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자고 있느냐?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일어나 기도하여라”
(루카22,46).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시다
2607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벌써 기도를 가르치신다.아버지 하느님께 드리는 예수님의 기도는 바로 우리의 기도가 하느님께 다다르는 길이다.그러나 복음서는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분명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전해 준다.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처해 있는 곳에서 그대로 우리를 받아들이시어,점차적으로 우리를 성부께 인도해 가신다.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오는 군중을 뒤돌아보시며,그들이 구약의 계약을 통하여 이미 기도에 대해서 알고 있던 것에서 출발하여,다가올 하늘 나라의 새로움이 어떤 것인지를 비유로 알려 주신다.끝으로,당신 교회에서 기도의 교사들이 되어야 할 제자들에게는 아버지와 성령에 대해 숨김없이 말씀해 주신다.
2608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마음의 회개를 강조하셨다.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형제와 화해하여라,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여라,“골방에서”(마태6,6)아버지께 기도하여라,많은 말을 되풀이하지 마라,기도할 때 마음속으로부터 용서하여라,마음을 깨끗이 하여 하늘 나라를 구하여라 하셨다.이 같은 회개는 온전히 하느님아버지께 향하는 것이며, 또 자녀다운 것이다.
2609이처럼 회개하기로 결심한 마음은 믿음 안에서 기도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믿음은 우리가 느끼고 이해하는 것을 초월하여 자녀로서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이다.믿음은 사랑하는 아들께서 아버지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 주기 때문에 가능하다.바로 예수님 자신의 길이요 문이시기 때문에,그분께서는 우리에게“찾아라.”그리고 “문을 두드려라.”하고 요구하실 수 있다.
2610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고 아버지의 선물을 받으시기 전에 감사를 드리셨던 것처럼,우리에게도 그러한 자녀다운 대담성을 가르쳐 주신다.“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11,24).기도의 힘이 이와 같다.곧 의심하지 않고 믿는다면“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9,23).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의 “믿음이 없음”(마르6,6)과 제자들의 믿음이 약함을 보시고 슬퍼하신 만큼,로마 사람 백인대장과 가나안 여자의 크나큰 믿음을 목격하시고는 경탄하신다.
2611“주님,주님.”하고 부른다고 믿음의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아버지의 뜻을 실천할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이다.예수님께서는,기도할 때 하느님의 계획에 협력하려는 마음을 지니라고 제자들에게 촉구하신다.
2612예수님을 통하여“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므로”(마르1,15),예수님께서는 회개하고 믿음을 가질 것과,깨어 있을 것을 호소하신다.제자는 기도 중에,비천하게 사람이 되신 주님의 첫 번째 오심을 기억하고,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희망하면서,‘언제나 계시며,오시는 주님’을 깨어 기다린다.스승과 일치하여 제자들의 기도는 하나의 싸움이다.깨어 기도함으로써 유혹에 빠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2613루카 성인은 기도에 대한 중요한 세 가지 비유를 우리에게 전해 준다.
첫 번째 비유,곧“벗의 청을 들어주는 사람의 비유”는 우리에게 간절한 기도를 드리라고 촉구한다.“문을 두드려라.열릴 것이다.”이처럼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고,특히 모든 선물을 가지고 계시는 성령을 주실 것이다.
두 번째 비유, 곧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는 기도의 특성 중 하나에 중점을 둔 것으로,믿음에 따르는 인내를 가지고서,“지치지 말고 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그렇지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관한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세 번째 비유,곧 “바리사이와 세리의 예화”는 기도하는 마음의 겸손에 관한 것이다.“오,하느님,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교회는 이 기도를 끊임없이 자신의 기도로 삼아 왔다.“주님,자비를 베푸소서!”(Kyrie eleison!)
