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에 부쳐
2024년 4월 21일 막 14:3-9
1. 어머니 잔칫상
(1) 심방 받는 날
저는 어릴 적 신당동 산동네에 살았습니다. 지금은 재개발되어 아파트들이 들어섰지만, 제가 자랄 때 그곳은 그냥 가난한 산동네였습니다. 저희 집만이 아니라 동네가 모두 고만고만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가난한 집에서 진수성찬을 차리는 때가 있었으니, 바로 목사님이 오시는 날이었습니다. 대심방을 받는 날이나 혹은 돌아가신 아버님의 추도식 날 목사님이 저희 집에 오셨고, 그날이면 저희 집안의 상다리는 휘어졌습니다. 교자상에 온갖 음식을 가득 차려서 목사님과 심방대원들을 대접하였습니다. 물론 저희 식구들도 덩달아 호강을 하게 되지요. 재밌는 것은 다 끝나고 심방대원들이 돌아간 뒤에 어머님이 끌탕을 하시는 경우입니다. 준비한 반찬 하나를 상에 올리는 것을 잊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리도 아쉬워하셨습니다. 아무튼 저는 목사님이 우리 집에 오시는 것이 그리도 좋았습니다. 설교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려진 밥상은 생생합니다. 목사님과 교회 식구들이 오는 것이 좋았습니다. 아니 진수성찬이 좋았던 것이지요.
(2) 그렇게 펑펑 쓰셨을까?
저희 어머니는 왜 그리도 풍성하게 차리셨을까요? 우리 집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하늘의 복을 받는 일이라고 생각하신 겁니다. 어쩌다 남편은 일찍 세상을 떠나고, 4명의 자식들은 아직 어린데, 어디 의지할 곳도 없고, 그러니 당연히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이런 걸 보면, 때로는 결핍도 복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저희 어머니는 남편이 없어서 하나님이 생겼습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교회 안 다니셨거든요. 아무튼 그런데 우리 집에 복을 빌어주러 목사님과 교우들이 오는 겁니다. 이런 기회가 없지요. 있는 정성 없는 정성 다 들여서 준비를 하는 겁니다. 어마어마한 음식을 차렸습니다. 물론 다 못 먹고 태반이 남지요. 정말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저희 살림이나 어머니가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아이스크림 한 통을 가족들이 둘러앉아 퍼 먹으면서도 ‘이 값이면 연탄이 몇 장인데…’라고 아까워하시던 분이었지만, 목사님과 교회 식구들을 위해서라면 펑펑 쓰셨습니다. 심방 예배 때면 목사님 인도하시는 책상에 흰 봉투가 두 장 놓입니다. 하나는 감사헌금이고, 또 하나는 소위 목사님 거마비입니다. 아무튼 너무 좋으셨던 겁니다. 그렇게 좋으셨을까요?
2. 마가복음 14:3-9
(1) 어찌하여 허비하는가?
얼마 전 신약통독 문제지에 오늘 본문의 내용을 질문하였습니다.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이렇게 허비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문제였습니다. 삼백 데나리온을 무슨 삼백 원이나 삼만 원 정도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이니, 삼백 데나리온이란 300일치 봉급, 즉 연봉쯤 됩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수천만 원에 달하는 금액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자들은 이 향유가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 같은 것이었으리라 봅니다. 이런 비싼 것을 한 순간에 쏟아버리다니 이런 낭비가 어디 있는가라는 게 주변 사람들의 지적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말씀을 준비하는 가운데 저는 우리교회 예배가 얼마짜린 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가 1년에 52번 모여서 예배드리는 데 119,000,000원을 사용합니다. 한번 예배드리는 비용이 약 229만 원입니다. 오늘 이 예배도 229만 원 짜리입니다. 어떤가요? 너무 비싸지 않나요? 모두 다 집에서 예배드리면, 이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 23명에게 매주 10만원씩 나누어 줄 수 있겠습니다. 계산상으로는 그렇습니다. 우리가 229만 원씩 비용을 들여 드리는 이 예배는 낭비인가요?
