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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예환 林禮煥 (1864∼1948)】 “조선은 원래 독립국이었다”
1864년 7월 18일 평남 중화군(中和郡) 동두면(東頭面) 용산동(龍山洞)에서 태어났다. 3 · 1운동 당시 평양부 경제리(鏡齊里)에 거주하였다. 천도교 도호(道號)는 연암(淵菴)이고, 부인은 조인화(趙仁嬅)이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24세에 동학(東學)에 입도하여 접주 · 수접주 · 대접주가 되었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다. 동학농민운동 이후 교세를 회복한 동학 교단은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바꿨다. 1906년 1월 손병희는 권동진(權東鎭) · 오세창(吳世昌) 등과 함께 일본에서 귀국한 후 중앙총부조직에 착수하였다.
2월 10일 공포된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에 따라 천도교 중앙조직은 대도주를 정점으로 원직(原職)과 주직(住職)의 이원체제로 구성되었다. 중앙조직이 갖추어지자 3월 전국 280여개 지방교구를 지역별로 주관하는 72개 대교구를 조직 발표하여 지방조직을 정비하였다. 이때 제25대교구장 대리로 임명되었다.
1906년 11월 손병희로부터 연암(淵菴)이라는 도호를 받았다. 1907년 5월 18일 천도교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나용환(羅龍煥) · 나인협(羅仁協) 등 22명과 함께 2등 은장(銀章)을 받았고, 관할구역 업무와 간부 선임 등을 책임지는 정주순독(定住巡督)에 선정되었다. 이후 정주교사(定住敎師), 교훈(敎訓)을 거쳐 1914년 8월 4일 신도사(信道師)에 임명되었다.
한편, 1910년 일제강점 이후 학교와 종교 활동만 가능해지자 천도교단 내에는 비밀결사가 조직되었다. 1912년 10월 31일 보성사(普成社) 사원을 중심으로 조직한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民族文化守護運動本部)와 이를 확대 · 발전시켜 1914년 8월 31일 보성사 사장 이종일(李鍾一)이 독립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비밀결사로 조직한 천도구국단(天道救國團)이었다.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의 임원은 총재 손병희, 회장 이종일, 부회장 김홍규(金弘奎), 제1분과위원장 권동진, 제2분과위원장 오세창, 제3분과위원장 이종훈(李鍾勳)이었는데, 장효근(張孝根) · 신영구(申永求) · 박준승(朴準承)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1917년 천도교 원로로서 나인협 · 나용환 · 양한묵(梁漢黙) · 이병춘(李炳春) · 서우순(徐虞淳) · 홍기억(洪基億) · 홍기조(洪基兆) · 오영창(吳永昌) · 이종석(李鍾奭) · 오세창 · 권동진 등과 함께 중앙총부 도사실(道師室) 도사(道師)에 임명되었다.
1919년에 들어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기 위한 파리강화회의가 열리자, 권동진 · 오세창 등 천도교 지도자들은 종교계와 교육계 인사를 중심으로 독립선언식을 준비하였다. 이 무렵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결성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밀사가 찾아왔고, 일본 도쿄(東京)로부터는 송계백(宋繼白)이 ‘2 · 8독립선언서 초안’을 갖고 찾아왔다. 이에 자극을 받은 천도교 지도자들은 본격적인 독립운동 준비에 들어갔다.
"조선은 원래 독립국이었다"
한편 이런 와중에도 천도교의 교세는 날로 커져갔다. 천도교는 1906년 3월 6일 전국에 72개의 대교구(大敎區)를 설치했다. 이때 홍기조는 13대교구, 나용환은 15대교구, 임예환은 25대교구 교구장에 각각 임명되었다.(대한매일신보, 1906.3.17.)
1907년 5월 21일 임례환은 그간의 포교활동 공로를 인정받아 2등 은장포증(銀章褒證)을 받고 정주순독(定住巡督)에 임명되었다. 정주순독은 휘하의 교구장, 교령, 봉교 이하 교인의 진퇴출척(進退黜陟) 권한을 갖고 있었다. 그해 12월 10일 임예환은 정주교사(定住敎師)에, 1909년 5월 6일에는 종문직접(宗門直接)에 임명되었다. 1919년 3·1혁명 이전까지 임예환은 평남 중화에서 포교활동에 전념하였다.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왕위에서 쫓겨난 고종이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타계했다.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국민들은 분노했다. 장례는 3월 3일로 정해졌다. 그 무렵 국내외 민족진영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이 모색되고 있었다.
