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어도 죽을수도 없는 분들을 위하여........
흐.르.는.곡.저.장.미.꽃.위.에.이.슬
살다보면 죽어도 안되는 일이 있다.
죽고 싶어도 죽을수도 없을때
그만 두고 싶어도 그만 둘수 없을때
도망가고 싶어도 지금의 자리에서 한 발자욱도 움직일수 없을때를 만날수 있다.
옛말에 진퇴양란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이렇게도 저렇게도 앞으로도 뒤로도 안할수도 할수도 없는
벼랑끝의 상황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와같은 삶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해서 예외일수 없다.
문을 열어보니 낭떠러지라는 말이있다.
이와같은 때에는 차마 눈물도 마르고 소리도 침묵한다.
고난이 서너가지 몰려오고, 끝은 안보이고, 앞은 막막하고, 삶의 무게는 심해의 압력으로
하루를 천년되게 할때가 있다.
하루를 살아도 우아하고 고상하게 살고프나 어제와 다르지 않게
웃고 있는 내 안에 울고 있는 또 다른 내가 공존한다.
이와같은 때에 사람들은 더 나은 방법을 찾아 헤매지만 하나님은 기도의 사람을 찾으신다.
왜냐하면 기도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으며 기도속에 길이 있기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홍해속에 길을 숨겨 놓으셨다.
길은 사람이 만들고 찾는 것이 아니다.
더 나은 방법속에 길이 있고, 해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길은 하나님이 만드시는 것이며 우리는 더 많은 기도의 힘으로 그 길을 만나는 것뿐이다.
어쩌면 주님은 길을 보여 주시고 길을 찾게 해주시는 분이시다.
아니 주님 자신이 길이시다.
이러므로 생명이신 주님을 떠나서는 살길도 없다.
길되신 주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통로가 기도이다.
찬송가 197장 가사에 보면 '이세상 험하고 나비록약하나 늘 기도 힘쓰면
큰 권능얻겠네' 라고 씌여져 있다.
그렇다.
우리가 살아 내야할 세상은 지독히도 험하고 악하다.
성도는 험하고 악한 세상 살이와 타협하거나 도피해서는 안된다.
오직 기도로 정면돌파 해야만 한다.
기도학교에는 세상이 험하고 악하다는 것과, 내가 무능하고 약하다는 사실과
하나님만이 나의 필요를 채워주실수 있다는 사실을, 동의하는 사람만이 입학할수 있다.
그런데, 찬송가 197장 가사를 자세히 묵상해 보면...
'늘 기도에 힘쓰라'고 고백하고 있다.
우리의 문제는 무엇인가?
우리는 왜, 기도해도 안된다는 패배주의의 늪에 빠져 사는가?
그 이유는, 기도의 절대부재와 결핍때문이기도 하지만, 늘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이 기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래 기도하는 일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도는 씨름이며 전쟁이다.
기도의 맛과 능력을 맛보지 못하는 이유는, 기도의 간절성과 집중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기도에 힘쓰라는 말은, 집중하고 몰입하고 모으라는 뜻이다.
레이져는 빛을 모은 힘을 가지고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레이져화 될수 있다면, 뚫지 못할 장애도
해결 안될 문제도, 해석 안될 고난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마귀가..우리의 바쁜 일상이..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뿐아니라
기도의 자리에 오래 머물도록 허락하지를 않는다.
우리의 일상과 현실은 바쁘고 피곤하다.
그래서 기도에 길이 있고, 기도에 힘이 있고, 기도에 능이 있음을 알고도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 오래 앉아 있는 사람이 점점 휘귀해져 간다.
홍수나면 마실물 없다고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 시대에 진정 기도의 사람은 너무도 적다.
죽겠다고 하면서, 죽을 힘을 다해 기도실에서 엎드려 있는 사람은 찾아 보기가 힘이 들다.
오늘날의 시대는 기도는 없고 방법만 있을뿐이다.
기도를 외치는 교회는 많아도, 온밤을 지새워 기도의 자리를 떠나지 않는 성도를 만들어 내는데
실패하고 있다.
기도없는 세상, 기도없는 교회, 기도없는 봉사, 기도없는 개인이야말로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며, 잎이 마른 고목이며, 물이 없는 저수지가 아니런가?
역사적으로 명품신자들은 동일하게 기도의 사람이었다.
찬이슬 맞으며, 눈을 녹이며, 이불을 적시며 평생을 기도에 자신을 기꺼이 바친 사람이었다.
기도의 시간은 낭비가 아니다.
오늘날에도 가롯유다는 기도하는 시간을 낭비라 생각하며 조소한다.
기도에는 외상이 없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갚아 주신다.
기도는 기름부으심의 통로이다.
불가시의한 일은, 오늘날 성도들은 기름부으심을 노래하고, 고백하고, 기다리면서도
기도는 하지 않는다.
기도없는 기름부으심은, 향기없는 조화에 불과 하고
기도없이 하루를 살아간다면, 그 사람의 삶의 내용은 허수아비의 하루일 것이다.
행복해도, 기뻐해도, 만족해도, 형통해도 그것은 실상을 가장한 허상일뿐이다.