(맨발 걷기 시작/인왕산 08/08)
2614예수님께서 성부께 드리신 기도의 신비를 제자들에게 숨김없이 밝혀 주신 것은,당신께서 영광스러운 인성을 지닌채 아버지의 곁으로 돌아가신 그때에 제자들이 드리는 기도와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신 것이다.이제 새로운 기도란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이다.예수님께서는“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요한14,6) 때문에,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제자들은 아버지를 알아볼 수 있게 된다.믿음은 사랑 안에서 그 열매를 맺는다.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게 되며,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안에 예수님과 함께 머무르게 된다.이 새 계약에 따라서,우리의 청원이 허락되리라는 확신은 예수님의 기도에 근거를 두는 것이다.
2615더 나아가서,우리의 기도가 예수님의 기도와 결합될 때,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보호자를 보내시어,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요한14,16-17).기도와 기도드리는 상황이 이 새로움은 예수님의 고별사를 통해서도 나타난다.성령과 하나 되어 바치는 그리스도인의 기도는,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와 이루는 사랑의 친교이다.“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청하여라.받을 것이다.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16,24)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발췌)
하느님의 길은 결백하고
주님의 말씀은 순수하며
그분께서 당신께 피신하는 모든 이에게 방패가 되신다.
정녕 주님 말고 그 누가 하느님이며
우리 하느님 말고 그 누가 반석이 되어주겠는가?
하느님께서 나에게 힘을 매어주시고
나의 길을 온전하게 놓아주셨네.
(시편18,31-33)
“하느님의 길은 결백하고”는 인간과 세상과 관계하시는 그분의 길이 흠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시인이 결백하다고(24절)말한 것처럼 주님은 결백하시다.이것은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행하고 당신의 약속과 계명에 따라 행동하심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주님의 말씀은 순수하며”는 주님의 말씀이 금이나 은처럼 정제되어 찌꺼기가 없다는 뜻이다(시편12,7;잠언30,5).하느님 말씀은 의지할 수 있는 것이다.“방패”는 최고의 보호자를 뜻한다(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시인은 전쟁을 승리로 이글어 주신 하느님을 찬양한다.
‘주님 말고 그 누가 하느님이냐?’는 수사의문문은 주님의 유일성에 대한 고백(탈출15,11)이며,주님만이 홀로 하느님이심을 의미한다.유일신 사상은 이사야에서 한층 발전되어‘나 말고 다른신은 없다(이사44,6,8;45,21)고 명백하게 나타난다.
2사무22,33에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힘을 매어주시고”대신에 “하느님은 나의 견고한 요새이시며”로 되어있다.’나에게 힘을 매어주셨다‘는 ’나를 강하게 만드셨다‘는 뜻이다.시인은 “저를 기쁨으로 띠 두르셨다”(시편30,12)고 하는데 이것은 ’나를 기쁘게 만드셨다‘는 뜻이다.임금은 주님을 의지하여 힘을 얻는다.임금은 하느님에 의해 강하게 되고 단련된다(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그리하여 적군에 대항하여 설 수 있다.
