 실현된 정도가 10%밖에 안 됐다면 한국전쟁 전후로는 20%, 군사정권 때는 30%, 민주화된 이후는 50%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지금도 60% 정도밖에 안 될 겁니다.
이처럼 100% 개선은 불가능한데 질문자는 자꾸 100%를 보려 하니까 마음이 괴로워지는 거예요. 지금도 한번 보세요. 미국 같은 나라에도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 이런 말이 있을 정도예요. 엄청나게 돈이 많은 사람들은 대법관 출신 변호사를 선임하거나 온갖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을 섭외하잖아요. 그러면 판결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검사며 판사가 죄다 그 사람 후배라면 판결이 어떻게 영향을 안 받겠어요?
그런데 빵을 하나 훔쳐 먹는 행위는 그 행위 자체가 죄라고 법에 정해져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 아무도 변호마저 안 해준다면 판사가 법에 따라 그 죄를 줄 수밖에 없습니다. 죄가 된다고 법에 명시되어 있는데 판사가 자기 마음대로 ‘에이, 이 정도는 봐줍시다’라고 한다면 그 판사가 오히려 문제죠. 판사는 가능한 법대로 집행을 해야 하니까요.
법이 문제라면 그건 국회에서 고쳐야 할 일이지, 판사가 법을 고치는 건 아니에요. 판사가 판결을 할 때 개인의 이익에 좀 영향을 받았다면 그건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명백히 법에 저촉이 된 행위이고 법에 처벌이 정해져 있으면 판결도 거기에 따라야 해요. 질문자는 행위에 비해 처벌이 과도하게 느껴지는 경우를 예로 들었지만, 반대 경우도 있습니다. 어린아이를 학대하고 성폭행했다 하더라도 법에 처벌이 징역 5년으로 정해져 있으면 판사가 5년 이상을 선고할 수 없어요. 아무리 국민들이 ‘저놈 죽여라!’ 이렇게 아우성쳐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경우가 빈발한다면 우리는 법을 바꿔야 해요. 그래서 죄형법정주의(罪刑法定主義)라는 게 있는 거예요. 죄형법정주의는 어떤 행위를 범죄로 처벌하려면 그 기준과 한계를 미리 법률로 규정해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법을 어기면 죄를 받을 수밖에 없으니까, 800원짜리 물건을 훔쳐도 훔쳤다는 게 명백하면 벌을 받아야 해요. 반면에 수십억 원이 아니라 수백억 원을 훔쳐도 훔쳤다는 증거가 불분명하면 죄를 줄 수가 없습니다.
미국 수사드라마 같은 걸 보면 피의자를 체포할 때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은 안 해도 됩니다’ 이런 말을 하죠? 이처럼 사람에게는 자기변명을 할 권리가 있습니다.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거기에다 또 좋은 변호사를 사고 온갖 논리와 인맥을 동원해서 어떻게든 재판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몰아가니까 우리가 볼 때는 ‘와, 저건 말도 안 된다’라고 할 만한 일이 자꾸 생기는 거예요.
물론 개선을 해야 해요. ‘세상이 원래 이러니 그냥 살아야 한다’ 하는 뜻이 아닙니다. 개선을 해야 하는데, 딱 눈에 띄도록 한꺼번에 개선이 이루어지기는 어렵다는 점도 알아야 해요. 불합리함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을 개선하기 위해 우리가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법부가 가능하면 독립돼 있으면 좋지만, 우리나라 사법부는 어쨌든 정치권력의 영향을 받습니다. 어느 당이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서 지금 판결이 바뀌고 있잖아요. 세월호 사건을 비롯해서 지난 정권에서 1심 유죄 판결이 났거나 고발되었던 사건들이 지금 정권이 바뀌고 나서 다 무죄 판결을 받고 있죠. 반대로, 군사정권 때 사형을 언도받았던 사람들에 대해 민주화 이후 재조사를 통해 무죄 판결이 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법이라는 건 시대에 따라 또 평가가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지금의 사례와 과거의 사례가 모두 같다거나 객관적인 옳고 그름이 아예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런 가운데에서 조금씩 개선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길게 보고 꾸준히 노력해 나가야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그러니 어쩔 수 없다. 포기하고 받아들여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100% 정의가 실현될 것이다’ 하는 것도 아닙니다. 정의를 100% 실현하기는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100%를 향해서 꾸준히 나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문제의식을 갖고 비판하면서 나아가야 해요. 이건 정말 불합리하다고 느낀다면 화내고 있기만 할 게 아니라 인터넷에 글을 올리든 1인 시위를 하든 무엇이라도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렇게 해서 계속 개선해 나가야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