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1. 21 나도 이젠 시인이다 초안
박: 안녕하세요. 자꾸 달력을 보게 되는 그런 계절이네요
이: 3월에 느끼는 시간보다 11월에 느끼는 시간은 그 속도가 다르게 느껴지지요
지: 그렇지요 일단은 년 중 계획에 있어 3월은 준비단계라면 11월은 마무리 단계라고 할 수 있겠지요,
남은 달력의 두께가 어떻게 느껴지느냐에 계획했던 일들의 완성도가 결정되는 것이지요.
이: 시인님은 요즈음 시간을 두고 어떻게 느끼고 계셔요
박: 네 제가 아마도 인사말에 시간을 이야기 하는 바람에 두 분을 다소 심각하게 만든 거 같네요.
ㅎㅎ11월 요즘은 제가 한해를 두고 볼 때, 정말 금쪽같다고 여기는 시간이 있는 계절이지요. 제가 문단에 나온 지도 벌써 23년이 됐네요. 문학청년시절 이쯤이면 거의 잠을 못자고 시를 썼던 기억이 나네요. 신혼 초 이었던 거 같은데 다락방에 박혀 밤새 시를 두고 머리를 싸매곤 했지요. 바로 신춘문예라는 등용문을 통과하기 위해 병을 앓았다고나 할까요? 문학의 길을 걷는 많은 사람들이 이 계절이면 신춘병이 도진다고나 할까요? 작년에 제가 모 신문의 신춘문예를 심사한 적이 있는데 지금도 만만치 않더군요. 연세가 80세가 넘은 분이 원고 앞장에 50년째 투고함 이라고 써놓은 분도 계시더군요. 물론 당선이 되어 문단에 나오더라도 이 계절만 되면 가슴 한 곳이 서늘해지지요.
이: 그렇군요. 시인들은 이 계절에 신춘증후군? 심한 휴유증이 생겨나는 군요
지: 신춘의 경쟁률이 상당한 걸로 아는데 어느 정도 인가요?
박: 네 신문의 지명도에 다라 다르긴 하지만 보통 2000:1 정도는 된다고는 봐야겠죠 . 요즘 많은 문학잡지들이 신인을 배출하고 있어 그나마 경쟁률은 전 같지는 않지만 실은 그 일반 문학도가 당선되기란 하늘에 별 따기죠. 전국에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석사 박사 과정의 수료자들까지 그리고 전문 창작원에서 몇 년씩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까지 놓고 보면 혼자서 골방에 박혀 시창작을 하는 사람들에겐 더욱 어려운 관문이라고 보면 될 겁니다.
이: 말씀 듣고 보니, 고시 중에 신춘고시가 가장 경쟁률이 높군요
박: ㅎㅎㅎ 그런 것 같습니다. 더욱이 한명만 뽑으니 더 하죠 ㅎㅎ
지: “나도 이젠 시인이다” 에 시를 보내오신 분들 중에도 신춘을 준비하는 분도 계실지도 모르겠군요?
박: 아마 그런 분도 계실겁니다.
이: 이번에 선정된 청취자님의 시 또한 시간을 다룬 시 같던데 시인님이 한번 보아주시지요
박: 네 한번 볼까요? 제목이 행복한 시간이네요.
행복한 시간
박 종 순
앨범처럼 차곡차곡 쌓여있는
해지난 달력마다 내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잠자고 있다
펼쳐보아야만 이제는 기억 할 수 있는
지나간 흔적들을 더듬어 본다
죽음의 긴 그림자 앞에서
모든 것을 체념하기란 아직
할일이 많은 것 같다
지나간 일들에 미련이
남아 다시 달력들을 펼친다
마냥 열심히 살아온 흔적밖에
없다. 뭐가 그리 즐거워 나돌아
다녔는지 달력마다 까맣게
채워진 일과가 나를 우울하게 한다
박: 전반부만 보아도 이 시를 쓰신 박종순 님이 달력을 통해 지나간 시간을 반추하고 있는 것이 얼핏 보여 집니다. 시간이란? 아주 관념적인 것이지요. 그리고 또한 주관적인 것이지요. 그러한 관념을 박종순 님은 지나간 달력 위에 그때그때 중요한 메모기록들을 통해 의미 있었던 기록들을, 사실들을 들춰냄으로 어둡고 우울한 현재가 밝아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렇듯 객관적 상관물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개인적 감정을 어떻게든 객관화 시키는 시적 방법인 것이지요.
지: 네 구체적인 사물등을 지시하는 가운데 간접적으로 정서를 환기하는 방법이군요 ?