시편18편의 전체적 의미:시편 18편은 임금의 시편이다.시인은 죽음의 영역까지 이르렀다가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그는 하느님의 원수의 손에서 자신을 구해내셨기에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시인은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2절)라는 고백으로 시작하여 자애(51절)를 베푸시는 주님에 대한 찬양으로 끝맺는다.시인은 주님께 대한 사랑 고백과 함께 하느님이 그의 힘이심을 깊이 신뢰한다(2절).그는 주님의 길을 지키고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았으며 그분의 규범에 따랐다(22-24절).그렇지만 그는 원수들로부터 고통받아 죽음의 위험에 처했다.그는 하느님께 간구했고 하느님은 그를 구원하기 위해 현현하셨다.주님의 현현(5-20절)으로 적들은 멸망하였으며 주님은 임금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셨다(17-20절).여기에 나타나는 신화적인 배경들은 임금이 원수에 대한 승리를 통해 민족들의 으뜸으로 자리 잡게 됨을 이해하도록 도와준다.주님은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한 하느님이시다(32절).주님은 임금에게 전투능력을 주시고 그를 가장 뛰어난 전사가 되게 하시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주셨다.결국 모든 민족이 그 앞에 굴복하게 되었다(48절).시인은 “주님께서 살아계시다!”(47절)는 감사와 감격의 외침으로 주님의 역사하심을 선포한다.원수에게서 구원받은 임금은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49-50절).사도 바오로는 시편 18,50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의 왕권을 노래하였다.“그러기에 제가 민족들 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송하고 당신 이름에 찬미노래 바칩니다”(로마15,9).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기름부음받은이가 민족들을 다스리게 된다는 이 시편의 이념을 발견하게 된다.이 시편의 궁극적인 구원의 승리는 다윗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었다.(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 시편1-41편/전봉순 著)
사람은
아무리 높은 사람이라도
땅에서 살다
땅에서 가고
구름은
아무리 낮은 구름이라도
하늘에서 살다
하늘에서 간다
그래서 내가
구름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구름은 작은 몸으로
나뭇가지 사이를 지날 때에도
큰 몸이 되어
산을 덮었을 때에도
산을 해치지 않고
그대로 간다
(흰구름의 마음/이생진)
“세상에 수많은 비극과 희극이 있지만 우리가 막을 수 있었던 어떤 안타까운
사고나 참담한 현실을 대하면 우리는 누군가를 원망하고 비난하기보다 늘 부끄
러움을 먼저 느끼지요. 왜 부끄러움은 사고를 친 사람들이 아니고 우리네 양심
있는 보통 사람들의 몫이냐고 한탄하면서요.
그 때문에 부끄러움은 가장 내밀한 우리 양심의 속살입니다.부끄러움이 없다면
가뜩이나 혼탁하고 야멸찬 이 세계가 얼마나 더 끔찍할까요,부끄러움 때문에
우리는 어떤 잘못 앞에서 수긍하고 멈칫 뒤로 물러설 수 있고,부끄러움 때문에
우리는 다른 이들의 아픔을 살피고 우리 스스로를 돌아봅니다.부끄러움으로
시를 쓰는 이생진 시인의 시‘흰구름의 마음’은 제가 몸담고 있는 터에 많이
실망하고 착잡한 일에 지쳐 있을 때 딱 제게 왔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을 두고 이 땅위의 사람들은 매일 이전투구 泥田鬪狗에 몰두
합니다.우리가 기껏 살아야 백년인데 천년만년 살 것처럼 권력을 행사하고,또 이
일이 아니면 죽어도 안 된다는 듯 기를 쓰고 덤비다가 서로 여며지지 않을 지독한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아무리 높은 사람도 땅에서 살다가 땅에서 간다고 이 낮은 땅,
아무리 뛰어도 1미터를 넘을 수 없는 이 땅에서 부대끼는 우리입니다.한편 구름은
아무리 낮은 구름이라도 하늘에서 삽니다.구름은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유유히
지나가는 구름을 우리는 그저 바라볼 뿐입니다.시인의 시선이 놀랍게 포착한
것은 바로 그 구름의 운동입니다.
구름은 나뭇가지 사이를 지날 때도 산을 덮은 때도 산을 해치지 않고 간다는 말.
저는 이 말에서 제가 한창 몰두하며 고민하던 일의 실마리를 얻었습니다.”
(다시 시작하는 경이로운 순간들/정은귀 산문)
태풍이 서울까지 온다는데,
계속되는 방송의 태풍 특집 뉴스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경쟁적으로 자치단체에서
보내는 재난 문자는 그저 그들의 면피용으로만 보인다.
어찌,
체감하는 마음은
그저 혼란 스럽기만 하다.
다만,지독한 더위가 지나가니
잠시 행복해 지는 느낌이 우선이다.
행복한 날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