그 허상에 자신을 포장하여 살지만, 언젠가 실상이 아닌것은 낱낱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정상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한끼 하루만 식사를 걸러도 허기저하고 고통스러워 한다,
그리고 무력해 짐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건강하고 제대로된 신자라면, 하루만 기도를 쉬어도
영적 무력감에 허기져 하게 되고, 거룩함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많은 신자들의 영적센서가 이미 오래전에 고장나 있거나
고장난줄도 모르고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기도의 부재, 기도의 결핍은 죄이며, 그 죄는 반드시 영적타락과 부패를 낳게 된다.
기도가 없으면 우리의 삶과 수고가 의미 없어진다.
기도가 없다면..일이 안될수록 축복이며, 길이 막힐수록 은총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복이며, 하나님을 믿는것 자체가 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도없이 어떻게 무엇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겠는가?
기도없이 어떻게 하나님을 잘 믿을수 있다는 말인가?
알고보면 기도의 자리에 앉아 있음 자체가 축복이며, 기도의 자리로 나아감이 이미 승리의 전주곡이다.
많은 신자들이 주와 복음을 위하여 돈을 드린다.
그리고 시간을 드리고 몸을 드린다.
그러나, 기도에 자신을 드리는 일에는 인색하다 못해 거의 불가능하다.
봉사현장에는 얼마나 사람들이 붐비는가?
교회마다 주방에는 얼마나 사람들이 북적대는가?
그러나, 어느 교회이든 대부분의 교회들의 기도실은
얼마다 썰렁하다 못해 냉기가 흐르는가?
기도없이 어찌 헌신이 가능할까?
기도없이 어찌 말씀이 능력이 될까?
기도없이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은 천사의 방언이라 할지라도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지 않는다.
그래서 기도없이 말씀을 배우고, 말씀을 들으면, 영적으로 교만에 빠지게 되고
오히려 들은 말씀때문에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할수 있는 특권이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할수 있는 일중에 가장 크고 귀한 일은, 기도하는 일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지만.. 성도는 죽어서 기도의 흔적을 남겨야만 한다.
이름남겨서 뭐하겠는가?
기도는 죽어서도 역사하고 기도의 응답은, 기도의 사람이 죽은후에도 계속된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대리석으로 지은 교회도 아니고 세련된 신자도 아니며
더 많은 헌금도, 더 많은 지식도, 프로그램도, 더 넓은 예배당도 아니다.
하나님이 이 시대를 향한 불타는 소원은
기도하는 교회
기도하는 성도
기도하는 지도자를 만나시는 것이다.
기도의 사람의 부재
기도하는 교회의 부재
기도하는 지도자의 부재는 하나님을 속상하게 한다.
우리를 서글프게 한다.
세상을 병들게 한다.
오히려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시대를 살아간다.
이 시대의 현주소는 이미 내리막길을 치닫고 있다.
마치 브레이크 파열된 자동차가 내리막 길을 빠른 속도로 내려감 같은
위태로운 현실 앞에 그저 숨이 막힐뿐이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하나님은 비밀병기를 주셨다.
그 비밀병기는, 광야 40년을 승리와 환희로 이끌었던 모세의 지팡이이다.
우리는 기도의 지팡이만 있다면, 오히려 다른 것들은 거추장 스러운 장식품에 불과 하다.
그렇게도 두려워하고 주저하고 막막한 모세에게 하나님은
돈을 주시지도 아니했고, 탱크를 몰고 가라 하지 않으셨고, 오직 투박한 지팡이 하나 붙잡으라 하셨다.
그렇다.
우리가 애굽과도 같고 소돔과 고모라와도 방불한 세상에서 꼭 붙잡아야할 것은, 기도의 지팡이이다.
기도의 지팡이는, 우리와 하나님을 연결해주는 유일한 링크이며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을 공급받는 신령한 파이프이다.
기도의 링크가 끊어지고, 기도의 파이프가 녹이슬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것도 공급받지 못할 것이다,
기도는 응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영교라 말한다.
응답은 교제의 산물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를 하기 위하여 창조되었음으로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여
기도에 투자하여야만 한다.
짧은 기도, 빠른 기도는 기도의 맛을 못느끼게 할뿐 아니라 오히려 사단의 장난거리를 제공할수 있다.
우리가 기도에 실패하는 이유는, 기도시간이 짧은데다가 응답에 대하여는 조급하고
하나님을 기다리는 일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기도가 주는 유익은 또 하나있다.
우리의 기도가 오랜 시간으로 영글게 되면, 우리는 거룩해짐을 느낄수 있고
세상과 문제는 초월하게 된다.
왜, 기도해도 성질이 안 죽는가?
왜, 기도해도 세상을 놓지 못하는가?
오랜 기도로 하나님과 거룩한 터치(임재)가 없기 때문이다.
기도의 확실한 응답과 댓가는, 거룩한 삶의 변화로 나타나게 된다.
우리의 남은 생을 확실하게 비참하고, 초라하고, 궁색하게 살려면 기도 안하면 된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된다.
지옥은, 가만히 있으면 가듯이 기도 안하고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분명히 비참해질수 있다.