1910년대 들어 천도교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민중시위운동을 추진하였다. 이 일에 앞장선 사람은 옥파 이종일(李鍾一)이었다. 이종일의 회고록인 <묵암비망록>에 따르면, 임예환은 이종일의 지시로 이종훈과 함께 농어민을 포섭하여 민중운동을 시도하였다. 당시 농어민들은 일제의 가혹한 경제수탈로 배일감정이 극에 달해 있었다. 1912년 1월 이종훈과 임예환은 농어민 피해실태 현장조사를 벌였다. 이종훈은 경기도 근처의 농민을, 임예환은 서해안 일대의 어민을 맡았다. 예상했던 대로 농민은 8할, 어민은 6할 이상이 반일감정을 갖고 있었다.
이를 토대로 이종일과 임예환·이종훈은 보성사 사원 60여 명과 함께 범국민신생활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는 비정치적 국민집회를 표방한 것으로, 손병희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집회일은 7월 15일로 정하였다. 그런데 집회 이틀 전에 종로경찰서에 발각돼 서류일체를 압수당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집회의 성격이 정치적 목적이 아니라 단순한 생활개선운동이라고 둘러대 겨우 화를 면했다.
임예환은 1919년 2월 24일 서울에 도착했다. 일행은 홍기조·나인협 등 세 사람이었다. 이들은 안국동 18번지 한주천(韓桂天)의 집에 숙소를 잡았다. 이들이 상경한 목적은 크게 두 가지였다. 우선은 1월 5일부터 시작한 49일 특별기도회 결과를 천도교 중앙총부에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또 3월 10일은 1대 교주 최제우가 순교한 날로 천도교 기념일이어서 해마다 행사 참석차 상경하곤 했다.
2월 25일, 임예환은 천도교 중앙총부에 들렀다가 권동진과 오세창을 만났다. 이들로부터 "조선을 독립국으로 하려고 선언서를 발표할 생각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나도 예전부터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다"며 적극 동조하였다. 27일 오후 5시경, 임예환은 재동 김상규 집에서 열린 모임에 홍기조·나인협 등과 함께 참석하여 선언서 등에 서명 날인하였다. 이로써 그는 민족대표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 자리에서 최린은 선언서 발표는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하기로 정했다고 알려주었다.
거사 전날인 2월 28일 밤, 가회동 손병희 집에서 최종 점검모임이 열렸다. 신문조서(1919.4.12., 경성지방법원)에 따르면, 임예환은 무슨 사정 때문이었는지 이 모임에는 참석치 않았다. 이날 밤 10시가 지나서 손병희 집에 도착한 임예환은 나용환한테서 선언서 발표장소가 파고다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바뀐 사실을 전해 들었다.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예정대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그 시각 인근 파고다공원에서는 학생 등 3~4천명이 집결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집회를 열었다.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가진 민족대표들은 직후에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전원 연행되었다.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 등 불참자 4명은 예외였다.
1919년 1월 20일 권동진 · 오세창 · 최린 등은 교주 손병희의 허락을 받은 다음 대중화 · 일원화 · 비폭력 등 독립운동의 원칙에 합의하였다. 또한 이들은 이승훈(李昇熏) · 한용운(韓龍雲) · 송진우(宋鎭禹) · 현상윤(玄相允) 등 종교계와 교육계 인사들을 접촉하여 독립선언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최린이 최남선(崔南善)에게 「독립선언서」의 초안 작성을 의뢰하였다. 최남선은 초안을 작성하여 15일 최린에게 건네주었다.
최린은 「독립선언서」 초안을 손병희 등에게 보여주고 동의를 얻었고, 함태영(咸台永)을 통해 기독교 측의 동의를 받았다. 「독립선언서」는 보성사 사장 이종일의 책임 하에 2월 27일부터 비밀리에 인쇄하여 21,000매를 제작하였다. 독립선언서 배포는 천도교 · 기독교 · 불교 · 학생 등이 분담하여 전국적으로 배포하였다.
1919년 2월 20일 홍기조 · 나인협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안국동 한계천 집에서 숙박하였다. 고종 장례식 참배와 3월 10일이 천도교 제1세 교조 최제우(崔濟愚)기일이므로 기도에 참석할 목적이었다. 2월 25일 천도교중앙총부에서 오세창 · 권동진 · 최린을 만났다. 그들이 조선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배부할 터인데 조선민족대표자가 되라고 권유하여 평소에 독립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찬성하고 서명하기로 약속하였다.