박: 그렇지요. 정서를 상징적으로 암시하는 시적 기법이라 할 수 있지요
엘리어트는 그의 시에서 하늘에 퍼지는 저녁놀의 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수술대 위에서 에테르에 마취되는 환자”를 상관물로 끌고 왔지요.
이: 네.그렇군요. 객관적인 상관물을 끌고 와서 시를 표현하면 형상이 그려지는데 엄청난 도움이 되겠어요
박; 그렇지요. 꽃이 아름답다고 시로 말하기보다는 “아침 출근길에 노란 버스 안에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던 소녀아이 웃음이 꽃이다” 라고 제시한다면 꽃은 더 생명력 있는 꽃이 되겠지요.
지: 좀 전에 박종순 님의 시도 이러한 기법을 적용하면 좀 더 선명해지지 않을까요?
시인 님 께서 첨삭을 해주시면 좋겠는데요
박: 그러죠 이미 박종순 님이 지난 달력의 까맣게 채워진 일과 흔적을 들어 시간을 이야기하고는 있지요. 좀 더 선명하게 그 부분을 드러내면 완성도 높은 시가 될 듯 합니다
제목도 그리하여 풍선의 시간으로 바꾸어 봤습니다.
박: 한번 읽어 봐 주실래요?
지: 네 (음악과 함께)
풍선의 시간
박 종 순
해 지난 달력 마다
내 삶의 흔적 고스란히
동그란 풍선을 움켜쥐거나
바람의 결을 배고 잠자고 있다
모든 것을 체념하기란 아직 할일이 많은데
펼쳐진 달력의 미련들은
마냥 열심히 살아온 흔적일 뿐인데
뭐가 그리 즐거워 나돌아 다녔는지
이미 동그라미 쳐진 숫자들 곁에는
등 떠밀어도 할 수 없는 그런 일들도 있었구나
그래도 달력마다 까맣게 채워진 일과는
꿈처럼 풍선처럼 살갑다
먹고 살기 버거울 때였었는데
돈 안들이고도 할 수 있었던
봉사활동의 날들이 풍선으로 둥둥
나의 시간을 가볍게 했었구나
수술 받기 전 돌아보니
가장 행복한 시간들이란
움츠러든 삶의 입구에 희망을 불어
누군가의 손에 들려주는 시간
남은 폐활량이 소중할 수 있음을
나 이제야 알겠다.
박: 바쁜 시간이란? 이 시에서 첫 연에 형상화로 드러냄에 있어 달력의 밑줄 친 그런 부분을 바람의 결로 그리고 그런 바람의 결에 동그라미 친 부분을 풍선이란 객관적 상관물을 데려와서 시 안에 이미지의 장치를 만들었다고 보면 바쁜 시간을 형상화하는데 무리가 없지요
지: 그러니까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이나 이야기가 잘 드러나지 않을 때 상관성을 지닌 어떤 이미지를 연결시켜 포함하면 시가 더 상상의 폭이 확대되어 정서가 환기 되는군요
박: 최근 발표 된 시 (시조이긴 하지만 )“각북-봄비”라는 박기섭님의 시를 보면 그 극명한 객관적 상관물의 깊이와 감칠맛을 조금은 이해 할 수 있지요
하늘 어느 한갓진 데 국수틀을 걸어 놓고 봄비는 가지런히 면발들을 뽑고 있다
산동네 늦잔칫집에 安南* 색시 오던 날
늦잔치집에 안남(베트남) 색시 오던 날을, 하늘 어느 한갓진 데 국수틀을 걸어 놓고 봄비는 가지런히 면발들을 뽑고 있다 라고, 표현하는 저 뛰어난 기교에서 봄비를 국수틀이란 상관물로 표현했을 때 어떤 설명보다도 정서 환기에 좋은 예라고 볼 수 있지요
지: 또 다른 봄비의 맛이 느껴지는군요
이: 그런데 <풍선의 시간>에 담겨진 후반부 시의 내용이 절박하시군요. 지금 수술을 앞두고 지난날을 돌아보며 시를 쓰신 것 같네요.
박종순 님! 건강을 되찾으셔서 시의 내용처럼 앞날도 달력에 봉사하실 계획을 세워보겠다고 환하게 답해주세요
박: 네 달력의 숫자위에 건강한 풍선을 동그라미로 더 많이 그리셔야지요. 시를 고르다 보니 이번 주의 시도 아픈 사연이 있는 시였군요. 다음에는 시의 언어가 잘 조탁된 서정시를 통해 시적 공간의 미학에 충실한 시를 선정해 볼까 합니다.
지: 남은 올해 달력의 숫자위에는 색색의 밝은 풍선만 그려봅시다.
이: 시인님 수고하셨습니다.
박: 따뜻한 하루 되세요.
감사합니다