루터는 골방에서의 승리가 하루를 좌우한다고 했다.
존 번연은 '이른 아침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하루 종일 하나님을 다시 만날 일은 거의 희박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좀더 이른 시간에 좀더 오래 기도할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더욱 기름질수 있다.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의 강도는, 우리가 기도의 골방에 머무는 시간과 비례하기 때문이다.
성급한 마음으로기도의 자리를 떠나지 말라.
영적 산만함으로 기도의 자리에서 들락날락하지 말라.
기도의 자세와 마음을 모아야 한다.
어느누가 대통령과 만나면서 들락날락 하겠는가?
들락날락하는 기도, 흩어지는 기도는 우리자신을 속일뿐이다.
하나님으로 부터 약속된 만나와 생수를 잃게 된다.
기도만이 기름부으심을 경험하는 통로이다.
더 나아가 오랜기도와 쉬지 않는 기도만이,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지속적으로 머무르게 할수 있다.
일회적으로 기름부으심을 체험할수는 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머물게하기 위하여는, 오랜 기도뿐이다.
이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것은, 기도의 응답이 아니라
오래동안 기도의 자리에 앉아있는 훈련이다.
우리는 오랜 세월동안 기도없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익숙하여져 있고, 학습되어 왔다.
이제 인본주의 늪에서 영성의 바다로, 율법의 수렁에서 복음의 강으로 싸이클을 바꾸어야 한다.
영성의 싸이클 전환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우선 기도의 자리에
오래 머무는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기도의 응답을 기대하지 못하면 오래 앉아 있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리의 싸이클을 낙망과 적정의 싸이클에서 기도의 싸이클로 바꿀때
하나님도 우리를 향해 응답의 주파수를 준비하실 것이다.
죽고 싶을 정도로 힘이 드는가?
죽을 힘을 다해 기도해 보았는가?
살맛 나는 일이 생길 것이다.
기도의 집중, 그것은 우리의 짐지는 인생을 춤추게 할수 있을 것이다.
내가 오랜세월 흠모하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기도의 일생을 살았고, 자신을 남김없이 기도의 제단에 부어 밀알되었던
무릎의 사람이었다.
브레이너드는 날마다 아프고, 날마다 힘들었지만, 날마다 기도에 사력을 다했다.
새벽이면 눈이 퉁퉁붓도록 밤을 지새우며 눈물로 기도했고,
시간만 나면 숲속에 들어가 기도했고, 기도를 의무가 아닌 사명으로 알고 즐겼다.
누가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서 대화하는 것을 수고와 노동으로 아는가?
브레이너드는 매일 기도에 몰입하였고, 기도의 시간에 푹~빠져 살았다.
브레이너드는 이렇게 주님과의 친밀함을 고백하고 있다.
"내가 집에 돌아와서 금식과 기도와 묵상에 잠길때면,
나의 영혼은 금욕과 자기부인과 겸손과 세상일로부터의 분리를 갈망한다.
나는 이 땅과는 상관도 없다.
오직 하나님을 위해 정직하게 땅에서 일할 뿐이다.
땅이 제공 할수 있는 것을 위해서는 단 1분도 살고 싶지 않다."
브레이너드는 30 세가 조금 넘어 주님이 부르셨다.
이 땅에 오래동안 놔누고 보시기에 너무 아까워 그러셨을 것이다.
아마도 주님 가까이에서 날마다 보시기를 원하셨기에 일찍 부르심이 틀림이 없다.
당신이 컴퓨터에 몰입하듯이, tv시청에 집중하듯이, 친구들과의 수다에 푹~빠지듯이,
직장일을 재미나게 하듯이
기도에도도 그러하라.
주님과의 교제에도 그러하라.
그러면 당신에게 알지 못하던, 크고 비밀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아니, 이미 준비되었던 일들을 보게되고 경험하게 될것이다.
그렇지 못한다면 당신의 여생은 어제와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며
내일은 더욱 더 초라해질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일어서라.
그리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라.
오래전부터 그곳에 계신 주님을 만날것이다
당신은 기도하고, 성령님은 당신속에서 춤추는 일들을 보게 될것이다.
기도하면 안될 일이 없다.
다만, 기도가 안되는 일이 있을 뿐이다.
기도만 된다면 문제는 없다.
기도가 안됨이, 기도를 오래 하지 못함이 심각한 문제이다.
기도가 안되고 못함이 가장 큰 불행이며, 비극이 될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고 있다면
당신은 더 이상 불행하지 않은 하나님의 사람이다.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라
하나님도 당신을 향하여 출발하게 될것이다.
기도해도 소용없다는... 기도해도 별수 없다는 것은 사단의 거짓말이다.
그 거짓말에 동의 하지 말라.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주신다는 말씀만이 실상이며, 진리이다.
그 말씀을 믿는다면 어제까지 아무일이 없었다 해도 오늘 또 다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라.
이 때를 위한 믿음을 준비하고, 그 때를 위하여 기도의 시간들을 저축해 두어라.
문제에 집중하면 마귀가 춤을 추고, 기도에 집중하면 성령이 춤을 추신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 것인가?
누구를 춤추게 할것인가?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