2월 27일 오세창 · 권동진 · 최린 · 김완규(金完圭) · 권병덕(權秉悳) · 나인협 · 양한묵 · 나용환 · 홍기조 · 홍병기(洪秉箕) 등과 함께 김상규(金相奎) 집에 모여서 독립건의서와 독립청원서를 일본 정부와 파리평화회의에 보내는 동시에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공원(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다는데 동의하고 민족대표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날인하였다.
천도교에서는 각 기관이나 연원의 대표로 활동하던 핵심간부 15명이 서명하였다. 이 서명에 천도교 총대표 손병희, 천도교중앙총부 대표 권병덕, 보성학교 대표 최린, 천도교월보사 대표 이종일(李鍾一), 장로인 이종훈(李鍾勳) · 홍병기, 그리고 천도교 원로로서 도사인 권동진 · 오세창 · 양한묵 · 김완규 · 홍기조 · 나용환 · 박준승(朴準承) 등과 함께 서명에 참여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仁寺洞)의 명월관(明月館) 지점 태화관(泰華館)에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길선주(吉善宙) · 유여대(劉如大) · 김병조(金秉祚) · 정춘수(鄭春洙) 등 4명을 제외한 29명이 모였다. 독립선언식을 마친 후 민족대표들과 함께 종로경찰서에 그 사실을 통보하였고, 즉시 달려온 일본 경찰에 의하여 경무총감부(警務總監部)에 구금되었다.
1919년 6월 상순 경찰과 검찰의 취조를 거쳐, 8월 1일 이른바 「내란죄」를 적용하여 최고심인 고등법원(高等法院)에 사건을 회부하면서 예심이 종결되었다. 그런데 고등법원에서는 전국적 만세시위에 대해 ‘민족대표들이 내란을 교사한 적이 없고, 폭동행위자의 자발적 의사에 의해 폭동이 일어난 것’으로 규정하고, 이른바 「보안법」, 「제령 제7호」, 「출판법」 등을 적용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결국 재판은 고등법원이 아닌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진행되었다.
1920년 7월 13일 열린 첫 공판에서 허헌(許憲) 변호사는 고등법원의 「예심종결서」에 ‘경성지방법원으로 송치한다’는 말이 없으니 이 사건을 경성지방법원에서 다룰 수 없고, 고등법원에서도 내란죄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했으니 이 사건을 다룰 수 없다고 주장하며 공소를 수리하지 말고 피고를 방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재판부가 이를 받아 들여 공소불수리 결정을 하였으나 검사는 즉각 항소하였다.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은 경성지방법원의 공소불수리 판결을 취소하고 곧바로 심리에 들어갔다.
재판 과정에서 ‘조선이 독립될 줄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 조만간 독립이 될 줄로 생각하며 나는 조선 사람으로서 직분을 다할 것”이라고 답하였다. 또한 “한일합병을 반대했으므로 앞으로도 기회만 있다면 운동을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결국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 정동분실貞洞分室에서 나용환·나인협·박준승·권병덕·김완규·양전백梁甸伯 등과 함께 이른바 「보안법 제7조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경성감옥으로 이감되어 1921년 11월 4일 신석구申錫九·이필주李弼柱·김원벽金元璧·나용환·김완규·양전백·최성모崔聖模 등 15명과 함께 만기 출옥하였다.
경성감옥에서 출옥할 즈음 천도교단은 최동희(崔東羲) · 오지영 · 윤익선(尹益善) 등이 이끄는 혁신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나용환 · 나인협 · 홍병기 · 홍기조 등과 함께 교단의 이런 움직임을 적극 지지하였다. 1922년 1월 종법원 종법사(宗法師)에 선출되었고, 황해도 지역 순회(巡廻) 임무를 맡았다.
1925년 천도교가 최린이 이끄는 신파와 이종린(李鍾麟) 이끄는 구파가 갈등할 때, 신파에 가담하였다. 1925년 12월 신파중앙종리원 종법사(宗法師)에 선임되었다. 1934년 법정, 1939년 4월 천도교본부 현기실(玄機室) 현법사(玄法師) 및 중화군 천도교 종리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40년 4월 중화교구장, 1942년 4월 선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 5월 7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