聖, 거룩한 것, 신앙은 합리적일 수도 있지만 합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윤리적일 수도 있지만 윤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성적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거룩함은 합리나 윤리나 도덕, 이성과는 전연 다른 차원입니다. 이 둘을 완전히 구분해야 합니다. 별개입니다. 아니 어떤 면에서 보면, 신앙의 차원, 즉 거룩하고 성스러운 일은 매우 비이성적입니다. 십자가만큼 비이성적인 일이 있을까요? 거룩한 것을 이성과 윤리의 잣대로 재단하는 일이 없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변 사람들은 이 여자의 이 행위를 나무랐습니다만, 예수님은 “가만 두어라.”라고 하며 옹호하셨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일 앞에 설 때, 이렇게 하신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2) 거룩한 낭비
그리고 또 하나, 오늘 본문이 주인공인 ‘한 여자’의 신분을 밝히지 않음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여인이 예수에게 향유를 부은 사건은 네 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 당대에 함께 했던 사람들과 초대교회 교인들은 이 여인이 누군지 환히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저 ‘한 여자’라고만 언급할 뿐 신분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무슨 까닭인가요? 이 여자에게 관심이 집중하지 않도록 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여자가 누구인지 관심하면 안 됩니다. 다만 이 여자가 무슨 일을 하였는지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이 여자가 한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기억하게 될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거룩한 낭비’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과 같은 신비하고 완전하고 거룩한 체험을 하게 될 때 사람은 정신을 못 차립니다. 이성, 합리, 윤리, 도덕은 다 날아가 버립니다. 오늘 본문의 이 여인도 그랬고, 세리 난쟁이 삭개오도 그랬고, 예언자 이사야도 그랬습니다. 어디 이들 뿐입니까? 성경이 증언하는, 교회의 역사가 증언하는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그랬지요. 하나님 체험을 하게 될 때 거룩한 낭비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신앙의 아주 특징적인 모습입니다.
3. 수련회를 준비하며
(1) 성도의 교제, 친교
요즘 커다란 규모의 교회에는 익명의 교인들이 많습니다. 회중 사이에 묻혀 예배만 보고 돌아가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본래 예배란 드리는 것인데, 예배를 보고 갑니다. 마치 좋은 공연을 보듯이 예배를 봅니다. 미국에서는 TV방송 설교를 듣고 헌금을 이체한다지요. 안 하는 것보다 나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은 아닙니다.
성도는 서로 교통해야 합니다. 성도의 교제는 우리 신앙고백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서로의 사정을 알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는 가운데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전교인수련회를 준비하면서 이름표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름도 모르다니요.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주보에 교우소식은 왜 적나요? 뉴스거리라 적나요? 교우들의 사정을 헤아려서 기도하시라고 적는 것이지요. 테레사 수녀의 글 가운데 일부분입니다. “서로를 위해 기도합시다. 이것이 가장 훌륭한 사랑의 방법이니까요.”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는 것이 가장 훌륭한 사랑의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불치병으로 투병중인 환자 교우를 위해서, 사업이 망해 파산신청을 해야 할 지 어쩔지 고민하는 교우를 위해서, 가정불화로 상처를 받아 더 이상 이 결혼생활을 유지해야 하는지 깊이 고민하는 교우를 위해서, 사회에 진출하기 위한 진로를 앞에 두고 갈 바를 알지 못해 방황하는 젊은 교우를 위해서, 이제는 노쇠해져 병약한 몸으로 인생의 마지막을 덤덤히 기다리는 연로한 교우를 위해서, 외롭고 쓸쓸한 하루하루의 삶을 무기력하게 느끼는 고독한 중년의 교우를 위해서,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는 우리의 청소년 교우를 위해서, 우울증에 사로잡혀 삶을 누리지 못한 채 억지로 일상의 생활을 그야말로 버티고 있는 교우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테레사 수녀의 표현으로는 가장 훌륭한 사랑의 방법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2) 축제의 자리
이번 전교인수련회에 우리 교우들 모두 거룩한 낭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 수련회가 거룩한 낭비가 일어나는 자리였으면 좋겠습니다. 교인들 가운데 흔히 은혜 받았다는 말들을 하곤 하는데, 은혜는 저녁집회에서 울고불고 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이런 것 많이 해봤는데 별로 영양가 없습니다. 은혜는 오천 명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데서 나옵니다. 저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우리 수련회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필요합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무엇입니까? 맛있는 먹거리일 수도 있습니다. 교우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좋은 물건일 수도 있습니다. 함께 나누는 모든 것이 보리떡이고 물고기입니다. 이 바치고 나누는 것을 우리 아이들이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으레 교회에 가면 좋은 것을 나누는 법이란 걸 체득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좋은 것을 늘 교우들과 나누셨던 것을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전교인수련회가 이런 은혜와 이런 수련이 이루어지는 참 수련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정성을 다해 보리떡과 물고기를 준비하는 하늘샘교회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